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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2)포철의 최대위기(2)
외자부는 설비공급계약을 맺었지만 혹시 더 빠른 납기에 공급할 수 있는 업체가 있나 전 세계를 두들겼다. 다들 전로제어반들을 제철소에 공급했던 회사들이지만 하나같이 설계도면을 요구했다. 설비공급자는 배선도면은 공급하지만 설계도면은 주지 않았다. 특히 일본업체들은 가끔 일본 통산성주식회사처럼 후지덴끼 몫이라고 대응조차 하지 않았다. 방법이 없었다 그저 후지덴끼에 목을 매달고 기다리는 수밖에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부품을 세척해서 하나하나 작동여부를 체크했다. 그것도 일본사람들이 쓸데없는 미친 짓을 하는 것으로 보고 조롱하듯해서 그들이 주변을 맴돌지 않은 심야에 했다. 눈이 번쩍 띄었다, 그렇게 사염화탄소로 닦아서 신주 다루듯이 말린 부품들이 겉모양이야 그을려 거무틱틱하지만 상당량이 제 기능을 발휘하는 것이다. 그러자 전로 3기(#1,2,3호) 제어반으로 단 1기용이라도 살려볼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용광로의 용선처리가 쉬워져 제철소도 한숨을 쉬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할 능력이 없었다.
전 직장 상사를 비롯해 동문들에게 전화를 드렸지만 국내에서는 불가능하다는 답뿐이었다. 단지 K산전이 그런 일을 시작했고 후지덴끼와 기술제휴를 맺고 있다는 귀중한 정보를 얻었다. 복구본부장에게 보고를 드렸다. 그도 여기 저기 루트를 두들겼지만 수리도 불가능하지만 수리가 된다 해도 보증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산하에 아끼는 중고대 후배가 있었다. 직장까지도 후배였다. ROTC장교 근무를 마친 그를 회사에 추천해서 전 직장에서 함께 근무했다. 그와 마주앉자 우리가 해볼 방법을 생각하고 생각하면서 한 개의 제어반의 부품을 장착했다. 그게 배선 후 작용할 것인지는 모르지만 부품만은 제 기능을 발휘했다.
일본을 다녀오신 회장님이 갑자기 새벽에 현장에 오셨다. 모두들 한 열흘 가까이 집에도 못 가고 가마니 위에서 새우잠을 자서 얼굴들이 말이 아니었다. 옷은 회사가 집에서 전달해주어 그런 대로였지만 거의 매일 샤워를 해도 피로에 지친 얼굴은 어쩔 수가 없었다.
회장님은 가마니에 털석 앉으시며 건강부터 물었다. 견뎌야 산다는 것이다. 그러시면서 일본에서 최대한 납기를 단축한다지만 임시 복구라도 수 없는가를 물으셨다. 직감적으로 일본에서 공기단축이 아닌 노력하겠다는 답을 들으신 것 같았다.
그간의 접촉했던 회사들의 상황을 보고 드리면서 전로 3기 제어반으로 1기라도 살려보고 싶지만 그 회사에서 할 의사도 없고 보증도 할 수 없다고 한다는 보고를 드렸다. 회장님께서 ‘그래’ 한마디하시고는 수리비를 날리고 보증을 못 받드라도 해 보자는 것이다. 수리비용이 생산손실에 비할 바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마 회장님도 지프라기라도 잡고싶은 심정이었으리라 믿는다. 우리 모두가 그랬었다. 모든 일은 회장님이 직접 주선하시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덜컥 겁이 났다. 수리해서 안되는 경우 그 비용에 대한 부담은 설사 그로 인해 회사를 떠나더라도 두고두고 따라다닐 것만 같았다.
반나절이 지나 회장실에서 호출이 왔다. 복구본부장도 함께 계셨다. 수리해서 설사 작동되지 않드래도 책임을 묻지 않겠다며 연락이 되어있으니 기술적인 사항에 대해 협의하라는 것이다. K산전에 전화를 드렸더니 이미 지시를 받았는지 보증을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수리를 해 보겠다고 했다. 이런 반전은 보증을 하지않는 조건도 있지만 아마 관계기관에서 주선해 준 덕으로 안다.
자칫하다 간 그들도 자신들의 기술제휴선과 문제가 될 수 있어 모든 일은 극비로 둘만 알고 다른 장소에서 작업을 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기능을 잃은 부품을 후지덴끼에서 공급하지 않을 경우 대책이 없으므로 자체 기술진이 우선 현장을 보아야겠다고 하셨다.
그날 바로 기술진이 포항으로 내려왔지만 일본인들이 배회하는 낮시간에는 호텔에서 대기시켰다가 한밤중에 모셔왔다. 그들은 경우에 따라 부품공급을 받지 못할 수도 있다며 부품확보가 우선이라면서 보석 다루듯이 닦아 놓은 부품들 보다 거의 다 타버린 것부터 자기들 부품리스트와 계속 체크한 후 연락하면 지정하는 장소로 제어반과 세척한 부품을 보내라면서 돌아갔다.
당시는 기술제휴를 했더라도 일본이 부품이나 원자재도 용도를 확인후 공급했다. 그만큼 그들은 한국산업계를 쥐락펴락했다. 그러니 그들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언제든지 그들은 한국 산업계의 목을 조를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고도 시간들은 무심하게 흘러갔다. 복구1반에서는 배설할 전선이 들어오고 건설업체들이 들락거리며 전기실은 조금 부산스러워졌다. 하지만 복구 2반은 별로 할일이 없었다. 그런 어느 날 연락을 받았다. 자정이 넘은 시간에 꼭 필요한 몇 사람만 불러서 아무도 모르게 부품과 전로 1호기용 제어반세트를 회사 철판 운송용 트럭으로 제3의 장소로 반출했다. 자칫하면 상대 측의 기술제휴가 깨어지는 위기에 대한 대비였다. 우리도 일본사람들이 모르게 수리할 제어반을 보내야 하는 것은 피차 마찬가지였다.
처음 반출했을 때는 남은 제어반을 듬성듬성 놓아 일본인들은 눈치를 못 챘지만 며칠이 지나자 제어반이 없어진 걸 알았다. 한구석으로 밀어붙여 둔 제어반을 하나하나 헤아리더니 가와쭈의 일본인들은 제어반 한세트가 사라진 걸 보고 야단이 났다. 어디로 옮겨졌느냐는 것이다. 그들은 내게 집중해서 물었지만 나도 모르겠다며 ‘소우데수네(그렇게 되었네요)’라고 답변을 했다.
급기야는 공갈협박이 들어왔다. 만일 자기들과 약속을 어기고 다른 행동을 하면 설비공급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 경우 포철의 운명은 불을 보는듯 뻔했다. 가와쭈의 대표인 부장에게 매달리는 회사꼴이 우스웠지만 만일을 위해 어떤 경우도 포철에서 새로 계약한 전로 3기분 제어반은 차질없이 구매한다는 각서를 써 줄 수밖에 없었다.
그 후도 나머지 제어반의 부품을 닦고 말리는 일만 계속할 뿐 신규제어반이 들어올 때까지 조금 한가했지만 그렇다고 집에서 출퇴근은 허용되지는 않았다. 심야에는 후배와 유선으로 제어반 수리상황을 체크해야 했다. 가족들은 모두들 궁금하니까 군부대에 면회 오듯 회사 문 앞에서 음식물이랑 옷이랑을 전해주었다.
일본인들은 각서를 받고서도 무언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신경전을 벌렸다 그들은 바로 K산전을 의심했는지 갑자기 후지덴끼에서 조사를 나왔다고 했다. 하지만 사라진 제어반은 거기 있을 리가 없었다. 가와쭈의 부장은 거의 내 곁에 붙어 다니며 제어반이 어디로 갔는지를 알려고 노력했다. 나도 모른다는 듯 입맛 만 다셨다.
복구본부장이 회장님께 일일보고를 드리는데도 꼭이나 새벽에 순찰을 하셨다. 그러잖아도 사장님이 저녁 늦게 순찰하시어 후배와의 진행사항을 일본사람들이 없는 야밤에 유선으로 하고 겨우 눈을 붙였는데 ‘회장님 출두’라고 연락이 온다. 업체직원들은 하얀 화이바를 쓰고 다니시는 회장님을 몰라보고 저분이 누구시냐며 쩔쩔매는 모습을 보고는 '백 바가지 출동'이라고 들 수군거렸다.
그러면서 한달이 지났다. 후배가 수리가 거의 다 되어간다는 좋은 소식을 보내주었다. 현지에서 24시간 작업을 계속한 덕으로 이제 우리가 바빠 질 차례였다. 전로 1호기당 이삼십개가 넘는 제어반이 들어오는 즉시 제어반당 수백개가 넘는 선을 제자리에 정확히 결선해야 했다. 단 한 개라도 틀리면 기계는 오작동을 한다. 다행히 건설당시 작업을 했던 건설업체가 연결되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제어반의 반출도 심야에 했지만 반입도 일본기술자들의 눈을 피해 심야에 들여와서 설치했다. 바로 전 제어반에 사람들이 붙어 결선도면을 들여다보며 하나씩 선을 이어 나갔다. 회장님도 사장님도 줄곧 서서 바라보셨다. 직원들이 너무 부담스러워 해서 복구본부장에게 두 분을 모셔가라고 까지했다.
그 다음 날 아침 출근한 일본인 기술자들은 화들짝 놀랐다. 다 타 버린 제어반이 어디서 새것으로 둔갑되어 설치해서 결선을 하고 있었으니 그만큼 놀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한마디로 페기품을 재생해서 무리하게 사용하면 전로까지 망치는 우를 범해 회복불능이 될 수도 있다며 으름장을 놓았다.
우린 들은 척도 않고 며칠밤을 세워 결선을 다 하고 제어반 별로 하나씩 테스트를 하려는 데 갑자기 후지덴끼 요원이 십수명이 들이닥쳐 체크를 했다. 사용가능한 것인지 확인해 봐야겠다며 일본에서 날아온 것이다. 그들은 2-3일을 체크하더니 수십여페이지의 결함을 지적하며 ‘사용불가’라는 보고서를 회장님께 제출했다. 회장님은 보고서를 보여주시며 ‘자네 의견은 어때?’ 라고 하문하셨다. 보고서는 잘못도 지적했지만 화마를 입은 부품의 기능에 대한 우려가 많았다. 내용을 훓어 보다가 거기에 상세 체크리스트가 첨부된 것을 발견했다. 거기에는 어느 곳이 나쁘다는 게 지적되어 있었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Thank였다. 실은 나도 자신이 없었는데 일본기술자들이 지적한 부분만 재 수정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날 밤새 수리를 한 기술자들을 모셔와 일본인들이 없는 심야에 그들 체크리스트를 기준으로 수정을 했다. 그렇지만 막상 작동시키자니 겁이 났다. 만에 하나 그들 지적대로 전로가 이상 작동을 하면 이 보다 더 큰일이 벌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또 하루가 지났다. 회장님이 복구본부장실에서 불렀다. ‘어이 안군, 안 되는 거야? 하며 다구치셨다. ‘만일 잘못되어도 모든 책임은 회사가 지지 자네에게 추궁하지 않아’ 하셨다. 이까지 와서 포기할 수도 없었다. 만에 하나 잘못되어도 제어반에는 차단장치가 설치 되어있었다. 그럼 그때 수정하면 된다는 생각이 들어서
‘하루 더 마지막 체크를 하고 시운전을 하겠습니다’라고 답을 드렸다. 회장님은 ‘하늘이 포항제철을 살려 주실건가?’ 하며 웃으며 자리를 떠나셨다.
밤새 보고 또 봤다. 수백 가닥의 전선의 연결상태를 나누어서 재점검했다. 이상하게 보이는 부분은 노란색 리본을 달아 함께 의논했다. 낮부터 조업 측인 제강부가 부산스러워졌다. 곧 시운전을 하기 때문이다. 그날도 일본 사람들은 잘못해서 전로가 제 위치에서 탈락하면 더 큰 일이 생긴다고 협박을 했다.
자정이 넘어서 시운전을 시작했다. 그 다음날부터는 밤낮으로 노골적으로 시운전을 했다. 제강부에서 조업할 수 있다는 답을 준건 그로부터 2-3일 후였다.
모래바닥에 뿌리던 선철을 제강 혼선로에서 예열해 전로에 장입했다. 전로 1호기가 우렁차게 돌아갔다. 모두들 만세를 불렀다. 아마 그날이 사고 이후 44일째로 기억하고 있다. 첫 차지(charge) 전로조업이 끝나는 걸 보고 집으로 돌아와 씻는둥 마는둥 정신없이 쓰러졌다. 달 반을 제대로 못 잤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 다음날 회사에서 회장님이 찾으신다며 차를 보내어왔다. 아마 하루종일 잠을 잔것 같았다. 복구본부장과 함께 회장님은 남은 것으로 #2호기 제어반 한세트를 더 살려 보자고 하셨다. 물론 책임은 회사가 진다는 것이다. 실무진의 마음도 같았다.
이제는 일본인들 눈치를 볼 필요도 없이 주간에 제어반을 반출하고 아끼는 후배는 현지에서 꼬박 근무를 했다. 한 보름 후쯤 #2호기 전로제어반도 성공적으로 수리되어 가동되었지만 전로 2기로는 용광로의 출선량을 조정해가며 조업을 해야만 했다. 하지만 다 죽어가든 포철의 생명이 이어진 것이다. K산전의 덕이고 온 국가가 힘을 모운 덕이다.
일본 사람들은 계속 수리한 제어반으로 인한 사고는 포스코 몫이고 어떤 경우던 신규 발주한 #1-3호 전로제어반 세트 전부를 포스코가 각서대로 받아야 한다고 욱박질렀다. 하지만 6개월이 걸린다던 납기는 3개월로 줄어들어 1기분을 선 공급하겠다고 했다. 나머지까지 살릴 경우 계약금만 포기하면 그들은 판매가 불확실해지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에게도 여유가 생겼다. 2기가 복구되고 한달쯤 지나 후지덴끼에서 신규제작 한세트가 공급되어 그 어려웠던 한시기를 지내면서 천우신조로 3개월만에 포철은 겨우 정상회복을 했다
가와쭈는 각서대로 3세트를 공급하겠다고 아우성쳤지만 실제 더 이상 구매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각서도 있고 또 무슨 일을 당하면 그들에게 손을 내 밀어야 하는 여건이어서 첫세트 공급 당시 제작중인 세트만 추가 도입하기로 조정했다. 결과적으로 각서에서 한세트를 줄였지만 두번째 세트는 어쩌면 불필요한 장치를 구입한 셈이다. 외자부의 힘이 컸다고 본다.
첫댓글 그 노력 감탄합니다.
하찮은 글을 보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당시 한국의 산업수준을 전하고 싶은 마음의 표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