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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웃음 보따리 야담
재미난 조선 시대 해학 야담 보따리를 풉니다.
성해학 작품이 있더라도 조선시대 해학 야담의 풍경을 이해하는 측면에서 이해해 주세요.
1) 멍멍아, 나 시집간당
옛날, 혼기를 놓쳤다가 뒤늦게 채단(신랑 댁과의 혼례가 확정되어 받은 예물)을 받은 처녀가 기쁨을 가누지 못했다.
뒷간을 가면서 혼례 날을 손을 꼽고는 멍멍이에게 자랑했다.
[멍멍아! 몇 일날, 나 시집간단다!]
때마침 멍멍이 놈 입을 크게 벌리고 하품을 했다.
그랬더니, 이 노처녀 맹세코 우겨댔다.
[정말, 그 날 시집 못 가면, 난 네놈 딸년이구만!]
昔有過時而受幣之處女 不勝其喜 乃於如厠之時 屈指計日 仍誇於尨曰 某日則吾婚日也 尨適張口而欠 女盟曰 如非其日 則吾眞汝女云. [破睡錄](23話), [韓國野談資料集成](卷12)
나이 많은 처녀가 혼례 전에 신랑 댁으로부터 채단을 받고, 혼례 날도 확정되어 더할 나위 없이 기뻐 뒷간 길에 만난 멍멍이에게 시집가는 자랑을 한다. 그런데 공교롭게 멍멍이가 하품을 토했고 이로 인해 노처녀의 히스테리가 터져 나온다.
서거정의 [태평한화골계전]에도 이와 유사한 처녀가 있다. 혼례를 사흘 앞둔 측간 길의 노처녀가 멍멍이에게 [육갑 중에 네 놈이 빠졌더라면, 혼례 날이 하루 당겨지겠다!]며 탄식한다.
여기서 두 노처녀가 미물에게 내뱉은 말 이면에는 자신의 성애가 그만큼 강한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다만 가탁 언어를 구사해 당사자의 속사정을 표현했을 뿐이다.
그런데 앞의 노처녀의 경우, 그냥 한 번 웃고 지나갈 일이다. 그러나 그녀의 행동을 자세히 보면 두 가지의 흥미로운 문제가 떠오른다. 이 처녀가 왜 그토록 혼례를 열망했으며, 그것을 비웃는다고 여긴 미물에게 이렇게 격분했을까? 이에 대한 해명이 있은 뒤에 이 처녀의 아픔이 밝혀진다.
이는 위의 글에서 답을 구하기보다는 다른 야담집에 등장하는 노처녀에게서 찾는 것이 바람직하겠다. 다른 야담집의 노처녀는 본인에게 어떤 결함이 있어서 그렇게 된 게 아니다. 다만 가정의 경제적 궁핍으로 인해 혼례가 늦어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글의 주인공 처녀에게도 그러한 상황이 주어졌을 것이고, 그로 인해 그녀는 본의 아니게 혼기를 놓친 것이다.
이어 그녀가 자기를 비웃는 것처럼 보여 지는 멍멍이에게 화를 내는 의미를 추적한다. 그녀는 가난하여 여태까지 신랑감을 구하지 못하다가 소원을 이루게 된 터이다. 그런데 멍멍이의 애꿎은 하품이 그녀를 화나게 했다.
처녀가 미물에게 시집가는 것을 자랑하는 짓이나 그에게 격분하는 행동에는 웃음이 묻어난다. 그러나 그 웃음 이면에 감춰진 그녀의 절박함 또한 지나칠 수 없다.
그 절박함은 한 인간으로서 본능 욕구를 이루기 위한 몸부림이다. 그것이 가난이라는 장애로 인해 봉쇄되었다가 급기야 이루어지려는 과정에서 이러한 희극이 연출된 것이다. 이 해학적 대화에서 노처녀의 성애에 대한 욕구가 우회적으로 드러난다.
이는 [파수추(破睡椎)]에서 가난한 집의 노총각이 양근(陽根)을 움켜잡고 엎드려 울기에 부친이 그 이유를 물었더니, 부친께서 손자를 늦게 얻는 게 애석해서 그런다고 변명하는 것과 일치한다. 즉, 노총각의 통곡은 집안에 손자가 늦게 태어남에 대한 슬픔이 아니라, 본인의 혼기가 늦어지는 것에 대한 항변이다.
결국 위 두 남녀의 성애에 대한 우회적 변명에서 인간의 기본 욕구 해소를 위한 갈망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여기에 드러난 성애의 간접 표현이 반드시 추한 산물은 아니라고 본다. 도리어 가난과 궁핍이라는 장벽에서도 굴하지 않고 개인의 성애를 성취하려는 강한 인간 형상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여성의 성애가 간접적으로만 표현되었느냐에 대한 해명은 이 [파수록]이 조선조 본격적인 성 해학 야담처럼 개방적 지면이 아니기 때문에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2) 개가죽 덮어쓴 도련님, 안녕하세요?
조선 후기 야담의 일반 성향이 그러하듯 [파수추](졸음을 깨트리는 몽둥이)에도 하층인의 진솔한 정서가 잘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이런 현상을 일부 반영은 했지만 실제 신분 질서는 엄연히 존재했으며 주인과 종의 논리 역시 유효했다. 이러한 사실은 조선 후기 신분 동요의 일면이 작품에 반영된 것이라고 보면 된다.
문제는 신분상 아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골계를 통해 상위 계층에 있는 자를 우롱한다는 것이다. 이런 작품에는 각성된 서민 의식이 담겨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는 신분상 주종 관계에 의해 상호 충돌하는 경우와 나이 어린 사람이 연상자를 우롱하는 것까지 포함해 다루고자 한다. 소금 장수와 개가죽을 덮어쓴 위인이다.
소금 장수가 북도의 산촌을 지나가게 되었다. 머리에 개털 모자를 쓰고 개털 옷을 입은 자가 그에게 공갈을 쳤다.
[이 무슨 결례냐? 양반을 보고도 예를 올리지 않다니?]
[미처 알아보지 못해서 그랬으니, 널리 용서를 청합니다.]
그런데도 개털 옷 입은 그는 계속 꾸짖어댔다.
소금 장수는 분을 이기지 못했는데, 그때, 갑자기 개 한 마리가 멍멍 짖으며 문에서 뛰쳐나왔다.
소금 장수가 개를 보고 황급히 넙죽 절을 올리는 게 아닌가.
그랬더니 영감이 그 짓이 괴상하여 물었다.
[왜, 개를 보고 절하는 거냐?]
[이 분도 개가죽을 덮어썼으니, 생원 댁 자제 분이나 도련님이 아닐까 해서요.]
鹽商 過北道之山村矣 頭着狗皮冠 身穿狗皮衣者 恐喝鹽商曰 爾何許人事而見兩班不拜耶 鹽商曰 未及知覺之故也 諒恕之如何 皮服者 責之不已 鹽商 於心憤悶之際 忽一狗吠出門外 鹽商見之 忽忙納拜 翁怪之曰 何爲見狗納拜耶 鹽商曰 此亦蒙着皮狗者也 無乃生員宅子弟道令耶. [破睡椎](4話). [栖碧外史海外蒐佚本](券26).
북변에서 개가죽을 덮어쓰고 가던 양반이 소금을 팔러 온 상놈 장사치를 얕보고 결례를 빌미로 한 마디 쏘아붙였다가 도리어 망신을 당한다.
소금 장수의 기지가 해학 처리되었다.
그는 멍멍이에게 절을 올려 조금 전에 당했던 수모를 갑절로 되돌린다.
이는 개가죽을 덮어 쓴 당사자만 우롱 당한 것이 아니라 자식까지 욕을 먹게 되었고, 급기야 가족 전체의 망신으로 파급된다.
그래도 그 양반은 할 말을 잃었다.
상놈 소금 장수의 어리석은 것 같은 행동 이면에는 고도의 기지가 개입되어 아둔한 양반을 우롱하는 것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사진 출처 : http://cafe.daum.net/imsilmunin
3) 전라감영 호남 막객의 과한 성욕
옛날, 어떤 위인이 호남의 막객이 되어 춘랑에게 먼저 정을 주고 또 홍련에게 흑심을 두었다.
그런데 춘랑의 시샘이 두려워 밤중에 춘랑이 곤히 잠든 틈을 타 살며시 홍련에게 접근하다가 실수로 춘랑의 배를 짓밟아 이루지 못했다.
잠자리로 재차 돌아와서는 ‘붉은 연꽃 따러 남포로 가는데, 동정호 봄 물결에 외로운 배는 놀라네’라 고 흥얼거렸다.
昔有一人 爲湖幕 先昵春浪 又注意於紅蓮 而苦其妬猜 夜半乘春浪睡熟 暗向紅蓮 誤踐春浪之腹而不果 還臥所寢而詠曰 欲采紅蓮南浦去 洞庭春浪孤舟驚. [破睡錄](37話), [韓國野談資料集成](卷12).
호방한 막객이 색향인 전라감영에서 두 기생을 차지하려는 음탕한 심보가 그려져 있다. 그가 야음을 타서 홍련에게 다가가 수작을 부리려고 한다. 그런데 공교롭게 춘랑의 배를 밟아 일을 이루지 못한다.
이 위인의 임기응변적 발상은 기가 넘친다. 붉은 연꽃을 딴다는 의미는 곧, 홍련의 육체를 소유하겠다는 음흉한 내심을 말해 준다.
그런데 잔잔히 있을 줄 알았던 봄 물결이 그의 흉계를 무산시킨다. 결국 작가는 엽색 위인의 곤경을 통해 엽색에 대해 경계의 의미를 보인 것이다.
4) 쌀뜨물 마시고 헤롱헤롱
옛날에 술주정을 잘 부리는 사람이 있었다. 쌀뜨물을 술이라고 속여 먹였더니 필경 또 술주정을 부렸다.
이튿날 친구들이 [어제의 술주정은 진심이 아니고, 거짓이었구만. 쌀뜨물을 먹였는데 무슨 해괴한 짓인가?] 라고 빈정댔다.
그 위인은 부끄러워 억지로 웃으며 변명했다. [나 역시 술맛이 좀 텁텁해서 이상하다 했어.]
昔有好使酒者 其友欺飮 以泔水飮 竟又使酒氣 友人揶揄曰 前日酩酒 果非而僞也 飮泔水而猶作駭擧 其人忸怩强笑曰 吾亦怪其無靈而心厭. [破睡錄](38話). [韓國野談資料集成](卷12)
술주정의 해학 속에 풍자가 담겨 있다. 친구들이 술만 마셨다 하면 주정을 부리는 위인에게 쌀뜨물을 술이라고 속여 먹였더니, 그는 어김없이 주정을 부린다. 이튿날, 친구들이 그에게 쌀뜨물을 속여 먹인 것을 실토하는 대목이 해학 부분이다. 그는 어쩐지 술맛이 텁텁해서 언짢았다며 겸연쩍어한다.
그래서 작가는 평어에서 [서경]을 인용해 이러한 병폐는 개인의 습관에 의한 것이라며 그를 나무란다. 술 대신 쌀뜨물을 먹여도 여전히 술주정을 부리는 그의 행각을 들어 술에 만취되어 발생되는 행각을 비난하며 풍자한다. 여기서는 이런 점을 한 개인에 국한해 조명했지만, 다음 작품에서 이는 더욱 확대된다.
① 서울 가난뱅이 주오(朱五)와 김삼(金三)이 무위도식했다.
② 술 한 병을 들고, 외상 술 안 먹기 시험을 했다.
③ 김삼이 엽전 셋을 주오에게 주고 술 한 잔을 사 먹고, 주오 역시 그렇게 했다.
④ 둘이 주고 받다보니, 술병은 바닥났고 엽전 석 냥뿐이어서 발끈해 술병을 깨고 하산했다.
위인들이 가난하게 된 주원인은 본인의 게으름과 방탕 생활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그들은 사십이 넘도록 부모를 봉양하고 처자를 부양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다. 말하자면 그들은 늘 술에 취해 사는 기생적 인간 유형이다.
이들이 늘 외상술을 마셔 온 까닭에 이 날은 단단히 결심을 하고 인적이 드문 북악산에 올라가 외상 술 안 먹는 시험을 한다. 그들의 이름처럼, 엽전 세 푼이오[金三]․한 잔 주오[朱五]하며 술을 주고받는다. 그러다 보니, 술병의 술이 바닥났고, 돈이라고는 애당초의 엽전 석 냥뿐이어서 홧김에 술병을 깨고 하산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끝내 당사자의 무지를 깨닫지 못한다.
그러기에 작가는 이들의 몰지각한 행동은 짐승과 다를 바 없다고 혹평한다. 이들은 곧 술로 인해 인생을 허비하는 저급 인생이다. 따라서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우리 사회의 비생산적이며 소모적 인생을 따끔하게 훈계한 것이다.
5) 돌중의 잽싼 바랑 낚아채기 연습
어떤 중놈이 주막에 들어가 주막집 아낙이 미색임을 보고 욕정이 끓어오르는 것을 주체할 수 없었다.
밤이 되어 그녀가 홀로 자는 것을 봐 두었지만, 무작정 뛰어 들어갈 수는 없었다. 그래서 승복을 모두 벗어 바랑에 넣어 창밖에 걸어 두고는 내빼는 연습을 했다.
곧, 홀랑 벗은 알몸으로 그녀를 덮쳤다가 잽싸게 바랑을 나꿔 채기를 여러 차례 시도하여 숙달된 뒤에 그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녀는 깜짝 놀라 ‘웬 놈이냐?’하고 소리를 지르니, 중놈이 질겁하여 묶어 둔 짐을 들고 내달렸는데, 근 30리 정도 달아나 숨을 돌리고 들고 온 것을 자세 히 보니, 바랑이 아니라, 닭이 알 낳는 짚둥우리가 아닌가.
僧有入店而當露店女之色美 慾火熱中 實難安住 及夜偵知厥女之獨 而不敢遽入 盡脫衣衲 納于鉢囊 懸於窓外 預習走法 赤身向房 急摘鉢囊 累試累中 然後乃入房中 女覺問誰也 僧驚怯摘囊走到一舍 定息細見 則非鉢囊而鷄伏卵之草簣. [破睡錄](11話). [韓國野談資料集成](卷12).
상황 전개를 통한 해학 유발 양상이다. 세련되지 못한 산간의 수도승이 미녀를 차지해 보려고 제 딴에 주도면밀하게 내빼는 예행 연습까지 했다. 그러나 그의 행각은 수포로 돌아갔고, 바랑과 장삼을 잃고 알몸으로 빈 짚둥우리만 안고 서있는 몰골이 되고 말았다. 그의 형상을 상상만 해도 웃음이 절로 나온다. 중의 엽색 행각 풍자는 성현의 [용재총화]에 많이 실려 있다.
이러한 승도의 여색 탐닉 수용은 무엇을 의미할까? 단순한 웃음 제공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수도승의 이중성을 드러냄과 동시에 중에게도 인간의 본성이 내재하고 있음을 보인 것이다. 즉, 해학 가운데 인간성 긍정의 작가 의식이 담겨 있다는 점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작중의 중은 부단히 그녀를 덮쳤다가 내빼는 연습을 했으나, 뜻을 이룬 것도 아니고, 도리어 제 풀에 놀라 이런 희극을 발생시켰다. 작중 남녀 대립이 심각하지 않은 채 다만 중의 일방적 낭패로 귀결된다.
다음 작품은 「배비장전」 계열의 야담과 근친성을 갖는다. 어떤 한량이 관북 지방을 유람하다가 한 기생에게 정을 주었다. 기생과 이별할 즈음, 기생은 그에게 정표로 이빨을 뽑아 달라고 조른다. 그 위인은 감격하며 이를 행동으로 옮겨 이빨을 뽑아준다. 그런데 그가 철령을 넘으면서도 그녀를 잊지 못해 눈물을 흘리는데, 그와 같은 신세를 당한 행인을 만난다.
그 행인도 그와 같이 그 기생에게 이빨을 뽑아준 것이다. 그제야 그는 기생의 간교한 놀음에 속은 것을 깨닫는다. 그는 발끈 화를 내며 하인을 시켜 자기 이빨을 회수해 오게 시키는데, 기생은 남성 이빨이 담긴 자루를 마당에 던지며, [그 속에서 네 상전의 것을 찾아가라]며 비웃는다. 이 대목이 작품의 절정이다.
그리고 이는 기생 수청을 거부하며 거드름을 피우던 순안어사(巡按御使)가 수령들과 아전, 그리고 기생의 철저한 미인계에 말려 할미의 두룽다리를 덮어쓰고 망신을 당해 급기야 파직되는 지경에 이르는 것과도 궤를 같이 한다. 이즈음에 이르러 작가는 일련의 주색잡기는 본인의 성벽(性癖)에 기인된다며 결말짓는다.
이상에서 인정세태와 주색잡기 풍자 성향을 보았다. 작가는 당대 우리 사회의 도처에서 일어나는 몰인정한 경박 풍조에 대해 우려를 드러내었다. 그리고 주색에 대한 경계의 목소리도 동시에 표현했다. 이 과정에서 교훈과 해학성이 구비된 고도의 풍자 수법이 동원되었다. 웃음을 통한 권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