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卿宰
洪霙 墓碣銘[李景奭]
往在宣祖朝, 有名臣曰都憲洪公。 經術雅望, 爲世所推, 有丈夫子六, 四登龍, 公其一也, 而於次爲第四。 孝弟於家, 忠恪於國, 爵躋小宗伯, 以福祿終贈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 公配貞敬夫人延安李氏, 左議政、贈諡文忠公月沙相國諱廷龜之女, 後公十一歲而卒。
旣葬, 公胄子都尉公纍纍然屈其哀色, 而問銘於不佞奭曰: “先人歿已久矣, 而墓刻尙闕, 以眞宅未定也。 今者不天, 又爲先妣所棄, 葬於先祖兆次面乙之原, 虛其右, 以今年某月日奉遷先人之墓, 蓋去權葬所不遠也。 知孤家世詳而能銘之者, 非公而誰也? 敢以慁焉。” 又曰: “先墓法應碑之, 而不惟先人官歷無多。 抑末俗務文, 豐碑而張之, 卽先人平日之所深非也。 玆不敢焉, 將就墓表而刻其陰。” 余辭不獲, 重感其克體先志, 謹按其狀而序之。
公諱霙, 字澤芳, 其先安東豐山人也。 上祖曰之慶, 魁麗朝文榜, 爲國學直學士。 有曰侃, 號洪崖先生, 最長於詩, 官至都僉議舍人。 有曰侑, 密直使, 賜紫金魚袋三館大提學。 曰演, 寶文閣大提學。 曰龜, 中郞將。 是生諱俶, 右軍司正, 公之五代祖也。 高祖諱繼宗, 司圃署別提, 贈通禮院左通禮。 曾祖諱禹甸, 贈承政院左承旨。 祖諱脩, 贈議政府左贊成。 考諱履祥卽都憲公, 贈議政府領議政。 妣贈貞敬夫人安東金氏, 宣務郞顧言之女, 惕若齋九容之後。
公生於萬曆甲申。 中乙巳司馬, 辛亥, 仕爲四山監役, 遷主軍器寺簿。 甲寅, 監平澤縣。 乙卯, 丁外艱, 丙辰, 又丁內艱。 外除, 除司憲府監察, 改刑曹佐郞。 辛酉, 出金浦縣令, 秋, 擢庭試文科。 癸亥, 罷歸, 卽敍爲成均館直講。 甲子, 适變, 扈駕公山, 還受工曹正郞, 遷成均館司藝, 轉掌樂正、兼春秋館編修官, 讎校史事。 又兼訓鍊都監、號牌廳都廳, 皆辦職。 丙寅冬, 出守瑞山郡。 丁卯, 進階通政, 以有勞也。 不樂久居, 無何解紱歸, 尋拜刑曹參議, 遞授僉知中樞。 己巳, 拜工曹參議, 已而陞嘉善階, 爲禮曹參判, 特命也。 公以婚聯禁掖, 得蒙異數, 跼蹐惶恧, 不敢出。 臺官以其特批論之, 上以爲“惜其才而嘉其不爲附勢, 故有是命”, 論遂止。 公旣堅辭不獲, 則强起肅謝, 卽引疾以免。 辛未, 拜漢城府右尹、兼五衛都摠府副摠管, 經歲而遞。 甲戌, 詔使之來, 承命延慰于平壤, 拜同知中樞。 丙子之難, 扈入南漢。 丁丑, 賞從臣, 進階嘉義, 又兼副摠管, 患風疾, 因就閑。 壬午, 又特授同知中樞。 乙酉四月, 寢疾卒于家, 年六十二。 訃聞, 別賜賻物, 遣禮官弔祭贈爵, 以都尉貴也。
李夫人孝順, 有女士行。 月沙相公選婿歸公, 爲婦爲母, 皆可法。 生五男四女: 男長柱元, 都尉公也, 尙宣祖大王女貞明公主, 封永安尉; 次柱後, 後於公第二兄監司公, 以進士仕, 爲郡守; 次柱臣, 進士; 次柱韓, 士人; 次柱國, 進士。 女長適李俊耉, 文科掌令; 次適李時術, 文科獻納; 次適李恒鎭, 繕工監役; 季適尹堦, 進士。 永安四男一女: 男萬容、萬衡俱進士; 萬熙; 萬恢, 業文。 女未嫁。 柱後初娶監司柳碩女, 男一萬最, 進士。 女一正言安後說。 再娶縣監金曄女, 女一朴敏悌。 柱臣初娶士人南陽洪東女, 男一萬齊, 女一李允相。 再娶進士申光樞女, 男一女二, 皆幼。 柱韓娶佐郞韓𢧳女。 柱國娶判書李景曾女, 男一女四, 皆幼。 俊耉男女各三: 男觀周, 進士; 次錫周; 次幼。 女長進士李元龜, 次林宏儒, 次幼。 時術男三女四: 男世長, 進士; 餘幼。 女長李尙濂; 次尹搢, 生員; 次李萬徽, 進士; 次洪遠普。 恒鎭男一幼。 女二: 長李命殷, 進士; 次安縨。 堦男女各二幼。 萬容男一女一。 萬衡男一。 萬最男三女一。 餘各有男女, 而皆幼不具載, 大略內外孫曾七十餘人。
公早聞詩禮, 目擩耳染, 孝友姻睦, 出於天性。 事寡姊、仲氏, 老而益篤, 省視不以病怠, 一饌有得必分。 不事家事, 而周戚屬之急猶己饑, 鄕族宦遊者歸之如家。 少時嘗入泮宮, 與諸上庠飮座, 有一人齒長而貌醜, 人皆陋之而異其杯。 公薄其習, 獨以一觴觴之, 聞者稱其厚德。 公治郡縣, 不要名譽, 政務字惠, 律己以簡, 吏慴民懷, 去後輒思之。 其爲金浦也, 奸賊爾瞻子元燁宰通津, 自以秩右, 文報之間, 偃蹇相等。 公回詰之曰: “通津是縣監也, 雖以府院君來, 法不可紊。” 元燁恚其侵父, 必欲齮齕之, 人以爲憂, 而公不少饒, 其不畏彊禦類此。 其赴瑞也, 當丁卯變初, 凡所應卒如素具焉, 郡民晏如也。 及聞車駕出狩, 去衙而晝夜於外, 省供貶食, 至旋軫乃復。 當是時, 士夫之家播流湖右者, 多寄郡地, 無親疎, 一以誠意待之, 君子於是知公之忠厚臨亂益著也。
公性樂易, 與人無裏襮, 而至於疾惡, 有不能自容者, 非其人, 雖顯者恥相面。 時時面詆人過, 不之避。 不喜趨炎, 絶跡權路, 由是雖無以疵纇公, 而亦未有推轂者, 以公資地亨衢要津, 特步武間耳, 而淸華之選, 一不及焉, 公議惜之。 象村申相公欽嘗寓於金浦野, 習知公爲政, 尤爲之嗟咄不已。 其耿介不朋比, 蓋亦先王之所臨燭, 華衮一言榮於靑紫也遠矣。 然公任眞守分, 未嘗以得失介意, 人以此益多之。
都尉公素孝謹, 及爲儀賓, 服用甘毳之奉, 靡不備至, 公𢥠然而懼, 益自挹損, 常以侈忕爲戒。 僮指、田園, 無所增加, 日與諸兄弟及里中親舊壎篪迭和, 談屑交霏, 間以詠歌細酌陶然終夕不倦。 晩節沈綿, 猶喜閑話, 亦有二三聞人詞客, 特相友善。 朝暮過從, 敲棋命酒, 兪兪然以自恬, 口不談時事。 方病甚而聞上候違豫, 有問安之擧, 則必扶而趨造, 子弟諫之, 則輒責以大義曰: “吾喘尙延, 敢言病乎?” 其忠悃如此。 公雖不爲柄用者所汲引, 由郞署循序而進, 累官至金玉之班, 歷左右侍郞。 玉樹叢於庭階, 丹桂掩於門楣, 孫枝濟濟衍宇充堂, 舃奕炳煥, 慶流無極, 其視一時翺翔而旋致顚濟者, 得失何如哉? 澤堂李尙書植誌中詳之。 《詩》不云乎? “溫溫恭人, 維德之基。” 《易》曰: “天道虧盈而益謙。” 吾於公驗之矣。 景奭以世好遊公兄弟、父子間久矣。 十數年來, 哭公兄弟旣盡, 今又爲公撰此文, 寧不悲哉? 遂係之以銘。 銘曰:
權勢怵人, 而公不之詘。 名利誘人, 而公不之利。 公不回於求福, 乃自天而降之。 官旣尊而卑以牧, 謙謙然存沒惟一。 曷敢多乎吾言? 宜觀夫墓前之短碣。
홍영[洪霙]의 묘갈명(墓碣銘) -이경석(李景奭)
禮曹參判贈領議政洪公墓碣銘
지난 선조조(宣祖朝) 때 명신(名臣)이 있었으니 도헌(都憲) 홍공(洪公)이다. 경술(經術)과 아망(雅望)으로 세상의 추중(推重)을 받았으며 여섯 자제를 두었는데 그 가운데 넷은 등룡(登龍)하였으니 공도 그 가운데 한 분이며 차례로는 넷째이다. 집에서는 효제(孝弟)하고 나라에 충성했는데 소종백(小宗伯) 벼슬을 지내고 복록(福祿)을 누리다 돌아가 의정부 영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세자사(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에 추증되었다. 공의 배(配) 정경 부인(貞敬夫人) 연안 이씨(延安李氏)는 좌의정 시호(諡號) 문충공(文忠公) 월사(月沙) 상공(相國) 이정귀(李廷龜)의 딸인데 공보다 11년 뒤에 졸하였다.
장사를 지내고 공의 주자(胄子) 도위공(都尉公)이 야위고 슬픈 기색으로 불녕(不佞) 이경석(李景奭)에게 비명(碑銘)을 청하면서 말하기를,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오래인데 묘비가 아직 없고 진택(眞宅)을 정하지 못했는데 이제 하늘이 돕지 않아서 어머니가 돌아가 선조(先祖)의 묘소 다음 을좌(乙坐) 자리에 장례를 지내면서 그 오른쪽을 비워 두었다가 금년 모월 모일에 아버지의 묘를 옮겼으니 임시로 장례한 곳에서 멀지 않아서입니다. 저희 집안의 세계(世系)를 자세히 알아서 명을 지을 수 있는 분이 공 말고 그 누가 있겠습니까? 감히 청하는 바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아버지의 묘소에는 응당 묘비가 있어야 하지만 아버지의 관력(官歷)이 많지 못합니다. 말속(末俗)이 글을 길게 지어 큰 비석을 세워 과장하기를 힘쓰는데 이는 아버지께서 평일 매우 그르게 여긴 바여서 감히 그렇게 하지 못하고 묘표(墓表)에 따라 음기(陰記)만 새기려고 합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사양했으나 되지 않고 또 그가 아버지의 뜻을 잘 따른 것에 감동해서 행장을 상고해 다음과 같이 쓴다.
공의 휘(諱)는 영(霙)이고 자(字)는 택방(澤芳)인데, 그 선조는 안동(安東) 풍산인(豐山人)이다. 상조(上祖) 홍지경(洪之慶)은 고려 때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국학 직학사(國學直學士)가 되었으며, 홍간(洪侃)은 호가 홍애 선생(洪崖先生)인데 시를 제일 잘했으며 벼슬은 도첨의 사인(都僉議舍人)에 이르렀다. 홍유(洪侑)는 밀직사(密直使)인데 사자금어대 삼관 대제학(賜紫金魚袋三館大提學)이요, 홍연(洪演)은 보문각 대제학(寶文閣大提學)이며, 홍귀(洪龜)는 중랑장(中郞將)이다. 이분이 홍숙(洪俶)을 낳았는데 우군 사정(右軍司正)으로 공의 5대조이다. 고조 홍계종(洪繼宗)은 사포서 별제(司圃署別提)로 통례원 좌통례(通禮院左通禮)에 추증되었고, 증조(曾祖) 홍우전(洪禹甸)은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에 추증되었으며, 할아버지 홍수(洪脩)는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추증되었다. 아버지 홍이상(洪履祥)은 바로 도헌공(都憲公)으로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어머니 증 정경 부인(貞敬夫人) 안동 김씨(安東金氏)는 선무랑(宣務郞) 김고언(金顧言)의 딸로 척약재(惕若齋) 김구용(金九容)의 후손인데 공을 만력(萬曆) 갑신년(甲申年, 1584년 선조 17년)에 출생하였다.
을사년(乙巳年, 1605년 선조 38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신해년(辛亥年, 1611년 광해군 3년)에 벼슬하여 사산 감역(四山監役)이 되어 군기시 주부(軍器寺主簿)로 옮겼다. 갑인년(甲寅年, 1614년 광해군 6년)에 평택 현감(平澤縣監)이 되고, 을묘년(乙卯年, 1615년 광해군 7년)에 외간상(外艱喪)을 당하였으며, 병진년(丙辰年, 1616년 광해군 8년)에 또 내간상(內艱喪)을 당했다. 상제(喪制)를 마치고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에 제수되고 형조 좌랑으로 옮겼다. 신유년(辛酉年, 1621년 광해군 13년)에 김포 현령(金浦縣令)으로 나갔다가 가을에 정시 문과(庭試文科)에 급제하였다. 계해년(癸亥年, 1623년 광해군 15년)에 파직되어 돌아왔는데 곧 성균강 직강(成均館直講)으로 서용되었다.
갑자년(甲子年, 1624년 인조 2년) 이괄(李适)의 변란에 공주(公州)로 호가(扈駕)했으며 돌아와 공조 정랑으로 제수되었다가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로 옮기고 장악원 정 겸 춘추관 편수관(掌樂院正兼春秋館編修官)으로 전직해 국사(國史)를 편수하는 일에 참여하였다. 또 훈련 도감(訓鍊都監)과 호패청 도청(號牌廳都廳)을 겸했는데 모두 잘 처리했다. 병인년(丙寅年, 1626년 인조 4년) 겨울에 서산 군수(瑞山郡郡)로 나갔으며 정묘년(丁卯年, 1627년 인조 5년)에 품계가 통정 대부(通政大夫)로 올랐으니 공로가 있어서이다. 벼슬에 오래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얼마 후 벼슬을 버리고 돌아왔으며 얼마 후 형조 참의에 배수되었다가 체직되고 첨지 중추(僉知中樞)에 제수되었다.
기사년(己巳年, 1629년 인조 7년)에 공조 참의로 배수되어 곧 가선 대부 품계로 올라 예조 참판이 되니, 특명(特命)이었다. 공은 금액(禁掖)과 연혼(聯婚)을 맺어 특별한 은수(恩數) 받는 것을 황공하게 여겨 감히 나가지 못하였는데 대관(臺官)이 특비(特批)임을 논박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 재주를 아끼고 그가 부세(附勢)하지 않은 것을 아름답게 여겨 이번 명이 있게 된 것이다.”라고 하여, 의논이 드디어 그쳤다. 공은 굳게 사직했으나 되지 않자 억지로 일어나 숙사(肅謝)하고는 병을 이끌어 면직되었다.
신미년(辛未年, 1631년 인조 9년)에 한성부 우윤 겸 오위 도총부 부총관(漢城府右尹兼五衛都總府副總管)으로 제수되었는데 해를 넘겨 체직되었다. 갑술년(甲戌年, 1634년 인조 12년)에 조사(詔使)가 나오자 명을 받아 평양(平壤)에 가서 맞이하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배수되었다.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호가(扈駕)하여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갔다. 정축년(丁丑年, 1637년 인조 15년)에 시종신(侍從臣)에게 상(賞)을 내려 가의 대부(嘉義大夫)로 품계가 올라 또 부총관(副總管)을 겸임했는데 풍질(風疾) 때문에 한산직으로 나아갔다. 임오년(壬午年, 1642년 인조 20년)에 또 특별히 동지중추부사로 제수되었다.
을유년(乙酉年, 1645년 인조 23년) 4월에 병환이 중해져 집에서 졸(卒)하니 나이 62세였다. 부음(訃音)이 알려지자 부의와 물자를 특별히 많이 내려주고 예관(禮官)을 보내 조제(弔祭)하고 증직(贈職)했으니 도위(都尉)의 귀함 때문이었다.
이 부인(李夫人)은 효순(孝順)하고 여사(女士)의 행실이 있었다. 월사(月沙) 상공이 사위를 가려 공에게 출가시켰는데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행실이 모두 본받을 만했다. 5남 4녀를 낳았는데, 장남 홍주원(洪柱元)이 도위공(都尉公)으로 선조 대왕(宣祖大王)의 정명 공주(貞明公主)에게 장가들어 영안위(永安尉)에 봉해졌다. 다음 홍주후(洪柱後)는 공의 둘째 형 감사공(監司公)의 후사(後嗣)가 되었는데 진사로 벼슬하여 군수가 되었다. 다음 홍주신(洪柱臣)은 진사요, 다음 홍주한(洪柱韓)은 사인(士人)이요, 다음 홍주국(洪柱國)은 진사이다. 장녀는 문과(文科) 장령(掌令) 이준구(李俊耈)에게 출가하고, 다음은 문과 헌납(獻納) 이시형(李時術)에게, 다음은 선공 감역(繕工監役) 이환진(李恒鎭)에게, 막내딸은 진사 윤계(尹堦)에게 출가했다. 영안위는 4남 1녀를 두었으니 아들 홍만용(洪萬容)과 홍만형(洪萬衡)은 모두 진사요, 홍만희(洪萬熙)와 홍만회(洪萬恢)는 업유(業儒)이며 딸은 출가하지 않았다. 홍주후의 초취(初娶)는 감사 유석(柳碩)의 딸인데 아들 홍만최(洪萬最)는 진사요, 딸은 정언(正言) 안후열(安後說)에게 출가했으며 재취는 현감 김화(金曄)의 딸인데 딸은 박민제(朴敏悌)에게 출가했다. 주신의 초취는 사인(士人) 남양(南陽) 홍간(洪柬)의 딸로 아들은 홍만제(洪萬齊)요, 딸은 이윤상(李允相)에게 출가했으며, 재취는 진사 신광추(申光樞)의 딸로 아들 하나와 딸 둘을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홍주한은 좌랑 한용(韓)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며, 홍주국은 판서 이경증(李景曾)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4녀를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이준구는 3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 이관주(李觀周)는 진사요, 다음은 이석주(李錫周)이며 다음은 어리다. 장녀는 진사 이원귀(李元龜)에게 출가하고, 다음은 임굉유(林宏儒)에게 출가했으며 다음은 어리다. 이시술은 3남 4녀를 두었으니 아들 이세장(李世長)은 진사요 나머지는 어리며, 장녀는 이상렴(李尙濂)에게 출가하고, 다음은 생원 윤진(尹搢)에게, 다음은 진사 이만휘(李萬徽)에게, 다음은 홍원보(洪遠普)에게 출가했다. 이항진의 외아들은 어리며 딸이 둘인데 장녀는 진사 이명은(李命殷)에게, 다음은 안황(安縨)에게 출가했다. 한계는 2남 2녀를 두었는데 모두 어리며, 홍만용은 1남 1녀를 두었고, 홍만형은 아들 하나이며, 홍만최는 3남 1녀이며, 나머지는 각기 아들 딸을 두었으나 모두 어려서 다 기록하지 않는데 대략 내외 손자와 증손이 70여 명이다.
공은 일찍부터 시례(詩禮)를 들어 눈과 귀에 익숙해서 효우심(孝友心)과 친척들과 돈목(敦睦)하는 것이 천성에서 나왔다. 혼자가 된 누나와 중씨(仲氏)를 늙을수록 더욱 돈독하게 섬겼으며, 어버이 문안을 병이 났다 하여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한 가지 반찬이라도 얻으면 반드시 나누었다. 집안일을 돌보지 않았으나 친척의 일은 급하게 여겨 자신이 굶는 것처럼 여겨 향족(鄕族)으로 서울에 와서 벼슬하는 자들이 자기 집처럼 여겼다. 젊어서 일찍이 반궁(泮宮)에 들어가 여러 상상(上庠) 학생들과 함께 술을 마시는데, 나이가 많은 한 사람이 얼굴이 못생겨서 사람들이 모두 누추하게 여겨 다른 술잔으로 마셨다. 공은 그런 습성을 야박하게 여겨 혼자서 같은 잔으로 마시니, 듣는 사람들이 그 후덕(厚德)함을 일컬었다.
군현(郡縣)을 다스리면서 명예를 바라지 않고 정사는 은혜로 돌보기를 힘쓰고 자신을 간약(簡約)함으로 검속하여 아전들은 두려워하고 백성들은 은혜롭게 여겨 떠난 후에는 번번이 사모하였다. 그가 김포를 다스릴 때 간적(奸賊) 이이첨(李爾瞻)의 아들 이원화(李元燁)가 통진(通津) 수재(守宰)로 있으면서 자기의 품계가 높다고 하여 문보(文報)하는 즈음에 거만하게 맞먹으려고 하였다. 공이 따져 말하기를, “통진은 현감이어서 비록 부원군(府院君)이 오더라도 문란하게 해서는 안 되는 법이다.” 하였다. 이원화가 그 아비를 침해한 데에 화를 내어 반드시 해치려고 하여 사람들이 걱정하였으나 공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으니 그가 강한 자를 두려워하지 않은 것이 이런 유였다. 그가 서산(瑞山)에 부임했을 때가 정묘 호란(丁卯胡亂) 초기였는데 모든 대응함이 마치 평소 준비한 듯하여 군민들이 안정되었는데 거가(車駕)가 파천(播遷)했다는 말을 듣고는 관아에서 나가 주야로 한데서 거처하며 음식을 줄였다가 어가가 돌아온 후에야 평상으로 회복했다. 이때를 당해 호우(湖右)로 피난하여 떠도는 사대부들이 그 군(郡)에 많이 기거하고 있었는데 공은 친소를 따지지 않고 한결같이 성의(誠意)로 대접하자 군자들이 여기에서 공의 충후함이 난리에 임해 더욱 드러난 것을 알게 되었다.
공은 성품이 낙천적이고 평이하여 사람들과 안팎을 두지 않았다. 아주 악을 미워하여 스스로 용납할 수 없는 자는 사람으로 여기지 않아 비록 현달한 자라도 상면(相面)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때때로 얼굴을 마주하고 잘못을 꾸짖기를 피하지 않았다. 권세 있는 자에게 빌붙기를 좋아하지 않고 권로(權路)에 발자취를 끊어 이 때문에 비록 공을 헐뜯는 사람은 없었지만 밀어주는 자도 없어서 공의 자급(資級)과 문지(門地)로 요직에 현달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으나 청화(淸華)의 선발은 한번도 미치지 않아서 공론이 애석하게 여겼다. 상촌(象村) 신흠(申欽) 상공이 일찍이 김포 들판에 우거하여 공의 정사를 익숙히 잘 알아 더욱 감탄해마지 않았다. 경개(耿介)하여 붕당을 짓지 않은 것은 선왕(先王)께서 밝게 아신 바여서 화곤(華袞)이란 한 마디는 청자(靑紫)의 영광과는 멀다고 하겠다. 그러나 공은 천진(天眞)하고 분수를 지켜서 일찍이 득실(得失)을 가지고 개의치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이 때문에 더욱 훌륭하게 여겼다.
도위공은 평소 효성스럽고 근실했는데 의빈(儀賓)이 되어 좋은 음식 봉양을 갖추 다 받게 됨에 이르러 공은 두려워하고 더욱 스스로 억제하며 항상 사치를 경계하였다. 노비(奴婢)와 전원(田園)을 늘리지 않고 날마다 여러 형제 및 마을 친구들과 화락하게 담소를 나누고, 가끔 시(詩)를 읊조리며 술을 들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지루하지 않게 보냈다. 만년에 침체되었으나 오히려 한담(閑談)을 즐겼으며 또 두세 명의 알려진 시객(詩客)과 서로 좋게 보냈다. 아침저녁으로 상종하면서 바둑을 두거나 술을 마시면서 기쁘고 즐겁게 보냈으나 입으로 시사(時事)를 말하지 않았다. 바야흐로 병이 심했는데 임금의 병환 소식을 듣고 문안하려고 하니 부축해서 가야 했다. 자제들이 말리자 문득 대의(大義)로 꾸짖기를, “내 목숨이 아직 붙어 있는데 감히 병을 말하느냐?”라고 하였으니, 그 충성심이 이러했다.
공은 비록 정권(政權)을 잡은 자가 이끌어 주지 않았으나 낭서(郞署)를 거쳐 순서대로 진급해서 여러 관직을 거쳐 벼슬이 금옥(金玉)의 반열에 이르러 좌우 시랑(侍郞)을 지냈다. 훌륭한 자손이 집 뜰에 가득하고 뛰어난 인재가 집안에 넘치며 많은 손자들이 당우(堂宇)를 가득 채워 빛나고 있어 경사가 무궁하게 전해지니 한때 훨훨 날다가 곧 거꾸러진 자들에 비교하면 그 득실(得失)이 어떠하겠는가? 기타는 택당(澤堂) 이식(李植) 상서(尙書)가 쓴 지문(誌文)에 자세하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온순하고 온순한 공인(恭人)은 덕(德)의 기본이다.[溫溫恭人 維德之基]” 하였고, ≪주역(周易)≫에 이르기를, “하늘의 도(道)는 가득 찬 것을 이지러지게 하고, 겸손한 것을 더해 준다.” 하였는데, 나는 공에게서 징험할 수 있었다. 나 이경석(李景奭)은 세호(世好)로 공의 형제ㆍ부자와 교유한 지 오래인데, 십수 년 이래 공의 형제의 죽음을 모두 통곡하였고 이제 또 공을 위해 이 글을 지으니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권세(權勢)는 사람을 두렵게 하는데 공은 굽히지 않았고, 명리(名利)는 사람을 유혹하지만 공은 옮겨가지 않았네. 공은 간사하게 복을 구하지 않았어도 하늘에서 내려 주었네. 벼슬 이미 높았으나 낮은 자세로 수양하였네. 겸손하고 겸손이 살아서나 죽어서나 한결 같으니, 어찌 감히 내가 많은 말을 하랴? 무덤 앞의 단갈(短碣)을 보면 되네.
禮曹參判贈領議政洪公墓碣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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