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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장에 선 현재의 위치
1971.09.26 (일), 한국 전본부교회
[기 도]
사랑의 아버님, 이 시간 여기 모인 자녀들을 살피시사, 당신이 개개인의 심령에 맞게 사랑하시는 이 시간이 되게 하시옵소서. 하늘과 땅, 그 가운데에 있는 인간에게 이것을 연결시켜야 할 사명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당신의 심정의 일로를 직선상에 연결시킬 수 있는 참다운 아들과 딸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당신 앞에 일치될 수 있는 그 자리는 최고의 자리요, 승리의 자리요, 표준의 자리인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사오며 그 자리를 저희들은 바라고 있사옵니다.
지금까지 역사노정에 있어서 인간들은 자기 나름의 삶의 노정을 가려 왔고. 나라들도 그 나름의 행로를 거쳐왔사옵니다. 이렇게 볼 때, 당신이 찾으시는 개개인에 대한 뜻의 노정과 나라의 노정은 언제나 같은 입장에 있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옵니다. 저희들이 마음으로 바라며 가는 곳은 천국이며 생활을 통하여 그 자리까지 가지 않으면 안 될 개인인 것을 생각하게 될 때, 그 하나의 크고 높은 목적을 위해서 현실적인 모든 어려움을 제거하면서 그 기준을 조정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될 현재의 저희 자신들임을 발견하게 되옵니다.
당신은 개인을 붙들고 사정할 수 있는 입장에 서기보다는 나라를 붙들고 사정하기를 바라시고, 나라의 사정을 붙들고 슬퍼하는 자리에 서기보다는 세계의 사정을 붙들고 슬퍼할 수 있는 자리를 찾아 나오신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인간은 언제나 땅에 처해 있고 당신은 언제나 하늘의 자리에 계시기에 서로 화합할 수 없는 상충된 거리를 두고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옵니다. 이 거리를 인간이 메워야 할 텐데도 불구하고 과거 현재를 통하여 볼 때, 또 미래를 두고 보더라도 당신이 그 거리를 메워 주지 않으면 인간은 이렇게 저렇게도 할 수 없는 존재인 것을 생각하게 되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언제나 비참한 자리에 서서 당신의 높고 귀하고 거룩한 은사를 바라는 것이고, 그것이 타락한 인간의 정성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되옵니다. 이와 같이 부족한 저희들을 아버지께서는 진정한 의미에서 세계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가치있는 아들이라 하고 싶고 딸이라 하고 싶어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러한 당신의 마음에 합당할 수 있는 아들딸이 이 천지간에 얼마나 있느냐고 반문하게 될 때는, 서러움과 슬픔이 한없이 사무치는 것을 저희 자신들도 느끼게 되옵니다.
아버님께서는 얼마나 얼마나 그러한 슬픔을 억제하시며 오늘의 부족한 인간들을 찾아오셨습니까? 이러한 인간들을 이끌고 가야 할 당신의 행로가 수난의 행로가 아닐 수 없다는 것을 저희들이 깨닫게 될 때, 과거의 우리의 선조들이 그러했고, 오늘날 이 땅 위에 살고 있는 인류가 그러하고, 또 미래의 후손들도 그러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 아버님은 얼마나 수고로왔으며, 얼마나 외로왔으며, 얼마나 비참하였는가를 저희들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옵니다. 저희들은 슬펐던 과거의 아버님을 잊어버린 자신들이옵고, 현재도 고독한 자리에서 싸우고 계신 아버님의 입장이 어떠하다는 것을 모르는 인간들이옵니다.
오늘날 저희 자신과 저희와 관계되어 있는 가정, 종족, 민족, 국가를 중심삼고 싸워 나가야 할 거창한 투쟁노정을 남겨 놓고, 이것을 바라보시는 아버지는 슬픔을 품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을 할 때, 이 땅 위에 있는 저희들은 자기 스스로의 슬픈 자리를 당신 앞에 직고하기 전에 당신의 슬픔의 자리를 동정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그야말로 당신 앞에 그런 효의 도리를 다짐하는 아들딸이 이 땅 위에 얼마나 있느냐 하는 서글픈 마음이 땅을 바라보시며 찾으시는 아버지의 마음인 것을 저희들은 알아야 되겠사옵니다.
오늘, 통일의 자녀들이 여기에 모였사옵니다. 저희들이 가는 길은 누구를 위해 가는 길이 아니옵니다. 그 길은 오로지 아버지를 위한 길이요. 다른 무엇을 찾기 위한 길이 아니라 아버지를 찾기 위한 길이옵니다. 아버지를 위하고 아버지를 찾는 길이라면, 어떤 입장에 서야 되느냐 하면, 과거에 이미 아버지를 찾았어야 했고, 현재에는 아버지와 더불어 살아야 되는 것인 줄 알고 있사옵니다.
오늘날 당신을 중심삼고 나 자신을 세워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있게 될 때는, 과거에 당신을 위해 산 그 가치가 얼마나 컸는가 하는 것을 가지고 자랑해야 되겠습니다. 현재 서 있는 자리나, 어떤 위치에서 저희들이 당신을 위해 살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게 될 때, 과거도 보람있는 가치의 내용을 가졌고 현재에도 보람있는 가치의 내용을 갖고 있다면 저희들은 암울한 자리에 있더라도 불쌍한 사람이 아니옵니다. 비록 외로운 자리에 처해 있다 하더라도 외로운 자가 아니요, 고독한 자리, 슬픈 자리, 비참한 자리에 처해 있다 하더라도 그 고독과 슬픔과 비참은 상관이 없다는 것을 아옵니다. 또한 슬픔이 가해지는 자리에 서 있다 할지라도 하늘의 동정의 마음이 언제나 떠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그러한 자리를 지키고 그러한 자리를 바라고 그러한 자리에서 살고 싶어하는 저희들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저희들은 아버님이 계신 것을 알았지만, 아버님을 얼마나 그리워했으며, 아버님과 얼마나 가까와지려고 했으며, 아버님과 얼마나 의논했으며, 아버님과 더불어 몸 마음이 하나됨과 동시에 보조를 맞추어 가지고 손에 손을 잡고 얼마나 많은 투쟁의 노정을 걸었는가를 생각하게 되옵니다. 그 투쟁의 노정은 개인의 행각노정으로써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나라와 세계를 위해서 복을 받을 수 있게 하기 위한 아버지의 길이기 때문에 그러한 길을 가지 않으면 안 될 저희 자신이라는 것을 얼마나 발견했는가 하는 생각을 해 볼 때, 당신과 저희가 너무나 엇갈려 있다는 것을 다시 느끼게 되옵니다.
아버지, 이제 저희들이 이 자리에 찾아왔사오니, 저희들을 긍휼히 여기시사 권고해 주시옵소서. 과거는 이러하였지만 현재는 이러이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충고하여 주시옵소서. 당신의 뜻 앞에 없어서는 안 될 아들이 되고 딸이 되기 위해서는 당신의 수고가 있기 전에 저희들의 탕감의 노정이 있어야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지금까지 그런 탕감의 노정을 걸어온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아버님을 위하여 슬픈 자리를 자초하여 제물의 길을 찾아 나가는 사람은 지극히 적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인간들은 슬픔의 눈물을 흘리는 자리보다 기쁨의 자리를 찾고, 오늘을 기뻐할 수 있는 생애의 여건을 갖지 못한 자신인 줄을 알면서도 슬픈 것을 도피하고 땅 위에 살고 있는 인간들과 더불어 보조를 맞추는 자리에서라도 기쁨을 갖고 싶어하는 것이 인간들의 습관적인 생활이었습니다. 그렇게 살고 있는 저희 개체인 것을 생각할 때, 저희들이 그냥 그 자리에서 아무리 슬픔의 자리를 찾는다 하더라도 하나님과 생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런 사실을 알면 알수록 저희들은 외로운 길을 가야 되겠습니다. 외로운 싸움의 노정에서 끝내 당신을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는 아들딸이 되어야겠습니다. 기쁜 자리에서 당신을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라 슬픈 자리에서 그리워해야 되겠고. 고독한 자리에서 그리워해야 되겠고, 모든 것을 잃어버린 자리에서 그리워해야 되겠습니다. 이런 길이 당신이 남기신 복귀의 노정인 것을 생각할 때마다 여기 모인 저희들은 당신의 외로운 아들딸임에 틀림없습니다.
당신이 외로왔기 때문에 저희들도 외로와해야 되겠고, 당신이 싸움의 노정에서 지칠 줄 모르고 그 길을 갔기 때문에 저희들도 지칠 줄 모르는 그런 자리에 서야 되겠사옵니다. 그러나 인간은 연약하기 때문에 과거보다도 오늘이 좋기를 바라다가 그러지 못하면 낙망하게 되고, 오늘보다도 내일의 희망이 없을 때 절망하기 쉬운 것이 인간이옵니다. 이런 사실을 두고 볼 때, 아버지께서 얼마나 외로운 길을 걸어왔는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대 시대마다 당신 앞에 소망의 날을 이어받고 소망의 세계를 이어받을 수 있는 아들딸이 이 땅 위에 얼마나 있었는가 묻게 될 때, 역사시대를 거쳐오는 동안 그런 사람이 없었다는 것을 생각할 적마다 아버님께서 얼마나 슬프셨겠는가를 저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소망의 흔적을 바라볼 수 있는 그런 기준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마음으로 다짐하는 창조적인, 이념적인 소원 기준 하나만을 바라시며 그렇게도 핍박받고 그렇게도 외로운 자리에서 눌리고 밟히면서도 그 마음을 잃지 않고 지금까지 역사를 더듬어 나오신 아버지를 생각하게 될 때, 저희들은 천만사를 다 잊고 아버지 앞에 감사해야 할 이 땅 위의 불효막심한 인간들임을 깨달아야 되겠습니다.
아버지, 저희들에게는 사죄라는 말이 너무나 황공한 말이옵니다. 용납이라는 말이 저희에게는 가당치 않은 것을 느끼게 되옵니다. 저희들은 아버지를 대해 감히 얼굴을 들고 그 무엇을 간구할 수 없는 인간들이옵니다. 옷깃을 여미고 당신 앞에 엎드려 천만사의 눈물과 더불어 죽음의 고빗길을 가겠다고 자처하고 나감으로써 자기 스스로의 가치를 긍정할 수 있는 자신이 되기를 먼저 다짐해야 하는 것이, 오늘날 속된 인간들이 처해 있는 현실임을 깨닫게 되옵니다. 저희들은 이러한 자리를 원치 아니하였고 이러한 자리에서 아버지를 만나고 싶어하지 않는 인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버님이 저희들을 위해서 만나고 싶어하는 그 자리는 지극히 고독한 자리였습니다. 또한 어떠한 사탄의 참소조건도 없는 자리를 찾으셨고, 사탄의 흔적이나 모습도 바라보이는 것을 원치 않으셨던 아버지의 마음을 저희들은 미처 몰랐습니다. 저희들은 언제나 친구를 좋아했고, 나홀로는 가기 싫어하는 신앙길을 지켜 왔습니다.
깊은 승리가 결정되는 자리라는 것은, 지극히 고독한 자리에서 당신의 높고 고귀하신 사랑의 인연을 가지고 승리의 영광에 잠길 수 있는 그 자리에서 만물만상 앞에 내세우고 싶은 당신의 소원의 귀착점임을 저희들은 미처 몰랐습니다.
아버지, 여기에 모인 당신의 아들딸들을 이 시간 굽어살펴 주시옵소서. '나'라는 것이 당신 앞에 어떤 가치의 대상이 될 것이며, 당신이 소원하시는 세계 앞에 어떤 책임자가 될 것이며, 당신의 사명을 분부받아 가지고 역사시대에 없는 새로운 하늘의 심정의 터전이 되고, 또 심정적인 인연을 남길 것인가를 생각하게 될 때, 언제나 부족한 것이 인간이요, 미급한 것이 인간이기 때문에 또다시 당신의 재창조의 손길을 요구하지 않을 수 없는 이 자리에 서 있는 저희들을 용납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전국에 널려 있는 당신의 자녀들을 이 시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그들은 그 누구를 따라가는 무리들이 아니옵니다. 통일교회에 들어 오고 싶어서 들어온 무리들도 아니옵니다. 당신이 인도하였기 때문에 들어왔고 지금까지의 신앙과정에 있어서 다짐해 왔기 때문에 남아 있는 무리들이옵니다. 그러나 저희들은 이 자리에만 머물러 있을 수 없습니다. 또 가야 할 운명을 남기고 있기 때문에 가야만 되겠습니다. 그 길을 가는 데 있어서는 선두에 서서 달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다리에 상처를 입고 저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배가 고파 쓰러지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힘이 들어 쉬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이렇듯 천태만상의 모습으로 가는 통일의 무리들을, 아버지여, 굽어살피시옵소서.
내일의 희망을 이루기 위해서 모진 희생을 다짐하고 이 길을 찾아왔다는 것을 저희들이 알게 허락하여 주옵소서. 저희들에게 오늘의 승리를 가누어 주기 위해서 지금도 쉬시지 않는 아버지가 계시다는 것을 알고, 어려울 때에 아버지를 부르고 외로울 때에도 아버지를 사모하면서 갈 수 있는 통일의 자녀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시간 방방곡곡에 널리어 이곳을 흠모하면서 당신 앞에 부복한 곳곳마다 당신이 같이하여 주시옵고, 만방에 널리어 외로운 개척노정에서 최후의 승리를 다짐하며 싸우고 있는 불쌍한 통일가의 자녀들을, 아버지여.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다시 만날 날을 고대하면서 그리워하는 그들의 하루하루 생활을 모두 거룩한 것으로써 수습하게 하시옵고, 당신의 사랑과 당신의 긍휼의 마음이 엉클어져 가지고 아버님의 아들이라 딸이라, 할 수 있는 그 자리를 잃지 않고 끝까지 싸워서 남아지는 무리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시간이 저희들만의 모임이 되지 말게 하시옵소서, 슬펐던 아버님의 사정을 동정하고 싶어서 모이고, 외로왔던 아버지의 방패가 되기 위해서 모인 저희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 앞에 있어서 믿을 수 없는 아들딸이 아니라, 믿을 수 있는 아들딸이 되기 위해서 모인 무리로서 인정하시어 거듭되는 슬픔의 마음을 억제하시고 저희들을 다시 찾아주시옵소서.
같은 자리의 인연과, 같은 자리의 사정과, 같은 자리의 심정을 지니고, 내일을 다짐하고 소망을 다짐할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비옵니다. 이 민족과 이 세계에 있어서 남아질 수 있는 무리가 되겠다고 몸부림치는 저희들이오니, 당신이 친히 기억하여 주시옵고, 동정의 마음을 베풀어 주옵시길 간절히 바라옵니다. 모든 전체를 아버지께서 맡으시옵소서.
당신의 승리만이 같이하여 주옵기를 부탁드리면서 모든 말씀 참부모님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말 씀
여기에 모인 여러분들은 사정이 각각 다를 것입니다. 과거에 걸어온 길도 다를 것입니다. 각자의 사정이 다르기 때문에 앞으로의 갈 길도 각자 나름의 다른 길을 가야 되리라고 보고 있습니다.
하나의 세계를 추구해 나온 인류
우리 개인이 그러한 것과 마찬가지로 종족을 두고 볼 때, 종족 또한 그렇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대한민국에는 수많은 종족들이 살고 있는데 그 종족들이 가는 길도 역시 다를 것입니다. 지금까지 걸어온 길도 달랐을 것이고, 현재 처해 있는 입장도 다를 것입니다. 나라들을 중심삼고 볼 때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역사가 다르고, 현재에 처해 있는 입장이 다르고 또 금후에 가야 할 길이 다를 것입니다.
이 땅 위에 수많은 나라가 있지만 그 나라들이 가는 길이 각기 다른 것을 생각하게 될 때, 개인이 그런 입장을 갖춘 것과 마찬가지로 종족도 그러하고 나라도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수많은 인간들이 가는 길이 각각 다른데 세계가 가는 길은 어떠할 것이냐? 가는 길이 각각 다른 천만인이 살고 있는 이 세계일지라도 이 세계가 가는 길이 달라서는 안 됩니다. 최후에 인간이 바라는 어떠한 소망이 있다면 그 소망은 만인이 바라는 공통적인 기점에 있어야 될 것이고, 그 기점은 만민 전체가 소망하는 곳이어야 될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하나의 높은 산을 중심삼고 보면, 그 산정을 향하여 올라가는 길은 동서남북으로 각각 다를지 모르지만, 그 산의 최고봉은 한 지점밖에 있을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둘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한 절정에 도달하여 가지고 거기에 선 하나의 나라, 거기에 선 하나의 종족, 하나의 사람이 있어야 될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생각해 볼 때, 그러한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한 가정을 두고 볼 때에도, 그 가정이 평화스러운 가정이 되기 위해서는-식구 모두가 자기 나름의 길을 중심삼고 자기 스스로를 주장할 수 있는 입장에 있지만-그 가정 전체를 중심삼고 열 식구면 열 식구, 그 식구 수에 해당하는 각자의 권위를 인정하고 각자의 행로를 총합하여 가정이라는 전체의 가치를 결전할 수 있는 하나의 중심적인 자리에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리를 바라보고 나가는 가정이라면 그 가정은 그 자리를 바라보는 동안은 불화하는 가정, 혹은 불행한 가정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하나의 중심점을 갖지 못하고 각자의 주장대로 가는 가정이 되게 될 때는, 열 사람이면 열 사람이 서로 상충이 벌어지게 될것입니다. 여기서 주장하는 그 주장은 어떤 중심을 대신하는 가치와 일치되는 것이 아니라 중심에 반항하는 입장을 결정하고 만다는 사실을 두고 볼 때, 그 주장의 결과가 전체 앞에 행복의 여건을 갖다 주는 것이 아니라 불행과 상충의 여건을 기필코 가져다 준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우리의 생활주변을 살펴볼 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바라보게 될 때, 오늘날 우리 각자가 처해 있는 입장이 다르고, 나라가 처해 있는 입장이 다르지만, 앞으로 남아질 세계가 처할 수 있는 입장은 달라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누구나 다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인류는 하나의 세계를 바라는 것입니다. 둘의 세계를 고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하나의 세계라는 것은 투쟁을 개재시킨 세계가 아니라 평화를 여건으로 한 세계를 말합니다. 그러한 세계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평화의 여건을 갖춘 하나의 세계를 추구할 수 있는 내용이 어디에서부터 출발할 것이냐 하는 문제를 타진하게 될 때, 자기는 그것을 모르지만 어떠 어떠한 인연을 통해서 그럴 수 있는 때가 올 것이다 하고 막연한 자리에서 그 세계를 추구해 나가고 있는 현실사회요, 역사적인 시대라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의 세계는 나 하나에서부터 모색되어야
하나의 세계를 결정지을 수 있는 그 요인이 무엇이냐, 또 그 중심적 내용이 무엇이냐 하는 것에 대해서는 모르지만, 어쨌든 하나의 세계는 기필코 와야 된다고 하면서 인류 역사는 숱한 투쟁의 행각을 모면하지 못한 입장에서 몸부림치며 커 나온 것입니다. 수많은 종족과 수많은 국가가 분립되어 싸우다가 규합되어 가지고 지금에 와서는 좌우가 대결하는, 민주세계와 공산세계가 대결하는 두 세계의 형태를 갖추게 된 것입니다. 이 두 세계 가운데에서 어느 세계가 이 세계의 중심으로 남아질 것이며, 정상의 자리를 차지할 것이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그것은 민주세계도 아니요, 공산세계도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 세계는 오늘날 이 세계의 어떤 주의, 사상에 이끌려 가는 세계가 아닙니다. 그 세계는 두 세계로 분립되어 투쟁의 여건을 남기고 있는 이 세계에 끌려가는 세계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 세계는 이 두세계를 끌고 갈 수 있는 세계가 되어야 되고, 두 세계를 종합할 수 있는 세계가 되어야 됩니다. 오늘날 이 두 세계는 앞으로 남아질 하나의 세계를 규정지을 수 있는 절대적인 위치에는 설 수 없는 것입니다. 상대적인 입장에는 설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그런 관점에서 볼 때, 그러면 민주세계는 민주세계로서의 그런 절대적인 기준에 설 수 없는 것을 알고 상대적인 입장을 취하여 내일의 희망 앞에 완전히 일치될 수 있는 현재의 입장을 취했느냐? 아니라는 거예요. 민주세계는 민주세계 나름대로, 공산세계는 공산세계 나름대로 이 세계를 중심삼고 주도하겠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종말시대에 우리가 처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류역사의 기원은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느냐? 이런 문제를 놓고 오늘날 그 누구에게 물어 보더라도 인류역사는 어떤 전체를 대표할 수 있는 본래의 원리적 기준에서부터 출발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모색하는 어떤 방향의 중심에서 직선을 그어 가지고 나오는 입장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어디인지도 모르는 사방에서 모여 가지고 하나의 중심을 그려 나오는 역사시대인 것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하나의 산꼭대기를 중심삼고 갈래 갈래길로 찾아 올라가던 것이 점점 정상에 가까와짐에 따라 그 많은 길들이 종합되어 가지고 두 갈래길로 남아진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볼 때, 그 출발의 기점이라는 것은 그 산의 정상과 더불어 산 밑에서부터 하나의 수직선을 세워 그 중심점을 갖춘 자리에서 출발하지 못한 것이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역사의 출발 기원이 엇갈려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왜 이렇게 되었느냐? 본래는 이렇게 되는 것이 아닌데 왜 이렇게 되었느냐? 이러한 것을 종교적 술어를 빌어 말한다면 타락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동기가 되어 이런 세계가 되었느냐?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사람입니다. 사람이란 어떤 존재냐? 이 사람이라는 존재가 나라를 대신할 수 있는 나를 찾고, 세계를 대신할 수 있는 나를 찾고 있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세계를 대신하고 나라를 대신하기는 커녕 종족도 대신할 수 없고, 가정도 대신할 수 없는 내가 아니냐?
그러면 나 자신이 가정도 대신할 수 없는 입장에서 어떤 자리에 서 있느냐 할 때, 그것도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모르는 자리에서 참을 찾겠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그러므로 제일 중요한 문제, 이러한 모들 문제들을 세계의 종착점에서, 역사적인 종착점에서 해결을 구하려는 것보다 반드시 내 자체에서 해결지으려 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생의 근본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인류의 선두에 설 수 있는 사람
이런 관점에서 나의 기원이 어디냐 할 때 여기에 신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그러나 우선 신은 제외하여 놓고, 나 자신만을 중심삼고 보면 나는 어떻게 되어 있느냐? 나에게는 두 면의 사람이 있습니다. 즉 양심적인 사람과 육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안팎의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나'는 존재가 출발의 기원에 있어서, 인류가 바라고 하나의 세계가 바라는 최고의 소망의 정상 기준을 중심삼고 그 자리에 섰느냐 할 때, 서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 중심의 자리에 서지 못한 나는 현재의 입장이 그 자리와 얼마만한 거리가 있느냐 하는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거리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중심과는 먼 거리에 있을 텐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30억 인류가 살고 있는 이 세계에는 많은 나라가 형성되어 있고, 많은 주의와 사상이 전개되어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현재의 위치라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면 그 위치가 어디에 있느냐? 사랑 중에는 동쪽에 서 있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서쪽에 서 있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남쪽에 서 있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북쪽에 서 있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나이가 많다고 해서 동쪽이 될 수 없고, 나이가 적다고 해서 북쪽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종적인 입장에서 보게 되면, 거기에는 선한 선조도 있을 것이고 악한 선조도 있을 것입니다. 종적으로 이어 내려오는 선조의 혈통을 중심삼고 보면 거기에는 천태만상의 등급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천(千)의 선한 선조를 가진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천(千)의 악한 선조를 가진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들쭉날쭉일 것입니다. 그러한 선조들을 어떠한 절대자가 계셔서 관찰해 본다면 그래도 맨 선두에 선 선조가 있을 것이고 그의 후손이 있을 것이 아니겠느냐? 그 맨 선두에 선 선조의 후손은 어떤 사람이겠느냐?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바라보고, 현재 살고 있는 인간들이 흠모할 수 있는 그런 자리에서 있는 사람이냐? 여러분은 그런 사람이 어떤 급에 있는 사람인가를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선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어떤 자리에 서야 할 것이냐? 얼핏 생각하게 되면, 그런 사람은 어떤 한 나라의 대통령의 자리에 서야 되지 않느냐고 할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그런 사람은 어떤 사람이며, 어디에 있을 것인가? 종적으로 본다면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별의별 사람이 다 있었습니다. 오늘날의 세계에 있어서 한 개인은 전부 점으로 되어 있습니다. 평면적으로 보면 다 마찬가지입니다. 아침에 밥을 먹는 것도 마찬가지이고, 하루의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엮어 온 과거를 중심삼고 선악의 차이를 보면, 그것은 천태만상으로 서로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높은 자리에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낮은 자리에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아까 말한 그런 사람이 어디 있느냐? 오늘날 민주세계를 보아 닉슨이 그런 사람이 아니냐? 천만에요. 또, 공산세계로 보아 브레즈 네프가 그런 사람이 아니냐? 천만의 말씀입니다.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여러분은 그런 사실을 믿기 싫어할 것입니다. 그들이 오늘날 그런 권력을 잡기까지의 그 모든 행로는 투쟁과정을 거쳐온 것입니다. 싸워서 이겼다 하는 그것은 선한 역사의 전통시대 앞에 있어서 그 자리에 접근할 수 있는 길을 찾아왔을는지는 모르지만, 그 자리에 섰다고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 서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오랜 역사를 거쳐와야 됩니다. 전통적 역사가 뚜렷해야 되고, 전통적 역사가 길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 역사가 길수록 그 사람은 선두에 서게 됩니다. 그리고 그 전통적 역사는 기원을 어디에 둬야 되느냐? 막연한 것에 두어서는 안 됩니다. 그 기원이 뚜렷해야 됩니다. 그것이 참이라면 참에 가까운 기원을 둬야 될것입니다.
절대적인 기준점에 선 남성을 찾아 나오신 하나님
오늘날 어떠한 나라든지 각 나라에는 신화(神話)가 있습니다. 신화는 어떤 것이냐? 막연한 것입니다. 각 나라는 이러한 막연한 역사에서부터 출발하여 문화적인 형태를 갖추고 민족을 형성하여 온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신화의 내용을 모체로 해서 그 나라가 얽혀져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관점에서 신화(神話)라는 말을 중심삼고 보면, 신(理)의 화(話)가 생겨나기 전에 신(神) 자체가 있었을 것이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종교는 신화를 중심삼고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신화를 신앙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신을 신앙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두고 볼 때에, 종교는 어떤 신화를 중심삼고 형성된 민족이나 문화의 기원보다 앞서는 것이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화가 있기 전에 신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신이란 어떤 신이냐? 오늘날 우리가 말하고 있는 신은 많이 있습니다. 그 많은 신 가운데 중심적인 신을 통해서 나타난 어떤 신화가 있다면, 그 신화로 말미 암아 엮어질 수 있는 개인이 있어야 되고, 종족이 있어야 되고, 민족이 있어야, 되고, 국가가 있어야 되고, 세계가 있어야 됩니다. 그것이 뚜렷하게 연면히 역사성을 갖추고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 세계가 비록 악한 세계일지라도 전통적인 방향성에 있어서 현재의 그 입장이 뚜렷하고, 현재에 있어서 중단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넘어 미래로 나갈 수 있는 확고부동하고 뚜렷한 행로가 있다고 할 때에는, 비로소 미래에 어떠한 소망의 길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외에는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억천만 사람이 주장했다 하더라도 어떠한 학설을 중심삼고 주장하는 것은 변천해 가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종교 중에도 어떤 종교냐? 종교 중에는 여러 신을 섬기는 종교가 있습니다. 미개한 신앙자일수록, 혹은 미개한 종교일수록 그 대상이 확정지어 있지 않습니다. 아플 때에는 병을 낫게 해 달라는 정성의 대상으로서 신을 모시는 것이요. 출세하기 위한 정성의 대상으로서 신을 모시는데, 이러한 것들은 미신 종교입니다. 그렇지만 그 미신 종교에도 그 입장에 있어서는 하나의 진리성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오늘날에는 비행기로 빨리 갈 수 있으니까 자전거를 타고 가지 않지만, 자전거밖에 없던 시대에 있어서는 그것을 타고 가는 것이 최고의 길이었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신 중에서도 어떠한 신이냐? 절대적인 신이어야 됩니다. 그러면 그 절대적인 신은 무엇을 중심삼고 인간을 찾아와 관계를 맺어야 되느냐? 이런 문제를 두고 볼 때, 절대적인 신으로서 바라는 소원이 있을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소원은 무엇이냐? 그것은 세계가 아닙니다. 그 신이 소원하는 대상은 세계도 아니요, 하늘땅도 아닙니다. 그것이기 전에 먼저 무엇이냐 하면 우리 개인이어야 합니다.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입니다. 그러면 남자와 여자 가운데서 남자가 먼저냐, 여자가 먼저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볼 때 여자들은 여자라고 하고, 남자들은 남자라고 말을 할 것입니다.
신이 대상을 찾아오는 데에는 보다 나은 것을 중점으로 하여 찾아 나올 것입니다. 먼저 대상으로 하는 것은 못한 것을 대상으로 하지 않을 것입니다. 보다 나은 것을 대상으로 할 것입니다. 왜 그러냐? 우리 개개인의 마음을 두고 볼 때, 타락되어 있고 악한 세상에 둘러 싸여 있는 우리 자신들도 보다 나은 것을 대상으로 하고 싶어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정상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타당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神)을 중심삼고 볼 때도 남자가 먼저냐, 여자가 먼저냐 하는 문제에 있어서 여자는 여자가 먼저다 할 것이고 남자는 남자가 먼저다 할 것이지만, 아무리 봐도 여자가 먼저 될 수 없다 하는 것은 여자들도 잘 알 것입니다.
어젯밤에 텔레비젼에서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의 여자들이 나와서 축구하는 것을 봤습니다. 그런데 그 선수들이 후반전에 가서는 조금만 부딪 쳐도 넘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걸 보고 여자들은 저렇게 과격한 운동은 못 하는 것이고, 체력적으로는 남자를 당하지 못 한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여자만 가지고는 안 되겠다, 남자가 있어야 되겠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도 우선 쓸 사람을 찾을 것입니다. 무엇에 쓰려고 하시는 것이냐? 데리고 살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전쟁 때 쓰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신앙자들은 개인생활에서 전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 영적으로나 육적으로나 싸움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굳세고 강해야 된다고 주장하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필요로 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바라보고 향기를 맡으며 좋아할 수 있는 온상의 꽃과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폭우가 쏟아지고 태풍이 불어오는 치열한 전투장에서, 그것을 거슬러 가며 당당하게 전진할 수 있는 용맹한 용사를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용맹한 용사라 하게 될 때는 여자 생각은 까마득하게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싸움의 역사시대에 있어서 필요한 사람은 틀림없이 남자일 것입니다.
종교를 중심삼고 볼 때, 종교의 도주들은 여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남자가 되어야 합니다. 역사를 보면 모두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기독교의 예수도 남자고. 불교의' 석가, 유교의 공자, 이슬람교의 마호메트도 다 남자입니다. 종교의 도주는 전부 다 남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소망의 대상으로 찾고 있는 것은 세계이기 전에, 나라이기 전에 남자라는 것입니다. 남자를 잘못 찾게 되면 나라도 잘못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산꼭대기를 중심삼고 산 밑과 수직선을 그어 90도가 되는 중앙선에 선 남자를 찾아야 되는 것입니다. 90도 근방에 갔다고 해도 안 되는 것입니다. 100점을 중심삼고 볼 때, 99.999…를 몇천년 몇억년 계속해도 100점은 못 따라갑니다. 그것보다 100점이 좋은 것입니다.
선한 사람이란 어떤 사람을 두고 말하느냐
그런 입장에서 여러분들도 지금 어느 한 자리에 서 있을 것입니다. (판서하심 ) 오늘날 세계 30억 인류가 역사시대에 오르락내리락하면서 100에 훨씬 못 미치는 자리에 처해 있습니다. 환경은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렇지만 여러분들이 그 자리를 부정하고 100을 향하여 아무리 간다고 하더라도 그 이상은 못 가는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여러분은 모르지만 지금까지 역사적인 인연을 중심삼아 가지고 선악이 엇갈리는 싸움을 해왔습니다. 거기에서 악한 사람은 망해야 되고 선한 사람은 흥해야 되는 것입니다. 흥망이 엇갈린 역사적 배경을 거친 선조들이 틀림없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오늘날 우리 자신들인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전부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왜 불행하노' 하고 불평할 수 있는 자격도 없는 것입니다. 다 같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잘사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반면에 지지리 못사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도 못하다고 할 수 있을 만큼 비참한 생활을 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자리를 피해 가려고 아무리 몸부림치더라도 그 이상의 자리에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네를 뛰는 데 있어서 짧은 줄을 매어 아무리 뛰어 봐야 왕복거리가 짧은 것과 같습니다, 그렇지만, 긴 줄을 매어서 뛰게 될 때는, 왕복거리가 길어지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되기 위해서는 선한 선조가 있어야 됩니다. 그러니 자신들이 선한 선조로 남아져야 선한 후손을 남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역사시대를 막론하고 '선'이라는 말을 가르쳐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것이 선한 것이냐? 자기를 내세우는 것이 선한 것이냐, 자기를 희생시키는 것이 선한 것이냐? 자기를 내세우는 것이 선이라고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또한 주는 것이 선한 것이냐, 받는 것이 선한 것이냐 할 때에 받는 것이 선한다고 생각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받는데 있어서 자기의 한계선을 넘어 가지고 받겠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이미 도둑권내에 들어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만일 아무리 거지의 입장에 있더라도 남에게 주고 싶어서 눈물을 흘리고, 세상에 가진 것이 없어서 외적으로는 못 주지만 마음만은 주고 싶어서 피땀을 흘리면서 몸부림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외로운 사람이 아닙니다. 외로운 자리에 있더라도 외로운 사람이 아니라고요. 그에게는 반드시 친구가 있는 것이요, 그를 환영하는 환경이 벌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받겠다는 심보를 가지고 끝까지 나가는 그런 사람은 그가 백만장자라 할지라도 그 사람 앞에는 안 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받겠다는 그 마음을 충당시키기 위해서 상대에게 있는 것은 전부 빼앗으려는 간악한 마음이 있기 때문에, 그가 아무리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 앞에는 안 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가 더 가지면 가질수록 가까이 있던 사람들마저도 점점 가까와지는 것이 아니라 점점 멀어지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그런 경우를 자주 볼 것입니다.
선한 사람이라는 그 기준은 무엇을 가지고 말하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그것은 물질적인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반드시 눈물이 가해져야 되는 것입니다. 또, 사람을 대할 때에는 웃는 얼굴로 대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울타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울타리는 울타리인데 무슨 울타리가 되느냐 하면 구속의 울타리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울타리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울타리가 되기 때문에 어색함이 없이 주의(注意)라든가, 혹은 방비를 갖추는 자기보호 관념을 초월하게 됩니다. 물론 그 웃음이 전략적인 웃음이라면 모르지만, 자연적으로 나오는 순박한 웃음일 때에는 그냥 그대로 접해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우리가 이 땅에서 요구하는 방어태세라든가, 자제해야 될 여건 같은 것은 필요없는 것입니다. 그냥 그대로 통할 수 있습니다. 그냥 그대로 얼마만큼 통할 수 있느냐 하면 그 웃을 수 있는 자리가 무한하다면 무한히 통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직선의 길이 있다면 한정없이, 갈 수 있는 데까지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우는 사람보다 웃는 사람을 좋아하고 성난 사람보다도 웃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그것은 전부 다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이 아니예요.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선한 사람이란 보이는 것을 중요시하는 사람 가운데에 있느냐, 보이지 않는 것을 중요시하는 사람 가운데에 있느냐 할 때, 보이는 것을 중요시하는 사람보다는 보이지 않는 것을 중요시하는 사람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정상의 표준
사람이 눈물을 흘린다 할 때, 그 눈물은 보이게 흘리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들딸이라든가 가정적인 문제, 정서적인 문제에 있어서 그 상대는 보이는 사람이지만 그 근본은 보이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보이지 않는 것이 근본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 물건이 어떻게 생겼느냐 할 때는 이렇게 생겼다고 말할 수 있지만, 사랑이 어떻게 생겼느냐 할 때는 삼각형이다, 동그랗다고 말할 수 있어요? 그렇게 보여요?
우리가 물질적인 문제를 중심삼고 슬퍼하는 것은 한때입니다. 그 때가 지나가면 그것은 단념할 수도 있고 새로이 수습할 수도 있는 것이지만. 정서적인 문제, 사랑의 문제를 중심삼고 걸리게 되면 자기 혼자서는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잠깐 슬픈 것이 아닙니다. 이것에 한번 걸리게 되면 문제가 큽니다. 이런 문제를 두고 볼 때에, 보이지 않는 것을 중심삼고 선의 바탕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바탕이 무엇이냐? 그것은 사랑이라는 말, 정서적인 말에까지 도달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게 될 때, 하나님이 찾는 인간은 남자여야 되겠습니다. 그 남자 가운데서도 어떤 사람이어야 되느냐? 정서적인 남자여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좋아하면 그도 좋아해야 되고. 하나님이 슬퍼하면 그도 슬퍼해야 됩니다. 하나님이 동하면 그도 동해야 되고, 또 하나님이 동으로 가면 그도 동으로 가고, 하나님이 서로 가면 그도 서로 가야 됩니다. 그런 사람이 되어야 됩니다. 만일 신이 있다면, 신은 그런 사람을 요구할 것입니다. 한 시간이라도 같이 있어서 나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원치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그렇잖아요?
그러려면 먼저 무엇이 같이 있어야 되느냐? 그 얼굴이 먼저 같이 있어서는 안 되는 거라구요. 사정이 먼저 같이 있어도 안 되고, 소망이 먼저 같이 있어도 안 됩니다. 사랑이 먼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소망이 있기 전에 사랑이 먼저 있어야 됩니다. 만일 소망이 있어서 소망을 중심삼고 하나되었다 하더라도 그 곳에 사랑이 없으면 서로 싸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사랑이 먼저 있어 가지고 소망이 있게 되면 그곳에는 싸움이 없을 것이 아니냐? 서로 서로 좋아하면서 그 소망을 이루어 갈 것이 아니냐? 그러나 사랑이 없게 될 때는 이것이 곤란할 거라구요. 그렇기 때문에 사정이 있기 전에 사랑이 먼저 있어야 되고, 소망이 있기 전에 사랑이 먼저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랑은 어떤 길을 가느냐? 상대적인 입장에서 둘이 의논해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주체와 대상의 관계는 절대적이기 때문에 여기에는 제삼자가 개입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절대적인 일치점을 바라고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남자는 한 여자를 절대적인 기준에서 사랑하려고 합니다. 이런 입장에서 볼 때, 절대적인 하나님이 있다면 그 하나님은 무엇을 중심삼고 하나되기를 바랄 것인가? 그것은 사람이 있다면 사람, 사람 중에서도 남자가 있다면 남자가 절대적인 하나님 앞에 절대적인 대상자로서 하나의 심정을 중심삼고 하나되기를 바랄 것입니다.
그 출발의 점을 역사적인 거리로 볼 때 몇천년이 될 것인가? 인간시조부터 그런 기원을 마련해 가지고 출발을 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 것이냐?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사랑을 중심삼고 살림살이한 어떤 경륜이 있었을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바라시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할 때 그 사람은 '너다' 하실 수 있는 사람, 또 하나님이 살고 싶은 사람은 누구냐 할 때도 '너다'하실 수 있는 사람, 하나님이 함께 살림살이하고 싶은 사람이 누구냐 할 때 '너다' 하실 수 있는 사람,'너로 말미암아 기쁘게 살고 싶기 때문에 너와 같은 사람을 세계화시키고 싶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연적인 이치입니다.
그러면 정상의 표준은 어떤 것이겠느냐? 그것은 단 하나이기 때문에 유일한 기준입니다. 그 유일한 기준을 왜 지금에 와서야 바라게 되었느냐? 또, 그 기준이 종착점에서 막을 내릴 수 있는 결정적인 내용이 무엇이냐? 그 유일(唯一)이 아무리 세계적이라 하더라도 그 자체만으로서 하나님은 기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어디에 귀착되어야 되느냐? 하나님이 세계를 전부 품에 품었다 하더라도 그 품은 것 대신, 그것을 남겨 두고서라도 하나의 절대적인 상대자, 상대적인 절대자를 추구하여 하나님의 마음에 제일 맞는 한 남자를 요구할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역사시대의 수많은 사람들이 경주장에 선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하나의 새로운 세계를 향해 달려 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각기 딴 방향으로 달려 나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북쪽으로 달리고, 어떤 사람은 올라가고, 어떤 사람은 내려가고…. 이 야단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끝날은 한 남자의 출현과 더불어 온다
그러면 세계의 정상에 도달할 수 있는 하나의 길이 어디에 있느냐? 역사시대에 있어서 하나님이 제일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는 소원 중의 소원이요, 내 마음 중의 마음이요, 희망 중의 희망이다'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무엇이라고 할까, 좋은 명사는 다 갖다 붙일 수 있는 사람을 가질 수 있다면 천하를 잃어버려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는 한 사람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끝날에 가서 세계는 하나가 되어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민주주의와 공산주의가 하나되어야 됩니다. 지금 세계에는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두 세계가 대립되어 있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이 두 세계뿐만 아니라 셋 이상의 세계가 대립되어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종교라는 것을 무시하고 있기 때문에, 무형세계에 주체성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민주주의와 공산주의 이 두 세계뿐만 아니라 종교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셋이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금후에 문제될 수 있는 종교권이 뭐냐 하면 아랍권, 즉 회회교권입니다. 그 다음에는 기독교권입니다. 이처럼 외적으로는 민주와 공산, 이 두 세계가 싸우고 있는 것 같지만 안팎으로 종교적인 사상을 중심삼은 그 무엇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그런 때가 왔으니 그 정상에 올라가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하나님이 찾고 있는 자리, 만나고 싶어하는 자리, 보고 싶어 하는 자리, 좋은 자리, 행복한 자리는 어떤 자리일 것이냐? 그 세계의 주권을 찾았다 하는 자리일 것이냐? 허황되고 복잡다단한 어떤 세계를 찾았다는 것보다도, 전부를 부정하고도 남음이 있을 수 있는 사랑의 대상으로서 한 남자를 찾았다는 자리가 아니겠느냐?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자와 더불어 새역사는 시작돼
그래서 종교에서 말하는 끝날이라는 말은 좋은 말입니다. 끝날이 온다…. 끝날이 오기는 오는데 끝날이란 무엇이냐? 끝날과 더불어 무엇을 남기느냐? 재림사상, 큰 종교일수록 재림사상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참 이상하다는 거라구요. 그걸 보면 하나님이 없다고 못 하는 것입니다. 어떤 종교든지 재림사상을 다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미륵불이 온다고 하고, 유교에서는 진인(眞人)이 온다고 하고, 기독교에서는 재림 주가 온다고 합니다. 다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끝날이 오긴 오는데 무엇과 더불어 오느냐? 끝날이 그냥 오는 것이 아닙니다. 세계가 싸워 가지고 끝날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어받을 수 있는 한 남자의 출현과 더불어 끝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대부 분의 종교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끝날을 이어 놓을 수 있는 하나의 새로운 출발의 기원이 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 그것은 절대적이고 유일무이한 하나님과 하나될 수 있는 남자입니다. 그 남자와 하나님이 하나되기 위해서는 얼마만큼 사랑해야 되느냐? '개인 한 사람으로서 하나님과 하나된 기준이 세계적이다, 세계 만민을 대표할 수 있다, 역사적이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대표할 수 있다'고 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렇게 되면 문제가 달라지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류는 역사와 더불어 자기도 모르게 뛰고 있는 것입니다. 역사라는 경주장에서 인류는 하나의 종착점을 향하여 뛰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종착점에 있어서의 챔피언 자리는 들이 아닙니다. 그 출발지가 어디인지는 모르지만 자신들은 출발했다고 합니다. (판서하심) 먼 거리에서(뒤에서) 뛰어오는 녀석은 아무리 큰소리 하더라도 이놈한테(앞 사람) 흡수됩니다. 이 차이에 의해서(뛰는 사람과의 차이) 흡수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종교도 몇백 년 몇천 년 이렇게 나온 겁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흡수되어 오면서 맨 마지막까지 남아져 가지고 정상의 자리에 가까운 종교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정상에 가까운 자리까지 이어오면서 정상의 자리에 있는 사람과 비교할 때 '사람과 나와 같지 뭐, 그 진리와 이 진리와 같지 않아? 불교나 유교나 뭐 종교는 다 마찬가지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종교의 목적은 하나입니다. 하나는 하나인데 무엇을 중심삼고 하나냐?
사정이나 소망을 중심삼고 하나가 아니라, 사랑을 중심삼고 하나입니다.
거기에는 둘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의 결정적인 자리를 찾아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유일무이한 분이기 때문에 그분의 마음에 속속들이 일치될 수 있는 사랑의 대상은 둘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사람이 나와야 됩니다. 그런 사람이 나와야 된다는 거라구요.
문명을 두고 볼 때에 낮은 문명권은 보다 높은 문명권에 흡수되면서 발전해 왔습니다. 이것은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우리가 말을 할 때에도.
나보다 조금 지식 있는 사람과 말을 하게 되면 그 사람에게 굴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반론하더라도 그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 되고 맙니다. 그 자리에 있어서 반대하고 나선다면 그 사람은 그 자리에서 제거 되기 때문에 다시는 거기에 못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 앞에 머리를 숙여야 거기에 남아져 가지고 은신이라도 하고 움직일 수 있지 그렇지 않으면 어림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때가 되었기 때문에 이젠 끝날이 다 됐습니다. 미국이 민주주의 국가를 지도하던 그 역량으로 세계를 리드해 갈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여지없이 후퇴해야 합니다. 후퇴하지 않으면 하늘이 치는 것입니다. 높다고 하는 녀석들은 다 꺾여져 버린다는 것입니다. 1970년도부터 3년 기간 동안에 높다 하는 녀석들은 다 잘려 나갈 것입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네가 높아? 높은 것을 중심삼고 내가 높다고 금을 긋게 되면 모가지가 잘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르는 것이 아니라 높다고 하는 자신이 자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정상시대가 오게 될 때는, 큰 별이 떨어진다는 성경말씀처럼 그때에는 세계적인 인물들은 목이 잘리는 것입니다. 그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높겠다고 하는 녀석들은 제거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플러스인 하나님 앞에 있어서 높아지기 위한 길을 찾아가는 그 입장은 마이너스이지만 그길을 갔다 할 때는 목을 탁 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동적인 원칙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끝날에는, 세계적으로 지도하던 사람들과 그 주의(主 義)는 목이 떨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통일교회 교인 들은 기분좋지요? 나도 기분 좋게 생각한다구. 두고 보라는 것입니다.
그때에는 혼란이 벌어지게 됩니다. 한쪽에서는 죽겠다, 살겠다 하고 아우성을 치는데 또 한쪽에서는 죽겠으면 죽고, 말겠으면 말아라 하면서 혼인잔치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입장을 두고 볼 때, 어떻게 보면 이렇게 능청스러운 분이 오시는 주님이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남들은 죽겠 다고 야단하는데, 잔치를 한다고 야단입니다, 그런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그저 '잘 망한다. 잘 망한다' 하는 그런 판이 나올 것입니다. '너희들이 아무리 그래 봐라. 우리는 잔치다. 먹고 보자' 그러는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그런 무리들은 이 세계와 저 세계로부터 위협이나 침범을 받지 않는 해방된 무리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절대자인 주인의 보호를 받고 있는 입장에 서면 절대자의 주권을 대신한 판사 앞에 선다고 해서 두려워하겠어요?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야, 판사야, 너는 나하고 상관이 없고, 검사야, 너도 나와는 상관이 없다. 상대세계와 상관이 있는 것이지' 그러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 서게 되면, 하나님이 안방에 들어가면 그도 안방에 따라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안방에 따라 들어가서 가만히 있으면 하나님께서 '왜 그러고 있어?' 하며 물을 것입니다. 아내도 그렇지 않아요? 남편이 안방에 들어와서 무뚝뚝하게 있으면, '당신 왜 그러고 있소? 하고 묻잖아요? 그러면 남편이 '왜 그러기는 왜 그래, 기분 나쁘게 ? 그래요? 부드럽게 '왜 그러기는 뭐가 왜 그래' 이렇게 하지 않아요? 그러면 하나님도 그러한 사람을 만나는 것을 나빠하겠어요, 좋아하겠어요? 한번 생각해 보라구요. 하나님이 그러한 사람을 나쁘다고 한다면, 하나님이 그런 사람 만나기를 싫어한다는 말이 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좋아합니다. 참 좋아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반하고 사람은 하나님에게 반해야
오늘의 말씀 제목이 '경주장에 선 현재의 위치'입니다. 역사는 수많은 종족을 중심삼고 경주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경주에 있어서 누가 일등이겠어요? 통일교회는 꼴등이예요. 중간이예요? 뭐예요? 일등이라고 한다면 기성교회에서 온 사람들이 기분 나빠할 것이니까 꼴등이에요, 중간이예요? 몇 번째예요? 통일교회가 이왕 될 바에는 일등할 거예요, 꼴등할 거예요?「일등요」 도둑놈들도 다 일등하겠다고 할 것입니다. (웃음) 도둑놈들에게 물어 봐도 일등한다고 하는 거라구. 일등하겠어 요?「예」 진짜 일등하겠어요?「예」
일등은 다 좋아합니다. 일등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것은 강아지도 그렇습니다. 강아지들도 싸울 때에 지려고 해요? 물리면서도 가만히 있어요? 상대를 몇번씩 깨물고 깔고 앉아 가지고 반은 어떻게 해놓고 나서야 떨어진다구요. 동물도 그러는데 사람이 안 그러겠어요? 일등은 다 좋아하지요? 그렇지요?「예」 결혼을 하는 데에도 일등 상대와 결혼을 하고 싶어합니다. 또 좋은 것 중에서도 제일 좋은 것하고, 더 제일 좋은 것하고 어느 것이 좋으냐? 더 제일 좋은 것입니다.
그렇게 보게 될 때, 세상에서 제일 좋은 분은 누구냐? 세상 사람들이 제일 좋아하는 분이라 해도, 그분이 이 땅 위에서 몇년이나 살 수 있겠어요? 아무리 미남자라 해도 백년 더 살 수 있어요? 1세기도 채 못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분을 좀 더 좋아해야지,1세기밖에 안 좋아하겠어요? 그까짓 것은 한숨 자는 동안 좋아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리 되는 거라구요. 제일 좋아하는 사람과 한 십년 살다가 싹 갈라지고 싶어요? 아니면 십년, 백년? 여러분들은 몇년 동안이나 살다가 갈라지고 싶어요? 「영원히 살고 싶습니다」 영원히까지?(웃음) 이건 얘기지만 그 영원에다 아마 혹을 열개 붙여 놔도 좋아할 것입니다. (웃음)
그런데 힘내기 해 가지고 영원히 산다면 그건 나는 싫어요. 매일같이 레슬링 선수처럼 힘내기 하며 산다면 살 수 있겠어요? 생각해 보라구요. 또, 아는 것을 내기하면서 살 수 있겠어요? 그렇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하면 살아 보라구요. 아무 재미없다구요. 권력도 싫고, 지식도?「싫다」 그럼 돈은? 부인과 남편이 앉아 가지고 '여보 내가 돈을 지극히 사랑하기 때문에' 하며 '일 전 일전' 하다가는 둘이 '아이구, 네것 내것' 하다가 나중에는 서로 갖겠다고 싸움하는 거예요. 돈을 서로 지극히 사랑하다가는 서로 갖겠다고 싸운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돈도? '싫다' 그러면 뭐예요? 남자의 상판대기만 바라보고, 여자의 상판대기만 바라보고 좋아요? 사랑이라는 것은 절대적이어야 되는 거라구요. 그렇기 때문에 사랑이 있고 나서야 돈도 좋고, 사랑이 있고 나서 권력도 좋고, 사랑이 있고 나서 학식도 좋다는 것입니다. 사랑을 뿌리로 박아 놓으면 거기에는 그 무엇이든지 다 갖다 붙여 놓아도 싫은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도 별수없이 그럴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그러한 사람을 만났느냐? 하나님이 반했다고 한다면 불경스런 말이 될지 모르지만 말이요, 하나님한테 물어 봐요. '당신이 사랑의 주인이시오?' 하면 하나님은 '그렇지 내가 사랑의 주인이지'하실 것입니다. '그럼 사랑하게 되면 보고도 또 보고 싶고,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갈라지고 싶지 않는 것인데,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반한다는 말인데, 당신은 반한다는 말을 싫어합니까? 하고 물어 보면 하나님도 별수없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이 땅 위에 있는 어떤 미남자에게 반해 가지고 미칠 듯이 되었다면 세상이 어떻게 되었을까요? 큰일났을 것입니다. 사랑의 요지경판이 벌어져 가지고 떡덩이가 되든가 돌덩이가 되든가 둘 중의 하나가 되었을 것입니다. 반면에 사람이 하나님에게 반해 가지고, 1대(代)뿐만 아니라 10대 20대 몇천년을 두고 미쳐 내려오면서 하나님이 보고 싶어서 울고불고한다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보고도 모른다고 하겠습니까?
엊그제 라디오 방송에 어떤 가수가 나와서 하는 말이 월남에 위문 공연을 갔다 왔는데 병사들로부터 자기가 없으면 난 죽겠다고 하는 편지가 수두룩하게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는 죄를 많이 졌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들도 자기로 인하여 이렇게 사모하게끔 만들면 죄책감을 느끼게 되는데 하나님 때문에 몇십대를 미쳐 가지고 뒤넘이치면서 나오는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그걸 보고 미친 녀석이라고 하면서 어서 망하라고 하겠어요, 동정하겠어요?「동정할 것입니다」 동정할 것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면 사랑하라지. 그 까짓 것 뭐 저는 저고 나는 나지. 피장파장이지 뭐.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어?' 하는 사람하고, 하나님에게 반해 가지고 미쳐서 날뛰는 사람하고 누가 하나님을 붙들 수 있고, 맨 나중에 하나님편에 자리를 잡겠어요? 어떤 쪽이예 요? 하나님에게 미친 패예요, 그럭저럭하는 적당 패예요?「미친 패입니다」 당신들도 그래요? 그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때문에 미쳐서 야단하는 패입니다. 어떻게 미친 패냐? 좋다고 웃고 춤추는 패들이냐?' '나 죽겠다'고 울고불고 야단하며 요지경을 벌이는 패냐? 그런 패들이 있습니다. 그게 어떤 패냐 하면 예수쟁이들입니다. 여러분들은 '예수쟁이를 좋아해요? 쟁이라는 말은 좋지 않지만 할수없다구요.
결사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나님은, 하나님을 대하여 반해 가지고 몇천년 동안 울고불고하다가 몰려 죽을 자리에 들어가서 모가지 내놓고 죽은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동정하겠어요, 하나님은 점잖은 분이니까 '점잖게 있어야지'하는 사람을 좋아하겠어요? 여기에 있는 점잖은 사람들도 자기 여편네 대해서는 점잖지 않다구요. (웃음) 그렇지 않다는 사람 손들어 봐요. (웃음) 점잖게 '예 - ' 그래요? 사랑의 세계에서는 점잖은 것이 통하지 않습니다. 점잖은 것을 다 팔아먹고 다 삶아 먹고 그러는 것이 사랑의 세계입니다.
하나님은 점잖고 권위가 있는 분이라고 해서 그런 사랑의 자리에 가서도 '사랑이라는 것은 권위를 세워 가지고 해야지. 내가 동쪽에 있으면 당신은 서쪽이지'라고 해야겠어요? 사랑은 체면의 도수를 넘는 것입니다. 남자가 남자의 체면을 넘고, 여자가 여자의 체면을 넘는 것입니다, 남자가 여자같이 되고, 여자가 남자같이 되어야만이 사랑이 성립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말이 좀 이상하지만 남자가 여자같이 되고 여자가 남자같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 거라구요.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사랑의 주체라면 아무리 높은 하나님일지라도 인간같이 되겠다고 하고, 인간은 하나님같이 되겠다고 하는 그런 무엇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그런 자리가 성립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자리를 찾기 위해서 눈물이 엇갈리는 길을 찾아 헤매면서 살이 찢기고, 팔다리가 떨어지고, 목이 잘려도 '나는 간다' 하는 패들이 있는 것입니다. 지독한 패라구요, 지독한 패.
여러분은 제일 지독한 패를 좋아해요, 나빠해요? 무엇에 지독한 패냐? 돈에 지독한 패냐? 권력에 지독한 패냐? 요즘은 권력에 지독한 패가 있습니다. 또, 지식에 지독한 패? 밤을 새워 가면서 책을 보는 책벌레도 있습니다. 그런 지독한 패가 좋아요? 지독하려면 무엇에 지독해야 돼요? 하나님의 사랑을 대해 가지고 지독한 패, 이게 제일 땡이라는 것입니다. (웃음) 땡 하는 것은 결승 때에 하는 것입니다. 다 끝나게 될 때 정합니다. 여러분들이 땡 잡았다고 하는 말은 다 끝났다는 말입니다. 이런 것을 보면 한국말은 암시적이고 계시적인 말입니다. (웃음)
'공산당은 결사적이다, 결사적인 패다' 하는데 무엇 때문에 결사적이예요? 주권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들의 마음 가운데에는 사랑을 중심삼은 결사적인 것이 없느냐? 주권 때문에 결사적이냐, 사랑 때문에 결사적이냐 할 때, 주권보다는 사랑이 더 강하기 때문에 결사적인 것 중에서도 사랑의 결사적인 패가 남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공산당은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자연히 그렇게 됩니다.
종교 믿는 패들은 뭐냐 하면 하나님을 그리워하고, 하나님을 중심삼고 죽기내기하는 극성패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통일교회 패들은 문선생을 중심삼고 죽기내기한다고 하는데, 그런 말 들으면 내 기분 나빠요. 제발 그러지 말라구요. 제발 간절히 비나이다. (웃음) 그 대신 하나님을 중심삼고 죽기내기하자는 것입니다. 내가 부채질해 주마. 어디 죽기내기해 봐라 이거야. 자기 남편을 헌신짝같이 집어 던지고 하나님 중심삼고 하나님을 사랑하겠다고 죽기내기한다면, 하나님이 그걸 보고 '네 남편에게 그렇게 하면 되나, 먼저 남편을 사랑하겠다고 죽기내기한 다음에 나를 사랑하겠다고 죽기내기해야지' 그러시겠어요? 아니면, '그저 남편이고 뭣이고 다 버리고 나를 사랑하기에 죽기내기해라'고 하시겠어요? 남자들 대답해 보라구요. 자, 우리 까 놓고 애기합시다. (웃음) 여기 목사님도 오셨는데, 하나님께서 '남편을 놓고 죽기내기 하고 나서 나하고 죽기내기 하자' 그러시겠어요, '다 버리고 나하고 죽기내기하자' 그러시겠어요? 어떻게 하겠어요?「나중의 것이요」 그건 틀림없이 맞지요? 너희들도 그래? 「예」 중학교 학생도 다 그렇다는구만. (웃음)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천사와 싸워 이긴 야곱
그러면 죽기내기하는 데에 있어서 무엇을 중심삼고 하느냐?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해야 되는 것입니다.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천사와 밤새도록 씨름을 했습니다. 그때 야곱은 천사에게 '당신은 나를 축복해 줘야 돼요' 하면서 천사의 허리를 붙잡고 놓지 않았습니다. '야 이놈의 손아! 너는 펴져서는 안 돼' 하면서 놓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건 미친 녀석이라구요. 천사는 밤새도록 손을 펴려고 하는데 '이놈의 손아! 너는 펴져서는 안 돼' 하는 것입니다. 미친 녀석이라구요. 손은 펴지는 것이 원칙인데 펴져서는 안 된다고 하며, 이것을 놓으면 큰일난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큰일나느냐? 그걸 놓으면 나 죽는다, 축복 못 받는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거기에 덧붙여서 '이 손을 놓는 날에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이 갈 데가 없다'고 했더라면 참 만점인 것입니다. '내가 형님의 장자권을 빼앗은 것은 뭐냐 하면 형님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기 위해서였다' 이럴 때는 통한다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내가 형님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 더 미쳤기 때문이다' 하면 통한다는 것입니다. 그거 맞지요?
'형님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기 때문에 더 미쳤다. 절대적으로 미쳤다' 그렇게 철저하게 살 수 있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하나님은 '그럼 해봐라' 하고 들이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야곱을 천사와 밤새 싸우게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길에 있어서 막는 자가 있으면 그 자를 때려 눕혀 항복시켜야 되는 것입니다. 생명이 끊어지기 전에는 그 싸움을 그만둘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판가리 싸움을 해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미쳐야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 있어서는 절대적으로 자기 일신을 초월한 자리에 서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된다는 거예요.
야곱은 그 싸움에 이겨서 천사로부터 이스라엘이란 축복을 받았습니다. 무엇을 중심삼고 싸워서 이겼느냐? 축복을 중심삼고 싸워 이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싸워 이긴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 있어서 야곱이에서보다 낫다고 하는 것입니다. 싸우는 데에 있어서 악착같이 싸웠다는 것입니다. 환도뼈를 맞아 허리가 부러져도 '아이고 나 죽소' 했어요? 외삼촌 집에서 21년 동안 고생해서 형님에게 자랑할 수 있는 모습을 취해 가지고 가는 판에, 얍복강가에서 천사와 밤새껏 씨름하다 부러졌으니 '십년 공부 나무아미 타불'이라고 낙망할 수 있는 자리인 것입니다 . 그렇지만 야곱은 그런 자리에서도 낙망하지 않고 '허리가 부러지더라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 있어서는 절대적이다. 아직 내가 생명이 붙어 있어 죽지는 않았으니 이것 만으로도 감사하다' 한 것입니다. 이런 경지까지 갔기 때문에 야곱은 이스라엘이란 축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하기를 악착같이 해야
통일교회 패들은 하나님 사랑하기를 악착같이 해야 됩니다. 악착같다는 말의 반대말이 무슨 말이예요? 악착같다는 말의 반대말이 있으면 좋겠는데…. 통일교회 사람들이 기성교회 사람들하고 같아야 되겠어요, 달라야 되겠어요?「달라야 됩니다」 얼마만큼 달라야 되겠어요? 악착같이 달라야 됩니다. 눈을 깜박거리는 것도 달라야 되고, 숨쉬는 것도 달라야 됩니다. 그들이 죽어서 천국가겠다고 하면 우리는 살아서 천국가겠다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죽어서 천국가겠다고 하는 패하고, 살아서 천국가겠다고 하는 패하고 어느 패가 더 극성맞아요? 살아서 천국가겠다고 하는 패입니다. 살아서 천국가겠다는 것은 하나님을 모시고 살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잡아다 놓겠다는 말이라구요. (웃음)
다시 말하면 하늘나라는 다 집어치우고 이곳에 하나님을 모셔 놓겠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보다 더 악착같아야 됩니다. 예수님보다 낫지 않고는 이 땅 위에 천국을 이루지 못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통일교회 패들은 예수님보다 낫겠다고 하는 패가 되어야 됩니다. 이런 말하면 이단이라고 하겠지만, 이젠 뭐 이단이란 말도 너무 많이 들어서…. (웃음) 그런 말이 없어지면 섭섭할 것입니다. 그 말은 아주 구미가 동하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이 유치원 시절부터 중고등학교, 대학교 때까지 계속 낙제를 했지만 논문을 쓰는 데 일등을 했다면, 그 사람에게 박사학위를 줘야 되겠어요, 안 줘야 되겠어요? 줘야 됩니다. 줘야 돼요? 낙제생인데도요? 그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낙제만 하던 낙제생이 나중에 대통령의 사위가 됐다고 하면, 학교 다닐 때 반장을 하고 공부 잘하던 동창생들이 와 가지고 머리 숙이고 부탁하겠어요. 안 하겠어요? 대한민국 식으로 말하면 부탁해요, 안 해요? 머리 숙여야 돼요. 안 숙여야 돼요? '이놈의 자식아, 공부깨나 한다고 으시대더니 이제 와서 뭐라고? 하고 큰소리칠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지…. (웃음) 이렇게까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했느냐 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승패가 결정되는 요인이 됩니다. 하나님을 얼마만큼 극성맞게 사랑했느냐 하는 것이 등급을 결정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독한 분입니다. 하나님이 지독한 분이예요, 허술한 분이예요? 지독한 분입니다. 지독한 분이라면 허허 웃는 입장에서 지독한 거예요, 이빨을 빠드득 빠드득 가는 입장에서 지독한 거예요? 어떤 입장에서 지독해요? 다르다구요. 까놓고 얘기하자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지독한 분한테 한번 붙들리면 꼼짝 못하게 됩니다. 생각해 보세요. 지독한 분에게 한번 붙들리게 되면 어디 국물이나 있겠어요? 그분은 지독한 분이기 때문에 변소를 가더라도 그냥 못 간다는 거예요. 옆에 와서 감시를 할 것입니다. 어디를 가더라도 졸졸 따라다니기 때문에 갈데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귀찮고, 얼마나 기가 막히겠어요? 만약에 공부를 하자고 졸졸 따라다니면서 '공부 공부'한다면, 그거 할 수 있어요? 또 '너는 내 권력을 가져야 돼. 너는 내 능력을 길러야 돼. 나 대신 해야 돼' 한다면 할 수 있겠어요? 못 하는 거라구요.
지독한 패로서 패스할 수 있는 하나의 방도가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냐? 사랑입니다. 누구든지 사랑하는 데에 지독한 것은 다 좋아하지요?「예」나이 많은 사람도 그래요? 그것은 죽음을 눈 앞에 둔 할아버지도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엊그제 기성가정 축복을 해주었습니다. 그 중에 88세 된 할아버 지도 있었는데 축복을 해주었습니다. 장가 보내 줬다는 것입니다. 내가 배가 고파서 통일교회 선생 된 것도 아닌데 이제 와 보니, 되기는 됐다고요. 내일 모레 공동묘지로 갈 입적서를 써 놓은 할아버지를 장가 보내며 그 할아버지에게 물어 봤더니 24,5세의 총각과 마찬가지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 할아버지에게 '장가가고 싶소? 하고 물어봤더니, 씩 웃으며 (웃음) 부끄러워서 말을 못 해요. 꼭 어린애와 같았습니다. 또, 할머니도 그저 손가락을 입에 물고 얼마나 부끄러워하는지…. (웃음) 부끄럽지만 축복받아야 되겠다는 겁니다. 축복받기 위해서는 창피고 무엇이고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입장에서는 아무리 나이 많은 사람도, 젊은 사람도 다 심각한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늙은이하고 결혼하게 되면 시중밖에 더 들겠어요? 그것은 뻔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시중을 들어 주고, 심부름을 해주고, 봉사를 하더라도 자기를 사랑해 주면 좋아요, 나빠요? 좋다는 것입니다. 악착같이 간섭을 하더라도 그것이 통할 수 있는 하나의 길은 사랑입니다. 총각들은 무슨 말인지 몰라도 됩니다. 아저씨들은 그저 다 알고 있는데…. (웃음) 총각들은 이런 말 할 때는 듣지 말라구요. (웃음)
사랑의 챔피언을 찾아 나오시는 하나님
그러면 인간세계에 있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에 일등 챔피언이 왜 생겨나지 못했느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에게 '당신은 나를 두고는 못 갑니다' 하면 '그래 그래 너를 두고 어떻게 갈 수 있겠느냐? 못 가지. 가더라도 데리고 가지' 이렇게 할 수있는 챔피언 역사가 있었어요? 그런 일대(一代) 챔피언이 있었어요? 여러분은 그 일대(一代) 챔피언을 찾아 봤어요? 그것을 생각해 봤어요? 역사적으로 과거, 현재, 미래, 또 영원을 중심삼고 '내가 챔피언이다' 하면서 챔피언의 길이면 길, 벨트면 벨트를 제2의 계승자에게 기쁨으로 전수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어디에 있었느냐? 그런 챔피언이 있었어요? 일등 챔피언이 있었어요? 그런 말을 들어 봤어요, 못 들어 봤어요?「못 들어 봤습니다」 못 들어 봤으니까 그런 챔피언이 없다는 거지요.
자, 그럼 그런 챔피언이 나오면 좋겠어요, 안 나오면 좋겠어요?「나오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을 지긋지긋하게 사랑하는 챔피언 남자가 있다면, 여자들은 그런 남자를 신랑으로 삼고 싶어요, 삼고 싶지 않아요? 나이 많은 여자들은 그 사람을 신랑으로 삼고 싶어도 삼을 수 없지만…. 나이 많은 여자들은 '지금 내가 처녀라면 그런 마음을 먹어 봤으면 좋겠다' 할 것입니다. 나이 많으신 분들, 그런 챔피언 남자에게 자기 딸을 맡기고 싶어요, 안 맡기고 싶어요? '그거 물어 볼 것 있나, 누구나 다 그러고 싶지' 할 것입니다. 그것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저기 아주머니도 살살 웃는 걸 보니 부정 안 하는 모양이구먼. (웃음)
만일 어떤 사람이 챔피언이 되었다면, 그 챔피언의 아들딸들은 어때요? 사람들은 말할 때 아버지가 훌륭하면 그의 아들에 대하여 아무개의 아들 이라고 합니다. 그렇지만 아들이 훌륭하면, 그의 아버지에 대하여 아무개의 아버지라고 하지요? 이렇듯, 사람들은 훌륭한 것을 앞세우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이것이 세상의 예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사랑하는 데에 있어서 일등 챔피언이 되었다면, 사람들이 볼 때는 그 사람의 아버지를 모르기 때문에 그 사람에 대해서 '저 일등 챔피언의 아버지 되는 분이 하나님이야' 하는 말이라도 나왔을게 아니예요. 그런 챔피언이 못 되었다면 사람들로부터 '저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다'는 말이라도 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둘 중의 하나는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저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다'는 말을 들을 수 있는 입장에 서 있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아들보다 나은 사랑을 해야 됩니다. 또 '하나님은 아무개의 아버지다' 할 수 있으려면 하나님은 사랑하지 않더라도 아들은 하나님을 지극히 더 사랑해야 됩니다. 사랑을 중심 삼고 그런 입장에 서게 되면 아버지와 아들의 위치가 엇갈리는 자리에 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 있어서 세계적인 챔피언 중의 챔피언이 될 수 있는 사람이 나온다면 하나님을 그냥 부르는 것보다도 '하나님은 아무개의 아버지다'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또, 아버지로서 아들보다도 더 훌륭한 자리에서 사랑한다면 그 아들을 대해서 '저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야'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 지구성에 사는 인간들 가운데서 대관절 그런 챔피언이 나왔느냐? 그런 챔피언이 나왔다는 말 들어 봤어요? 오늘날 기독교의 예수님을 보라요. 예수님은 '아바 아버지여,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나에게서 피하게 하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시 옵소서'라고 세 번씩이나 기도를 했고, 나중에 십자가에 못박혀 죽을 때에는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버렸어요, 사랑했어요? 예수님이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라면, 하나님도 사지(死地)를 개의치 않고 예수님과 같이 죽든지, 그 주위에 벼락을 치든지 해야 했을 텐데 왜 그렇게 하지 못했느냐? 이렇게 물으면 기성교회 목사들은 '그것은 우리가 알 바 아닙니다. 그분들이나 압니다' 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문제가 크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지 않고 악착같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싶었을 텐데, 왜 그렇게 사랑하지 못했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사랑하는 데 있어서 죽어서 사랑하고 싶어요, 죽지 않고 사랑하고 싶어요? 죽지 않고 사랑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왜 죽어야 됐느냐 이겁니다. 이런 등등의 문제가 골칫거리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런 것 다 덮어놓고 믿으면 돼요?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이렇듯 최후에 남는 것은 사랑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까지 사랑의 동산을 꿈꾸고 사랑의 종착점을 찾아 나오기 때문에, 하나의 세계를 중심삼고 거기에 접선될 수 있는 챔피언을 찾아 나오는 것이 틀림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 알았지요?
적극적인 신앙자가 되라
이렇게 볼 때, 통일교인은 악착같은 패가 되어야겠어요, 안 되어야겠어요?「되어야겠습니다」 말을 하더라도 지독하게 해야 됩니다. 우물우물해서는 안 됩니다. 총을 쏜다면 권총을 쏠 거예요, 기관총을 쏠 거예요? 「기관총이요」 기관총을 쏴야 됩니다. 뛰기내기하는 데도 땀을 흘리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 좋아요, 그저 슬쩍슬쩍하는 것이 좋아요? 땀을 흘리고 스릴이 있어야 좋은 것입니다. 영화를 볼 때도 스릴이 없으면 재미없지요? 마찬가지로 종교도 스릴 있는 종교가 좋습니다. (웃음) 자극적이어야 합니다. 하려면 하고, 말려면 말고. 안 되면 가슴에 철추가 날아드는 종교가 좋아요. 가만히 있는 종교가 좋아요? 어디, 여기 아주머니들 어느 것이 더 좋은지 대답해 보세요. 갓 시집을 간 새댁이 잘못했을 때는 그 즉시 책망하는 것이 좋아요, 그저 이래도 가만두고 저래도 가만두는 것이 좋아요?
그런 의미에서 통일교회 교인들은 소극적인 패가 아닙니다. 그렇지요? 소극적이라는 말은 통일교회에서 통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무슨 패예요? 「적극적인 패입니다」 소극적의 반대말은 하나밖에 없다구요. 중극적이란 말은 없습니다. 적극적인 패입니다. 상 중 하라고 하듯이 중극적이란 말을 만들 수 있었을 텐데 중극적이란 말은 없고 그 중에서도 소극적인 것은 싫고 적극적인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적극적인 것을 좋아하지요? 한쪽 눈을 빼 주면 그거 적극적이요, 아니요?「아닙니다」두 눈을 빼 주면? 그것도 아닙니다. 또 팔을 빼 주면? 그것도 아닙니다. 생명을 덜컥 내줘야 적극적입니다. (웃음) 그런 거예요.
여기에 서 있는 사람도 그런 사람입니다. 통일교회 문선생은 세상에서 욕해도 가만히 있으니까, 저 사람은 본래 가만히 있는 역사를 책임지고 태어났다고 할지 모르지만, 천만에, 아직 그럴 때가 안 됐고, 봄철이 안돼서 그렇지 해동기만 지나가 보라구요. 크게 되면 누구보다도 크게 될 것입니다. 비료가 모자라면 기성교회를 비료 삼아서라도 클 겁니다. 기력을 못 쓰게 되면, 죽게 되면 그것은 썩게 됩니다. 그 썩어진 것을 전부 흡수하여 비료로 삼는 것입니다. 썩을 것은 썩어야 되는 것입니다. 대한민국도 썩을 것은 썩고, 썩지 않을 것은 안 썩어야 됩니다.
그러면 통일교회가 썩겠어요, 안 썩겠어요?「안 썩습니다」 우리 회사 중에 일반 사람과 같이 일하는 곳이 있는데, 우리 통일교회 패들에게는 일반 사람의 월급 절반만 주라고 내가 지시를 했습니다. 한 사람을 과장으로 보냈는데 계장들이 자기보다 월급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곤란한 겁니다. 월급날 월급을 받으면 다른 사람들이 과장인 자기를 쓱 본다는 것입니다. (웃음) '과장이라는 사람이 계장보다 월급이 적어 가지고, 무슨 과장이야' 그런다는 것입니다. 그런다면서 나에게 왔어요. 그래서 내가 '이놈의 자식, 그것이 뭐가 나쁘냐? 너는 주인이고, 그들은 종 새끼 인데, 주인 아들이 월급 한 푼 안 받는다고 해서 무시하는 녀석이 있어? 무시하는 녀석들은 모가지를 잘라 버려야 된다구' 했던 것입니다. 그런 녀석들은 전부 모가지를 잘라 버려야 된다구요. 공장 전체가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면 되지, 그까짓 월급 몇 푼이 문제예요? 여러분은 생각하는 것이 달라야 합니다.
적극적인 사람이라면 월급을 받는 데 있어서 남보다 더 많이 받아야 되지요? 남이 5만 받으면 10만원을 받고, 남이 100만원을 받으면 150만 원을 받아야지. 이것이 적극적이예요? 이것은 세상적인 면에 있어서 돈을 중심삼은 적극적인 패인 것입니다. 그럼, 통일교회 패들은 적극적인 패이니까, 돈을 한 푼도 안 받고?(웃음) 그래야 된다구. 통일교회 패들은 남이 밥 먹고 살면 우리는?「죽을 먹고」 뭘 먹고 산다면 그것은 벌써 적극적이 아닙니다. (웃음) 그렇잖아요? 남이 웃고 산다면 우리는 울고 살아야 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소극적이고 우리는 적극적이라면 반대'가 뭐예요? 세상 사람이 웃으면 우리는 더 웃으라는 것입니까? 그것은 더 소극적입니다. 더 적극적이라고 안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과는 전부 다 반대여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회 문선생은 여러분들에게 잘먹고 잘살라는 말은 하지 않습니다. 절대 안 합니다. 하라고 가르쳐 줘도 안 합니다. 그저 고생시키려고만 합니다. 고생을 시켜도 그냥 시키지 않습니다. 몰아치면서 목을 잘라 가지고 굴러 보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까지 말을 하지 않고도 슬쩍슬쩍 좋게 말을 할 수도 있을 텐데, 듣는 사람들이 왜 힘을 주고 듣게 만드느냐? 남 좋게 하기 위해서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내가 좋기 위해서 그러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울든 말든 고생하든 말든 이 일을 하는 것은 통일교회 문선생 좋기 위해서 그러는 것입니다. 그럼 나는 누구 때문에 그러느냐? 나는 하나님을 좋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나위에 맨 고수가 누구냐 하면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단이면 하나님은 더 이단이라는 것입니다. (웃음)
결국 뭐냐 하면. 나 좋게 하기 위한 것보다도 하나님을 좋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그렇게 하는 것을 그저 좋다고 하니 어떻게 하겠어요? 하나님이 싫다는 것 해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받을 수 있을 것같아요? 어림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욕을 먹으라 하면 욕을 먹어야 하고. 누더기 보따리를 쓰라 하면 써야 하고, 감옥에 들어가라 하면 들어가야 합니다.
또, 뭇매를 맞아야 할 때에는 뭇매를 맞아야 합니다. 뭇매를 맞으면서도 연구해야 됩니다. 열 사람이 뭇매를 치면 그 매를 맞으면서 그들의 다리를 보고 '저 녀석은 큰 녀석이다. 저 녀석은 작은 녀석이다. 또 이 녀석은 어떤 녀석이냐' 하는 것을 연구해 가지고, 한 손을 휘저으면 몇몇을 일시에 잡아치울 수 있게끔 감상하라는 것입니다. (웃음)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뭇매를 맞은 자들을 중심삼고 뜻을 이루려는 때에 있어서 뭇매를 맞지 않은 다른 사람은 다 망하더라도 뭇매를 맞은 왕초를 하나님은 찾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런 생각을 해야 됩니다.
사랑이란 하고 또 해도 끝이 없는 것
여기 생련이 왔나, 생련이? 지생련! 「예」 임자 이야기를 한마디 하자구. 임자의 남편이 살아 생전에 임자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모르지만, 얼마 전에 남편이 영계에 갔다구. 우리 통일교회 교인들이 누가 죽었다고 서럽게 우는 것을 보면 선생님은 따귀를 후려갈기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뜻을 중심삼은 삼각관계에서 눈물을 흘린다면 모르지만, 남편이 죽었다고 해서 뜻이고 뭣이고 통일교회 잘못 믿었다고 하면서, 통일교회 문선생이 축복을 어떻게 해뒀기에 내 남편이 이렇게 죽었느냐고 항의한다면, 용서 못 한다고요. 후려갈기는 거라구요. 내가 죽으라고 축복해 줬나, 잘살라고 해줬지. (웃음) 그 슬픔을 동정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살아 있는 동안에 얼마나 사랑했는지 모르지만, 죽고 난 다음에 눈물을 흘리면서 '나는 살아 생전에 남편을 사랑하지 못했고, 남편은 하고 싶은 것을 다 못 했다'고 서러워한다면 그것은 동정이 가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남편에 대해서 불평한다면 그건 안 됩니다. 심각한 문제입니다.
나는 생전에 이 이상 더 사랑할 수 없다고 할 만큼 사랑했다는 것하고, 생전에 내가 좀더 사랑했으면 좋았을 걸 하는 것하고, 어느 것이 더 좋을 것 같아요? 좀더 사랑했으면 좋았을 걸 하는 것이 좋아요, 생전에 죽도록 사랑을 했다고 하는 것이 좋아요?「사랑했다 하는 것이 목적을 완성한 것이므로 좋다고 봅니다」 그러면 사랑을 다했기 때문에 죽어도 그만이라는 거예요?(웃음) 사랑이란 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랑을 다했다고 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사랑을 다했다는 생각이 들더라도 사랑을 다 못 했다고 해야 되는 것입니다. 사랑을 다 못 했다고 하는 것이 오히려 좋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언제나 내가 그를 위할 수 있는 자리에 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을 다했다고 한다면 끝이 나는 것입니다. 사랑의 길은 상대를 위하고 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사랑을 다했다 하는 것보다 사랑을 다 못 했다고 하는 것이 오히려 낫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통일교회 교인들이 '나는 통일교회에서 할 것 다 했으니까, 나를 사랑해줘야지'라고 한다면 이런 사람은 끝나는 것입니다. 다했더라도 '더 해야 할텐데'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선생님도 그런 사람을 좋아합니다. '내가 무엇을 어떻게 했고 어떻게 했는데 요즘엔 선생님이 나를 몰라 준다. 당장에 이렇게 해줘야지, 해줬으면 갚아 줘야지' 이러는 패들을 보면 내눈이 뒤집어진다구. 이년! 이놈! 장사꾼들이야?
아버지가 아들을 위해서 돈을 쓰고서는 아들한테 그 돈을 내라고 할 수 있어요? 아들이 아버지를 위해서 돈을 쓰고서는 그걸 갚아 달라고 할 수 있어요? 그것은 찾으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알아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알아 달라고 하기 전에 할 것을 다 못한 것에 대해 머리를 더 숙여야 합니다. 아무리 다했다 하더라도 내가 해야 할 효의 도리, 충의 도리를 다 못 했으니 이제라도 더 사랑할 수 있는 그런 길이 남아 있다면 고맙겠다고 할 수 있는 마음이 있어야 됩니다. 그 마음이 장땡입니다, 장땡. 여러분은 그것을 알아야 됩니다.
통일교회 문선생은 세상의 그 누구도 부럽지 않습니다. 또 내가 큰소리할 수 있는 때가 점점 가까와 온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내가 그런 걸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럴수록 책임이 더 큰 것입니다. 좋은 일이 있다고 해서 좋아하고 자랑하기보다는 하늘 앞에 더 자랑할 수 있는 그런 환경을 어떻게 이루어 드릴 수 있느냐 하는 문제를 생각하고 나가야 됩니다. 그런 사람은 망하지 않습니다. 절대 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최후의 정상을 찾아가는 길
사랑이란 하고 또 해도 끝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데에 끝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있는 정성을 다하여, 잘먹이고, 잘입히고, 안팎으로 걸릴 것 없이 키웠다고 하지만 만약 그 아들이 죽었다고 할 때 '난 너를 위해서 다했다'라고 할 수 있는 부모가 있어요? 사랑의 길이란 것은 진정 좋은 것을 주고도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좋은 것을 주고 그것을 자랑의 조건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머리를 숙이면서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 이것이 사랑의 길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최후의 정상의 기준을 찾아가는 사랑의 길이란 어떤 길이냐? 하나님을 위해서 미치는 길입니다. 통일교회 교인 중에 하나님을 위해 미치지 않은 사람은 가짜입니다. 통일교회 문선생도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미친 사람입니다. 어떤 영통인이 '통일교회 문선생은 하나님한테 미친 사람이다'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내가 그 말을 듣고 '그녀석, 알기는 아는구나' 했습니다. 하나님에게 미쳤다는 말이 돈에 미쳤다는 말보다 기분이 좋아요, 나빠요? 이왕 미칠 바에야 하나님한테 미치는 것이 좋지 하나님한테 미친 미치광이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세계적인 조롱을 받지요. 안 그렇습니까?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미치광이가 동네에 척 서 있게 되면 잠자던 아이들도 구경하고 싶어할 텐데 눈을 뜨고 있는 사람들은 오죽하겠어요? 그 미치광이를 보고 뭐가 어떻고 어떻고 평을 다 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한테 미쳤으니 세계적으로 평을 받아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 내가 미쳤다는 증거를 보여 주는 것이 반대파들이라구. 대한민국이 반대하고, 기성교회가 반대하고, 요즘엔 무슨 총회패들도 반대하고 나서는데, 그래 반대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반대하는 바람에 통일교회 문선생이 출세한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남편을 사랑하기에 미친 아내가 십년, 이십년 동안 오지도 않는 남편을 기다렸는데, 나중에 남편이 세상에 없는 출세를 해 가지고 오게 되면 어떻게 되겠어요? 이도령같이 오게 된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미쳤다고 조롱하던 사람들은 서릿발 맞겠지요? 서릿발 맞겠어요, 안 맞겠어요? 「맞습니다」 나는 그것을 보고 난 다음에 죽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이 열 시간 자면 나는 아홉 시간 자고, 남이 아홉 시간 자면 나는 여덟 시간 자고. 남이 여덟 시간 자면 나는 일곱 시간 자는 것입니다. 남이 일곱 시간 자면 나는 여섯 시간 자고, 남이 여섯 시간 자면 나는 다섯 시간 자고, 남이 다섯 시간 자면 나는 네 시간 자고, 남이 네 시간 자면 나는 세 시간 자고, 남이 세 시간 자면 나는 두 시간 자고, 남이 두 시간 자면 나는 한 시간 자는 것입니다. 이런 주의입니다.
사실은 어제도 몹시 고단했습니다. 그렇지만 책임자란 고달프고 피곤하다고 해서 '오늘은 피곤하니 쉬자' 할 수 없습니다. 젊은 일본사람들을 데려와 교육을 하고 왔는데 몸은 비록 고달프지만 그들을 산으로 끌고 다니면서 오르락내리락 뛰어다녔습니다. 그렇게 긴장을 하고 있다가 그들을 보내고 나서 마음을 턱 놓으니 얼마나 피곤한지 모르겠어요. 교회에 가도 선생님을 찾는 사람이 많고, 또 어디를 가더라도 그곳에 선생님이 왔다는 소문만 나면 전부 다 나를 만나겠다고 하기 때문에 정신이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청평을 잘 만들어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피난처를 잘 만들었다는 거예요. (웃음) 선생님이 청평에 가서 가만히 생각하니 그곳에도 할 일이 있거든. 그래서 어제는 사람들을 오라고 해서 밤 아홉 시까지 배를 수리했습니다. 또, 오늘은 일요일이기 때문에 새벽같이 일어나서 서울에 왔습니다. 서울로 오는 차 안에서 곤드레만드레 잠에 취하여 온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서울에 와 보니 또 누가 선생님을 기다린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선생님이 부르터 가지고 안 만나겠다고 할 수 있어요? 팔자가 그러니까 할수없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과 이야기를 하다 보니 열두시가 다 되었고, 또 이것저것 하다 보니 열두시 30분이 쓱 지난 것입니다.
선생님은 아침에 기도하는 것이 습관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시간만 되면 일어나게 됩니다. 오늘도 새벽 4시 전에 일어났습니다. 이렇듯 곱배기로 일을 하기 때문에 사실 쉴 사이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통일교회를 이끌어 가면서 어떻게 해서 좀더 편히 잘살아 볼까 하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다 팔자소관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이 길이 운명길이기 때문에 이렇게 하지 않으면 죽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못 살게 되면 못 사는 것을 팔자로 알고, 반대를 받게 되면 반대받는 것을 팔자로 알고 이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비틀걸음을 하면서도 지금까지 온 것입니다.
선생님을 좋아한다면 선생님이 하라는 일을 좋아하라
통일교회 교인들은 선생님을 내세워 놓고 구경을 많이 했습니다. 구경하는 사람들이 참 많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에 대해 '저 사람은 본래 그런 사람이다. 그런 걸 좋아하는 사람이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본래 그런 것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왜 좋아하느냐? 좋아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좋아하는 것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선생님은 이 길을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여러분들은 선생님이 가라 하는 길을 다 좋아해요? 좋아해요, 싫어해요? 선생님은 좋아하지요? 남자나 여자나 선생님을 다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혹시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런 사람이 있으면 그런 사람은 듣지 말라는 거예요. 그런 사람은 빼놓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여러분이 선생님은 좋아하는데 선생님이 하라는 일은 좋아해요, 좋아하지 않아요? 이것이 문제입니다. 좋아해요, 좋아하지 않아요?「좋아합니다」 좋아하긴 뭘 좋아해. 어디 선생님을 좋아하는 사람 손들어 보세요. 저저 잘들 생겼다. (웃음) 그럼 한번 해보자구요.
내가 여러분을 더 좋아해요. 여러분이 선생님을 더 좋아해요? 누가 더 좋아해요? 여러분이 더 좋아해요, 내가 더 좋아해요?「선생님도 저희를 좋아하고 저희도 선생님을 좋아합니다」 누가 더 좋아하느냐고 물어보는데 선생님도 좋아하고 우리들도 좋아한다니, 세상에 그런 대답이 어디 있어?(웃음) 선생님이면 선생님이고 여러분이면 여러분이지 둘 중의 하나를 택하는 문제인데…. 누가 더 좋아하는 거예요? 그거 가리기가 곤란하지요?
어떤 사람은 '선생님이 보고 싶어서 아침도 안 먹고 이른 새벽부터 찾아왔는데, 선생님은 나 보고 싶다고 언제 찾아와 봤어요? 이렇게 생각도 할 것입니다. 어떤 때에는 무슨 잔치니, 회갑이니 해 가지고 진수성찬을 차려 놓고 '선생님 오십시오, 오십시오' 하지만 나는 안 갑니다. 그러면 섭섭해 가지고 부르터 있는데 그런 사람은 틀린 사람입니다. 선생님이 잔치집마다 찾아다녀 가지고 그거 습관이 되면 어떻게 하겠어요? (웃음) 사람이 찾아오는데 나 초청하러 오지 않나 하게 되면 망복(亡福)이 드는 거라구요. 누가 와도 손에 뭐 들고 오지 않나 하게 되면…. 감옥살이 하게 되면, 면회 오는 사람의 얼굴보다 그 사람의 손부터 보게 됩니다. (웃음) 군대생활을 해본 사람은 그 마음을 알 것입니다. 면회 왔다고 하면 그 사람의 손부터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심리가 선생님에게도 있습니다. 없는 것이 아니예요. 선생님은 더 분석적이고 더 이론적입니다.
오래된 목사의 자녀들이 불량배가 되는 경우가 많은데 왜 그러냐 하면, 사람이 오면 벌써 들고 오는 것부터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부패한 관리들도 사람을 대할 때 들고 오는 것부터 봅니다. 그것이 망조입니다. 선생님은 누구에게도 신세를 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신세지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에게 신세를 지우려고 합니다. 신세를 지우는 데 있어서도 여러분 일대보다도 더 큰 분야에 지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원리를 실천하면 사랑의 챔피언으로 뽑힐 수 있어
벌써 일곱시 반이 되었구만. 이렇게 얘기하다가는 한정이 없겠으니 이제 결론을 지읍시다. 세계는 하나의 정상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하나의 세계를 누구나 원하고 있지만 그것을 국가면 국가, 민족이면 민족이 같은 자리에서 원하는 것이 아니라, 천태만상의 차이를 중심삼고 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의 세계, 정상에 도달할 수 있게 하려면 접선시킬 수 있는 어떤 선봉자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 선봉자는 역사시대의 맨끝에 절대적인 주인이 있다든가 이상세계가 온다면 그 절대적인 주인과 함께 그 이상세계에 입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두 사람이 보조를 맞추어 일시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보다 나은 한 사람이 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남자일 것이냐, 여자일 것이냐? 남자는 여자보다 키도 크고 그러니까 여자보다는 남자일 것입니다. 그분은 남자일 것이기 때문에 세계의 대표적인 명사로서 인류 종말시대에만 나타나야 됩니다.
그것을 종교의 입장에서 말하면 재림사상에 해당합니다. 오늘날 기독교 입장으로 말하면 재림주에 해당합니다. 재림주라는 분은 어떤 분이냐? 남편으로 오시는 신랑입니다. 그 다음에는 신부입니다. 신랑은 남자를 대표한 것이요, 신부는 여자를 대표한 것입니다. 그런데 남자만 이기면 여자들이 시기합니다. 그렇지요? 남자만 전부 일등하면 되겠어요? 안 그래요? 여자들이 시기할 거라구요. 지금 내가 남자라고 하니까 '선생님도 남자니까 별수없이 남자를 내세우지' 하고 욕하는 사람이 있을는지 모르겠지만, 욕해도 좋습니다. 남자와 여자를 두고 볼 때, 남자만 일등하면 안 되겠다구요. 남자만 일등하고 여자는 이등하기를 원해요? 원해요, 안 원해요? 이등하기를 원한다면 죽으라구요. 그런 사람은 한꺼번에 다 죽어도 괜찮습니다. 남자만 일등하는 것 원하지 않지요? 그렇지요? 평균적으로 키가 작은 것만도 분한데…. 그 분풀이를 하기 위해 하이힐을 신고 다니는 것이 아니예요?(웃음)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이 얼마나 공평한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여자들이 분하게 생각할 줄 알고 '여자의 본질은 사랑받는 것이다'고 한 것입니다. 여자가 시집가는 것도 사랑받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여자는 사랑받는 소질이 농후하기 때문에, 집 밖에서 활동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의 역사시대는 싸움으로 엮어 내려 왔습니다. 싸우고 죽이는 전쟁 마당을 계승해 나왔다는 것입니다. 이런 역사 시대에 있어서 하나님은 여자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여자들이 전쟁마당에 나오지 않게 하기 위해서 집 지키는 일을 시켰고, 세상에 나가 출세하는 길을 막아 놓은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여자들은 고맙지요? 남자는 밖에서 생명을 내놓는데 여자는 집에서 하는 고생쯤이야 그거 못 하겠어요? 그래서 지금까지 여자들은 그저 고생해 나온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자들이 불쌍한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남자는 지금까지 죽어 온 것입니다. 죽는 것 하고, 고생하는 것하고, 어느 것을 택하겠어요? 죽는 것보다 고생하는 것이 낫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자들이 약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끝날에 있어서 남자를 택하실 것입니다. 끝날에 있어서 남자라는 그분이 누구냐 하면 신랑입니다. 세계적인 일등 남자 챔피언이 나오면 일등 여자 챔피언이 나와 가지고 남자와 여자가 싸움을 하는 것입니다. 여자 챔피언과 경쟁을 해봐야 될 것이 아니예요? 그렇잖아요? 남자 일등, 여자 일등이 나왔으면 챔피언을 뽑아야 됩니다. 무슨 챔피언을 뽑자는 것이냐? 힘내기 챔피언을 뽑자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내기 챔피언을 뽑자는 것입니다. 그때에 있어서 하나님은 역사상에 없는 심판관이 되는 것이고, 그 다음에 남자와 여자가 나와서 누가 더 하나님을 사랑하느냐 하는 내기를 하는 것입니다. 통일교회 여자들, 이 싸움에서 질래요, 안 질래요? 남자들은 지겠어요. 안지겠어요?「안 지겠습니다」 절대 져서는 안 됩니다. 악착같이 싸워야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챔피언을 뽑는데 어떻게 뽑느냐? 거기에는 법이 있습니다. 레슬링 경기를 하는 데도 법이 있고 심판이 있는 것과 같이, 거기에도 법이 있고 심판이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에 두 사람이 싸우는 그 싸움이 하루에 끝나지 않거나, 또 그 싸움이 어느 기간에 끝나지 않고 십년, 영원히 계속된다면, 서로 비기게 될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비기는 판이 벌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싸움에서 서로 비기기는 비겼지만 누가 더 법을 지켜서 사랑했느냐? 여기에는 전부 같지 않은 것입니다. 차이가 벌어지게 됩니다. 지지 않겠다고 버티고 나왔다 하더라도, 그 싸움이 끝이 나지 않아 비기게 되었더라도 심판관이 볼 때 그래도 법을, 즉 룰을 중심삼고서 일등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 법은 개인을 위한 법이요. 가정을 위한 법이요. 종족을 위한 법이요. 민족을 위한 법이요, 세계를 위한 법입니다. 세계에서 일등가는 법을 중심삼고 그 법을 지키는 심판관 앞에 있어서는 전부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법을 어겨서라도 일등하려는 사람도 있고, 법대로 해 가지고 일등하려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이럴 때는 최후까지 그 싸움이 끝나지는 않았지만 심판관이 그 경기의 내용을 중심삼고 누가 더 낫다고 하는 것을 감정을 할 것입니다. 그건 틀림없지요? 알겠어요?
만일에 경기가 끝나서 감정을 할 때, 심판관은 마음으로 누가 이겼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겠어요? 대답해 보라요. 누가 이겼으면 좋겠다고 생각할까요?「남자요」 에이, 말도 안 되는 소리. (웃음) 법대로 한 사람, 나중에는 문제가 이렇게 됩니다. 나중에는 어떻게 결정되느냐? 법대로, 법을 따라서 하려고 하는 사람이 그래도 하나님편에 가깝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심판관이 법을 지킨 사람을 중심삼고 이 사람이 일등을 했으면 하는 마음을 가진다면, 심판관이 그 사람에게 귓속말로 가르쳐 줄 수도 없다?「있다」 대답해 보라요? 있다, 없다?「있다」 알기는 아누만.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심판관이 저 사람의 약점이 무엇이고, 자네의 장점이 무엇이다는 것을 알려주어 가지고, 이럴 때는 이렇게 하고 저럴 때는 저렇게 하라고 가르쳐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음 경기에 있어서는 이길 수 있는 비율이 적다, 많다?「많다」 많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통일교회에서는 경기에 이길 수 있는 원리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지금까지 몇천 년을 싸웠어요? 「2천년요」2천년이 뭐예요? 6천년 동안입니다. 자그마치 6천년을 싸워 나왔습니다. 그렇게 몇천년 동안 싸워 나오며 후퇴했어요, 안 했어요?「안 했습니다」 후퇴하지 않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통일교회가 반대를 받고 나오고 있지만 후퇴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결코 없어지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반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사랑해야
이렇게 볼 때, 현재 통일교회 교인의 위치는 경주장에 서 있는 것입니다. 경주장에 선 여러분들을 보게 되면 별의별 사람이 다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이런 것을 생각 않고 있겠지만 누가 어느 급에 있고, 동쪽의 몇도선에 있다 하는 것이 전부 다른거라구요. 여러분이 그런 것을 알게 되면 불평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은 일세기를 한 주기로 하고 있지만 하나님은 2천년을 한 주기로 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높고 낮은 것을 보게 되면 다 마찬가지입니다.
일생을 두고 볼 때, 어떤 사람은 지위가 높고, 어떤 사람은 지위가 낮고 또 저 사람은 잘사는 데 왜 나는 이렇게 못사느냐 하며 불공평하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불공평한 것이 아닙니다. 공평한 것입니다. 현재 못사는 사람은, 남의 가산을 탕진시키고 도둑질해 가지고 잘 먹고 잘살았던 사람의 자손입니다. 그런 선조의 후손은 낮은 자리. 깊은 골짜기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한 6천년이나 3천년을 한 주기로 보게 되면 전부 평등합니다. 공평하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눈으로 앞뒤를 보고 전부 같은 줄 알고 평등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가는 길에 있어서는 평등입니다. 그렇지만 위치에 있어서는 평등이 절대 있을 수 없습니다. 위치에 평등이 있어요? 다른 의미에서는 전부 평등하지만, 위치는 절대 평등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려 가지고 자기가 이런 자리에 있기 때문에 이렇게 되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게 되면 불평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시대가 온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제목이 '경주장에 선 현재의 위치'인데. 오늘날 통일교회가 지금까지 종교계를 중심삼고 정상을 정복하기 위해 투쟁해 나오는 하나의 표준이 무엇이냐? 돈이예요? 여러분은 돈 벌기 위해서 여기 왔어요? 얼굴 잘난 것을 자랑하러 왔어요? 그런 사람은 보따리 싸 가지고 가라구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여기에 온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사랑해야 되는 것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해서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한 것이 둘째 되는 계명이라고 했나, 뭐라고 했나?「첫째 되는 계명이라고 했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라는 것은 생명을 내놓으라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하라는 말이 무슨 뜻이예요? 마음을 다했다는 자리는 죽는 자리입니다. 죽기까지 하라는 말입니다. 아직까지 죽지 않았다면 마음을 다하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곳을 향해서 달려가야 됩니다. 무엇을 위해서 가느냐?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랑의 세계를 향해서 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개인을 사랑할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 가정을 사랑할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 종족을 사랑할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 민족을 사랑할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 세계를 사랑할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 전체를 대표할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권을 향해서 달려가는 것이 통일교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세계를 필요로 한다면 통일교회 자체는 필요로 하지 않느냐? 아닙니다. 세계를 찾기 위해서는 통일교회를 세계보다 더 사랑해야 됩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통일교회는 전체를 대표할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권을 찾는 데 원동력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세계는 결과이고 우리는 원인이기 때문에 여기에서 더욱 하나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식구'라는 명사를 생각해야 됩니다. 자기가 사회에 나가 힘든 일을 하고 있는 것은 식구를 위해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어렵고 힘든 일을 하다가도 자기를 위하는 식구의 얼굴을 대하게 되면 자기도 모르게 기뻐지는 것이 아니냐?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식구끼리 목적을 위하여 더 기뻐할 수 있는 내용에 불타야 됩니다.
정상을 향하여 가는 거기에는 우리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반드시 상대가 있는 것입니다. 기성교회라든가 수많은 종교들도 하나님을 중심삼고 사랑하기 위한 싸움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통일교회는 악착같이, 적극적으로 생명을 내놓고 출발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아 정상까지 가야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해야 되느냐? 하나의 정상을 찾아가야 하는데, 그 정상에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내려와서 우리를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찾아가야 됩니다. 하나님을 찾아 정상까지 올라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개인을 지나고. 가정을 지나고, 종족을 지나고, 민족을 지나고, 국가를 지나 가지고 세계 끝까지 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 길을 가는 데에는 직선으로 가야 됩니다. 개인, 가정, 종족, 민족, 국가, 세계, 이렇게 바로 올라가야만 직선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완전한 개인이 나와 가지고 직선으로 올라가 가정을 이루게 되면. 그 가정은 종족으로 커 가는 거예요. 범위가 넓어져 가는 것입니다. 개인, 가정, 종족, 민족, 국가, 이렇게 이 선에서 직선이 되는 것입니다. 다른 데에는 직선이 없습니다. 절대적으로 없다는 것입니다. '있다'가 아니라 '절대적으로 없다'입니다. 그 직선은 하나의 길이요, 통일의 길입니다.
그러면, 세계와 그런 개인을 바꿀 수 있느냐 할 때, 성경에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라고 했습니다. 이렇듯 생명 그 자체는 개인의 중심이요. 전체의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요 자리는 개인의 자리로서 맨 중앙 자리라는 거예요. 개인이 틀리게 되면 다 틀리게 되는 것입니다. 개인이 잘못되면 전부 차이가 벌어지는 거라구요. 다시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 세계를 잃어버리더라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나라가 있다면 그 나라를 찾는다는 것입니다. 이 세계의 수많은 민족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한 민족 중에 어느 쪽을 남기겠느냐? 세계의 수많은 민족은 버리더라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한 민족을 남긴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민사상입니다, 선민사상. 한 민족을 찾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또, 그 선민을 버리더라도 특별히 택한 아브라함의 직속 후손은 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지파를 통해서 찾는 거예요. 선민을 부정하더라도, 유대교를 부정하더라도 유다지파를 부정하지 못해요. 이래 되는 거예요. 그 다음에는 유다지파를 버리더라도 다말은 버릴 수 없는 것이요, 유다를 버릴 수 없는 것입니다. 다말과 유다는 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다말은 버리더라도 유다는 버리지 못합니다. 이렇게 개인에 귀결됩니다. 그 귀결점이 개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체에 해당하는 개인이 없어 가지고는 전체가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예수님은 어떤 분이냐 하면, 세계적으로 개인을 대표한 분이요. 세계적으로 가정을 대표한 분이요, 세계적으로 종족을 대표한 분이요, 세계적으로 민족을 대표한 분이요, 세계적으로 국가를 대표한 분입니다. 그런 예수님이 국가를 중심삼고 싸우는 데 있어서 그 싸움의 승패의 기준이 무엇이겠느냐? 그것은 무력이 아니라, 하나님을 얼마만큼 사랑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두고 보면,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을 사랑할 때는 망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때는 번번이 망했습니다. 두고 보라구요. 통일교회도 그래요. 통일교인들 망하는지 안 망하는지 두고 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자기보다 더 사랑하면 망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뜻을 자기의 뜻으로서 귀결하려 하면 꺾어져 나갑니다. 망한다는 것입니다.
투쟁의 길은 희생의 길
그렇기 때문에 망하지 않고 남아지는 길은 어떤 길이냐? 하나님의 사랑을 더 받을 수 있는 길은 어떤 길이냐? 잘먹고 잘살고 편안히'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해서는 안 됩니다. 그 반대의 길을 가야 하는 것입니다. 먹고 싶은 것이 있어도 그 나라와 그 세계를 위해서 먹지 못하고. 잘살더라도 그 나라와 그 세계를 위해서 못사는 자리에 나가야 됩니다. 이런 반대의 길을 가는 사람일수록 하나님의 동정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말하면, 남편을 위하여 아내가 고생을 많이 했는데 그 고생했던 목적이 이루어져 남편이 영광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을 때, 그 남편에게는 아내를 먼저 그 자리에 내세우고 싶은 마음이 있을 것이 아니겠느냐?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어떤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서 그 일을 놓고 서로 서로 협조해 가지고 나중에 그 일이 성사되었을 때, 하나님 자신이 그 자리에 나서기 전에 아들이면 아들, 혹은 딸이면 딸을 내세워 가지고 이들을 먼저 찬양받게 하여 그 찬양과 더불어 영원히 같이 있고 싶은 것입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마음이 아니겠느냐?
그래서 하나님은 이 땅 위에 한 남성을 내세우는 것입니다. 그 남성은 어떤 사람이냐? 역사적인 대표로서 수난길을 가는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은 역사시대에 있어서 누구보다도 고생을 많이 한 사람이어야 됩니다. 몸으로 고생하기보다는 마음적으로 고생을 많이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생각을 누구보다도 많이 한 사람이어야 됩니다. 하늘나라를 중심삼고 누구보다도 생각을 많이 한 사람이라야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하늘나라를 중심삼고 생각도 많이 하고, 하늘나라를 중심삼고 고심(苦心)도 많이 하고, 하늘나라를 중심삼고 공상을 했다면 누구보 다도 공상을 많이 하고, 생각뿐만이 아니라 하늘나라를 중심삼고 열 번을 생각했으면 반드시 열 번 행동해야 됩니다. 그 생각을 실천하기 위해 길을 찾아갔다가 그 길이 틀렸으면 되돌아와서 다시 그 길을 찾아야 될 것이고, 실천하는 데 있어서 의외로 잘 안 되더라도 그것을 넘어서 가지고 다시 결심하고 나설 수 있는 사람이 아니고는 안 됩니다.
그리하여 외적으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다 하더라도 틀림없이 그 일을 실천 구현해 가지고 소기의 목적의 자리까지 나가기 위해 투쟁의 길을 가야 됩니다. 그 투쟁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개인이 희생하는 것도 감수해야 되고, 가정이 희생하는 것도 감수해야 됩니다. 종족을 희생의 길에 처넣더라도 불평불만하지 않아야 됩니다. 종족을 희생시키지 않고는 민족을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민족을 희생하는 자리에 처넣지 않고는 하나의 주권을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통일사상이 가는 길
오늘날 대한민국을 보면 남북이 갈라져 있기 때문에 아무리 민족을 찾았다 하더라도 하나의 주권을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남북이 갈라져 있기 때문에 하나의 주권을 찾기 위해서는 민족이 단결해 가지고 싸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민족이 그렇게 해 가지고 주권을 찾았더라도 그 주권만으로는 다 됐다고 할 수 없습니다. 주권을 찾았으면 세계를 향해서 가야 합니다. 주권을 희생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세계를 찾아 나서는 싸움의 행로를 거치지 않고는 하나님이 찾고자 하는 평화통일세계는 오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길을 가기 위해서 통일교회 문선생이 고생을 했습니다. 고생한 이야기를 터놓고 해보자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데 있어서 누구보다도 눈물을 많이 흘린 사람이라구요. 하나님이나 통일교인을 누구보다도 사랑한 사람입니다. 내 자식보다도 더 사랑한 사람입니다. 그랬다구요. 그렇게 해서 통일족속을 만들어 왔습니다. 통일족속을 만든 것은 족속끼리 잘먹고 잘살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이들을 잡아다가 어려운 길로 몰아내 가지고 고생을 시키기 위해서입니다. 그건 누구 때문에 그래요? 통일교회를 위해서가 아니라 이 나라를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오늘날 남과 북으로 양분되어 내일의 소망과 내일의 승리의 기틀을 장담할 수 없는 이 나라의 현실을 바라보게 될 때, 하나님의 사랑을 들고 나오고, 세계적인 사조를 넘어갈 수 있는 하나의 승리적 기준인 하나님의 사랑과 일치될 수 있는 기준에 서야 합니다. 그러한 사상을 가진 통일교회라면 단연코 이 민족을 중심삼고 누구보다도 나라를 더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부패하여 망해 가는 대한민국이 아니라 영원히 남아질 수 있고, 미래의 만민이 추구할 수 있는 영원한 하나의 기수로서 하나님의 사랑 앞에 부끄러움 없이 직행할 수 있는 그런 대한민국의 주권을 중심삼고 우리는 나가는 것입니다.
여기에 있어서 불의는 용납할 수 없습니다. 그때까지는 참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바쁩니다. 대열을 강화해야 되고, 정비해야 됩니다. 우리가 가야 할 목표의 한계선을 중심삼고 총진군의 명령을 받게 될 때는, 이의 없이 전체가 보조를 맞추어 직행할 줄 아는 이런 대열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자든 여자든 몽땅 규합해 가지고 들이 치는 것입니다. 행복한 나라에서 살기를 원하거든 오늘 불행한 나라를 위해 죽을 줄 알아야 됩니다. 그 이상이 되어야 됩니다.
대한민국이 세계 앞에 불리워졌다면, 대한민국은 자기의 주권을 위주로 하여 그 이익을 찾기 위해서 세계를 버릴 수 있는 그런 미국과 같은 입장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슬라브 민족만을 중심삼고 공산권의 세계 제패를 꿈꾸는 소련과 같은 입장의 사상적 사조를 가져서도 안 됩니다. 여기에는 초민족적이요, 초국가적인 입장에 서는 뜻과 사상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 뜻과 이상을 중심삼고 충성을 다하는 사람이라면 백인도 좋고 흑인도 좋습니다. 이것이 선생님의 사상입니다.
인종을 초월해 가지고 세계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자기 민족의 울타리 안에서 꿈을 꾸는 것은 꿍꿍이속이라는 거예요. 오늘날까지 인간들이 걸어온 그런 입장에 서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 민족을 중심삼은 민족 감정 가지고는 앞으로 다가오는 통일세계에 있어서 전인류의 감정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세계 인류의 감정, 더 나아가 천정(天情)의 인연까지도 포용할 수 있는 기준이 있어야 됩니다. 그 기준을 중심삼고 거기에서 찾아진 민족이 하나의 주권을 제기시켜 그 주권을 사랑하게 될 때, 그 주권은 하나의 세계의 주권이 되고, 그 주권을 중심삼은 국민은 세계 인류를 대신한 세계의 국민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그 주권을 가진 국민이 세운 국가가 바로 이 지구성이 됩니다. 이것이 통일사상이 가는 길입니다.
통일교회보다도 기성교회를 더 사랑하라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회를 망하게 해서라도 나라를 찾아야 되고, 나라를 망하게 해서라도 세계를 찾아야 됩니다. 남편과 아내가 가정을 위해서 서로 희생하게 될 때, 그 가정이 발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새로운 전통을 본받아 철옹성같이 중심자 앞에 일치되어 나가는 것이 원칙입니다. 이와 같은 사상을 어떻게 갖추느냐 하는 것이 끝날의 역사가 요구하는 현실적인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그 시대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보게 되면 우리는 어떤 입장이냐? 지금은 개인적인 시대, 가정적인 시대, 종족적인 시대를 지나 민족을 중심삼고 가인과 아벨이 싸우는 시대입니다. 가인 아벨의 자리는 어떤 자리냐?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리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 사랑을 받기 위하여 누가 더 하나님을 사랑하느냐 하는 것을 중심삼고 싸우는 것입니다. 여기에 있어서 하나님은 공의의 심판정에 서서 법도를 따라서 싸우는 사람을 가리는 것입니다. 아까 말한 것과 마찬가지로 법도를 따라 가지고, 원리 원칙을 따라 가지고, 하늘의 궤도를 따라 나가려는 싸움은 끝이 안 나지만 하나님은 반드시 그 배후에 있어서 그 법을 중심삼고 감시하고 감정하여 승패의 결정을 내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법을 따라 싸우는 그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내면적인 지도가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이런 견지에서 볼 때, 오늘날 통일교회와 기성교회는 대립되어 있습니다. 기성교회는 나에게 있어서 원수라면 참을 수 없는 원수입니다. 지금까지 통일교회를 반대하고 하나님의 뜻과 인류 앞에 피해를 가져온 것을 생각하면 칼로 그저 갈기갈기 찢어 산 독수리의 밥으로 만들고 싶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악하다면 그렇게 악한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없으면 뜻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가인과 아벨이 하나되지 않고는 부모를 만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걸 알아야 돼요. 가인과 아벨이 하나 못 되게 되면 부모를 못 만나게 돼요. 부모를 해방시키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해방시키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은 여러분에게 통일교회보다도 기성교회를 더 사랑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통일교회의 가르침입니다. 기성교회 교인들이 이것을 알게 되면 기가 막힐 것입니다. 선생님은 지금 빚을 지면서도 그들을 위해 일하고 있습니다.
그거 왜 그러느냐? 어떤 마음을 가지고 그러느냐? 지금 통일교회 문선생의 나이가 50여세 되는데, 통일교회 문선생이 나오기 전, 즉 반세기 이전에는 누가 하나님을 모셨느냐는 것입니다. 그래도 그 사람들이 하나님을 모셔 나오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런 입장에서 그들은 형님이라는 겁니다. 그들이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고,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형님이 아니냐? 그야말로 사랑을 중심삼고 볼 때 가인이라는 것입니다.
통일교회는 요셉과 같은 입장입니다. 요셉은 형제들의 시기를 받아 애급으로 팔려가서 보디발의 아내의 모함을 받고 감옥에 가게 되지만, 그곳에서 바로의 꿈 해몽을 해주어 가지고 애급의 총리대신이 됩니다. 이때, 온 세상에 흉년이 들어 애급 사람뿐만이 아니라 각국 사람들이 곡식을 사러 오는데 그 사람들 중에 자기의 형님들도 있었습니다. 자기를 죽이려고 했던 원수들인 그 형님들을 봤을 때 요셉이 얼마나 기가 막혔겠어요? 그렇지만 요셉은 그들이 자기와 한 핏줄을 이어받은 형제지간이고, 자기가 부모곁을 떠나 외지에서 생활할 때 그래도 부모를 모셨고, 부모의 사랑의 대상이 되었으며, 부모의 사랑하는 마음이 그들을 거쳐갔다는 것을 생각하고 그들을 용서한 것입니다. 통일교회가 요셉의 이런 경우와 똑같다는 것입니다.
통일교회 문선생에게 있어서 기성교회 목사들은 원수입니다. 선생님은 그들이 한 짓을 일곱배로 가중해서 갚아 줄 수 있고, 또 그들을 한꺼번에 불살라 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천리를 알고 보니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갈 길도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경주장에 서 있는 것과 같은 위치에 있습니다. 여기에서 어떻게 해야 되느냐? 사랑하는 데에 있어서 누구보다도 앞서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사랑한다는 모든 것을 거두어 가지고 내가 내 손을 거쳐 그들을 사랑했다는 기준을 세우지 않고는 끝이 안 나는 것입니다. 사탄편은 끝까지 반대하는 것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여러분은 부모의 마음을 가지고 종의 몸으로 사랑과 눈물과 피땀으로 봉사하는 길을 감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굴복하게 될 때, 비로소 끝이 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탄이 또다시 발기할 수 있는 기대가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 통일교회가 가는 길입니다.
이렇게 하여 통일교회와 기성교회가 하나되는 날에는 기성교회 교인들이 전부 다 통일사상을 가지게 되는 날에는 종교통일은 물론 공산당도 문제없습니다. 지금 끝날이 왔기 때문에 모두가 기진맥진해 있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과 마찬가지로 검부러기든 무엇이든 휘어잡으려고 하는 때가 왔다구요. 이러한 시점에서 통일교회는 혼자 갈 수 없습니다. 알겠어요? 절대로 혼자는 천국에 못 가는 것입니다.
통일교회와 기성교회는 공동운명체
예수님이 왜 낙원에 가 있느냐? 세례 요한을 데리고 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구약을 계승해 가지고 신약에 다리 놓아야 할 세례 요한은 어디 갔느냐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열두 지파를 중심삼고 역사적인 전통의 열매로써 신약의 터전을 마련해 주어야 할 열두 지파 족장의 중심 대표가 되어야 했습니다. 열두 지파가 시중하는 중심자리에서 동서남북 어느 방향과도 상치되지 않고 전체와 하나가 되어, 한 방향으로 백 번, 천 번 돌더라도 예수님이 가는 방향에 일치단결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세례 요한이 그러한 사명을 완수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은 3년 공생애노정을 통하여 거지떼와 같은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고생만 죽도록 한 것입니다. 나중에는 스승을 팔아먹는 제자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스승을 배반한 꼴뚜기 같은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그런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거 기가 막히는 거라구요. 그런데도 그런 제자들을 잊지 못하고 부활해 가지고, 다시 그들을 찾아가야 하는 예수님의 신세가 얼마나 따분하냐는 것입니다. 얼마나 따분했겠어요? 사나이로 태어나서 목전에서 자기를 배반한 후계자들을 다시 찾아가서 40일 동안 꿍꿍이해 가지고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는 이런 놀음을 했다는 것입니다. 좋아서 그랬겠어요? 기가 막히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두 세계를 한 품에 품고 하나님의 사랑의 다리를 놓아 개인, 가정, 종족, 민족을 거쳐 국가를 통일해 가지고 로마 제국을 제압하여 지중해를 중심삼고 세계적 판도를 넓혀 전 세계를 통일해야 할 것이 예수님의 사명이었는데. 그렇게 졸장부가 된 것이 잘된 일이예요? 기독교인들은 억울하게 죽은 예수님을 '예수님은 나를 위해 십자가를 졌다' 하고 믿고 있으니 기가 막히다는 것입니다. 내가 거짓말하나 예수님을 만나 보라구요.
세상에는 악당의 무리가 꽉차 있습니다. 그들의 모가지를 끌어다가 한 구덩이에 처넣어도 시원치 않을 판입니다. 그렇지만 모르고 그러기 때문에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르는 것을 가르쳐 주는데 오히려 통일교회를 이단이라 하고 자기들은 정통이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정통? 어디 두고 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끝날에 있어서 거리는 무덤길이 되리라고 말씀했던 것과 같이. 이 목사들이 전부 길가에서 매맞아 죽을 때가 올 것입니다. 앞으로 반대하다가는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통일사상이 중심이 되게 되면 그때에도 통일교회를 반대하겠어요? 기가 막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내가 얼마나 반대를 받아 왔는지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옵니다. 어떤 때는 하나님께서 '아무개 목사가 너를 죽으라고 기도하니 들어 봐라' 해서 들어 보면 '하나님, 당신이 사랑하는 2천년 전통의 기독교회를 유린하고 있는 통일교회 문 아무개, 사탄 마귀의 괴수를 데려가시오' 라고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기가 막힌 일이예요? 그래, 내가 가나 네가 가나 두고 보라는 것입니다. 내가 평양감옥에 들어갔다 나오니까 나를 잡아 죽이려고 했던 녀석들은 다 쓰러져 버렸더라는 것입니다. 그 종자들까지 총칼에 다 쓰러졌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통일교회 문선생을 쳐 가지고 남아지는 무리가 있겠어요?
그런 의미에서 이 문선생은 어느누구보다도 무서운 사람입니다. 무섭 다면 무서운 사람입니다. 어떤 때는 나는 아무 생각도 안 하고 있는데 저주가 나와요. 나는 생각도 안 하는데 저주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몇개월 이내에 복닥불이 나 가지고 전부 쓸어 버리더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망하는 사람을 대하여 망하라 하고 저주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벌을 받는 것입니다.
통일교회와 기성교회는 공동운명체이기 때문에 한쪽 발만으로는 못 갑니다. 한쪽 발로만 뛰어서는 못 가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가인이 아벨을 죽였지만, 아벨은 가인을 사랑으로 부활시켜 가지고 같이 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원수를 자기의 종으로 만드는데 있어서는 강제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으로써 종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것이 쉽겠어요? 하나님은 그런 일을 해 나오신 것입니다. 시간이 많이 지나갔군. 가고 싶은 사람 있으면 가라구요.
사랑으로 사탄을 굴복시킨 예수님
아담 해와는 장성기 완성급에서 타락했기 때문에 완성의 기준까지 못 올라갔습니다, 그래서 사탄은 하나님을 대하여 '피조세계를 창조하신 당신은 창조주로서 절대자이기 때문에 내가 비록 타락해서 사탄이 됐을 망정 당신은 이 사탄도 사랑해야 되는 것이 아니요?'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맞는 말입니다. 또, 하는 말이 '당신이 나를 짓고 사람을 지어 가지고 당신의 창조위업에 협조하게 한 것은, 인간이 완성의 기준을 넘어서면 그들과 더불어 나도 같이 있는다는 약속이 있어서 지은 것이 아니요? 그것이 원칙이 아니요? 인간이 완성한 자리에서 나를 사랑할 수 있는 입장에 서야 당신은 절대적인 하나님이 되는 것이 아니요? 또, 당신의 아들은 당신의 위업을 송두리째 상속받을 수 있기 때문에 아버지가 사랑하던 모든 것을 사랑해야 되는 것이 아니요? 다시 말하면, 천사장 입장의 사탄인 나 자신을 완성한 자리에서 사랑해 봐야 되는 것이 원칙이 아니요? 한다는 거예요. 이렇게 물고 늘어지는 것입니다. 또 '나는 악하기 때문에 할수없지만, 하나님은 나와 같아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닙니까? 약속한 대로 해야 될 것이 아니요? 내가 비록 사탄일지라도 약속을 했으면 그것을 지켜야 될 것이 아니요?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않고는, 하나님이 나를 완성된 자리에서 사랑하지 않고는 나에 대해서 누구도 제재를 할 수 없소. 당신의 아들이 완성의 자리를 넘어서 가지고 나를 한번 사랑했다는 조건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당신과 당신의 아들이 합해 가지고 나를 사랑했다는 기준을 넘어서지 못하면 안 돼요' 이렇게 사탄은 목을 찌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것을 풀자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바 아버지여,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피하게 하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아버지의 뜻이란 무엇이냐? 사탄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볼 때, 예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구하기 위해서 죽었다기보다도 사탄을 사랑하기 위해서 죽었다는 것입니다. 사탄을 사랑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아들을 버려야만 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고 했지만, 하나님은 아들을 버려서라도 사탄을 사랑했다는 조건을 세우지 않고는 넘어서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영적 사탄을 총합한 실체적 사탄인 로마병정들에 대해서, 저들이 저들의 죄를 알지 못해서 그러니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했습니다. 이렇듯 예수님은 죽음의 자리에서도 그들을 사랑했다는 기준을 세웠고, 생명을 잃어 가면서도 사랑했다고 하는 그 자리에 섰기 때문에 사탄은 예수님이 자기를 사랑하지 않았다고 하는 조건을 세울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서부터 두 세계로 갈라지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복귀는 가인과 아벨이 하나될 때에 이뤄져
여러분은 가인을 사랑해요? 가인은 사탄입니다. 사탄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 영적 사탄, 실체사탄이 대드는 것입니다. 죽이고 싶어하고, 통일교회가 미워 죽겠다고 이를 부드득 부드득 간다는 것입니다. 뭐 우리가 밥을 달랬나, 떡을 달랬나, 가만히 있는데도 그러는 것입니다. 여기에 여러분이 걸리지 않으려면 가인을 굴복시켜야 합니다. 가인을 굴복시키기 위해서는 끝까지 가인을 사랑해야 됩니다. 그런 사람이 아니고는 가인을 구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천국에 가려면 사탄의 영수증을 받아야 됩니다. 사탄의 영수증이란 무엇이냐? 죄인이 석방되려면 먼저 검사를 통하고, 그 다음에 변호사를 통해서 판사에 의해 석방되는 것입니다. 이런 입장으로 볼 때, 사탄은 검사이고 하나님은 판사이고 예수님은 변호사입니다. 사탄이 '너 이렇게 이렇게 했지? 해 가지고 딱 올가미를 씌워 하나님한테, '이 사람은 이렇게 해야 되겠소?' 하면 하나님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변호사 입장에서 '하나님이여. 이 사람의 선조는 이런 일을 했습니다. 본래 혈통이 나쁘지 않은 사람입니다. 이러이러한 조건에 걸렸으니 그 조건에 해당된 탕감조건을 세워 가지고 죄를 벗겨 주어야 됩니다'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을 해 나오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천국에 가려면 사탄의 영수증을 받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사탄을 사랑했다는 영수증을 받지 않고는 영영 천국에 못갑니다. 그래서 통일교회는 그런 일을 하자는 것입니다. 반대하는 사람을 원수로 대해야 할 것인데도 불구하고 사랑해야 하다니, 기가 막히는 일입니다. 칼로 가슴을 찢고 배를 긁어 내 가지고 개밥을 해줘도 시원찮을 그런 원수들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들을 위해 복을 빌어 줘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가인과 아벨이 하나되지 않으면 복귀가 안 되는 것입니다. 부모에게 못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중심삼고 이스라엘과 유대교가 하나되어야 했습니다. 예수님을 중심삼고 하나가 됐더라면 오늘날의 기독교는 소생, 장성을 거쳐 완성이 되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에 있어서는 오시는 재림주님을 중심삼고 공산세계와 민주세계가 하나되어야 됩니다. 그전에 기독교와 민주세계가 하나되어야 됩니다. 그렇게 하나되는 날에는 공산당은 쫓겨나는 것입니다. 김일성이도 멀지 않아 꺾여 나갈 것입니다. 통일교회와 대한민국 현 정부가 하나되는 날에는 김일성이를 영계에서 호출해서 데려간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통일교회와 기성교회가 하나되어야 됩니다. 하나되지 않고는 길이 없습니다. 알겠어요?「예」 이번에 부인 전도대원 1,200명을 동원한 것도 기성교인을 위해서입니다. 아들딸을 버리고 길거리에 나서 가지고 그들을 붙들고 눈물을 흘리게 하는 것은 아들딸보다 그들을 더 사랑했다는 천륜의 조건을 세우게 하기 위해서예요. 그 조건만 넘어서는 날에는 기성교회는 망하더라도 통일교회는 망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되는 날에는 다른 종교들이 우리편을 들게 될 것입니다. 기성교회가 통일교회를 반대하면 다른 종교가 들고 일어나 싸울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자리에 선 종교가 복귀된 상대적 가인형으로서 축복을 그대로 이어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간종교)도 만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길을 가야 합니다. 그 길을 감으로써 통일교회는 망하지 않습니다. 그 길을 가지 않으면 나라가 갈 길이 없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가인에는 개인적 가인이 있고, 가정적 가인이 있고, 종족적 가인이 있고, 민족적 가인이 있고, 국가적 가인이 있습니다. 만일 기독교가 해방 직후에 통일교회를 맞아들였더라면 오늘날 통일교회와 대한민국은 이렇게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공산당은 내 손에 이미 없어졌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럴 수 있는 좋은 때는 비운의 낙엽과 같이 쓰러져 갔기 때문에, 통일교회는 지금까지 다시 재봉춘하기 위한 역사적인 탕감노정을 개인으로부터 가정, 종족, 민족, 국가를 모아 한꺼번에 세계로 가기 위한 수난의 길을 거쳐온 것입니다.
통일교회의 표준
여러분은 지난날 통일교회를 반대하던 교회와 나라 앞에 몰리고 쫓겨나 수의(囚衣)를 입고 가던 선생님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수의를 입고 쇠고랑을 차고 재판장 앞에 섰던 선생님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제 한스러웠던 그 시절이 풀려 가지고 우리에게도 때가 왔습니다. 싹이 날 수 있는 봄날이 왔기 때문에, 땅에 씨를 뿌리면 우리에게는 싹이 날 것이고 반대하는 데에는 싹이 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민족과 겨레를 대신하여 지금까지 역사적으로 쌓아 올려 놓은 생명의 위업, 사랑의 위업을 그냥 그대로 계승해서 세우게 될 때, 현재 기성교회가 당장은 우리와 원수지만 그 배후에 있는 7,8억의 기독교인들의 갈 길이 여기에서 열려지는 것이 아니냐? 대한민국 국내에서는 반대했지만 외국에서는 반대하지 않고 같은 운명에 설 수도 있지 않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소수의 통일교인들을 고스란히 희생시켜서 제물삼아 가지고 하늘 앞에 바치고자 하는 때가 현재의 때라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통일교회는 무엇을 주체로, 무엇을 표준으로 삼고 나오느냐?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더 사랑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떠한 종단이나 대한민국의 어떠한 종교보다도 하나님을 더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골수에 얽혀진 심정의 내정을 부여잡고 세계를 향하여 당당하게 나가는 투쟁의 행로를 감사한 마음으로 소화시키고 가야 할 때가 지금 여러분이 앉아 있는 이때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지금 일선에서는 부인 전도대원들이 전도하느라고 고생하고 있는데 여기 본부에 있는 사람들은 놀러 다니겠어요?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은 금년에 들어와서는 될 수 있으면 본부에서는 주일 아침 예배만 보고 지방을 순회 다니려고 했습니다. 이번 7,8월은 일본 사람들 수련 때문에 못갔지만, 마음은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방에 가 있습니다. 그런 마음이 있어야 됩니다. 밥을 먹더라도 우리 뜻을 위해서 일선에 나가 있는 가냘픈 아낙네들을 생각하고, 보고 싶은 자식을 뒤에 두고 편지를 통해 사정을 듣고 눈물지으며 집에 와 보지 못하는 서글픈 생활환경에서 뜻길을 가고 있는 아낙네들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야 됩니다.
그것은 누구 때문이냐? 먼저 통일교회 문선생을 잘못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금후의 기성교회와 대한민국의 갈 길을 열어 주기 위해서 입니다. 우리가 이러지 않으면 기성교회와 대한민국은 갈 길이 없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돈이 있으면 다 털어 가지고 기성교회 목사들에게 줘야 합니다. 그들의 입에다 대주면 그들은 산 독사새끼처럼 입을 벌릴 것입니다. 내가 다 타진해 봤습니다. 이렇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제 통일교회는 돈이 많아질 것입니다. 이제는 돈이 많아집니다. 알겠어요? 내가 돈을 벌게 되면 거지 같은 그 사람들을 수습하려고 합니다. 그들을 수습해 가지고 꼬부라진 그들을 어떻게 재차 훈련을 시키느냐 할 때, 참 곤란합니다. 그래서 천국과 지옥 같은 것이 있어야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낙원과 같은 격리처가 있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만일 통일교회 문선생이 죽었다면, 그 동기가 어디에 있느냐 할 때 나라를 찾기 이전에 교회를 찾기 위해서 싸우다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나라를 찾고, 가인 교단을 찾고, 개인을 중심삼은 개인적인 가인 가정을 굴복시키기 위해 싸워 가지고 개인적인 종족권을 중심삼은 여러분을 빼앗아 왔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부모를 버리고 친척을 버리고 여기 통일교회로 왔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이겼습니다.
이렇게 해 가지고 어떻게 하느냐? 하늘 종족을 만들어야 됩니다. 그리고 그 종족은 하늘 종족주권을 만들어야 되는데, 그것은 사탄세계와 같이 자기를 위하고 부모를 위한 것이 아니라 기독교를 위한 것입니다. 그 종족이 누구냐 하면 기독교입니다. 알겠어요? 기독교는 우리와 형제입니다, 앞으로는 기독교를 중심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에서 기성교회는 통일교회를 제일 무서워합니다. 통일교인을 살펴보면 후퇴하는 것이 아니라 자꾸 파고들어간다는 것입니다. 나중에는 목사부인들한테까지 파고들어가 가지고, 목사가 예배를 보려면 한바탕 싸움을 해야 할 때가 올 것입니다. 지금도 그런 목사 부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배 때 설교를 하려면 싸움을 하지 않고는 못 나간다 할 때가 올 것입니다. 집사들은 더 그렇구요. 통일사상만 집어 넣으면 자연히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형제의 우애, 부부의 인연, 부자의 인연 등을 중심삼고 이루어진 가정과 종족권을 떼 버려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 자신이 그들을 그들 이상으로 사랑해야 됩니다. 그것이 천리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여러분 자신을 어머니보다도 더 높은 자리에서, 아버지보다도 더 높은 자리에서, 형제보다도 더 높은 자리에서, 친척, 스승보다도 더 높은 자리에서 사랑할 것입니다. 틀림없습니다. 그런 철석같은 하늘의 보장을 받았기 때문에 여러분은 신념을 가지고 남편을 버리고 나온 것이요. 가정을 버리고 나온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선생님은 여러분을 사탄세계에서 빼앗아 온 것입니다. 갈라내 왔다는 것입니다. 갈라내 온 여러분이 남아 있는 그들보다 못해서는 안 됩니다. 형님의 반대를 받고 남편의 반대를 받고 온 여러분이 반대한 그들보다 못살아서는 안 됩니다. 선생님이 잘살게 만들어 줄 거라구요. 알겠어요, 무슨 말인지? 그들의 반대를 등지고 우리는 하나의 목적을 위해서 가는 것입니다.
통일의 운세가 우리 앞에
청파동 교회는 함부로 헐 수 없습니다. 선생님이 교회를 지으려고 마음만 먹는다면 당장에 몇천만 원짜리라도 지을 수 있습니다. 영락교회 이상으로 지을 수 있는 실력도 있다구요. 돈 한 푼 없더라도, 내가 하려고만 하면 할 수 있습니다. 세계에서 긁어모아서라도, 여러분들에게 도깨비춤을 추게 해서라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곳은 남겨야 됩니다. 여러분이 앞으로 일억 원을 주고도 여기에 못 앉을 때가 옵니다. 하룻밤 숙박료로 일억 원을 주고도 이곳에서 잘 수 없는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통일교회의 본부인 청파동 교회가 왜 이러냐고 하겠지만, 여기가 시시한 곳이 아닙니다. 내가 세계의 궁전은 다 다녀 봤습니다. 녀석들. 이런 데서 잘 해 먹었구나 하고 생각하지만 그곳과 청파동 교회를 비교해 보면 어이가 없습니다. (웃음) 세상에서 제일 초라한 곳이지만. 여기에서 세계를 요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사상적인 면에서는 많이 성장했습니다. 대한민국에 사상무장을 해야 할 긴박한 때가 왔는데 누구를 믿어야 할 것이냐? 엊그제도 우리가 국방대학에 가서 강의를 했는데, 거기에서 고정적으로 강의를 해달라고 했습니다. 또, 육군대학에서도, 사관학교에서도 강의를 해달라고 하지만 강의할 사람이 모자랍니다. 이렇게 되니까 이제는 우리가 바쁘지 않고 그들이 바빠지게 됐습니다. 알겠어요? 옛날에는 우리가 바빴지만 요즘엔 그들이 바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꼭대기에 올라와서 자리 잡고 쉬고 있으니, 다음에 올라오는 패들이 더 바빠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나는 산을 오를 때 젊은 사람들을 제치고 헐떡거리면서도 제일 먼저 정상에 올라갑니다. 정상에 앉아서 올라오는 사람들을 구경하면 참 멋집니다. 사람으로 태어나 가지고 이왕 하려면 죽더라도 이 놀음 하다 죽는 것이 낫습니다. 맨꼴찌가 되어 가지고 정상에 겨우 올라왔는데, 선두로 와서 쉬던 사람이 '가자' 하고 가게 되면 그는 쉬지도 못하고 죽을 지경이 되는 것입니다. (웃음) 그러니 헐떡거리면서라도 먼저 가는 것이 좋습니다. 또 욕을 먹어도 먼저 먹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에 있어서 욕을 먹게 되는 경우가 있다면 먼저 먹자는 것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욕 안 먹고 대접받고 기름때 풍기며 잘살던 목사들과 복닥복닥해 가지고 고생을 한 통일교회 문선생을 두고 볼 때, 하나님 앞에 있어서 고생 안 하고 대접받고 잘살던 목사들보다 고생하고 온 통일교회 문선생이 하나님의 동정을 받을 수 있는 요건이 많은 것입니다. 그렇지요? 선생님은 무엇을 하더라도 진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아무리 생각해도 진다는 생각이 나지 않아요. 우리를 못 살게 하던 그 사람들에게 져요? 대한민국에 있어서 지금까지 자유당, 민주당이 야단했지만 나라 사랑하는 데 있어서 그들에게 지지 않습니다. 오늘날 공화당이 떠들고 다니지만 나라 사랑하는 데는 그들에게 안 진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 입으로만 애국애족을 다 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대한민국이 안 하겠으면 그만두라는 것입니다. 명년부터는 일본 사람들만 2천명을 데려다가 교육시키려고 합니다. 다음 달이면 또 일본 사람들이 이곳에 옵니다. 통일교회 문선생이 생기기는 이렇게 생겼지만 일본 통일교인들에게 일년에 2천명 교육할 테니 보름에 80명 이상 한달에 200명은 보내야 된다고 하면 그렇게 오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그들에게 일본 하네다 공항을 출발할 때는 교회 깃발을 트렁크 속에 넣고 한국의 김포 공항에 도착해서 내릴 때는 그 깃발을 들고 내리라고 시키는 것입니다. (웃음) 깃발도 아주 크게 만들어서 말입니다. 그리고 나발을 불면서 행진을 시키는 것입니다. 택시나 버스를 타지 말고 김포 공항에서부터 수택리 수련소까지 나발을 불고 따따따 하면서 행진을 하는 것입니다. (웃음) 사람들이 따라오면서 '어디 행이오? 하고 물으면 '수택리 수련소 행이오' 하면 '아이쿠, 통일교회 수련생들이구나'한다는 것입니다. 일본에서 올 때마다 그런 행렬을 종로로 한 번, 을지로도 한 번, 퇴계로도 한 번, 중앙청 앞으로 한 번 이렇게 슬슬 열두 번만 돌게 하면 어떻겠어요? 그리고 매일같이 십자거리에서 삐라를 뿌리게 하는 것입니다. 통일교회 문선생이 괜히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지금에서야 이야기지만, 수택리 수련소를 지을 때도 정보부에서 뭐 한다고 수련소를 지으라고 해 놓고는 나가자빠진 것입니다. 이러니 이 나라를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내가 수련소를 지을 때는 이 나라를 믿고 지은 것은 아니지만. 그들이 못 하게 되면 외국 사람들이라도 데려다가 교육하면 했지 수련소는 절대 놀리지 않는다구요. 그때에 여러분은 외국 사람들이 오는 것 구경을 해야 되겠지요? 통일교회 본부에 계신 거룩하신 어르신네들이여, 미륵불마냥 놀면서 '우리가 수고한 그 뒤를 따라서 잘 오는구먼' 하며 구경해야 되지요? 구경해야 돼요? 정신을 차려야 된다구요.
이 시대에 처해 있는 우리의 위치를 확실히 알고 대처하자
어떤 당에서는 '한국에 있어서 미래의 사상 단체로서 연구해야 할 것이 통일교회다. 지금까지 우리가 갖고 있던 사고방식이나 주관적인 관념을 다 일소해 버리고 통일교회를 연구해야 된다. 공부해야 된다'고 해 가지고 자기들끼리 짝자꿍이 벌어졌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수련회에 참석 하기 위해서는 통일교회 앞으로 제 1차, 2차, 3차 공문을 내라고 할 것입니다. 옛날과 같은 싸구려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그렇지요? 통일교회가 언제나 그렇게 헐떡거리고, 언제나 그렇게 싸구려인 줄 알아요? 지금까지 통일교회 교인들이 지방에 가게 되면, 돼지우리 치워 주기 일쑤요, 변소 치워 주기 일쑤요, 외양간 치워 주기 일쑤요, 소제해 주기 일쑤였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개밥을 먹으면서 별의별 고생을 다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딸이 언제까지나 그렇게 껄렁한 종이 될 줄 알아요? 그것은 역사적인 전통을 세우기 위해 그런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제는 기성교회에서 우리를 무서워합니다. 점점 무서워할 거라구요. 그러나 무서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문만 열어라. 문만 열라구요. 그렇게 하면 내가 한 종단에 1억 원씩 기부하겠다는 것입니다. 한 5억 원을 기부하겠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이런 말을 하면 통일교회 교인들은 '우리는 교회도 없이 고생만 하는데, 그 돈 있으면 벽돌집을 짓고 따뜻하게 살 텐데 선생님은 왜 그래? 이러겠어요? 아주머니들 그럴 거예요? 또'아이고, 그 돈 있으면 우리 딸 시집갈 때 장농이나 하나 사줄 텐데'그럴 거예요? 그렇지만 그들을 위해서 내가 가진 반지도 빼주고 옷도 벗어 주고, 모두 가져가라 해야 됩니다. 내가 돈을 버는 것은 통일교인들 먹이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알겠어요? 그 불쌍한 목사들, 배고파서 헐떡거리는 목사들, 배가 나오도록 한 번 잘 먹여 보자는 것입니다. 소 잡아 먹이고, 돼지 잡아 먹이고, 닭 잡아 먹이고, 뭐 다 잡아 먹이고 그 다음엔 임자네들 잡아 먹이겠다구요. (웃음) 그렇게 해서라도 하나님 뜻이 이루어 진다면, 임자네들 잡아 먹혀도 괜찮겠지요?「예」 대답은 잘 하네. (웃음)
이번에 1,200명 동원한 것도 통일교회 때문이 아닙니다. 기성교회를 위해서입니다. 그것 때문에 지금 기장, 예장 등 기성교회가 서울, 대전, 인천 등지에서 야단났습니다. 아가씨인지 아주머니인지, 시집은 갔지만 신랑하고 살지를 않았으니 처녀지 별수 있어요? 아줌마라는 이름이 붙은 처녀입니다. 이들이 분수도 없이 목사 앞에 왕발(맨발)로 성큼성큼 들어가니 목사들이 하나님의 종 앞에 천사장급들이 감히…. 수작들은 좋지요. (웃음) 너희들은 종이지만 주인의 아들딸을 몰라보느냐? 이들은 주인의 아들딸들입니다. 주인의 아들딸이 종의 방에 못 들어가요? 어디든지 갈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 놓으니 목사양반들이 지금 야단입니다. 그래 놓고, 다음엔 장로, 집사까지 하게 되면 거꾸로 소생 장성 완성이 되어 끝나는 것입니다.
한국 기독교의 부흥역사를 두고 보면, 해방 직후의 목사시대를 거쳐 장로시대, 권사시대, 집사시대까지 내려왔습니다. 요즘에는 부흥회도 그렇게 안 하지요? 부흥회 한다고 해도 사람들이 콧방귀를 뀐다는 것입니다. 목사들이 걸러 먹을 대로 걸러 먹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통일교 회에는 아직 안 와 봤지요? 통일교회 문선생이 부흥회를 한다고 하면 구경삼아 올 거라구요. 우리 부흥회 한 번 해볼까요? 통일교회 문 아무개가 부흥강사로 등장한다 하게 되면, '어떤 사내인가?' 하고 구경삼아라도 한번 올 것입니다. 나는 이렇게 생긴 사내요. 뭐 그렇게 잘 생기지는 못했소. (웃음) 그들이 모이게 되면, 내가 뿌리 뽑는 데는 소질이 있습니다.
기성교회가 통일교회 앞에 문만 열어 놓았다면 통일교회는 6개월 이내에 세계 기독교를 녹였을 것입니다. 로마 교황청이 통일교회의 본부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통일교회 앞에 있어서 몇몇 사람이 반대를 안 했더라면 그렇게 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역사는 전체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한두 사람이 잘 하느냐 못 하느냐에 따라서 역사가 뒤넘이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이 시대에 처해 있는 통일교회의 현재 입장을 여러분은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가 왜 기성교회 교인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하는지, 알겠지요?「예」
이 땅에 하나님이 임재하실 수 있게 하자
지금 대한민국에 있어서 종교문제가 제일 문제입니다. 통일교회를 중심삼고 볼 때도 기독교가 제일 반대를 합니다. 그렇지요? 그렇지만 기독교가 우리와 하나되어 통일사상으로 무장하게 되는 날에는 북한 김일성은 문제없습니다. 김일성이를 영계에서 데려간다는 것입니다. 명년 1972년이면 김일성 나이가 만 60세가 되는데, 그 1972년을 중심삼고 통일교회가 고개를 넘는 것으로 맞서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북한에서는 김일성을 아버지라고 하지요?「예」 통일교회에서도 선생님을 아버님이라고 합니다. 그렇지요?「예」 이렇게 볼 때, 아버지가 둘입니다. (웃음) 김일성이 없으면 복귀가 안 됩니다. 가인 아벨관계가 형성되지 않는 것입니다. 외적 내적인 대결이 없으면 복귀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북한을 통일해야 됩니다. 통일교회에서는 이것을 준비하기 위해서 국제승공연합을 창설해 가지고 그물을 짜 놓은 것입니다. 외적으로 이 민족을 전부 승공연합에 규합시켜 놓았기 때문에, 이제 이 민족 앞에 내외적으로 통할 수 있는 평평한 수수작용권이 스며들고 있는 것입니다. 알겠어요?「예」 대학가도 우리에게 맡기려고 합니다. 사상적인 면에서 통일사상 외에는 없다 하는 것은 이미 공증된 사실입니다. 알겠어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책임이 중요합니다.
여러분, 선생님 고향에 가 보고 싶어요, 안 가 보고 싶어요?「가 보고 싶습니다」 가 봐야지요?「예」 고향에 가면 선생님 어렸을 때의 이야기를 실컷 해줄 것입니다. 선생님은 여러분을 데리고 다니면서 이곳에는 어떤 역사가 있고, 이곳에는 어떤 역사가 있다고 다 가르쳐 주려고 합니다. 통일교인들은 그 가르침을 못 받고 저나라에 가면 북한 땅에 가서 몇천년 동안 수고를 해야 됩니다. 그건 내가 세밀하게 이야기를 해주지 않지만 그런 때가 곧 올 것입니다.
북진통일을 해야 합니다. 무기를 가지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 말로, 이론적으로 싸우는 것입니다. 말로 하자는데 이남에서는 지금 큰일났어요. 여러분은 경주장에 선 현재의 위치를 알고,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기성교회에 져서는 안 됩니다. 알겠지요?「예」 한국 기성교회에서 떠난 하나님은 어디로 갈 것이냐? 여러분은 생각해 봤어요? 그것을 생각해 볼 때 하나님이 얼마나 불쌍해요? 백년에 가까운 한국 기독교 역사인데…. 성경 역사에 없는 축복을 해준 이 터전이, 왜정 때도 침범받지 않게끔 보호했던 이 강토가 6·25사변으로 인하여 사탄한테 밝히다니…. 여기에는 다 원인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성교회를 떠난 것은 사실입니다. 그 하나님을 어디에 모실 것이냐? 어디에 모셔야 되겠어요? 통일교회가 모셔야 되고, 그 다음에는 여러분 자신이 모셔야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하나님을 모셨어요? 아주머니들, 자기 아들딸을 가르치는 선생이 집에 온다고 하면 대접하기 위해 먹을 것을 사러 잘 돌아다니지요? 또, 사위가 온다고 하면 돈을 빌어서라도 준비하지요? 그런 것은 잘하지요? 그런데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그렇게 해봤어요? 그렇게 모셔 봤어요?
교단과 교단이 싸우고 있는 현실을 바라볼 때, 하나님은 거기에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듯 갈 곳이 없는 하나님을 오늘날 통일교회에 모셔야 됩니다. 천년 꿈을 안고 오신 그분, 만년 승리의 참 복지를 다져야할 그분 앞에 여러분은 소망의 실체가 되어 효자 효녀로서 단장을 어떻게 해야 되고, 심성을 어떻게 가져야 되며, 정서적인 인연을 어떻게 마련할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두고 볼 때, 통일교회가 기성교회한테 져서 되겠어요? 과거의 어떤 신부, 수녀들한테 져서 되겠어요? 역사상의 그 누구보다도 가까운 입장에서 하나님을 모셔야 되고, 자기 아버지를 모시는 것보다도 더 잘 모셔 드려야 됩니다. 나라의 군왕이 자신의 보좌를 버리면서도 여기에 와서 쉬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그런 보금자리가 되어야 됩니다.
이 한국 강토에 그런 집이 누구의 집이냐? 여러분의 집이예요? 여러분 집이 그런 곳이예요? 소위 통일교회를 믿는다고 하는 여러분의 집이예요? 하나님이 임재하실 수 있는 세계적인 본궁과 같이 거룩하고, 꽃피어 향기 풍기는 사랑의 동산이 되어 있어요? 여기 있는 아주머니들, 집에 손님이 오면 대접 잘하지요? 그런데 아주머니 집이 그렇게 되어 있어요, 안 되어 있어요? 자기들은 배고프면 밥먹고, 추우면 옷을 입고, 서러우면 서럽다고 타령은 잘하지만 하나님이 서글프고 굶주리는 그 억울한 사정을 누가 아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남자들은 어떻게 해야 되느냐? 자신의 집에 아버지를 모신다는 마음으로 돈이 생기면 아버지 앞에 물건이라도 사다 드려야 됩니다. 비록 실체는 안 계시지만 엎드려 눈물을 흘리면서 '아버지께 드리고 싶어 사 가지고 온 이 감사의 예물을 아버지 앞에 드립니다. 역사과 정에 있어서 수많은 선조들이 갈라서 드렸던 그 제물을 대신하여 혼자 드리는 이 마음을 받으소서. 이 민족이 잘못하고 과거 선조들이 잘못했던 것을 용서해 주시옵소서'라고 통곡하며 기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또한 아들의 손을 이끌고'하나님한테 가서 인사드리자' 해 가지고 정성 들이고, 사연을 나누고 싶지만 아버지의 실체가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을 아들을 붙들고 통곡을 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드리던 것과 마찬가지로, 갈라서 제물을 드려야 하는 아브라함의 그 심정보다도 갈라서 받아야 하는 저끄러진 역사적 사실을 아는 우리는 내 아들딸뿐만 아니라 나 자신까지도 헌제의 실체로서 아버지께서 받아 주실 수 없겠습니까 하는 기도를 드려야 됩니다.
자기 아내와 함께 아버지를 모실 수 있는 환경이 되지 못하면 부부가 손을 맞잡고 '저희 두 사람을 당신의 한을 해원성사하는 데에 제물로 삼으소서. 쪼개는 제물이 아니라 가정적인 승리의 제물로서 받아 주시옵소서' 하면서 통곡의 기도를 드려야 되는 것입니다.
지금 세상에서 하나님이 계실 수 있는 곳이 어디 있나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이 아버지라고 하는 그 하나님이 계실 곳이 어디 있어요? 여러분의 집이예요? 여러분의 집을 생각해 보십시오. 먹을 것 타령, 살림 타령. 무슨 타령 해 가지고 그저 쨍쨍거리는 여러분의 집에 하나님이 들어오셨다가도 이틀, 아니 한 시간도 못 돼서 도망가실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넓고 넓은 이 세계 가운데서 내가 사는 집 안방 고요한 곳에 하나님을 모셔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어디 가시게 되면 나 이상으로 효도하고, 정성들일 수 있는 사람이 없을 것 같아서 내가 안심이 안된다고 아버지를 찾아가고 싶고 모셔 오고 싶은 마음에 불타는 아들이라 딸이라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고는 이 시대에 있어서 하나님을 위로해 드릴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그런 사람이예요?
모심의 전통을 세우자
여러분이 오늘날 통일교회를 놓고 어찌하여 이 교회가 세계적으로 이름난 궁전을 중심삼고 복귀섭리를 하지 못했는가, 어찌하여 통일교회 교인들은 이렇게 수난의 길을 가면서 허덕여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내가 불쌍하기 전에 하나님이 불쌍했다는 사실을 알고, 하나님을 위로하기 위하여 있는 정성을 다 기울이고,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허덕이면서 심정의 굶주림의 길을 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틀림없이 하나님의 사랑을 상속받을 것입니다. 그가 권위를 갖지 못하고 안팎으로 모든 것을 갖추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런 심정을 가졌다면, 하나님은 그래도 사막과 같은 이 천지 가운데서 내가 있을 만한 곳은 이 집밖에 없다고 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심정을 가진 사람의 집이라면 그 집이 아무리 허술하다 하더라도, 초가삼간이라 하더라도, 그 집은 세계 어떤 궁전보다도 나은 집이 될 것입니다. 거기에서 대접하는 정성어린 밥이 비록 비지밥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도리어 행복한 미래를 다짐할 수 있는 터전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거기에 안식하시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러한 현재의 입장에 있어서 갈 곳이 없는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모실 수 있는 여러분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그 가정을 거쳐서 어디로 가고 싶어하시느냐? 가정을 거쳐서 종족을 찾아가고 싶어하십니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이 종족을 찾아가는 데 있어서 선두에 서 가지고 그 길을 닦아야 됩니다. 그리하여 종족을 찾고 나면 그 다음에 어디로 갈 것이냐? 민족을 향해서 갈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길을 가기 전에 내가 먼저 그 길을 닦아 가지고 하나님을 모시고 가야 되고, 다음에는 국가와 세계를 찾아가는 길을 닦아 가지고 하나님을 모시고 가야 됩니다, 이렇듯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내가 욕을 먹고 매를 맞고 조롱을 받고 핍박을 받고 죽음이 엇갈 리는 교차로에 서더라도 임 향한 일편단심 변할 줄이 있으랴 하는 심정을 가져야 됩니다. 그 길밖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현재 만나서 은혜받았다고 좋아할래요? 그런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왔다가 그냥 돌아서면 안 됩니다. 이왕에 왔으면 모시고 가야 됩니다. 모시고 가야 되는 것입니다. 부모는 사랑하는 자식을 위해서, 효자는 나이 많은 부모를 위해서 좋은 것이 있으면 먼저 주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위하는 데 있어서도 어디 갔다 오게 될 때, 시장에 들러 좋은 음식을 사 가지고 와서 그것을 정성의 표시로 하나님 앞에 드리고 싶어 제사상을 차려 놓고 절을 한다고 해서 우상숭배가 아닙니다. 그런 생활적인 인연이 있다면 하나님이 얼마나 좋아하시겠어요? 하나님을 위해서 남편과 아내와 아들딸이 그렇게 한다면, 하나님은 비로소 인간 세상에 있어서 그 가정을 중심삼고 웃어 볼 수 있는 인연, 기쁨의 소망을 가질 수 있는 인연을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 가정은 이땅에 있어서 하나님이 대할 수 있는 첫번째 가정이 되기 때문에 그 가정의 후손을 통해서 역사는 뒤넘이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통일교회에서는 모심으로써 구원을 받는다고 합니다. 시의(侍義), 즉 모심으로써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춘하추동 양복을 해 입는 남자들이 있으면 아버지께도 해드려야 됩니다. 그분이 체(體)를 가진 분이 아니기 때문에 대신 정성을 모았다가 한 절기가 되면 그 모은 정성을 누가 보나 안 보나 자기 혼자 교회를 위하여 하나님을 모시는 마음으로 눈물을 흘리면서 연보궤에 드리게 되면 그것은 법궤와 같은 것입니다. 그것이 관념적이 아니라 감정적으로 체화(體化)되고 표현될 수 있는 생활이 되어야 됩니다.
이것은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고 모시는 데 있어서 누구한테도 져서는 안 된다는 전통을 세우는 것입니다. 그런 전통을 세워야만 그의 아들딸에게도 좋은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자리 잡을 수 있는 후손을 만들어 놓고 가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이 땅 위에 계실 수 있는 땅의 발판을 넓혀 놓을 수 있습니다. 이런 문제는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선생님은 지금가지 맨살을 드러내 보인 적이 없었습니다. 요즘에는 그때가 지나갔기 때문에 어느 정도까지는 내놓지만 말이예요. 흥남 감옥에 들어가 비료공장에서 일할 때, 그렇게 더운 오뉴월 복중에도 대님을 매고 했습니다. 정강이도 내 놓지 않았습니다. 요즘은 반소매 옷도 입지만 옛날에는 그런 옷을 참 싫어했습니다. 내 몸을 통해서 땀을 흘려 가지고 하나님 앞에 바쳐 드려야 할 거룩한 길이 남아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위하여 정성을 다하는 데서는 누구한테도 이 몸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혼자 잠을 잘 때도 팔 다리를 벌리고 자지를 않았습니다. 위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입니다. 자는 데에도 예법이 있는 것입니다.
요즈음 퉁일교회 여자들 버릇이 참 없습니다. 내가 보고도 모르는 척하지만, 여자가 대낮에 안방에서 끈 대자로 누워서 드르렁 드르렁 코를 골며 낮잠을 잔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그런 버르장머리 없는 여자가 어디 있어요? 하나님은 이 시간에도 쉬지 않고 계십니다. 그것을 생각할때 잠을 잔다는 것이 틀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6천년 동안 쉴 수 없는 자리에 서서 여러분의 운명을 가려주기 위해 복귀의 행로를 걸어 나오면서 지금 이 시간도 나와 더불어 생사의 결단을 짓기 위해 방어진을 치고 보호하고 계시는데, 어떻게 잘 수가 있느냐는 것, 거기다가 잠잘 시간이 되었다고 네 활개를 떡 펴고 자게 되어 있어요? 잠을 자더라도 엎드려서 기도하면서 자는 것입니다. 정 피곤하면 옆으로 누워서 자는 거예요. 그렇게 잠든 다음에는 자기에게 책임이 없습니다. 까짓것 차 버리 겠으면 차 버리고 말겠으면 말고, 그것은 괜찮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런 생활을 해야 됩니다.
하나님은 어디를 가다가도 안된 것을 보게 되면 가슴 아파하면서 남모르게 눈을 흘리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종족과 민족과 국가를 갖추어 나가야 할 도상에 있기 때문에 여러분은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을 사랑해야 됩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사는 아들딸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한 경주장에 선 통일교회의 현재 위치는 가정과 종족을 중심삼고 국가와 세계로 하나님을 모시고 가야 할 입장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다가오는 수많은 시련의 십자가를 달게 받고, 먼저 눈물을 흘릴 수 있는 길을 가려 나간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더더욱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길이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기를 바라면서 말씀드렸습니다.
기 도
아버님, 이제 며칠 남지 않은 9월의 마지막 안식일을 맞이했습니다. 여기에 모인 당신의 자녀들은 각자의 사정과 처지와 입장이 다르옵니다. 저희들은 현재 어떤 위치에 서 있느냐 하는 것을 자각해야 되겠습니다. 나는 도대체 어떤 선조의 후손이며 어떤 방향에 처해 있는가 하는 그 위치를 자각해야 되겠습니다. 가만히 있는 것 같지만, 인생행로에 있어서 경주장에 서 있는 사람과 같은 입장에 선 것임을 알았사옵니다. 이러한 입장에 있는 저희들은 가정의 정서적인 터전을 중심삼고대 사회와 대 국가적인 관계를 맺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저희들의 필연적 운명길인 줄 아옵니다.
모든 존재물에게는 사위기대 노정 위에 정분합작용권을 거쳐가야 할 노정이 있기 때문에 저희들에게도 가정을 중심삼고 사회와 국가를 연결 시켜야 할 길이 남아 있는 것을 생각하게 되옵니다.
아버님, 이 세상에는 오른쪽이 있고 왼쪽이 있습니다. 오른쪽을 통하여서 왼쪽으로 돌아갈 수 있는 하나의 회로를 조성하여야 할 이상적인 사회의 기대권을 찾아 나온 것이 아버지의 뜻이기 때문에, 아버님께서 지금까지 몰고 나오셨다는 것을 아옵니다.
지금 이 세계는 민주와 공산의 두 세계로 갈라져서 대결하고 있습니다. 가정적인 기원도 확실하지 않고 세계적 종점도 확실치 않은 현실이옵니다. 이러한 세계와 아버님이 표준하시고 바라시는 심정의 터전이 절대적인 자리에서 관계를 맺어 가지고 그 심정이 세계를 넘어 전 인류의 마음을 거쳐 하나의 주권 사회로 등장하는, 최후의 승리권에 귀일되는 노정이 있어야 되겠사옵니다.
오늘날 그 길을 찾아가야 할 것이 통일교회 무리라고 한다면, 저희들의 생활은 나라와 더불어 생활하는 데 있어서 대표적인 생활이 되어야 되고, 세계인과 더불어 생활하는 데에 있어서 치우치지 않아야 되고, 하나의 주권 국가를 대표하여 충효의 도리를 거쳐가는 데 있어서 둘이 아닌 하나의 길을 가야 된다는 것이 철칙인 것을 저희들은 알았사옵니다.
부모를 모시는 자식은 부모가 바라지 않더라도 자식으로서 부모에게 효성의 도리를 해야 되고, 군왕을 모시는 신하는 군왕이 바라지 않더라도 신하로서 군왕에게 충성의 도리를 해야 되는 것이 아니옵니까? 아침 해를 바라보는 것도 자기를 위해서 보는 것이 아니라 부모를 위해서 바라보는 것이요, 밥을 먹는 것도 자기를 위해 먹는 것이 아니라 부모를 위해서 먹는 것이요, 생활하는 것도 자기를 위주로 하여 생활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를 위주로 하여 생활하는 입장에 서야 되겠습니다. 이렇듯 부모에게 자기의 일체를 바치는 자리에 설 때 효라 하는 것이요, 군왕에게 일체를 바치는 자리에 설 때 충이라고 하는 것을 아옵니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 오늘날 저희들에게 있어서는 '나'가 너무나 많았습니다.
아침 햇빛을 바라볼 때, 하나님을 흠모하면서 역사는 더럽혀졌지만 당신이 찬란하게 지었던 이 광명한 태양 빛은 변함없는 광명한 빛이라고 찬양할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되겠사옵니다. 신선한 공기로 호흡하게 될 때도 타락한 역사가계를 지나온 공기지만 이 공기는 변함없다고 찬양할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되겠사옵고, 물을 마시는 자리에서도 타락한 역사세계를 지나온 물이지만 이 물은 변함이 없다고 찬양할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되겠사옵니다.
본래 인간 자체의 근원이 되는 귀중한 생명요소는 변함이 없는데, 이 사회현상은 변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당신으로부터 지음받은 태양빛과 물과 공기의 변하지 않는 본질적인 것을 흡수해서 그와 같이 변하지 않는 나 자신이 되겠다고 다짐할 수 있는 당신의 아들딸이 되어야 되겠사옵니다.
지금까지 당신을 자신의 생활권내에 모시면서 당신께 효도하고 충성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고 자부하는 한 개인이나 무리는 이 땅 위에 나오지 않았사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가르쳐 주고 깨우쳐 주기 위하여 통일교회 교리가 나왔고,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 심정적인 인연의 역사를 빛어내야 할 것이 저희의 갈 길인 것을 확실이 알았사옵니다.
저희는 아버지를 진정히 사랑할 줄 아는 효자가 되어야 되겠고, 이 세의 도리를 이어받을 수 있는 아들딸이 되어야 된다는 것을 확실히 깨닫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이 수난길에 계시기 때문에, 저희가 기쁜 날을 맞이하겠다고 하는 것은 원수와 짝하는 길에 가깝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사옵니다. 아버님이 고통 가운데에 계시기 때문에, 저희들이 안식하겠다고 하는 그 자체가 아버님을 배반하는 자리가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되겠사옵니다.
절대자인 아버지가 소원하시는 그곳에 가기 위해서는 슬픔의 길을 거쳐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 세계는 타락된 세계이기 때문에 아버님이 원하는 세계와 반대되는 세계요. 반대의 세계이기 때문에 사탄이 주관하는 세계요, 사탄이 주관하는 세계는 아버님과 반대되는 세계이기 때문에 일체가 아버님과 반대되는 자리에 서게 되는 것을 아옵니다. 저희들은 부정의 자리를 거쳐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확실히 깨닫고, 내일의 긍정적인 자기 자체를 발견하고 긍정적인 사회와 국가를 인정할 수 있는 그 자리를 향하여 싸워 나가야 되겠사오니, 그 싸움터에서 지치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최후의 승리를 갖추어 아버지 앞에 부끄럽지 않고 아들의 권위와 딸의 권위를 가질 수 있는 충효의 자체로서 나타날 수 있는 아들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님, 오늘날 통일교회는 이 자리까지 나왔습니다. 남 모르는 이 길을 나오는 데 있어서 그 누구도 친구되어 주지 않고 반대하며 망하라고 하는, 원성이 가득한 자리에서도 망하지 않고 묵묵히 이 자리까지 나오고 보니. 아버님의 슬펐던 인연을 더욱더 느끼게 되고, 아버님이 외로웠던 것을 더욱더 느끼게 되고, 억울하였던 아버님을 더욱더 느끼고 깨닫게 되옵니다. 통일교회를 중심삼고 이 땅 위에서 자랑할 것이 있다면 그 누구로 말미암아 자랑하게 된 것이 아니라 오직 아버지로 말미암아 되어졌다는 것을 저희들은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영광의 아버님이 피를 흘리며 다짐했던 자리와 사정을 저희들이 알게 될 때, 저희들은 그 자리를 흠모해야 되겠고, 그 자리를 마음으로 동경해야 되겠고, 그 자리가 아버님과 더불어 몸부림쳐야 할 자리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잊을래야 잊을 수 없고, 교회를 멀리할래야 멀리할 수 없는 통일교회 무리는 교회를 중심삼고 모이고 싫은 마음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교회가 가는 길에 있어서 누구보다도 선두에 서서 달려야 하는 것이 저희의 전통적인 역사인 것을 알게 되옵니다.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내 뜻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자리에서 사라지는 한이 있더라도, 아버님은 더 애달픈 자리에서 나를 부등켜 안고 운행할 수 있는 길을 찾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오늘도 가고 내일도 가야 되겠습니다. 이달에도 가고 금년에도 가야 되겠습니다.
1971년, 이 해는 아버지 앞에 바쳐져야 되는 복된 해로서 6천년의 복귀 역사 중에서 최고 정상의 고개를 넘는 해라는 것을 연초에 말하였습니다.
역사는 변해 나오고 있고, 세계는 급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누구로 말미암은 것이며 누구를 위한 것이냐 할 때, 이것은 아버님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아버님의 아들딸을 위한 것임을 알게 되옵니다. 이러한 것을 생각할 때, 철부지한 자녀들을 앞에 놓고 서러워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저희들이 염려하면서, 교만한 모습으로 스스로 잘났다고 하는 그런 입장을 떠나 무릎을 꿇고 어린아이와 같이 당신의 분부의 말씀만이 생명의 요인이요. 당신이 지도하는 방향만이 죽음을 각오하고 가야 할 길인 것을 아는 철든 아들딸이 되어지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전국에 널려 있는 당신의 자녀들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더우기 일선에 나가 있는 어린 딸들을 아버지께서 지켜 주시옵소서. 그들이 눈물을 짓거들랑 아버지께서 위로하여 주옵고, 제가 그러한 자리에 있을 때 당신이 위로하던 것같이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에도 스승을 그리워하면서 기도하고 있는 무리가 많은 줄로 알고 있사오니, 당신께서 친히 같이하여 주옵소서.
국내에서도 그렇지만 더욱더 이번에 한국을 다녀간 일본의 지구장들이 일본을 대해서 혁신적인 행로를 개척해야 할 시점에 놓여 있고, 일본의 운세와 더불어 아시아의 운세를 좌우하는 중차대한 사명을 부여안고 갔사오니, 아버지, 그들을 지켜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한국에 있어서 통일교단이 결속된 심정의 터전을 중심삼고 3국을 연결하여 하나되게 하시고, 아시아의 어떤 민족이 사탄권을 대신하여 나서더라도 그 심정기준을 몇십배 능가하는 기준을 세우시어서 새로운 세계적인 기원을 마련할 수 있는 섭리의 때가 어서 속히 오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세계에 널려 있는 뭇자녀들에게도 친히 같이하여 주옵고, 영계에서 한을 품고 있는 수많은 애혼들도 아버지께서 불쌍히 여기셔서 후손들을 통하여 해원성사할 수 있도록 탕감복귀의 이름을 그들에게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후손들이 아니 갈래야 아니 갈 수 없게끔 한 길로 몰아 주시옵고, 그럴 수 있는 날이 어서 속히 오게 허락하여 주옵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리옵니다. 만만세의 은사와 사랑이 길이길이 같이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경주장에 서 있는 경쟁자와 같은 입장에 있는 저희들이 보다 큰 사랑을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하면서 나가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현재의 위치에서 아버지 앞에 산제물로서 바쳐질 수 있는 자아를 가꾸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면서, 모든 말씀 참부모의 이름으로 아뢰었사 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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