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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때와 너희의 때
본문<요7:1~9>
<1-2절> 1 그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유대에서 다니려 아니하심은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이러라 2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운지라
‘그 후에’라는 말은 6장의 오병이어 사건 이후에 라는 말입니다. 오병이어 사건은 유대력으로 첫째 달에 지키는 유월절 명절을 앞 둔 시점에 벌어진 사건이었습니다(6:4). 그리고 7장에서 언급되는 초막절은 유대력으로 7월 달에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즉 지금 공부하는 7장은, 6장의 오병이어 표적 이후 6개월이 지난 후에 벌어진 사건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내려가지 않으시고 계속 갈릴리에 거하신 이유가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했던 이유는 요5장에서 벌어졌던 안식일 논쟁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있는 베데스다 연못에서 38년된 병자를 고쳐주셨는데 그 날이 안식일이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 안식일 준수는 생명처럼 여기는 일이었는데, 그것을 어기고 안식일에 병자를 고쳤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고, 게다가 독이 잔뜩 오른 유대인들에게 예수님께서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5:17)라고 말씀하시자, 이 말을 들은 유대인들이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칭하는 예수의 당돌함에 분노합니다. 그것도 시골 어느 촌구석에서 벌어진 사건이 아니라 유대교의 본거지인 이스라엘의 성전,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사건이기에 그 파장은 어마어마하게 큰 것이었습니다.
결국 유대교 당국자들이 회의를 소집해서 예수를 가만히 두어선 안 된다는 결론을 내렸고 예수가 예루살렘에 다시 내려오면 체포해서 처형시키려는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그들의 움직임을 알고 계셨던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일을 삼가고 계셨던 것입니다.
7장의 사건이 벌어진 때는 유대인의 3대 절기 중 하나인 초막절 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민족에게 초막절을 지키라고 하신 이유는 일주일간 가족들이 초막(간이 천막)에서 생활하면서 과거 조상들의 광야생활 40년간 ㅎ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불기둥과 물기둥의 보호를 받으며 ㅎ님의 은혜로 살았던 시절을 되새기라는 의도였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광야 40년은 징계의 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 12명의 정탐꾼을 보내어 가나안을 정탐케 했습니다. 거기서 기골이 장대한 가나안 족속을 보고 10명의 정탐꾼이 회중에 보고 합니다(그들은 키가 장대 같은데다가 네피림 후손 아낙자손까지 있더라. 거기에 비하면 우리는 메뚜기 떼와 같다. 우리는 그들의 적수가 못된다.)- 이 소식을 듣고 온 백성이 낙담하여 ㅎ님을 원망하게 됩니다.
반면에 나머지 2명인 여호수아와 갈렙은 옷을 찢으며 반대로 말합니다(거기는 아름다운 땅이라. ㅎ님이 우리를 기뻐하시면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그러므로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한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 ㅎ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니 두려워 말라)고 말하자 온 회중이 이 둘을 돌로 치려고 할때, ㅎ님의 영광이 나타나서 이들을 지키시고 다음과 같이 호통을 치십니다.
-‘너희가 큰 이적을 수없이 보고도 나를 믿지 않으니 40일 정탐한 날수 하루를 일년으로 환산하여 40년간 너희의 죄악을 질지니라.’ 이렇게 그들의 거역과 불신에도 불구하고 용서하시는 ㅎ님의 은혜를 함축하는 것이 광야 40년인 것입니다. 그렇게 초막절은 백성들의 죄를 죄로 값지 않고 한없이 용서하시는 ㅎ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그런 엉터리 같은 자신들을 ㅎ님 백성으로 삼으신 ㅎ님은 어떤 분이시며 그 ㅎ님의 나라는 어떤 나라인지를 배워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의도와는 달리 이 초막절은 단지 유대 민족의 명절로 지켜지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이러한 일은 오늘날 기독교에서 지키는 각종 절기에서도 그대로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성탄절, 추수감사절, 사순절, 부활절 등의 절기를 지키고 있지만 그 절기에 담겨 있는 본래의 의미와는 상관없이 단지 기독교라는 종교인들의 명절로 지켜지고 있는 것입니다.
골2:16절을 보면 모든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은 장래일의 그림자, 즉 IX의 십자가로 성취되는 ㅎ님의 구원을 보여주는 모형이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절기를 무턱대고 절기로 지키는 것은 ㅎ님의 의도와는 동떨어진 종교의식에 불과한 죽은 행위들입니다. 육신들이 절기를 지킨다고 북적대는 모습에서 사망의 냄새가 나지 않습니까? 거기에 세상 장사꾼들의 상술이 가미되어 교회가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터전이 되어 버렸습니다.
<3-5절> 3 그 형제들이 예수께 이르되 당신이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4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하니 5 이는 그 형제들까지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
여기에 기록된 ‘형제’란 말은 예수님의 육신의 형제들을 말합니다. 기회만 있으면 제자들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내려갔던 형 예수가 어쩐 일인지 갈릴리 시골 촌 동네에 계속 머물러 있는 것을 동생들은 이상히 여겼습니다. 그래서 형 예수에게 “아니 능력이 그렇게 많은데 왜 이런 시골에 처박혀 삽니까? 서울에 가서 뜻을 펼쳐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조언했던 것입니다.
동생들의 이 말은 “큰 인물이 왜 작은 물에서 놀고 있습니까? 자고로 위인은 큰물에서 놀아야 하지 않겠습니까?”라는 말이었습니다. 우리 속담에도 있지요(사람은 서울로, 말을 제주도로.. 성공하려면 서울로 가야한다는 말임) 동생들은 형 예수가 행하는 표적을 보고 그의 위인됨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런 시골 동네에 있을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열광적으로 형 예수를 따르는 수많은 제자들이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형 예수가 갈릴리 촌구석에 계속 머물러 있는 것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켜보던 동생들이 초막절 명절이 가까운 이 때 형에게 이렇게 조언을 한 것입니다. “형님, 이번 명절에 수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몰려 올 텐데 이때 그곳에 내려가서 형님이 누구인지 그들에게 보여 주세요. 저희들이 할 일이 있으면 저희들도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들이 예수를 믿지 않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슨 뜻일까요? 동생들은 형 예수가 하나님이 보낸 메시아라는 것을 어렴풋이 감 잡고 있었습니다. 물위를 걸으신 사건도 제자들을 통해 들었을 것이고, 오병이어 사건도 알고 있습니다. 가나의 혼인잔치의 기적과 병자들을 말씀으로 고치시는 형 예수를 자신들의 눈으로 보아서 잘 알고 있습니다. 이들은 예수를 모세가 말했던 ‘그 선지자’ 즉 약속된 메시아라는 것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들이 예수를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동생들이 예수를 믿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은 그들이 믿고 있는 믿음이 하늘에서 주어진 믿음이 아니라 자신들의 욕망에서 나온 믿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즉 이들의 믿음은 하나님의 언약과 상관없는 믿음이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로 오신 예수를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로 등장하신 그리스도는 죄 문제를 해결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정상으로 회복시키는 그리스도입니다(롬5:1-2). 그러나 동생들이 믿었던 예수는 이러한 하나님의 언약과 아무런 상관이 없이 이 땅의 불행에서 자신들을 건져주고 자신들의 소원을 이루어줄 그리스도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를 믿지 않는 것입니다. 믿음의 내용과 방향성이 어긋난 것이지요. 썩어질 땅의 것을 구하느냐? 아니면 썩지 않는 영원한 것을 구하느냐?
오늘날 기독교가 말하는 예수는 이 세상의 불행에서 우리를 건져주시는 그리스도입니다. 본문대로 본다면 오늘날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있는 자들로 생각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이 말하고 있는 ’믿음’에 대한 바른 이해를 하고 있어야 합니다. 인간의 믿음과 하나님이 택한 자녀들에게 선물로 주시는 믿음은 동일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 사람의 믿음은 내 필요에 의해 ㅎ님께 무엇인가를 얻어내려고 ㅎ님을 섬기는 것으로서 엄밀히 이것은 믿음이 아니라 우상 숭배입니다. 반면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은 먼저 자신의 죄를 보게 합니다. 그래서 죄로 죽은 자기의 실체를 보고 자신이 도저히 ㅎ님의 말씀을 지킬 수가 없는 태생적 죄인, 본질상 진노의 자식인 것을 깨닫게 합니다. 이렇게 절망 가운데 처한 자신의 실존을 발견하고 새언약으로 오신 IX의 십자가를 붙잡게 하시는 게 ㅎ님이 주시는 믿음입니다.
<7: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
예수님께서 동생들에게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내 때와 너희 때를 구별하여 말씀하십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의 라이프 패턴과 우리들의 라이프 패턴(삶의 목적)이 어떻게 다른지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은 늘 자기중심적인 역사관을 갖고 세상을 바라보며 살아갑니다. 스스로 하나님 되고자 선악과를 선택한 인간은 언제나 자기 자신이 모든 일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자기가 마치 자기인생의 주인인양 자기가 주체가 되어 살아갑니다. 이런 성향을 창6장에서는 사람이 어려서부터 모든 계획과 생각이 항상 악할 뿐이라고 규정 합니다. 무슨 죄를 저질러서 악이 아니라 모든 삶의 목적을 자기가 주체가 되어 자기를 위해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때의 중심에는 자기 자신이 아니라 아버지가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들에게 ‘내 때’란 내 꿈이 이루어지는 때를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내 때’란 예수님 자신의 꿈이 성취되는 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계획하신 일이 이루어지는 아버지의 때를 말합니다. 즉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때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같이 아버지의 뜻이라는 큰 틀 안에서 속박된 채 한 평생의 삶을 사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는 자신의 인생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관심사는 자기 인생에 꽂혀 있고 가장 소중한 것은 자기 인생뿐 입니다. 내 꿈이 이루어지는 내 때를 바라보며 지금을 인내하며 살아갑니다.
이러한 우리들 앞에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즉 자신이 주체가 되어 자신 맘대로 살아가고 있는 인간 앞에, 아버지의 때를 위해 자신을 그 도구로서 온전히 드리고자 인간의 몸으로 오신 예수님이 등장한 것입니다. 이 예수님의 등장으로 드러난 사실은 자기만을 위해 사는 이 세상이 어둠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등장으로 선악과 따먹고 죄 아래 갇혀진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가 드러나 버린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가 예수님 앞에 설 때, 내게 있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라 마귀의 형상이라는 것이 드러나게 됩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는 고백이 모두 거짓임이 드러나게 됩니다. 우리의 예배, 헌금, 봉사, 희생, 우리의 선한 행위 속에 감추어진 바탕에는 내 욕망이라는 탐심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빛 앞에 자기 사랑으로 가득한 음란한 우리 마음의 실체가 그대로 폭로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3:19-20절>에서 “3:19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3:20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 20절에서 악을 행하는 자라는 말은, 어떤 윤리 도덕적 범죄를 말하는 게 아니라 자기가 중심이 되어 살아가는 인간의 속성을 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성경은 우리 영혼의 실체를 보여주는 거울입니다. 그 거울이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는 자들은 자신의 모습을 절대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성경이 우리를 죄인이라고 말하니까 그러려니 생각하고 나는 죄인입니다 고백할 뿐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빛을 볼 수 있는 영의 눈이 주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증거하는 예수님의 삶을 흉내내보고자 합니다. ‘예수처럼 삽시다’라는 삶의 목표를 정해 놓고 예수의 삶을 연구해서 예수의 삶을 그대로 살아보고자 애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와 의의 경쟁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예수를 본받자는 것은 복음을 외면하고 힘써 ㅎ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음으로 스스로 멸망의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성화주의 율법주의 신앙이 마치 좋은 믿음인양 호도되어 유행처럼 번져 나갑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악입니다. 그들의 주장은 성령을 받아 성령의 도움으로 죄를 이기고 반듯한 삶을 이루어야 온전한 구원이 된다고 역설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IX의 십자가 복음을 훼손하는 죄라는 것을 모릅니다. 이들은 ‘IX의 십자가는 원죄애 대한 죄사함이다. 자범죄는 우리 스스로 죄를 안 짓는 것이다. 그게 아니면 다 탈락이다’-라고 말합니다(복음이 아닌 신율법주의)
성령이 오심은 자신의 죄를 날마다 확인하고 IX의 은혜가 아니면 하루도 살 수 없는 자신을 보며 매순간 자기를 부인하는 삶을 살라는 것이지, 성령의 도움으로 죄를 안 짓는 삶을 살라는 게 아닙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더 이상 IX의 은혜가 필요 없는 자가 될 것이고, 거기서 또 다른 율법적 잣대로 남을 판단하고 자신을 우월한 자로 자랑에 빠질 게 아닙니까? 물론 죄를 짓고 살라는 말이 아니라, ㅎ님의 구원의 목적성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남들보다 더 도덕적으로 뛰어나게 살지도 말고, 못하게 살지도 말고 그저 평범하게 사세요. 인간이 반듯하면 얼마나 반듯하겠어요? ‘예수 닮자?’ 자기주제를 몰라서 하는 말들입니다. 그래서 전7.16절에,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고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도 말라고 경고 합니다. 지나친 의인 되면(자기자만, 자랑, 우월의식), 지나친 악인(ㅎ님의 징계로 고통당함). 따라서 그저 평범 속에서 복음을 믿고 그 안에서 기쁨과 안식을 누리며 사는 게 성도입니다.
형의 출세를 종용하는 동생들에게 예수님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의 인생은 늘 너희들 것 아니었니? 늘 자기 하고 싶은 것 아무 때나 하고 살고 있지 않냐? 너희는 ㅎ님의 일하심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오직 온 평생 자기 영광을 위해 세상일에 매여 사는 자들이라는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약4:13~17>
13,14절~ 자기의 꿈을 위해 자기 인생을 맘대로 설계하는 인생의 실체를 고발함
15절~그게 도리어 ㅎ님의 뜻인 것처럼 자기 행위에 대해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다는 말임.
(이게 ㅎ님을 우상으로 섬기는 자들의 행태.. 이 사업 저 사업, 다 ㅎ님이 허락하신 거?)
16절~ 자기 욕심을 ㅎ님의 축복으로 둔갑시켜 살아가고 있는 기독교인들 모습
17절~ 선이 무엇인가?(자기가 죄인인 걸 자백하고 IX를 믿는 게 선). 그런데 성령을 받지 못했으니 자신이 죄인인줄 몰라, 그래서 입술로는 예수 믿는다지만 정말 죄로 인한 절박성으로 믿는 게 아니니 여전히 죄 가운데 있는 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스스로 하나님이 되고자 선악과를 먹은 아담에 속한 우리들의 때는 늘 준비되어 있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그 어떤 것도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성향의 존재들 이지요. 이것이 하나님의 것을 내 것이라 주장하며 사는 하나님의 원수된 모습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삶을 자기 것으로 생각하여 인생의 주인이 되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대응방식은 그들의 뜻대로 살도록 내버려 두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선택한 길의 결국을 스스로 맛보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이 경험하고 있는 이 세상의 삶입니다.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모든 불행은 그 누구의 탓도 아닌 우리들이 선택한 삶의 결과물일 뿐입니다.
<7:7>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아니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일들을 악하다고 증언함이라
세상이 예수님을 미워한다는 세상은 이방세상을 말하는 게 아니라 율법으로 치장된 유대교의 세상을 말합니다. 이방인은 예수를 미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빌라도처럼 예수님의 무죄를 인정하고 풀어주려고 했지요. 그러나 유대교의 율법으로 조성된 세상은 죄인을 용서하시는 예수님을 용납할 수가 없습니다.
주님은 공공연하게 선포하십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필요 없고 병든 자에게 의원이 필요하듯,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이런 말씀이 율법에 동화된 유대인들로 하여금 미움을 불러일으킨 것입니다. 유대인들 생각에는 율법을 잘 지키는 의인들을 메시야가 오셔서 칭찬을 하며 구원하실 것으로 여겨들 왔지요. 그런데 예수는 그런 자들을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질책하시면서 세리와 창기가 먼저 ㅎ님 나라에 들어간다고 하니 어찌 유대인들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주님은 긍휼을 베풀고 용서를 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런데 의인은 용서가 필요 없는 자들입니다. 용서는 죄인에게만 필요 합니다. 게다가 예수님의 용서는 한도 끝도 없는 무조건적이라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래서 IX 안에는 정죄함이 없고 용서만 있습니다.
잘못한 자를 정죄하는 게 인지상정인데 무조건 용서한다고 하니 율법으로 조성된 유대교의 바리새인들은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선악의 법 아래에서는 잘하면 상, 못하면 벌이 마땅합니다. 그런데 예수는 무조건 용서하고 사랑을 해 준다고 하니, 이것은 율법정신에 어긋나는 반칙입니다. 그래서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죽었다 깨나도 예수의 말에 동의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죽여 버린 것입니다.
누가 예수를 죽였습니까? 착한 사람인가요? 악한 사람인가요? 율법으로 따지면 ㅎ님의 법을 잘 지킨 사람들 입니까? 못지킨 사람들 입니까? 율법을 잘 지킨 제사장과 바리새인이 예수를 죽였지요. 왜? 율법을 잘 지킨 자들이 예수님을 죽여야만 했습니까?
->이는 예수님을 살려 두면 율법으로 흠이 없는 자기 자신들의 삶이 부정당하기 때문입니다.
->율법대로 살지 않은 세리와 창기들과 비교하여 의로운 그 의(義)가 날아가기 때문입니다.
->의(義)가 날아가면 자존감이 날아가고 위대한 존재가치가 말짱 도루묵이 되고 맙니다.
바리새인들은 일평생 목숨 바쳐서 지켜온 율법이 붕괴되기 때문에 용납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율법을 잘 지킨 놈이나! 안 지킨 놈이나! 동등하다고 하면 자기들은 뭐가 됩니까?
율법을 안 지키고 살아온 세리나 창기들은 예수님을 쌍수를 들고 환영할 수는 있어도,
율법을 생명처럼 지켜온 바리새인들은 환영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예수 안에서 너나 나나 차별 없이 모두가 동등하다고 하면 바리새인들은 엄청 손해를 보는 겁니다. 법 아래선 법을 지킨 것은 힘이 됩니다. 그래야 법을 지키지 않은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 할 수 있는 힘이 되고 권세가 되기 때문이지요.
유대인들은 지금까지 율법대로 살아온 것을 힘으로 믿고 의롭고 잘난 사람이라는 자부심으로 살아 왔는데, 어찌 이 힘을 버릴 수 있단 말입니까? 그래서 무조건 용서해 주시는 예수님을 없앤 겁니다. 예수를 죽여야 자기들이 율법대로 살아왔다는 의로움이 힘으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율법이 사라지면 제사장들이 설 자리가 없어져요. 유대사회에선 제사장은 엘리트들이고 지식층이고 존경 받는 대상들입니다. 제사장들은 성전중심으로 먹고 살아가는 자들인데 성전중심의 신앙의 근간이 바로 율법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지금 절대로 건들면 안 되는 그 율법을 건들인 겁니다.
자기들 밥그릇을 건드린 것이고, 자기들의 밥줄인 성전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린 겁니다.
율법이 없으면 다 사라져요. 성전도 사라지고, 제사장도 사라지고, 제사도 사라지고, 제물도 사라지고, 안식일도 사라지고, 절기와 월삭도 사라지는데 어찌 두고 있겠습니까?
예수의 말을 그대로 두면 자신들은 굶어 죽어야 해요. 성전에서 나오는 것으로 먹고 사는 사람들이 얼마인데! 밥그릇을 건들었으니 죽지 않고 베기겠어요. 제사장 그룹들은 예수를 반드시 죽여야만 했어요. 우리가 살아야겠으니 네가 좀 죽어 주어야겠다고! 해서 죽인 겁니다.
이같은 아수라장에서 ㅎ님은 바울을 불러내셨습니다. 그전에는 바울도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요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는 자부심으로 살았습니다. 그때 그 역시 예수 믿는 자들을 잡아 죽이는데 앞잡이 노릇을 했습니다. 그러나 다메섹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후에 눈의 비늘이 벗겨져, 율법 행함의 모든 가치들이 배설물 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을 따라 순교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이처럼 복음은 성령으로 기득권에서 먼저 불러내는 일을 하십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들이 기독교라는 종교에 몸담고 있으면서 강대상에서 예수를 팔고, 복음을 팔고, 십자가를 팔지만, 정작 ㅎ님도 모르고 예수도 모르고 십자가 복음도 모르는 거짓복음, 짝퉁 예수를 전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말하면서 사람의 열심과 충성을 보태고 십일조를 해야 온전한 구원이 된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장사치들 앞에서 우리의 구원은 새언약이신 IX의 십자가 피를 믿음으로 온전하고도 영원한 구원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인간 편에서 아무 것도 할 일이 없다고 외친다면 어찌되겠습니까? 주님처럼 사도들처럼 이단으로 몰려서 영적인 매도를 당하겠지요. 종교의 탈을 쓴 기독교에는 더 이상 생명이 없습니다. ‘거기서 나와 그들의 죄에 참여치 말라’는 계18장의 말씀에 유의해야 합니다.
교회는 이러한 사도의 터 위에 세움을 입은 자들입니다. 세상의 미움을 받지만 주님이 가신 길이기에 기쁨으로 그 길을 갈 수 있는 자들이 그리스도의 신부된 교회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이 부르심 안에서 우리의 때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들에겐 아버지의 때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 길이 얼마나 복된 길인지 알고 그 길을 기쁨으로 걸어가는 저희 모두가 되시길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