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도 자라고 있다.
영화영상학과/2013112973/박은비
1.
성장영화를 몇 편 보는 도중 문득 ‘성장’이라는 용어가 생소하게 다가왔다. 이리저리 찾아보니 ‘미숙한 존재에서 성숙한 존재로의 변화’ 정도로 정리할 수가 있었다. 궁금해졌다. 미숙한 존재와 성숙한 존재의 경계 기준은 무엇인지. 오랜 고민 끝에 모든 사람에게 통용되는 표준기준이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각자의 기준에서 조금 더 성숙해진다면 ‘성장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린 늘 미숙함과 성숙함을 오가며 좌절하고, 일어나고, 불안해하고, 안정을 찾기도 한다. 이런 과정들을 반복하며 성숙함에 조금 더 가까워지는 것이다. 그렇기에 일반적으로 아이에게만 쓰이는 ‘성장’이라는 단어는 어른들에게도 적용이 가능하다. 완벽히 성숙한 존재는 있을 수 없으며, 그렇기에 성장의 끝이란 없다(물론 물리적인 의미에서의 성장은 끝이 있다.).
2.
‘성장’이라는 단어에 불가피하게 따라오는 단어가 있다. ‘성장통’. 개인적으로 대부분의 영화에서 ‘성장’과 ‘성장통’을 다루고 있다고 생각한다(그것이 주요 이야기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주인공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앞서 말했듯 대부분의 사람에게 ‘성장’은 끝이 없이 늘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프랑소와 트뤼포의 <400번의 구타>는 앞서 말한 ‘성장’을 소재로 한 대표적인 영화다. 이 영화는 화목하지 않은 가정과 평범함과 수동적인 모습을 요구하는 사회 속에서의 불우한 아이 이야기다. 아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어른들(심지어 부모까지도)과 아이 ‘앙투안’. 이 영화 속에서 끊임없이 말썽을 저지르는 ‘앙투안’의 모습이 처절하게까지 느껴졌다. 말썽만 저지르는 아이가 ‘발자크’를 존경하는 모습은 내가 이 아이를 조금 다르게 보는 계기가 되었다. 불우한 환경 속에서, 자신이 축복받지 않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아이에게도 ‘꿈’은 있다는 사실이 내게 깊게 다가왔다. ‘아이의 꿈’을 생각했을 때 스티븐 달드리의 <빌리 엘리어트>가 떠올랐다. 꽤 비슷한 상황이다. 딱히 사랑을 받는다고 느껴지지 않는 가정환경에서 빌리는 조심스레 꿈을 키웠다. 목에 걸고 다니던 권투 장갑이 발레슈즈로 바뀌었고, 그는 자신의 감정을 춤으로 표현하기 시작한다. 이 두 영화의 공통점이자 차이점은 어른들(또는 가족)이라고 생각한다. 공통점은 앞서 말했듯 아이가 사랑을 받는다고 느낄 부분이 딱히 없‘었’다라는 것이다. 차이점은 바로 그 어른들의 성장이라는 점이다. 개인적으로 <빌리 엘리어트>에서 주인공인 빌리보다도 그의 아버지와 형, 할머니에게 더 시선이가고 집중을 하게 되었다. 그들은 방관자에서 완벽한 조력자가 되었다. 가족의 조력, 조금 더 넓게 ‘가족과의 관계’가 아이의 성장에 굉장한 영향을 미치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기에 성장영화에서 가족과의 관계를 다루는 경우가 많다. 린 램지의 <케빈에 대하여>는 가족과의 관계가 아이에게 미치는 영향을 강렬하게 보여준다. 물론 조금 더 깊게 영화를 보았을 때, 반대로 아이와의 관계가 어머니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도 보여준다. 그렇기에 난 이 영화를 <에바에 대하여>로 볼 수 있다고도 생각한다. <400번의 구타>와 공통점은 가족과의 관계 속에서의 성장을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차이점은 어른의 성장이라고 생각한다. 준비되지 못한 어머니인 에바와, 그녀와 도저히 가까워 질 수 없는 그녀의 아들의 이야기. 모성이라는 사회적 개념 속에 갇힌 에바는 아들에게 끝없는 노력을 한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 모든 노력들보다 끝 장면에서 진심으로(내가 보았을 땐 처음으로 느껴진 진심이었다.) 아들을 안아주는 모습이 그녀의 성장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에서 볼 수 있듯이 영화 속에서 성장하는 인물은 아이들만이 아니다. 다시 <빌리 엘리어트>로 돌아가보았을 때, 이 영화에서도 어른의 성장을 볼 수 있다. 조력자로 변한 가족들의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 아들의 꿈은 무조건적으로 무시해버리고 자신의 꿈을 강요한 아버지가 아들의 꿈을 위해 탄광으로 돌아가는 모습, 그리고 후에는 탄광으로 함께 들어가는 형. 이 모든 장면들이 어른의 성장을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생각한다(개인적으로 아버지의 모습에 몇 번이고 마음이 아팠다).
가족의 모습이 기본 바탕이 되는 또다른 영화에는 윤성현 감독의 <파수꾼>을 들 수 있다. 사실 이 영화에서의 기본 갈등은 주인공과 친구들과의 관계지만 그 바탕엔 가족과의 관계도 깔려 있다. 이 영화는 무관심했던 아버지가 아들의 자살 이 후에 아들의 친구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듣는 구조이다(이 과정에서 과거와 현재를 교차해서 보여준다.). 사실 죽은 아들에게 관심을 가지는 모습이 아버지의 성장이라고 볼 수 있을까에 대해서 고민을 했지만 성장으로 보기로 했다. 죽고 난 뒤 무슨 소용인가 싶은 마음도 들지만, 끝까지 관심이 없었을 수도 있기에 난 이런 변화를 아버지의 성장이라고 생각한다. 아버지의 성장도 성장이지만 이 영화에서의 주요갈등 및 성장의 주체는 친구들이다. 현재 학교에서 보여지는 약육강식, 서열의 모습을 잔인하게 보여준다. 이익을 위한 상호관계와 그에 따른 갈등. 그리고 죽음 뒤에 주변인이 깨닫게 되는 모습들은 현재 우리 사회의 청소년들이 앓고 있는 아픔을 적나라하고 나타내고 있다. 그들의 성장은 상처를 내며 이루어지고 있다. 비약이라고 생각될 수도 있지만 개인적으로 <400번의 구타>에서 앙투안의 달리기가 <파수꾼>에서 기태의 자살과 비슷한 맥락인 것 같다. 그들이 선택한 방법은 달랐지만 두 사람 모두 염증을 느낀 것이다(물론 기태가 느낀 염증은 앙투안에 비해서는 단기간이라 볼 수도 있다.). 결과적으로 기태가 성장을 했다고 볼 수는 없다. 그의 주변인들이 성장했다고 볼 수 있다. 반면, 앙투안은 성장했고, 그 주변인들이 성장했다고 볼 수는 없다. <파수꾼>이라는 영화를 보면서 ‘성장’이라는 것이 가끔은 굉장히 잔인한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것을 느꼈다.
3.
‘엄마, 내 자퇴할거다.’ 철없는 내가 부모님께 가장 큰 대못을 박은 대사다. 그리고 내 성장의 출발점이다. 나는 학교가 싫었다. 정확히 말하면 학교 안에서의 내 모습이 싫었다. 난 어느 순간부터 어중간한 학생의 모습이었다. 늘 공부를 걱정하지만 제대로 된 공부를 하지 않는 학생, 그렇다고 신명나게 노는 학생도 아니었다. 이 모습의 내가 싫었다. 짧은 기간의 고민을 마치고 난 부모님께 상담이 아닌 ‘통보’를 하였다. 할 수 있는 굵직한 400번의 고생 중 첫 번째 였던 것 같다. ‘앙뚜안’처럼 난 달렸던 것이다. 부모님은 결과적으로 나의 선택을 존중해주셨고, 그 날을 기점으로 나와 나의 부모님은 부모자식의 관계 속에서 한 발짝 성장하게 되었다. 그 후 부모님은 나의 ‘자유’를 인정했고 대신 그에 따른 ‘책임’은 오롯이 나의 것이 되었다. 난 내가 하고 싶은대로 살았고 늘 그에 따른 책임을 졌다. 내 10대의 성장은 내 현재의 성향과 인생 전체의 모습에 대부분의 영향을 미쳤다. 난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성장’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느꼈다. 그 중요성을 알기 때문에 영화 속에서 보이는 직접적인 혹은 간접적인 성장의 모습들이 좋다. ‘성장’이라는 단어가 주는 기대감은 나에게 있어 굉장하다. 내가 아직 성장할 수 있고, 지금보다 좋은 모습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기대감은 나에게 삶의 원동력을 제공해준다. 난 지금도 자라고 있다.
<참고 영화>
400번의 구타(프랑소와 트뤼포)/케빈에 대하여(린 램지)/파수꾼(윤성현)/
빌리 엘리어트(스티븐 달드리)/파라노이드 파크(구스 반 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