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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백성(33-40)
폭력적인 국가는 폐허의 무덤과 이리 때의 소굴이 될 것입니다. 무자비한 권력은 아무도 살 수 없는 황무지처럼 참혹한 모습을 낳을 것입니다. 권력과 권위의 오용은 하나님의 진노를 몰고 오는 일임을 기억하면서, 우리는 두렵고 떨림으로 파수꾼이 되어 기도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33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딸 바벨론은 때가 이른 타작 마당과 같은지라 멀지 않아 추수 때가 이르리라 하시도다 34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나를 먹으며 나를 멸하며 나를 빈 그릇이 되게 하며 큰 뱀 같이 나를 삼키며 나의 좋은 음식으로 그 배를 채우고 나를 쫓아내었으니 35내가 받은 폭행과 내 육체에 대한 학대가 바벨론에 돌아가기를 원한다고 시온 주민이 말할 것이요 내 피 흘린 죄가 갈대아 주민에게로 돌아가기를 원한다고 예루살렘이 말하리라 36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네 송사를 듣고 너를 위하여 보복하여 그의 바다를 말리며 그의 샘을 말리리니 37바벨론이 돌무더기가 되어서 승냥이의 거처와 혐오의 대상과 탄식 거리가 되고 주민이 없으리라 38그들이 다 젊은 사자 같이 소리지르며 새끼 사자 같이 으르렁거리며 39열정이 일어날 때에 내가 연회를 베풀고 그들이 취하여 기뻐하다가 영원히 잠들어 깨지 못하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40내가 그들을 끌어내려서 어린 양과 숫양과 숫염소가 도살장으로 가는 것 같게 하리라(33-40)
바벨론은 바다 괴물이 되어 폭력과 학대를 자행하였습니다. 그로 인해 아벨의 피처럼 신원하는 소리가 땅에 가득합니다. 불의에 고통을 당한 자들이 하늘을 향해 탄원하며 법정에 고발하였습니다. 폭력국가는 하나님을 대항하는 일이며, 하나님께서는 약자들의 호소에 응답하시는 분입니다.
⑴ 추수 때(33)
(일반적으로 33절은 27-32절에 붙여 읽는다.) 바벨론의 방어선이 침략군에 의해 차례로 허물어지는 긴박한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준 후에 여호와께서 다시금 바벨론의 종말이 왔음을 선포하십니다. 익은 곡식 잘라 거두어들이는 추수와 마른 곡식의 이삭을 떠는 타작은 자주 심판의 표상으로 사용됩니다. ‘때가 이른’은 문자적으로는 밟아야 할 때가 됩니다. 보통 성문 안쪽 평편하고 통풍이 잘되는 곳에 마련된 타작마당은 가을 수확기 한두 달만 사용되고 나머지 열 달은 그대로 놀렸습니다. 추수 때가 돼서 타작마당으로 다시 사용하려면 바닥을 발로 밟아 다시 평평하게 만들고 깨끗하게 정리해놓아야 했습니다. 타작 작업에 들어가기 전에 타작마당을 발로 다지는 단계가 비유로 사용됩니다. 이제 곧 바벨론에 추수 때가 닥칩니다. 사람들이 타작마당을 밟듯이 바벨론이 침략군에 의해 곧 짓밟힙니다.
⑵ 시온의 호소(34-35)
바벨론이 자기에게 저지른 악행을 시온/예루살렘이 재판장 여호와께 호소합니다. 시온은 자신을 한때 맛있는 음식으로 가득 찼던, 그러나 이제는 깨끗하게 빈 ‘그릇’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을 자기 배를 가득 채워도 배부르지 않은 괴물(큰 뱀)에 비유합니다(34). 바벨론은 시온을 정복하고, 시온의 귀한 것들은 모두 빼앗아 가져가고 빈 그릇(껍데기)만 남겨놓았습니다. ‘나를 쫓아내었으니’는 유배를 가리킵니다. 배를 채운 바벨론은 시온 주민들을 사로잡아 갔습니다. ‘큰 뱀’으로 옮긴 ‘바다 괴물’로 옮기는 것이 좋습니다. 바벨론 왕을 바다 괴물에 비유하는 의도는 이중적입니다. 한편으로는 바벨론 왕의 엄청난 힘을 보여줍니다. 바벨론은 유다가 상대하기에는 너무 거대한 세력이었습니다. 바벨론이 잡아먹으려 하면 유다는 먹힐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바벨론이 이미 멸망에 떨어졌음을 시사해줍니다. 여호와께서는 일찍이 탄닌의 머리를 부수셨습니다(참조. 시편 74:13). 바벨론이 무서운 괴물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여호와에 의해 이미 그 운명이 결정된 괴물입니다.
바벨론의 무자비한 폭력에 넘겨져 피를 흘린 시온은 재판관 여호와께 되갚아주시길 호소합니다(35). 시온이 바벨론에 당한 대로 바벨론에게 그대로 되돌려주어야 합니다. 바벨론은 시온에서 저지른 폭력의 결과에 책임져야 합니다. ‘내가 받은 폭행과 내 육체에 대한 학대’로 번역한 히브리어 표현은 ‘나의 폭행과 나의 살’로 그 의미가 불분명합니다. 뒤따르는 ‘내 피’와 함께 보면, 살이 찢기고 피가 흐르는 야만스러운 폭력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의 호소에 긍정적으로 반응하십니다. 36절 도입부의 ‘그러므로’는 여호와께서 시온의 고발과 호소에 전적으로 동의하셨음을 시사해줍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의 송사를 들어주어(50:34) 그를 위하여 보복해주십니다. 바벨론의 바다를 말리시고 그의 샘을 메마르게 하십니다. 바다와 샘은 유브라데 강과 그 수로들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유브라데는 바벨론의 생존에 결정적이었습니다. 그 강물이 말라버리면 바벨론도 말라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벨론이 돌무더기가 되어 승냥이의 소굴이 되고 인적이 끊깁니다(참조. 9:11).
⑶ 영원한 잠(38-40)
‘혐오(의 대상)과 탄식 거리’는 ‘놀람(의 대상)과 조롱거리’로 옮기는 것이 좋습니다. 갈대아인들이 굶주린 사자들의 무리에 비교됩니다(38). ‘그들’의 신분에 관해 본문이 직접 언급하지는 않지만, 39-40절의 묘사는 바벨론 백성에 적합합니다. 메소포타미아에서 사자는 자주 왕을 상징했는데, 여기서는 바벨론 사람들로 확장됩니다. 갈대아인들이 젊은 사자들처럼 으르렁거리며 울부짖습니다. 여호와께서 바벨론의 바다와 샘을 말리기로 하셨지만, 이를 모르는 갈대아인들은 무서울 것이 없었습니다. 비유가 (사냥에 나서는) 굶주린 사자에서 (전쟁의 승리를 즐기는) 주연 자리로 뀝니다. 여호와께서 술자리를 마련하시고 이들이 술 취해 ‘영원히 잠들어 깨지 못하게’ 하십니다(39). 여호와께서 바벨론을 잡으려고 올무를 놓으셨던 것처럼(50:24) 술자리를 베풀어 이들이 정신을 잃고 취하게 하십니다. ‘열정이 일어날 때에’의 원문은 ‘그들이 뜨거워졌을 때’입니다. 싸움과 약탈의 흥분과 열기로 들뜬 상태에서 연회에 참석해 소란스럽게 떠들며 코가 삐뚤어지게 마시다가 그 자리에 쓰러져 깊은 잠에 빠집니다. 승리에 도취한 바벨론이 자신의 앞날을 생각지 않고 즐기기만 하다가 영원한 멸망에 떨어집니다.
40절에서는 다시 표상이 바뀝니다. 38절의 경우처럼 바벨론이 짐승에 비교되는데, 도살장으로 가는 어린 양과 숫양과 숫염소에 비유됩니다. 여호와께서 갈대아 인들을 어린 양들처럼, 숫양과 숫염소들처럼 도살장으로 끌고 가십니다. 으르렁 거리며 어린 양과 숫양과 숫염소에 달려들던 사자와 같았던 바벨론이 술에 취해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숫양과 숫염소’가 됩니다.
바벨론에 대한 애가(41-44)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은 탐욕스러운 권력의 말로(末路)는 매우 비참합니다. 아무리 화려한 도시와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심판 앞에 죽음의 적막 속으로 사라질 것이며, 여호와의 분노의 칼은 견고한 성벽까지 날려버릴 것입니다. 교만한 바벨론은 함락되고 제국의 영광은 참혹하게 몰락할 것입니다.
41슬프다 세삭이 함락되었도다 온 세상의 칭찬 받는 성읍이 빼앗겼도다 슬프다 바벨론이 나라들 가운데에 황폐하였도다 42바다가 바벨론에 넘침이여 그 노도 소리가 그 땅을 뒤덮었도다 43그 성읍들은 황폐하여 마른 땅과 사막과 사람이 살지 않는 땅이 되었으니 그리로 지나가는 사람이 없도다 44내가 벨을 바벨론에서 벌하고 그가 삼킨 것을 그의 입에서 끌어내리니 민족들이 다시는 그에게로 몰려가지 아니하겠고 바벨론 성벽은 무너졌도다(41-44)
하나님께서는 온 세계를 취하게 하는 금잔으로서 젊은 사자같이, 새끼 사자같이 기세를 올리며 잔뜩 흥분한 바벨론에게(51:7) 연회를 베푸십니다. 교만한 바벨론은 자신들에게 마땅한 잔치라고 여기겠지만, 영원히 깨어나지 못하는 죽음의 연회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
⑴ 애가(41-43)
이 애가는 바벨론의 멸망을 전제합니다. 한 때 여호와의 망치(철퇴)로 온 세상을 부수었던(20-23) 바벨론이 함락됐습니다. ‘온 세상의 칭찬’(온 세상의 자랑거리)이 민족들 가운데 공포의 대상이 됐습니다(41). ‘황폐하였도다’는 문맥에 맞게 ‘공포의 대상이 됐다’로 옮기는 것이 좋습니다. 특히 느부갓네살은 전리품과 조공과 정복민의 노동력을 착취해서 신 바벨론 제국의 수도 바벨론을 화려하게 건축했습니다. 영원할 것 같았던 바벨론의 영화가 한순간에 끝장이 났습니다. 50:23에서처럼 감탄사 ‘어찌’를 두 번 사용해 탄식의 강도를 높입니다. (개역개정은 ‘슬프다’의 삽입으로 대체했다.) 세삭은 바벨론의 암호에 해당합니다. 바벨론의 몰락이 홍수로 인한 침몰에 비교됩니다. 바닷물이 밀려오고 바벨론은 요란한 파도에 잠겨 버립니다(42). 홍수가 사납게 땅을 뒤덮고 모든 것을 휩쓸어 가듯이 적이 바벨론 온 땅을 뒤덮고 침략해옵니다(참조. 46:7 이사야 8:7, 17:12-14). 적의 공격으로 성읍들이 파괴되고 ‘마른 땅과 사막’이 됩니다(43). 유브라데 강의 풍부한 수량과 촘촘하게 설치된 관개 수로 덕분에 물 부족을 모르던 바벨론이 메마른 땅이 됩니다. 36절에서는 여호와께서 바벨론의 바다와 샘을 말리시는데, 여기서는 적에 의해 바벨론이 마른 땅이 됩니다. 물이 없기에 사람이 살 수 없는 불모지가 되고, 그곳을 지나는 사람도 없게 됩니다. 고대적 사고에 따르면 폐허가 된 도성은 신의 저주가 내린 곳이기에 사람들은 멀리 돌아갔습니다.
⑵ 바벨론의 심판(44)
바벨론의 멸망을 전제하는 애가가 끝나고, 여호와께서 다시 바벨론의 멸망을 선포하십니다(44). 여호와께서 ‘벨을 바벨론에서 벌하고 그가 삼킨 것을 그의 입에서’ 끄집어내십니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처럼(34) 바벨론의 신 벨(50:2)도 게걸스러운 괴물에 비유됩니다. 벨이 삼킨 것이 전자의 경우처럼 시온을 가리키는지는 불분명합니다. 여호와에 의한 바벨론 제국의 신 벨의 징벌은 이중적입니다. 벨로 불리는 말둑의 무능력뿐만 아니라, 바벨론 제국이 여호와의 통치 아래 있음을 보여줍니다. 화려하고 거대한 건축물로 치장된 제국의 수도 바벨론은 민족들의 시선을 잡기에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정치는 물론 경제의 중심지였기에 이방인들이 바벨론으로 몰려들었는데, 앞으로는 그럴 일이 없게 됩니다. 바벨론의 자랑인 성벽의 무너짐(50:15; 51:58)은 바벨론의 완전한 멸망을 상징합니다. 넓은 문맥에서는 예루살렘 성벽의 파괴(참조. 39:8b; 52:14)에 연결됩니다.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그 성벽을 허물었던 바벨론이 그대로 되갚음을 당합니다.
권력은 영원할 수 없고 절대 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합니다. 귀 있는 자들은 듣고 철저한 새로움으로 매진해야 합니다. 지금 여기서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영적인 나태는 금물입니다. 우리는 이리 떼에게 던져진 양으로서 분별력과 기백을 갖고 담대히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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