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故鄕 마을 甫勿里는
나는 오래 전에 「고향유정(故鄕有情)」이라는 제목으로 어떤 수필지에 기고한 일이 있다. 이번에는 중복을 피하기 위해서 추억의 방향을 조금 다른 쪽으로 잡을 생각이지만 뜻대로 될는지 조금은 염려스럽다.
내가 태어나서 자란 곳은 공주군(현 공주시) 정안면 보물리이다. 언뜻 보물리(寶物里)로 착각하기 쉬운데 엉뚱하게 보물리(甫勿里)로 되어 있다. 이름만으로는 마을의 성격을 짐작하기 어려울 듯싶은데 옛날의 한자 이름인 춘산리(春山里)의 '봄뫼'를 음운화하여 보물리(甫勿里)로 바뀐 듯하다. 보물(寶物)과 보물(甫勿)이 다 같은 음인데 보물리(賣物里)는 너무 이름이 거창해서 피한 지도 모른다. 사실은 크게 빗나간 이름도 아닐 터인데 말이다.
공주문화원에서 발행하는 《공주문화소식지》에서 최근에 이 마을을 기획 취재한 일이 있다. 참고로 그 목차를 훑어보면 ① 벼농사 마을 ② 특색 있는 경관 ③ 지명 유래 ④ 원주 원씨 입향 ⑤ 산신제 ⑧ 마을의 정기로 되어 있다. 언뜻 목차만 보아도 평범한 다른 시골 마을과는 조금 다른 데가 엿보일 듯싶다.
나의 친구가 처음 이 마을을 찾아온 일이 있다. 그리고는 하는 말이 마치 어떤 도시에 들어온 느낌이라는 것이었다. 지금은 이 마을에도 드물게나마 정기 버스가 드나들지만 십여 년 전까지만 해도 버스를 타려면 1킬로미터는 족히 걸어 나가야 했다. 그만큼 외진 마을인데 마을을 관통하는 큰 길과 그곳에서 갈려 나간 고샅과 밀집된 가옥 등 그 구조가 마치 도시의 한 블록(block)을 닮은 것이다.
내가 자랄 때는 가구 수는 80여 호였는데 그중 70호 가까이가 우리 문중이었으므로 원주 원씨의 집성촌인 셈이었다. 동, 남, 북의 3면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서쪽은 앞이 탁 트인 포실한 들판이어서 인근에서는 가장 부유한 마을로 손꼽히고 있었다. 인심 또한 그지없이 소박한 마을이고 보니 '보배'나 '보물' 이 별것이랴 싶은 것이다.
해는 동쪽의 상봉 쪽에서 떴고, 넘어갈 때는 멀리 무성산(茂盛山)의 목말을 탔다. 이 근방의 뚜렷한 해돋이 마을이기도 하다. 한때 정가에서 '뜨는 해', '지는 해' 의 논쟁이 뜨거웠던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이다. 나는 그때 우리 고향 마을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다. 우리 고향은 아무도 넘볼 수 없는 '뜨는 해' 쪽에 든다고.
내가 어릴 때는 동구 밖에 숲거리라고 불리던 울창한 상수리나무 숲이 있었는데 마을에서는 이 풍치림에 큰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이 숲거리에 해마다 왜가리와 백로가 교대로 떼를 지어 날아와서 둥지를 틀고 알을 품었다. 이 철새들이 황새를 닮았다고해서 다른 마을에서는 우리 마을이 황새마을로 통해서 부러움을 샀다.
나는 이 마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상급학교로 진학하면서 이 마을을 떠났다. 내가 보통학교 1학년에 입학하던 해 나의 집은 다른 마을로 분가를 했다. 그러나 통학 관계로 나는 조부모님 곁에 눌러 앉아서 열네 살 때까지 학교를 다녔다.
학창시절도 방학 때면 나는 정이 든 이 마을에서 친구들과 어울려서 태반의 시간을 보냈다. 내가 태어난 1923년에는 우리 마을에서 열여덟 명이 출생했다. 그런데 딸은 단 한 명뿐이었고 나머지 열일곱 명은 머슴애들이어서 이 마을에는 그해 싸리문마다'고추'와 '호두'가 제법 풍성했을 것 같다.
아래위로 몇 살 터울까지 합치면 한 마을에서 어울릴 수 있는 친구들은 부지기수였다. 내가 방학 때는 이사 간 우리 집보다 이 마을에서 시간을 많이 보낸 것은 바로 이 녀석들과 어울리기 위해서였다. 일본군 학도병으로 징집 당해서 옥고까지 치른 후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개구쟁이 친구들 가운데 더러는 징병이나 징용으로 끌려갔고, 포로 감시원으로 소집된 친구도 있었다. 이 마을에도 웬만큼은 전쟁이 할퀴고 지나간 상처가 남아 있었다. 그뿐 아니라 거리의 상수리나무들이 모조리 잘려서 그렇게 울창하던 풍치림이 폐허가 되어서 깜짝 놀랐다. 군수물자 수송용 마차의 장채감으로 잘려나갔다는 것이다. 징병이나 징용, 그리고 포로 감시원은 목숨을 부지하고 돌아오면 상처는 그런 대로 아무는 셈이다. 그러나 이 숲의 복원은 얼마나 오랜 세월을 요할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곡물은 그렇다 치더라도 놋쇠붙이와 함께 상수리나무까지도 공출(供出)의 대상이 되었다니 서글프고도 웃기는 얘기였다. 연합군 측은 첨단 무기를 개발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는데 거기에 비하면 마차를 끌고 다닌 일본군은 옛날 사무라이시대의 싸움을 한 셈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린이 상식만도 못한 군국주의의 석두(石頭)들 때문에 우리 고향 마을의 상수리나무 애먼 희생을 당한 꼴이 되었다. 연쇄적으로 왜가리, 백로 떼는 서식지를 잃고 우왕좌왕했고.
그 뒤 몇 해 동안은 마을 주변의 소나무 숲으로 드문드믄 옮겨앉더니 어느 때부터인지 아주 자취를 감추었다. 하천의 오염과 농약 살포 등으로 먹이가 바닥이 나서 떠난 것으로 보고 있다.
상수리나무가 장채감으로 잘려 나가던 때는 그래도 철새들의 먹이는 풍성한 때였다. 그 뒤부터 50여년 사이에 환경에 오염된 것을 생각하면 위정자들이고 민초들이고 다들 될대로 되라는 배짱이었든 듯싶다. 이럴 때 쓰라고 허허실실(虛虛實實)이라는 낱말이 생겨난 것일까.
언제던가 수필문학사(隨筆文學社)가 주최한 천로작가 인증패 수여식에서 있던 일이 지금도 선명하게 인상에 맡는다. 신인 작가를 대표해서 김중위(金重緯) 님의 인사말 가운데 “푸른 벼 논 가운데 서 있는 백로의 우아한 모습을 문학 정신에 반영하고 싶다”는 구절에 나는 크게 감동을 받았다. 내가 그런 모습을 많이 보면서 자란 때문이었다. 사실 지난날은 여름에 푸른 벼포기 사이에서 먹이를 찾는 순백한 백로의 모습에서 우리는 어떤 고귀한 생명력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풍치림의 훼손과 함께 우리 고향 마을의 또 하나의 큰 변화는 '서판산(徐判山)'의 이장을 들 수 있다. '서판산'은 이조판서를 역임한 서유린(徐有隣)의 묘소에서 유래한 서 판서의 산소를 줄여서 부르는 말이었다. 잔디로 덮인 이 넓은 곳은 이 마을 졸망구니들의 더 말할 나위 없는 즐거운 놀이터였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이곳에 모 기업체의 창업주의 묘소가 들어서서 모습도, 그리고 이름도 '김회장 묘'로 바뀌었다.
고향의 정취는 낯익은 자연 산천과 어려서부터 쌓인 우정의 결집 등에서 깊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숲거리와 서판산, 그리고 백로 떼들이 나의 추억 속에서 사라졌다. 돼지띠 동갑내기들도 지금까지 살아있는 사람은 세 사람뿐인데 그나마 다들 뿔뿔이 헤어져서 살고 있다. 옛 성인은 "먼 곳의 친구가 찾아오니 어찌 기쁘지 않을쏘냐" 라고 말씀하셨다고 하는데 나의 벗들과의 만남은 언제쯤일까.…………. 지난여름에 고향의 농업기술센터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우리 고향 마을인 보물리를 시범마을로 선정해서 큰돈을 들여서 걸맞는 조형물을 세운다는 것이었다. 며칠간의 말미를 줄 터인즉 나보고 행정동명과는 다른 상징적인 마을 이름을 하나 지어 달라는 부탁 전화였다.
옛 고향은 달라진 것이 너무 많아서 고향을 지척에 두고도 나는 지금은 실향민의 심정이 아닌가. 그런 나의 어느 구석에서 무슨 그럴듯한 이름을 짜낼 수 있을지 적이 망설여졌다.
'황새마을', '숲거리마을'은 지난 세월 속으로 날아간 지 오래이다. 그렇다면 마을 사람들의 순박한 마음과 주변의 풋풋한 녹지대를 결부시킨 '푸른마을'은 어떨른지? 아니면 아침마다 해가 영락없이 동쪽 상봉에서 떠오르므로 희망의 상징으로 '해돋이마을'은?
하기는 오나가나 이 나라의 산천은 오염투성이가 된 지 오래인데 우리 고향 마을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닐 듯싶다. 넉살 좋게 여기에 이름만 그럴 듯하게 붙인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조형물은 이미 세워졌을 터인데 누구의 어떤 이름이 우리고향의 상징적인 이름으로 등장했는지는 모르겠다. 올해는 오랜만에 고향 나들이 한번 해보고 싶다. 그리고 이름이야 어찌되었든지 우리 고향 마을이 풋풋하고 정겨웠던 옛 모습으로 되돌아가기를 바라고 싶은 심정이 간절하다.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