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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31:4-9(To), 계9:1-10:11(신약)
* 신약 계9:1-10:11
계시록에서는 많은 재앙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마지막 때에 살인, 복수, 음행, 도둑질을 회개하지 않는 이야기들이 있다. 굉장한 재앙이 있더라도 회개하지 않아서 재앙에 재앙을 더하는 일들이 벌어진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그런 일들을 예견하시고 계시록에 그것을 기록해놓으셨다. 우리는 그것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공부해야 하는데, 니짜빔에서 공부하는 것이다.
우리는 니짜빔 & 바옐레크 기간을 보내고 있다.
נִצָּבִים 니짜빔 : 견고히 서다, 수동적(נ)인 의(צ)의 집(ב)을 지은 상태
니짜빔은 하나님이 서 계신 것, 아주 견고히 서 계신 것을 이야기한다. 니짜빔은 수동적인 의의 집, 시스템이다. 의의 시스템을 갖추는 것이다. 집을 짓는 것은 목적이 있는 것이다. 의라고 하는 것은 목적이 있는 것이다.
여러분이 어떤 것에 대해서, 이 목적에 대한 질문은 여러분들이 사는데 있어서 굉장히 중요하다. 내 인생의 의미가 무엇이고, 이 땅에 왜 왔는가? 내 영혼이 이 땅에 온 것이 뭐냐? 이 목적에 대한 질문은 우리를 니짜빔하게 한다.
아템 니짜빔 하욤, 오늘 너희가 서 있다고 한다.
הַיֹּום 하욤 : The Day, 그날, 오늘
오늘이 왜 그날이냐면, 그 자체가 영원이기 때문이다. 니짜빔이 되었을 때 그날은 하욤, D-day라고 한다. 오늘이라고 하는 것은 어쩌다 온 것이 아니다. 히브리어로는 오늘은 하욤이다. 생전 처음 있는 날인데, 그날에 서 있다고 한다. 오늘 새벽기도는 처음온 것인데, 오늘 서 있다고 하는데, 히브리어로는 그날에 서 있다고 한다.
여러분에게서 새로운 오늘은 하나도 없다. 니짜빔, 견고히 서려면 그전에 목적한 날이 있어야 한다. 오늘 서 있으려면 말이다. 그전에 목적한 날이 없었으면 서질 못한다.
הַיֹּום 하욤 : 창세기 1장
그날이 언제인가? 오늘이라는 말은 창1장에 서 있다는 말이다. 내가 오늘 서 있으려면 창1장에 서 있다는 것이다. 첫째 날부터 일곱째 날까지이다. 우리가 그날에 서 있다. 과거의 창1장의 날에 서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설명하는 말이 목적과 수단이다. 사람이 서려면 처음으로 목적이라는 것이 있어야 한다. 목적 속에서 서 있게 된다. 인생에서 아무 목적 없이도 서 있을 수 있다. 눈을 떴으니까 아무 목적없이 나올 수 있다. 이것을 방황이라고 한다
그런데 사람이 오늘을 살기 전에 바로 그날을 살아야 한다. 그날이 목적이다. 목적이 있는 사람들은 니짜빔한 사람들이라고 한다. 목적이 분명하고, 그 목적 안에서 이미 살고 있어야 한다.
넌 왜 사느냐고 하면 뭐라고 대답하겠는가? 대다수의 사람들은 사는 이유가 먹고 살기 위해서 산다고 한다. 수준이 낮은 사람들은 의식주를 위해서 산다.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을 위해서 산다.
우리가 이 땅에서 산다는 것, 욕구로 산다는 것은 사는 목적이 의식주로 산다는 것이다. 이것은 결코 니짜빔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런 목적은 하늘까지 다다르는 견고히 서는 것을 할 수 없다. 아무리 내가 의식주를 목적으로 하더라도, 의식주를 통해서 견고히 설 수 없다. 내가 걸어갈 수 있는 길은 70-80년이면 끝난다. 죽을날이 바로 앞에 다가왔어도 사람들은 니짜빔하질 못한다. 인생의 목적이 뭐냐고 하면 사실상 의식주를 목적으로 하고 산다.
의식주, 집을 얻으려고 하고, 늘 먹는 시스템을 구축하려고 한다. 집이란 내 육신을 잠재우고, 육신이 먹고 사는 것인 줄 안다. 이 의식주를 목적으로 살다보면, 돈이 이것을 준다고 알아서, 돈을 벌기 위해서 산다. 회사가는 이유가 돈을 벌기 위해서 간다.
또 사람이 명예와 권력이 있으면 이것들이 주어진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스스로 지혜롭다고 하는 자들은 명예와 권력으로 니짜빔하려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식이 이것을 주관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지식을 얻으려고 한다. 모든 것이 형통하다. 이 지식이라는 것을 통해서 학력이라는 것을 얻는다. 모든 일에 형통하려면 학력이 있어야한다는 것을 깨닫고, 이것을 얻으려고 한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아무리 이렇게 해서 니짜빔, 어디론가 올라가려고 하더라도, 결국 니짜빔하지 못하고 무너지는 것을 경험한다.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니짜빔은 목적 가운데 서는 것이다. 하욤, 창1장을 인생의 목적으로 놓는 것이다.
물질을 목적으로 놓으면 모두가 멸망한다. 너는 왜 사느냐의 답이 이것은 될 수 없다. 오직 이 위에 있는 영의 세계만이 니짜빔할 수 있다. 영의 세계란, 삶의 목적이 창1장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베레쉬트, In the beginning이라고 한다. 사람이 자신의 삶의 목적을 하욤, The Day, 내가 그날을 살고 있다. 이 땅에 살아있는 이유는 그날, 창1장을 살기 위함이다. 오늘 이 시간에 존재하는 목적, 이유가 있다고 할 때 그 사람을 니짜빔했다고 한다.
이 니짜빔을 하고나면(= 목적), 사람은 수단을 가지게 된다. 그것을 바옐레크라고 한다. 니짜빔하면 걸어간다.
וַיֵּלֶךְ 바옐레크 : 가다, 걷다, 손(י)으로 훈련(ל)하고 적용(כ)하는 것
그런 목적을 이룰 수 있는 수단이 바옐레크이다.
이 수단은 아들이 한다. 목적은 아버지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니짜빔 - 바옐레크라고 한다. 수단은 말하는 것이다. 사람이 목적이 정해지면 이것이것을 살 것이라고 막 말하기 시작한다. 사람이 하욤, The day를 모르면 오늘 내가 왜 사는지에 대해서 할 이야기가 별로 없다. 욕구의 바람만 이야기할 뿐이다. 그런데 The Day를 알면 오늘 할 이야기가 있는 것이다
신29장에서 30장으로 넘어가고 있다
신29:29 감추어진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에게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
감추어진 일은 여호와께 속하였다. 니짜빔이라고 하는 것은 감추어진 일이다. 하니쓰테로트라는 아주 유명한 말이다. 이 감추어진 일은 목적을 이야기한다. 목적이 감추어져 있는 것이다.
여러분들이 드러나있지만, 이 오늘이라는 시간 속에 목적은 감추어져 있다. 목적은 머리 속에 있다. 영 속에 있다. 주님은 그 목적을 감추어진 일이라고 한다. 영,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감추어진 일이다.
마음이 어디있는가? 마음은 마치 돈이 안되는 것 같다. 토라 공부, 이런건 돈이 안되고, 감추어진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감추는 일을 주로 담당하신다.
나타난 일은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다. 이 수단은 나타나야 한다. 어떤 목적을 이루는 수단은 나타나야 한다.
니짜빔 : 영 / 바옐레크 : 몸
우리는 영과 몸으로 구성되어있는데, 이것은 우리 생명을 구성하는 핵심이다. 몸은 나타나야 한다. 그런데 영은 안 나타난다.
이 모든 것들은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려 하심이다.
그리고 30장에 오면 회개에 대해서 강하게 말씀하신다. 회개라는 것의 실제에 대해서 살펴보자. 사실 회개라고 하는 것은 목적 가운데 돌아오는 것이다.
여러분들은 태어나면서 걷는다. 그러면서 자기가 수단을 목적화한다. 자기가 걷고, 살다보니까 자기가 목적인 줄 안다. 자기 시간이 목적인 줄 알고, 자기 자체가 인생의 목적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회개하라는 것은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의 목적이 있다. 아버지가 있다.
수단은 아들이 자기가 목적이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가서 재산을 다오. 나는 나를 살겠다고 하고 먼 나라로 가버린다. 아버지가 인생의 목적을 다 정해놨다. 이 땅에 온 이유가 다 정해져있다. 창1장을 살아라. 너는 그리스도의 형상과 모양이 되는 그 삶을 살아라. 그 목적이, נָחֲלָה 나할라, 기업이 다 이미 정해져있다. 수동적인(נ) 생명(ח), 내가 훈련해야 할 생명이 다 정해져있다
첫째 날에는 죄가 뭔지를 깨닫는다. 빛이 임해서 죄를 깨달아야 한다. 인생에서 첫째 날이 오는 때가 있다. 누구든지 처음 만나는 일이 있고, 처음 느껴지는게 있다. 여러분들은 매일매일이 새롭다. 매일매일 첫 날이 온다. 똑같은 일을 하다가도 새롭게 느껴지는게 있고, 똑같은 사람이라도 또 첫날이 있다. 새롭게, 첫날로 느껴지는 것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 첫날로 느껴지려면, 빛이 있어야 한다. 사람은 첫날이 없으면 니짜빔하지 못하고 자기를 수단으로 여긴다. 이 빛이라는 것은 자기 자신으로 살지 않으려고 할 때 온다.
어둠이라고 하는 것은 죄이다. 어둠에 빛이 비추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중심의 사고방식에서 타인 중심의 사고방식으로 딱 왔을 때 새로운 빛이 비춰진다. 자기를 버리고 다른사람 중심으로 생각할 때 빛이 비춰지고 또 첫날이다. 또 그런 첫날을 살지 못하는 것은 과거의 판단과 정죄로 산다. 자기 중심으로 생각했던 것, 나하쉬, 자기 경험으로 산다.
브래*리를 딱 만나면 첫날이어야 한다. 그래야 하욤이고, 자기 중심적인 것을 버리고 주님의 생각으로 살아야 한다. 딱 보면 잘생겼다는 빛이 임해야 하는데, 그전에 내 중심으로 생각했던 것을 가지고 판단해서, 저것 또 왜 왔어? 하면 이게 어둠, 지옥 속에서 사는 것이다. 우리는 매일 첫날을 살아야 한다. 이게 예수 그리스도로 사는 사람들이다. 이게 너는 절대 판단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렇게 첫날을 사는 사람들은, 그날에 또 둘째 날이 있다. 빛이 임하면, 자기 중심적인 것들을 발견한 것이 있다. 자기 마음 속에 이기적인 것을 라키아, 두들겨 패는 것이다. 그러면 거기서 영이 생겨난다. 자아의 파쇄와 영의 해방, 내 자아를 두들겨 패고, 파쇄하면 영이 생기고, 하늘과 궁창이 생긴다. 거기서 윗 물, 아랫 물이 생긴다. 하늘에 속한 진리와 땅에 속한 진리가 생겨난다.
나를 두들겨 패는 것, 자아에 속한 것을 두들겨 패는 것, 자아를 쪼개고 파쇄시키는 그날이 또 있어야 한다. 둘째 날이 또 온다. 오늘 하루 속에서 나를 부수는 그런 둘째 날이 있기를 축복한다.
셋째 날도, 넷째 날도 있게되고, 굉장히 바쁘다. 그 삶 속에 계속 그날이 임하는 것이다.
그래서 회개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을 의미한다. 이미 The Day가 있다. 이미 내가 살게 되어있는 삶이 있다. 이 일이 벌어지는데는 목적이 있다. 에*더가 바가지를 긁었다는 것 자체가 인생이 아니라, 거기에는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바가지라고 표현하는 나에게 어둠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내가 바가지구나라는 것을 깨닫고, 둘째 날로 넘어가서, 그 나의 바가지를 깨뜨리고, 파쇄하는 것이다. 그랬을 때 셋째 날의 소망이 생겨나고, 약속의 땅이 생겨나고, 그랬을 때 넷째 날의 광명체가 떠올라고, 내가 빛이 되어서 에*더를 비추니까, 눈을 뜰 수가 없어요 남편이시여. 이런 것을 경험해야 한다.
이미 있는 삶, 정해져있는 목적이 있는 삶이라는 것이다. 거기로 돌아오라는 것이다.
신30:1 내가 네게 진술한 모든 복과 저주가 네게 임하므로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로부터 쫓겨간 모든 나라 가운데서 이 일이 마음에서 기억이 나거든
이것의 가장 핵심적인 것은 הֲשֵׁבֹתָ אֶל־לְבָבֶךָ 하쉐보타 엘 레바베카, 마음에 기억이 나거들랑이다. 모든 복과 저주가 다가온다. 인생을 깨닫는 것이 언제냐면, 모든 복과 저주가 임한다. 복만 임하게 살려고 했는데 모든 복과 저주가 임한다
사람이 헷갈리는 것이 이것이다. 내가 결혼을 하는데, 대부분 파트너가 복인 줄 알고 결혼한다. 물론 언약적 결혼을 한 사람들은 좀 다르다. 보*스는 복인 줄 알고 결혼하지 않았고, 저주일지도 몰라라고 덜덜 떨면서 결혼을 했다. 이런 경우는 좀 다르다. 복과 저주를 생각하지 않고 결혼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복인 줄 알고 결혼했는데, 살다보니까 이게 자꾸 저주이다. 내가 원하는대로 되질 않는다. 살다보니까 정신병에 걸리겠다. 얘는 복인가, 저주인가? 어떨 땐 복인 것 같다가, 어떨 땐 저주이다. 그리고 예수의 이름으로 복이 될 것을 굳게 믿고 교회에 끌고오면 복이 될 줄 알고, 열심히 끌고온다.
그런데 이게 오히려 또 저주가 된다. 괜히 교회에 데려왔다가 엉뚱한 소리 듣고서는, 오히려 나한테 너는 토라 배운게 왜 그래? 이래버리면 이게 또 저주가 된다. 복과 저주가 있다.
자식을 낳으면 처음엔 다 복인 줄 안다. 요즘 우리 진*가 루*가 복인지 저주인지 모르겠다. 저주라는 소리는 못하는데, 밤에 잠을 안 잔다. 그렇게 귀여워 하다가도 말이다. 둘째를 낳으라고 했더니 패닉 증상을 보인다. 그러면 애가 복이란 소리인가, 저주라는 소리인가? 루*에게 말은 못해서 그렇지 말이다. 복이라고 하면, 둘째 낳으라고 하면 신난다고 낳을텐데, 절대 못 낳는다는 것이다.
이게 복인 것 같은데 저주이다. 이래서 정신병에 걸리는 것이다. 기어코 이것을 복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복 제조기로 만들어버리려고 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베하야라고 하신다. 정말 놀라운 Joy, 기쁨이 있다.
וְהָיָה כי־יָבֹאוּ עָלֶיךָ כָּל־הַדְּבָרִים הָאֵלֶּה 베하야 콜-야보우 알레이카 콜-하드바림 하엘레 : 엄청난 기쁨이 있는데, 모든 말씀이 네 위에 왔다. 임했다.
= 이 모든 말씀이 복과 저주이다
우리는 복만 오게 하려고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예수님을 믿는데, 이 모든 말씀이 너에게 왔다. 그런데 베하야, 최고의 기쁨이다. 여러분들도 최고의 기쁨을 느끼시지 바란다.
왜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최고의 기쁨을 못 느끼냐면, 베하야, 야훼의 존재대로, 뜻대로 되었다는 것을 못 느끼냐면, 복만 오게하려고 다녀서 그렇다. 신30장은 다 회개의 장이다. 회개하려고 해야한다. 모든 말씀이 다 나에게 왔다. 이 모든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이다.
הַבְּרָכָה וְהַקְּלָלָה 하브라카 베하클랄라 : 복과 저주가 다 왔다
선악과는 악은 밀어내고 선만 오게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보, 왔다는 것이다. 선악과의 지식은 복만 오고, 저주는 나가게 하려고 하는데, 보라고 하는 것은 그 복과 저주가 왔다는 것이다.
사람의 생명이라는 것은 복이 있어야 살 것 같다. 그리고 저주가 있으면 죽을 것 같다. 사람은 원래 태어나면서부터 복을 생명이라고 하고, 저주를 사망이라고 한다. 사람은 이렇게 인식한다.
15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복 -> 생명 : 토브(선)
저주 -> 사망 : 라아(악)
생명과 복,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다. 생명과 복이 한 짝인데, 여기서의 복은 토브이다. 그리고 사망과 화는 라아이다. 내가 오늘 생명과 사망을 네 앞에 두었다고 한다
주님이 에덴동산 한 가운데 선악의 지식나무를 두신다. 선과 악을 네 앞에 두었다고 한다. 선악의 지식나무가 내 앞에 있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따먹는다는 것은, 선악과를 나에게 맞게, 나를 위해서 바라보면, 아은 갖다 버리고, 선은 나에게 가져오는식으로 생각한다. 그렇게되면 사망을 택하게 된다. 악을 택하게 된다. 악을 선인 줄 안다. 이것을 거꾸로 생각한다.
저는 젊었을 때 나를 생명으로 가고 싶어서 많은 choice를 했는데, 결국 내 choice는 최악이라고 하고 죽어버리려고 했다. 내가 선택하는 것마다 최악이다. 인간이 자기를 위해서 선하게 살려고 하면 항상 최악을 선택한다
하나님을 믿으면 생명만 오는 줄 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것을 네 앞에 두었다는 것이다. 지금 네 앞에 있는 파트너는 너를 위한 복이 아니라, 복과 저주. 생명과 사망이다. 네 앞의 파트너는 태어나서 죽는다는 것이다. 생명과 사망이 네 앞에 있다. 너는 어느날 태어났는데, 어느날 계속 죽으러 간다. 그래서 생명과 사망이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19 내가 오늘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라고 한다. 생명과 복과 저주, 이런 것들이 네 앞에 있다. 앞에 있는게 문제가 아니라는 소리이다.
회개라고 하는 것은 니짜빔에게로 돌아가는 것인데, 복과 저주, 생명과 사망이 있는게 문제가 아니라, 네가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라고 한다. 얘가 있는 것은 It's okay이다.
לְמַעַן תִּחְיֶה 레마안 티흐예 : 살기 위해서
תִּחְיֶה 티흐예 = 트히야 : 부활, 십자가(ת)의 생명(ח), 야(יָה)의 생명(ח)
영원한 삶을 위해서 생명을 택하라고 한다. 이것은 생명 안에서 선택하라는 것이다. 생명과 사망이 앞에 있는데 생명을 택하지 않을 사람이 있는가? 나는 그냥 확 죽어버리겠다는 사람 있는가? 없다. 다 생명을 택할 것이다. 복과 저주 중에 저주를 택하겠다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생명을 택하라는 말이 뭔가? 당연한 소리가 아니니까 또 이야기하시는 것이다
생명을 택하라는 것은 목적이 부활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이 복과 저주가 다 임한다고 하는 것은, 이 문제가 물질 세계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너는 회개해야 하는데, 마음의 문제라는 것이다. 물질 세계에서는 복과 저주가 굉장히 중요하고, 생명과 사망이 중요하다. 생명이 태어난 것이면, 몸이 태어난 것을 이야기한다.
이 몸은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사망으로 가서, 선택을 할 수가 없다. 생명을 택하라? 선택을 어떻게 하는가? 내가 내 맘대로 태어났는가? 엄마는 왜 날 낳았는가? 죽는 것도 내 마음대로 안된다. 이 세계는 생명을 택할 수가 없다. 내 마음대로 안된다.
회개라고 하는 것은 이 세상을 살기 위한 목적이 아니다. 레마한 티흐예는 목적이 부활이고 영의 생명인 것이다. 목적이 십자가의 생명이다.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혔다는 것이 이 육신이 죽고 다시 태어났다는 것이 아니다.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영의 생명, 십자가의 생명이다. 목적이 영의 생명이다
이 세계의 생명을 목적으로 하지 않을 때 우리는 생명을 택할 수 있다. 애초에 이 세계에서는 생명을 택할 수가 없다. 몸에 관련된 것은 우리의 택함, 자유의지의 바깥에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꾸 몸을 택하려고 한다.
내 파트너가 복이다? 뭐가 복이라는 것인가? 얼마나 저는 육신적인 사람들 때문에 괴로웠는지 모른다. 우리 아내를 보고, 선교사님은 정말 복이 많다고 하는데, 아내가 이뻐서랜다. 우리 아내를 육신으로 보는 것인가? 이것은 우리를 완전히 육신적으로 보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아내가 젊어서 그렇다고 하더라. 그저 물질적인 것, 몸에 대한 것이 오면 복이고, 아니면 저주이다. 여기서는 뭘 택할 수도 없다. 이 안에서 정신병 걸려 죽는다. 복인 줄 알고 저주고, 저주인 줄 알면 복이다. 이 교회 좋다고 하고, 나쁘다고 하고, 나쁘다고 했다가 좋고, 목사님도 좋았다가 나빴다가 한다.
그래서 98개의 저주를 공부할 때 가장 최악의 저주가 미침, 눈 머는 것과 정신병이다. 복인지 저주인지 맨날 헷갈린다. 그래서 죽는 것이다
주님은 생명을 택하라고 하신다. 그것이 이 세상의 물질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이다
사람이 회개하게 되는 것은 첫 번째로 무엇을 회개하냐면, 이 모든 것이 내게 왔다. 이게 기쁨이라고 해야한다. 복과 저주가 다 있다. 괜찮다. 나는 물질이 아니다. 나쁜 성질, 좋은 성질 다 있다. 괜찮다. 이 성질 조차 나한테 좋으냐, 나쁘냐지, 그 사람에게 좋으냐, 나쁘냐가 아니다. 다 그것은 나한테이다. 이것이 괜찮다, 기쁨이라는 소리는 내가 자아에서, 나 중심에서 나왔다는 소리이다. 괜찮다.
내 제자가 어떻던지 상관없다. 까짓거 그거 뭔 문제인가? 나의 자아에서 나왔다. 베하야, 모든 복과 저주가 다 왔다. 세상이 왜 이래? 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자기를 너무나도 사랑하는 사람이다. 세상이 말세이고, 어떻다는둥, 괜찮다. 누구에게 악한 것인가? IS, 북한, 미국은 누구에게 악한 것인가? 괜찮다. 복과 저주가 다 왔을 때 베하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 다음에 뭘 이야기하는가?
신30:1 내가 네게 진술한 모든 복과 저주가 네게 임하므로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로부터 쫓겨간 모든 나라 가운데서 이 일이 마음에서 기억이 나거든
베하야, 어마어마하게 기쁘다. 복과 저주를 모든 말씀, 콜 하드바림이라고 한다. 우리 주님은 하브라카 베하클랄라, 복과 저주를 못박아버리신 분이다. 복과 저주를 지고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은 그분은 복이면서 저주이다
אֲשֶׁר נָתַתִּי לְפָנֶיךָ 아쉐르 나타티 레프네이카 : 그것은 주님이 주셨다는 것이다.
이 비밀을 깨달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지냐면, 베하쉐보타 엘 레바베카가 벌어진다. 이게 회개의 첫 번째 단계이다. 너의 마음을 향해서 너가 회개 사역을 한다는 것이다.
הֲשֵׁבֹתָ אֶל־לְבָבֶךָ 하쉐보타 엘 레바베카
레바베카, 우리는 영의 세계와 육의 세계 두 시스템을 살아서 ב 베트가 2개이다. 이 두 시스템을 사는 네 마음을 회개하는 것이다. 회개 사역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반드시 내 스스로, 자유의지로 해야한다.
בְּכָל־הַגֹּויִם 베콜 하고임, 너의 욕구들 안에서, 너의 마음에 대한 회개사역을 하라는 것이다. 물질 세계에 대한, 환경, 내가 생각하는 복과 저주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내 마음의 문제이다. 마음이 아니면 생명을 택할 수가 없다. 네 마음의 문제이다. 마음에게로 돌아오라. 네 마음이 문제이다. 이게 회개의 첫 번째이다
2 너와 네 자손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한 것을 온전히 따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네 마음이 회개 사역을 하면, 회개란 שַׁבְתָּ עַד־יְהוָה 샤브타 아드 야훼, 야훼에게까지 돌아와야 한다. 야훼까지 돌아와야 한다. 야훼의 형상이 된다는 것이다. 생명을 택하는 것은 야훼를 택하는 것이다.
사실 육신의 쪽은 나를 택하는 것이고, 영은 야훼를 택하는 것이다. 야훼를 택하려면 야훼가 오셔야한다.
20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이시니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주하리라
הוּא חַיֶּיךָ 후 하예이카 : 그는 네 생명이시다
그분이 바로 예슈아이시다. 우리는 지금까지 내가 내 생명인 줄 알고 생 난리를 핀 것이다. 그게 내 생명이다. 예슈아가 내 생명이다. 생명을 택하라는 말은 그분을 택하라는 말이다. 예슈아를 택하라는 것이다. 진정한 회개는 내가 생명이 아니라, 그분이 생명이고, 그분을 택하는 것이다
신30장은 놀라운 회개와 생명에 대한 장이다. 그분을 생명으로 택하시길 축복한다. 또 그분을 몸으로 달라는 경우도 있는데, 아까 이야기했듯이 마음에 대한 것이다. 네가 마음으로 믿어서 이 생명을 택하게 된다. 마음으로 믿는 것이다.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른다. 니짜빔에 이르게되는 것이다.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임을 믿으시기 바란다. 우리 자신은 생명이 아니다. 나는 생명이 아니다.
하쉐보타 엘 레바베카, 우리의 마음을 돌이키는 것이 회개의 첫 번째이다. 마음의 사역, 회개 사역을 해야한다. 다른데 회개 사역을 하면 안된다. 다른 사람을 회개시키려고 한다던지 하면 안된다. 우리는 그런 경우가 많다. 내 마음의 회개 사역을 해야한다. 그것을 또 내 마음을 바꿔먹어서 저주를 복이라고 하려고 한다던지, 내 몸뚱아리 안 죽으려고 회개하고, 질병이나 사망이 오면 회개하는게 아니다. 이것은 아주 완전히 상관이 없다.
마음의 회개 사역은 한다는 것은 오히려 이것이 있어도 된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나는 상관없고, 나는 마음으로 산다, 영으로 산다는 것이다. 내 마음을 돌이킨다는 것, 회개한다는 것은 나는 이제 영을 생명이라고 하겠다. 몸뚱아리를 생명이라고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영으로 살기 때문에 나는 돈을 위해서, 욕망, 기쁨을 위해서 살지 않고, 내 자랑, 내 시간을 위해서 살지 않고, 영으로 살기 때문에 상관없다는 것이다. 누가 5리를 가자고 하면 10리 가도 괜찮다고 하는 것이다
정*이가 회사에 다니는데, 근로계약으로는 8시간 일하는 것인데, 2시까지 일하라고 한다. 괜찮다. 저주가 아니다. 처음 취직할 때는 복인 줄 알았으나, 몇일 하다보니까 저주이다. 벤 다*드도 2시까지 일한다. 복인지, 저주인지, 돈 딱딱 주고, 제 시간에 퇴근하고, 그래도 많이 줘야 복인게 아니다. 그런건 상관없다. 6시까지 일하라고 하면 10시까지 일하라. 제발 퇴근 좀 하라고 해야한다. 3달만에 살이 쪽 빠지고, 눈이 퀭해서, 이 회사를 제가 살려보겠다고 하고, 사장이 너나 살아라고 해야한다. 베하야, 복과 저주가 와도 괜찮다. 돈 더 준다고 해도 회사가 어려우니 회사에 쓰라고 해야한다.
좋은 회사 찾아가려는 것도 아니고, 상관없다. 그 속에서 한 영혼을 얻으려고, 한 영혼을 사랑하려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다. 마음의 회개 사역을 한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는 마음을 고쳐먹고 복이 오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생명이라는 것을 깨달으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이라고 고백한 그 사람은 전혀 다른 삶을 살게된다
* 기도
주님 우리가 정말 회개하는 삶을 살게 하소서. 그동안 끊임없이 복과 저주를, 선악의 지식나무를 내가 보암직한 것만 먹으려고 하고, 탐스러운 것만 먹으려고 하고, 그러다가 우리는 모두 미쳤고 눈 멀었고, 정신병이 걸렸고, 모두 어둠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주님 이제 내가 모든 복과 저주, 생명과 사망이 온 것에 대해 그냥 기뻐합니다.
베하야, 회개의 날이 왔습니다. The day가 왔습니다. 주님 이제 내가 마음으로, 영으로 살겠습니다. 내게 겉옷이 있던, 속옷이 있던 그게 내 생명이 아닙니다. 내가 십리를 가던, 오십리를 가던, 뺨을 쳤던, 안 쳤던 상관없습니다. 주님 나는 마음, 영을 살겠습니다.
베하야 키 야보 알레이카, 내 위에 모든 말씀이 임했습니다. 내가 이제 그것을 기뻐합니다. 이 물질, 몸이 나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는 이 놀라운 것을 믿습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가 내 생명임을 믿습니다. 영이신 하나님이, 영의 세계가 내 생명임을 믿습니다. 내게 어떤 물질이 있는지는 상관이 없습니다.
주님, 베하야 야보우 알레이카 하드바림 하엘레, 주님, 모든 말씀이 너희 위에 올 것이다. 복과 저주가 너희 위에 올 것이다. 주님, 그날, 하욤이 바로 오늘 내게 임하였습니다. 이제 알겠습니다 주님. 깨닫겠습니다. 이제 내가 내 마음에 회개의 사역을 하겠습니다. 나는 마음으로 살고 영으로 삽니다. 이 세상의 어떤 물질적인 것도 나를 해할 수가 없고, 나는 오히려 그것을 다스리기 위해 영의 세계로 들어갑니다.
예수 그리스도, 당신을 나의 생명으로 영접합니다. 내가 나의 생명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생명이십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