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침례교회가 “대한기독교회”라는 이름으로 창립한 뒤(1906년), 반세기가 지나도록 역사책이 하나도 발간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대단히 안타까운 일이었다. 어쩌면 대한기독교회의 초기 펜윅 선교사가 생존해 있을 동안에는 역사서를 펴낼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고, 또 그럴 만한 여력도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펜윅 선교사가 1935년 한국 선교 40여 년의 업적을 남기고 별세한 뒤부터, 그분의 생애와 신앙, 그리고 대한기독교회의 발자취를 남기는 작업은 시대적 요청이었다. 그런데도 우리 가운데는 아무도 그 몫을 감당하려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다가 해방 후, 20여 년이 지난 뒤에서야 비로소 역사적 사실을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는 인식이 몇몇 지도자들 간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교단 총회가 서둘러 역사편찬을 시작한 것은 1963년 총회 때였다. 더 이상 역사편찬을 방치해두었다가는 그나마 생존해 있는 원로목사들마저 잃고 말 것이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역사편찬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위원장은 총회장인 김용해 목사로 하고 편찬 및 집필은 교육부장이던 나를 선임했다. 총회는 이듬해 1964년 1월 14일 서울종로교회에서 개최된 실행위원회에서 역사감수위원으로 원로목사인 노재천, 신성균, 박기양, 신혁균, 최성업, 한기춘, 안대벽 목사를 선임하면서 조직을 갖추었다. 그러나 한기춘 목사는 스스로 감수위원을 사양했고, 안대벽 목사는 영주권을 받아 도미했기 때문에 사실상 감수위원에서 제외되었다.
역사편찬은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니었다. 집필을 맡았던 나로서 느꼈던 당혹감은 대단히 크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역사편찬을 어렵게 했던 문제는 역사적 자료의 고갈 때문이었다. 참고할 자료가 없었다. 이처럼 우리 교단의 역사자료가 고갈된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 찾을 수 있다. 하나는 일제말기에 우리 총회본부를 습격한 사람들이 모든 문서를 약탈해 갔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한국전쟁 때 공산당원들에 의해 총부의 관련 자료가 몰수당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하나 더한다면, 교단 지도자들이 역사의식이 부족해서 역사적 자료를 문서로 남겨두지 못했고, 설령 문서화되어 있었다 하더라도 소홀히 취급해서 소멸된 것이다.
역사를 기록하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생존해 있는 교계의 원로들을 찾아가서 그들의 증언을 듣고 기록하는 것이었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선배들을 만나서 그들을 통해 역사적 사실을 확인하고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는 것은 대단히 보람있는 일이었다. 물론 발로 뛰어서 자료를 얻는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이 일에 몰두했고, 가능한 한 자료를 수집했다.
역사 자료수집 과정에서 가장 많은 자료를 제공한 사람은 김용해 목사였다. 김목사는 또렷한 기억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질문들에 대해 소상하게 답해주었다. 이에 못지않게 박기양 목사도 대단한 기억력으로 잃어버린 역사적 사실들을 복원해주었다. 최성업 목사는 북한 사정과 시베리아 교회 현황을 자세하게 알고 있었기에 그 지역의 역사를 기록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오긍선(吳兢善) 박사를 만난 것은 정말 행운이었다. 그는 우리가 미처 잘 알지 못했던, 강경과 공주에서 활동했던 스테드만(F. W. Steadman) 선교사 일행에 관한 정보를 한 아름 안겨주었다. 오박사는 스테드만 선교사의 어학선생이었으며, 그에게서 1900년 공주 앞 금강에서 침례를 받았다. 그러니 누구보다 선교사를 잘 알고 있었다. 오박사는 1909년 미국 루이빌 의과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한 우리나라 최초의 의사로서, 교육사업과 사회사업을 활발히 전개한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는 군산 야소교병원 원장과 세브란스 전문학교 교장을 역임했고, 많은 교회를 창립했다.
1963년 오박사는 경기도 안양에서 조용히 노후를 보내고 있었다. 그분을 통해 미국 보스톤 클라렌든 침례교회의 엘라씽 선교회에서 파송한 파울링 선교사와 스테드만 선교사 일행이 이 땅에서 선교사업을 중단하고 떠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를 들었다. 그는 타 교단 선교부의 압력 때문에 침례교 선교사들이 떠났다고 믿고 있었다. 당시 각 교단의 지역 분배에 대한 상황을 좀 더 자세하게 언급하면, 북장로교선교부는 평안도, 황해도, 경기도, 충청도, 경상도 낙동강 이북을; 남장로교 선교부는 전라도, 충청도; 남감리교 선교부는 서울, 경기도, 강원도, 충청도; 캐나다선교부는 함경도 등이었다. 부산지역은 그 이전부터 북장로교와 호주 장로교가 함께 선교지역으로 삼았으나, 공의회 이후 낙동강 이남은 호주 선교부, 그 이북은 북장로교 선교부로 분할했다. 여기서 서로 중복되는 지역이 나타나는 까닭은 1892년 이미 북장로교 선교부와 북감리교 선교부가 선교구역을 협의할 때 5천명 이상의 인구가 거주하는 주요 지역은 두 선교부가 합동으로 선교사업할 것을 결의했기 때문이다.
역사편찬을 탈고하고 감수를 받아야 하는데 또 하나의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몇몇 목사가 자신과 관련된 내용이 불합리하다는 이유로 역사책을 발행하면 안 된다는 주장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공개적으로 감수위원들을 소집하지 못하고 원고를 들고 일일이 개인별로 찾아가 감수를 받아냈다. 물론 이후 편집과정이나 인쇄과정도 모두 비공개적으로 진행되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인쇄소도 안양인쇄소를 택할 정도였다.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나는 신명기 32장 7절의 말씀을 가슴에 깊이 간직하고 역사를 집필했다: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비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이르리로다.” 이 말씀은 난관 속에서도 끝까지 좌절하지 않고 역사책을 집필하게 하는 큰 힘이 되었다.
1964년 부산 범일동교회에서 제54차 연차총회가 개최됐다. 우리는 폐회 직전 축도와 함께 1000권의 역사책을 일제히 배포했다. 「대한기독교침례교회사」(大韓基督敎浸禮會史)는 이렇게 해서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다. 재정으로 후원해 주신 분은 부산의 안경선(安慶善) 집사였고, 그 밖에도 많은 분들의 기도와 협력이 있었다. 이 모든 분들과 함께 우리의 역사적인 기록은 후대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한국에서 침례교회가 어떻게 복음을 전했고, 순교의 피를 흘렸으며, 어떻게 교회가 성장했는지를 알게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