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왜 노병들을 길거리로 불러내는가?
백발이 성성한 노병들이 무더운 여름 날씨를 아랑곳하지 않고 따가운 아스팔트 위로 나서고 있다. 두 손으로 피켓 하나를 부여잡고 묵묵히 거리를 지킨다. 평생 나라를 지키던 사람들이 이제는 거리를 지키고 있는 모습은 낯설고도 안타깝다.
피켓 시위는 누구나 쉽게 선택하는 행동이 아니다. 자신의 절박한 심정을 알릴 다른 방법이 없을 때 마지못해 선택하는 마지막 호소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평생 명령에 살았던 노병들을 거리로 불러냈을까.
나는 지금까지 피켓 시위는 물론이고 공공정책에 반기를 드는 어떠한 행동도 해본 적이 없다. 평생을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는 군인으로 살아왔기에 국가의 정책에 대해 거리에서 집단으로 의사를 표시하는 일 자체가 낯설었다. 선거철이면 거리에서 피켓을 든 선거운동원들을 보며 그저 그런 일도 있겠거니 했을 뿐, 언젠가 내가 그 자리에 서게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러나 최근 정부가 육·해·공군 사관학교를 통합하여 새로운 장교 양성체제를 마련하는 방안을 추진한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정부는 시대 변화에 맞는 효율적인 장교 양성체계를 내세우고 있지만, 많은 예비역 장교들은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닌 사관학교가 사실상 폐지되는 결과를 가져오고, 군의 정체성과 장교단의 정신적 기반이 약화될 수 있다는 우려를 갖고 있다. 장교 양성체계는 단순히 학교를 통합하는 행정의 문제가 아니라 군의 전통과 가치, 지휘문화와 국가관을 이어가는 국가 안보의 근간이다. 그런 중요한 사안일수록 충분한 연구와 사회적 공론화, 그리고 국민적 공감 속에서 신중하게 결정되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나는 더 이상 침묵할 수 없었다. 사랑하는 모교의 존폐를 넘어 우리 군의 뿌리와 정체성이 흔들릴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이 나를 집 밖으로, 거리로 이끌었다. 젊은 시절 가슴 깊이 품었던 애국심과 모교에 대한 애정이 노년의 나를 다시 행동하게 만든 것이다.
이번 피켓 시위는 67기 김세진 동문의 청와대와 국방부 앞 1인 시위에서 시작되었다. 후배의 외롭고도 결연한 행동은 많은 동문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총동창회는 국방부 주변에서 기수별 릴레이 시위를 시작했고, 서울뿐 아니라 대전과 부산, 계룡 등 전국 곳곳에서 뜻을 함께하는 동문들의 자발적인 1인 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나는 계룡에서 처음으로 피켓 시위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계룡은 3군 본부가 자리한 대한민국 국방의 중심지이기 때문에, 이곳에서 울리는 목소리는 그 상징성 또한 남다를 수밖에 없다. 뜻을 함께하는 동문들과 피켓을 제작하고 참가자를 모집하면서 계룡동문회의 시위가 시작되었다. 지금도 계룡대 정문과 주요 길목에서는 사관학교 통합 정책에 대한 우려를 알리는 피켓 시위가 조용하지만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처음 피켓을 가슴에 받쳐 들고 거리에 섰을 때는 솔직히 쑥스럽고 어색한 마음이 앞섰다. 군복을 입고 전후방을 넘나들던 군인이 노년에 이르러 길거리에서 피켓을 들고 서 있는 모습이 스스로도 낯설었다. 총을 들고 적과 마주했던 일보다 시민들의 시선을 받으며 피켓을 들고 서 있는 일이 더 어색하게 느껴졌다. 출근길 차량과 행인들의 시선이 와닿을 때마다 묘한 중압감이 밀려왔다. 그러나 피켓에 적힌 글귀를 다시 마음속으로 읽으며 흩어지는 마음을 다잡았다. 내가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은 사리사욕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평생 몸담았던 군의 근간과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라는 당당함이 부끄러움을 이겨내게 했다.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반응은 참으로 다양했다. 가장 힘이 되는 것은 말 없는 격려였다. 어느 날 출근하던 현역 장교 한 사람이 차량의 속력을 줄이더니 창문을 열고 아무 말 없이 엄지를 치켜세우고 지나갔다. 또 걸어서 출근하던 어떤 장교는 조용히 목례를 하며 응원의 뜻을 전해 주었다. 차량정체로 대기하던 여군장교는 창문을 내리고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 격려는 오랫동안 서 있던 피로를 모두 잊게 만들었다. 우리의 절박한 마음이 누군가에게는 전해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위안을 얻었다.
반면 대부분의 출근 차량들은 무심히 지나쳤다. 처음에는 서운한 마음도 들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타인에게 우리 의사를 전달하는 일이란 원래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들을 원망하기보다 우리의 생각을 더 쉽고 품격 있게 전달해야겠다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간혹 냉소적인 시선을 보내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럴수록 감정보다는 이성으로, 분노보다는 진정성으로 다가가는 것이 옳다는 사실을 배웠다.
이러한 경험을 하면서 피켓 시위도 결국 국민과 나누는 하나의 대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피켓의 문구는 누구나 짧은 순간에 이해할 수 있도록 간결하고 분명해야 하며, 왜 우리가 우려하는지, 무엇을 지키려 하는지를 국민의 눈높이에서 설명할 수 있어야 할 것 같다. 아울러 시위의 목적이 정당한 만큼 행동 또한 품격을 잃지 말아야 할 것이다. 감정적인 구호나 과격한 행동보다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절제된 모습이 오히려 더 큰 울림을 줄 것이다. 노병의 명예와 진정성이야말로 가장 강한 설득력이기 때문이다.
피켓 시위는 시작일 뿐이다. 국민과 소통하는 설명회와 언론 기고, 전문가들의 연구와 토론, 나아가서는 국민들에게 직접 호소하는 궐기대회 등 다양한 공론화가 함께 이루어질 때 우리의 목소리도 더욱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목적은 갈등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국가 안보를 좌우하는 중요한 정책이 보다 신중한 논의와 국민적 공감 속에서 추진되기를 바라는 데 있다.
노병은 원래 거리에서 싸우는 사람이 아니다. 젊은 날에는 국경을 지켰고, 전역한 뒤에는 후배들을 믿으며 조용히 살아가는 것이 가장 행복한 삶이다. 그럼에도 백발이 된 노병들이 피켓을 들고 거리로 나섰다면, 우리 국민 모두는 먼저 그 이유를 물어야 할 것이다. 누가, 왜 노병들을 길거리로 불러냈는가?
희끗희끗한 머리카락과 떨리는 손은 세월을 이기지 못했지만,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만은 아직도 현역이다. 계룡대 정문 앞에서 바람에 흔들리는 노병의 피켓은 누군가를 향한 분노의 깃발이 아니라, 자신이 평생 지켜온 가치와 신념을 끝까지 지키려는 마지막 몸부림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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