나의 회고록 3막15장 (6부)
1970년대.
독재 정권에 속수무책이었고 문화의 꽃이 피지 못하는 암흑의 시대였다.
검열을 받고 방영되는 영화나 드라마 심지어는 대중노래까지 퇴폐와 사치 , 사상개념이 의심갈시는 여지없이 영화나 드라마가 방영 되지도 못하였다.
그래서인지 일반인들은 제한된 공간에서 문화와 벽을 쌓은채 살아가야만 하였다.
그러나 1970년 TBC에서 방영된 "아씨" 와 1972년에 방영된 KBS "여로" 는 시청율이 70~80%를 차지하며 온국민을 TV앞에 모이게 하였고 지금도 깨지지 않는 대기록을 세운 것이다.
연속극이 방영될시는 모든것이 정지되고 말았다.
극장에서도 영화를 중단하고 연속극을 보았고, 도둑 맞은집, 밥을 태운집. 길거리에는 사람도 차도 사라지고 도시가 텅빈 상태가 되었다.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그런일이 흑백TV 보급율도 저조한 그당시에 발생된것이다.
두 드라마는 온국민을 웃고 울렸던 것이다.
여성협회에서 방송국에 여주인공이 불쌍하다고 항의 데모까지 하였고 주인공들의 일거수일투족이 국민들의 관심을 받게 된것이다.
특히 이미자가 부른 "아씨"의 주제곡은 지금도 불리워 질만큼 대히트를 쳤고, 장욱제의 바보연기는 추후 코메디언 심형래의 모방으로 이어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두 드라마가 대성공을 이루었던 비결은 한여인이 천대를 받으면서도 굿굿이 조강지처로 살아가며 가정을 지킨것이다.
모두 해피엔딩으로 종결을 지으나 여권신장이 전무한 그당시에는 여인들에게 결혼이란 또다른 세계에서 적응해서 살아야하는 고난의 시작인 것이었다.
지금은 남녀평등으로 여권신장이 동등해졌으나 그당시에는 여권은 철저히 유린당한 시국인 것이었다.
여권의 유린은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소가족제의 현실과 대조적으로 그당시에는 여자가 결혼하면 시댁식구들과 다같이 살면서 가정을 꾸려나가니 말이 시집이지 얼핏보면 여종하나 들어온 셈이 된것이다.
여종은 여러가족한테 치이며 험난한 여정을 가지게 되고 여인은 시집을 가면 그집에서 죽어야 한다며 대문을 닫아 버린 것이다.
여인들은 자식이라도 낳을시면 자식들에게 온정성을 쏟아부었다.
당연한 이야기 일지 모르나 그당시 영화나 연속극을 볼시면 자식들이 성공하여 검사나 판사되는 것이 그들의 마지막 소망이 된것이다.
성공의 상징인 "판,검사"
사업가도 아닌 의사도 아닌 왜 그당시에는 판검사를 최고의 목표로 삼았을까?
맞다.
그들은 시련을 당하면서도 어디다 대고 하소연 한번 못해본 것이다.
법에 무지하고 여권신장이 무엇인지도 모른 여인들은 법으로부터 보호받고 자신의 희생을 자식으로부터 보답 받고 싶었던 것이다.
주위의 선망이 되기도 하나 그들은 자신의 억울한 인생을 하소연 하고 싶었던 것이다.
문화가 르네상스를 이루고 있는 오늘날
TV드라마 채널을 돌릴시면 허무해지고 만다.
재벌들이 나오는 허잡한 소재,
남녀 연애담이나 허잡한 스토리로 자극적인 영상으로 가득차니 탈랜트들의 눈물어린 연기는 찾아볼길 없고 그얼굴이 그얼굴인 여인들이 브라운관을 가득 채우고 있다.
문학는 찾을길 없고 소재 또한 완전 고갈되여 그연속극이 그것이고 비슷한 드라마가 여기저기서 방영되고 있으니
한숨만 나올뿐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TV를 보질 않는다.
뉴스는 싸구려 정치인들의 권모술수가 판치고, 대중 가요는 랩으로 변질되 무슨가사인지 알지 못해
공해 같았으며 오락프로그램들은 연예인들의 입장난으로 넘쳐나고 있었다.
방송매체가 가져야 할 공정성은 사라진지 오래고 시청율과 돈을 찾아 배회하는 감투 쓴 집단체 같았다.
물론 K 팝, K드라마의 성공한 케이스도 있으나
내 생각은 다르다.
복고의 드라마에서 방영된 것중 지금으로서는 흉내도 못낼 작품들이 엄연히 존재한 것이다.
자극적이고 원시적인 소재와 주인공의 연기력에 사활 건 줄타기 방송은 아슬아슬하기만 하다.
" 여로"
" 아씨"
두 드라마를 볼시면 틀림없이 말할것이다.
우울한 시대극으로 보기에는 너무나 아름답고 찬란하였다.
수많은 베테랑 연기인들과 탄탄한 소재는 한시대를 대변하고도 남을 많은 것들을 보여주고 있으니 말이다.
한여인이 걸어온 처절함에 동정심이 유발하여 전국민에게 눈물을 주며 가정의 소중함을 알게한 산교육장이 되였고, 여인의 악독한 비극에서 유종의 미를 거둘시는 누구나 감동의 눈물을 쏟아내고 만것이다.
불후의 명작
"아씨"
"여로"
그당시 읽는 심훈의 "상록수"보다 더한 감동을 선사하였고 나도향의 "벙어리 삼룡이"보다 더한 추억을 선사한것이다.
특히 이대사는
불후의 명대사가 되고 말았다.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니 말이다.
"색시야 밥 먹자"
"색시야 밥 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