Ω given to fly
"괜찮아."
"그래도 괜찮아."
"그렇지만 괜찮아."
자, 우리는 이제 "괜찮아."라는 이 말이 온전함과의 동의어가 아니라는 사실을 드러내고자 합니다.
우리가 받은 이 엄청난 선물을, 무슨 리트머스 시험지처럼 고작해야 자신이 지금 괜찮은 상태인지의 여부를 확인하는 데만 사용하고 있는 이 쪼잔한 현실을 넘어서기 위해서입니다. 미운 오리새끼의 날개는 자신의 얼굴을 가리는 데 쓰이는 것이 아니라, 작은 호수를 박차고 광활한 하늘로 날아오르는 데 쓰이는 것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상기하기 위해서입니다.
"괜찮아."라는 목소리는 차라리 "좋아."로 바뀌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현실의 온전함은 더욱 정확하게 확인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날카로운 주사를 맞게 될 때, 우리가 몇 번의 경험을 통해 그 주사바늘에 익숙해지기만 한다면 이렇게 말하는 일은 이제 조금도 어렵지 않습니다.
"음. 괜찮아요. 이것도 괜찮아요."
그럼 우리는 그에게 물어볼 수 있습니다.
"주사바늘이 좋기까지 하나요? 주사바늘을 평생 꽂고 살아야 한다 해도, 또는 죽어야 한다 해도 아무 문제없이 좋게 느껴지나요?"
그럴 수 없다면, 그에게 주사바늘은 정말로 100% 온전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온전함과 밀접하게 관련되는 표현들은 '기꺼이' '좋은' '반가운'과 같은, 보다 적극적인 열림의 뉘앙스를 담보한 단어들입니다. 자기보호와 안전을 위한 폐색의 뉘앙스를 담아내고 있는 "괜찮아."는 사실 온전함과 그리 어울리는 짝은 아닙니다.
온전함은 일시적인 수성전의 전략이 아닙니다. 이 순간의 면피용 방법론이 아닙니다. 그러나 "괜찮아."라는 목소리는 바로 그러한 수성과 면피의 목적을 위해 참 빈번하게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경우의 "괜찮아."가 드러내는 것은, 그저 자기 자신이 가치적으로 지향하는 상태에 대해 지나치게 예민한 중요성을 부여하는 몸짓입니다.
이처럼, 상기한 목적으로 "괜찮아."가 쓰이는 대부분의 경우, 우리가 정말로 관심있는 것은 온전함이 아니라, 자신의 안전과 안위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는 온전함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괜찮은 상태에만 관심이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현실 속에서는 '자기 자신'과 '자기 자신이 아닌 세상'이 자연스럽게 둘로 분리됩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은 '자기 자신이 아닌 세상'에 대한 수성의 입장을 취하면서, 둘로 나뉘어진 까닭에 필연적으로 야기되는 긴장과 갈등 속에서 "괜찮아."를 거듭해서 추구하게 되죠.
예를 들자면, 오늘날의 세상 돌아가는 모습은 너무나도 마음에 안들고 화가 나지만, 그래도 자기 자신은 괜찮다고 말하는 셈입니다. 그래서 늘 '안 괜찮은 세상'과 '괜찮은 자신'으로 현실이 분열되게 됩니다. 모든 게 다 이와 같은 식이죠.
'안 괜찮은 세상' VS '괜찮은 자신'
'안 괜찮은 대상' VS '괜찮은 자신'
'안 괜찮은 사건' VS '괜찮은 자신'
"괜찮아."라는 말로, 자기 자신의 괜찮은 상태를 추구하는 움직임이 만들어내는 것은 바로 이 영원한 대립의 구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에서 온전함의 영어 표현을 잠깐 기억해볼 수 있습니다. wholeness라는 영단어가 담고 있는 함의는 '전체성' '전일성' '분리될 수 없는 하나' '통째' '전부 다' 등입니다. 따라서 '안 괜찮은 세상'과 '괜찮은 자신'으로 이미 현실이 분열되었다면, 거기에서는 아무리 우리가 "괜찮아."라고 강조한다 하더라도, 그 자리에 이미 온전함은 없는 것입니다.
내가 괜찮으면 세상도 괜찮은 것이고, 내가 문제없으면 세상도 문제없는 것입니다. "내가 깨달았으면 세상도 깨달은 것이다."와 같은 말은 바로 이러한 온전함의 정확한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 발화되는 표현입니다.
현실의 이원적 분열과 더불어, 온전함을 "괜찮아."로만 갖다 쓰는 행위가 가져오는 또 하나의 주요한 결과는 바로 피해자 의식의 지속입니다.
"괜찮아."라는 말을 누가 그렇게 요청하고 있겠습니까? 바로 안 괜찮은 자입니다. 안 괜찮기 때문에 그렇게도 반복적으로 "괜찮아."를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말로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괜찮아."라고 말하고 있을 때, 그 자리에 있는 것은 온전한 자가 아니라 일종의 안 괜찮은 피해자라는 사실을요. "괜찮아."라는 말의 지속만큼이나, 피해자 의식이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을요.
피해자 의식이 끝나는 때는 "괜찮아."를 멈추고 온전함을 발견하고자 할 때입니다. 정말로 온전한 자는 "괜찮아."라는 말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자신이 지금 괜찮은 상태인지의 여부를 따질 필요도 없습니다. 온전한 자가 관심을 두고 발견하고자 하는 것은 말 그대로 이 삶의 온전함이지, 자신의 괜찮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는 삶을 온전하게 만들지, 자신을 괜찮게 만들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 온전함에만 관심을 둘 때, 괜찮게 만들어져야 할, 소위 부족하고, 못나고, 잘못한 피해자는 이미 거기에 없습니다. 온전한 그와 하나된 온전한 삶만 있습니다.
그래서 온전함에 관심을 두는 자는 삶이라는 이름으로 늘 세상과 자신을 연결시킵니다. 온전한 하나로 만듭니다. 온전한 그로 인해 세상 또한 온전해집니다.
그러나 피해자 의식은 늘 세상의 가해를 상정하며 안전과 방비에만 힘을 쏟습니다. 세상은 늘 가해해야만 하고, 그 속에서 늘 그는 괜찮아야만 합니다. 이 둘 간의 화해는 영원히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한번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온전함이라는 것이 정녕 이 정도밖에 안되는 쩨쩨하기 짝이 없는 것이던가요?
자신이라는 조그만 모래성을 유지하고 보수하는 데나 쓰이는 일회성 순간접착제에 지나지 않는 것이던가요?
저 힘차게 밀려드는 파도 앞에 "괜찮아."라는 방패로 모래성을 지키고 앉아 있는 그 일이 우리에게 그렇게나 감동스러운 일이던가요?
우리, 바닷가에서 평생 그거 하고 살려고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던가요?
두 손에 들려 있는 방패를 한번 봐보세요. 정말 방패가 맞는지 다시 한 번 봐보세요.
우리는 이순간 거대한 알바트로스를 봅니다. 파도 앞에 날개를 방패삼아 전신을 가리고 있던 그 뭉뚱그려진 음영의 덩어리가, 이제 파도 위로 솟구쳐 날아올라 거대한 날개를 여한없이 휘두르는 그 위풍당당한 창공의 왕자였다는 사실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알바트로스는 이해합니다. 구름과 폭풍을 뚫고, 대해를 가로질러, 세계와 세계를 연결하는 위대한 자유의 메신저가 바로 자신이었다는 사실을요.
이처럼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게 된 그 결과로서의 온전함은, 하나의 세계로부터 다른 하나의 세계를 보호하기 위한 방패가 아니라, 하나의 세계와 다른 하나의 세계를 연결하기 위한 날개입니다. 그래서 온전함을 방패로 쓸 때는 우리의 삶은 우리와 이원적으로 분열되지만, 온전함을 날개로 쓸 때는 우리의 삶은 우리와 하나가 됩니다.
날개를 방패로 쓴다고 뭐라고 할 사람은 없습니다. 날지도 않으면서 하늘은 무한하다고 얘기하는 일이 다만 거짓말인 것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 거짓말로 인해 슬퍼지는 것은, 하늘도, 바다도 아닌, 파도를 거듭 맞으며 홀로 웅크리고 있는 알바트로스 오직 그 자신입니다.
그러니, 부디, 안 괜찮은 바다를 건너, 안 괜찮은 하늘을 향해, 안 괜찮게 날개짓하며, 그 모든 것이 안 괜찮았지만 가장 온전해서 너무나도 좋았음을 마지막 비행의 끝까지 전하세요. 가장 위대한 자유의 왕이시여.
첫댓글 잉느님짱~오늘도 잘 읽고 감~
오늘도 좋은 날 되기를. ^^]/
글이 엑스칼리버급이네요~
당신이 뽑아주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킹 아더시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