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의 깊이> 강요배
-가슴속에 부는 바람
p44
에베 형이 생각 난다.
내가 일곱 살쯤 되던 어느 날인가 그는 그 골목길에서 우리 꼬마들에게 흥분한 듯이 무슨 말을 하려 했다. 그는 땅바닥을 손으로 깨끗하게 쓸고 나서는 사금파리를 주워 들고 금세 한 마리 ‘도미’를 멋들어지게 그리면서 손가락으로 개수를 나타내는 게 아닌가? 나는 그 속사술이 신기롭고, 그 유선형의 형태감에 감탄했다. 아마도 백돔 낚시의 성과를 우리에게 자랑하고픈 마음이었으리라. 그렇게 그는 그 골목길에서 땅바닥 그림의 명수로 우리 조무래기들의 부러움을 샀다. 이것이 그림의 힘을 느낀 첫 번째 경험이다.
...나는 지금껏 그림을 그려오면서 나 자신이 빼어난 소질을 미리 지녔다고 생각해 본적이 없다. 단지 어린이들도 올바로 나타내고 공들이고 싶은 충동이 있다고 믿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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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갈 <나와 마을>
이라는 그림과 해설에 흥미가 갔다. 생각과 마음을 그린다! 그러한 그림도 그려질 수 있다니.
이렇게 해서 묘사적 화풍에서 추상적 표현적 상징적 화풍으로의 변화가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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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형이 1982년에 번역한 소설 앙리 보스코의 말리크루아가 생각났다. 거기에는 바람과 물이 가득한 야생의 땅 카마르그 지방에 대한 묘사가 있다. 자연에 파묻혀 사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 사이에 뒤얽힌 인간관계를, 자연을 대하는 선조의 고결한 정신을 되찾음으로ㅆ 해결해 가는 주인공의 이야기다. 그는 프랑스의 한 지방과 고향 제주 양극단에 똑같이 정신의 공간이 있음을 알았다.
강한 이끌림. 인간이 자연과 만나는 최전이며 최후인 접전지역.
-제주도 공초전(곰취밭) 드넓은 황야.
+형은 그날 그 야생의 대지를 확인했던 것 같다. 대지의 품 안에서 피어나는 인고의 생명들을 본 것 같다. 생의 치장도 아니오, 부정도 아닌 절제와 골기. 순결한 바람결에 씻긴 늦가을의 산꽃 자태 같은 것. 그것은 정작 바람 찬 대지, 그 박토를 일구며 살아온 사람들만이 지닐 수 있는 선량하고 꿋꿋한 품성이었을 것이다.
섬의 소년이 바다로 나아가 머나먼 대륙의 유학길을 돌고 돌아, 기어이 낮고 낮게 스미며 흙의 본향으로 귀의하는 삶(죽음)의 동그란 회로였을 것이다.
그러나 생은 먼저 피어나는 것이다. 각질을 뚫고 힘차게 솟아올라 시련을 헤치고 펼쳐 나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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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자아는 두 가닥의 회로를 따라 교차하면서 자라난 듯하다. 자연과 우주, 사회와 역사로 향하는 두 가닥의 회로. 그 둘이 바람 속에 얽혀 있듯이, 그것들을 그림 속에 녹이고 싶다. 그것들은 자아와 사물의 끊임없는 대화요, 세계 속에서 중심을 찾아보려 안간힘을 쓰는 한 존재의 마음 궤적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어쩌면 너무 멀리 있는 것들이었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비교적 단순한 것들이기도 하다.
우리는 서로에게 어떠한 창을 내고 있는가?
우리는 얼마나 서로 평등해질 수 있을까?
또한 우리는 어ᄄᅠᇂ게 서로를 새롭게 gow fn tn 있는가?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 가장 어려운 신비의 사람들, 그 거울을 언제쯤 진정 들여다 볼수 있을 것인가?
샛바람-마파람-갈바람-하늬바람
바람은 머나먼 사원으로부터 시간을 관통하여 불어온다.
금강초롱꽃-지상에 유일하게 금강산에 핀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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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해 오는동안 미술교육 속에서 접했던 미적 가치관이, 그 선택의 폭이 어떤 의도에 의해 암암리에 기획되고 통어된 이념의 한계 안에 닫혀 있는 것이라면 나의 자유는 불구의 것이 아닌가? 여러 형태의 사회적 힘이 제도를 만들고, 그것이 개인의 의식과 관념, 행위 방식을 규정하고 있다면 그러한 구조를 밝혀보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 시기에 만난 ‘현실과 발언’ 동인 동료, 선배 들의 현명한 통찰은 나의 안내자가 되어 주었다. 복잡한 사회 현실 속에 놓여 있는 사물에 대한 이해맥락과 명분과 실질의 모순을 조금은 공부하였다. 그것들은 때론 소박한 정의감의 산물이기도 했고, 조금은 이론적 이해의 소산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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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화되고 압축된 에센스, 핵심 같은 것. 그것을 내가 상이라고 말하는데, 이해를 넘어서 한꺼번에 포착되는 것이다. 사실 그러한 현상을 그대로 드러내 설명하기가 상당히 어렵다. 일례를 든다면, ‘기억’은 사건의 요약인 상으로서만 강렬하게 남는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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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에서 내 리듬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가를 느끼는 것이 중요한 듯하다. 이를 위해 이미지를 빌려오는 것이다. 추상이라는 ㅁ라과 같은 말이 바로 사상이다. 추상은 뽑아 올리는 것, 사상은 버리는 것과 같은 행동인데, 무엇을 하나 뽑는 순간 다른 무언가를 하나 버린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이 두 단어모두 영어로 앱스트랙션 abstraction이라는 같은 단어를 쓴다. 즉 이단어가 두 개의 뜻이 있는 거다.
추상화시키는 순간 많은 것을 버리게 된다. 이러한 측면을 생각하다 보면 나의 그림은 추상 쪽으로 가는 것이라고 단순히 이야기하기보다는, 버리고 남기다 보니깐 그게 추상화된다고 설명할 수 있겠다. 수많은 사물 중에서 무엇 하나만을 뽑아서 강렬하게 만들려면 나머지는 다 버려야 한다. 내 그림이 논문이라면 이제 결로능 써야 하는 단계에 온 것 같다. 논문 요약도 앱스트랙트 라고 하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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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상에서 상 자는 이미자 상 자가 아니고 코끼리 상자를 쓴다. 이미지나 형태에 국한된 개념이 아닌 것이다.
주역에 괘상이라는 말이 나온다. 이는 어떤 요약된 본질 압본 같은 것을 의미한다. 즉 어떤 사건의 핵심이랄까.
그리고 사상이라는 단어도 이와 관련된다. 그런데 갈수록 추상이라는 언어가 혼란스럽게 사용되고 있는 것 같다.
일반적으로 명료화가 아닌 애매화 하는 것을 추상이라고 생각한다. 또 한편으로는 단순히 기하학적인 것을 추상이라고 이해하곤 한다. 물론 수학자체도 추상적인 것이니까 맞는 말이지만, 동양 철학에서 볼 때 추상은 시간 속에 흘러가는 사건을 어떤 기의 흐름을 추출하는 것을 말한다. 결국 본질 골격을 중시한다는 의미다.
그런데 형상이란 것이 완전히 없어져 버려서 아무런 단서가 없다면 일종의 문양이나 무질서한 얼룩만이 되어 버릴 우려가 크다. 그래서 나는 풍경으로부터 이미지를 빌려 온다. 말하자면 추상이란 어떤 기운을 뽑아내는 것이다. 지금 시대야말로 이런 문제를 소화하고 넘어설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미술이나 조형의 기본 요소로 우리가 다시 추상을 생각할 때 아닌가. 이는 전통적인 동시에 대안적인 방법론이 될수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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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강력 태풍이 아니라면 큰 바람은 큰일을 한다. 대기를 선선하게 하고 마른 땅을 흠뻑 적셔주고, 지하수를 보충하고 염수와 담수를 뒤섞여 바다 생물 폐사를 막아주고 물밑 돌들을 뒤집어 바다를 건강하게 한다. 부실한 것들은 ᄁᅠᆨ이거나 찢기거나 쓸려나간다. 튼실하게 자라지 못하고 속성으로 허우대만 키운 나뭇가지는 여지없이 부러져 나간다. 그 위력에 경외하고 순응할 일이다.
...
바람은 시간 속을 불어온다. 차가운 겨울, 소년의 귀때기를 베어 갈 듯이 때리던 바람은 지금도 여전히 노년의 무뎌진 머리를 얼얼하게 후린다. 바람을 맞는 싱싱한 감각은 몸에 깊이 각인되어 있다. 그것은 흘러온 시간에 대한 감각이기도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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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험들 속에서 요체를 끄집어내는 일, 이것이 추상아닌가?
사물로부터 ‘코끼리를 끌어낸다’라는 말은 단순히 이미지의 문제만이 아니다. 동시에 생각을 응결하는 작용도 따라야 할것같다. 마음에 낙인되는 인상, 마음속의 심상, 하늘 별자리인 천상, 그것들을 꺼내는 추상의 상에는, 주로 모습 이미지를 뜻하는 상과 달리 인변이 없다. 더욱 원본적이라는 뜻이다.
像 / 象
대상에 대한 관찰-감정의 표출-간명한 압축을 거쳐-주체(나)의 행동으로 나아간다.
:대상에 대한 얽매임에서 자신ㅇ르 풀어놓아 그에 구애됨 없이 스스로 움직이고 싶은 것.
102
그림의 방식들 –재현, 표현, 추상, 행동은 모든 그림에 나타나는 주된 경향이다. 상대적으로 어느 한 ㅂ아식이 더, 또는 나머지 방식은 덜 사용되었을 뿐이다. 동서고금의 모든 회화에는 네가지 방식이 적절히 합성되어 있다 할 것이다. 재현성에서 수행성으로 나아갈수록 화가의 자유도는 높아보인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방식의 최종 효과, 감동의 문제다.
성공적인 그림은 방식이 적절한 사용에 의해 참신해야 하고, 풍부해야 하고, 간결하며, 생동해야 한다. 그것이 먼저 창작가 자신을 놀라게 해야 하고, 다시 감상자의 마음을 반드시 움직여야 한다. 그가 그림 앞에 섰을 때 어! 아 하 야 하는 망므이 일어나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그림을 통해 우리가 새로운 곳에서 새롭게 되어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이다.
*하늘
화면들에는 지평선이 없다. 범상한 풍경으로 가는 단서는 금지되어야 한다. 모호함이 아니라 간결한 명료함이며 추상의 강렬함이다.
*나는 아직도 4.3을 모른다. 내 상상력은 체험의 진실성 앞에 무릎을 구부린다. 역사의 진정한 의미는 끊임없는 숙고 속에만 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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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쾌한 질문 앞에서.
p359
삶의 과정엔 받고 싶은 질문이 있고, 받기 싫은 질문이 있기 마련이다. 강요배를 만나기로 했을 때, 게다가 ‘묻는 자’의 역할을 맡기로 했을 때, 그에게 물어야만 할게 무엇일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불쾌한 질문을 던지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더 경계할 건 칭송 일색의 설탕 질문이었다. 어떤 물음은 답하기 편했을 것이다. 또 어떤 질문은 편치 않았을 것이다. 건너뛰려 했던, ‘작가란 존재가 세계의 조화를 눈여겨보는 자인지, 부조화를 눈여겨보는 자인지’ 묻는 항목을 굳이 불러 세운 까닭이 무엇이었을까. 내가 준비한 질문이었지만 나는 버리려 했다. 강요배는 주워담았다. 그가 묻고 그가 답한 셈이다. 오랜 시간 스스로 묻고 스스로 답해 왔던 문답이었을지 모른다.
강요배의 오래 준비한 답
하나라고 봐요. 부조화를 보는 자와 조화를 보는 자는 한 사람입니다. 부조화를 눈여겨보다 보면 조화를 그리워하게 돼요. 조화를 강조한느 사람은 세상이 얼마나 부조화한지 압니다. 같은 거에요. 나는 현장에서 함께 뛰는 예술가와 혼자 뛰는 예술가가 똑같다고 봐요.
강요배
: 나는 제주 바다의 혜택을 받은 사람입니다. 나는 ‘어린 나’에게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고 싶어요. 나는 어렸던 나를 존중합니다. 열 살짜리 강요배가 지금의 강요배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아요. “너는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니고 그대로의 너다.” 나는 이런 사람이 될수도 있었고 저런 사람이 될수도 있었을 텐데 이상하게도 변신을 하지 못했더라고요. 청년 강요배도 “너 딴 쪽으로 변해 볼수 있겠어?”묻는 것 같은데, 나 또한 시도를 안해본 건 아닌데 그걸 못했더라고요. 내게 출발점은 화가가 아니었엉. 종착점도 마찬가지라 생각해요.
예술은 둘째죠. 삶이 먼저지.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이 실망하려나. 사실이 그래요 아무것도 아니고 한 인간의 삶일 뿐입니다. 내 작업은 삶의 보고서일 뿐이에요.
생존, 그것이 내 삶의 대원칙이었어요. 예술이고 나발이고 살아남아야 하는 게 인생이지요. 예술을 하지 않더라도 살아남아야 합니다. 살아 있는 한 모두에게 그럴 동기가 있어요.그 본능을 존중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