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현세자와 세자빈 강빈(姜嬪)
우리민족이 가장 존경해야 할 여성은 신사임당보다 소현세자 빈 강씨이다.
소현세자의 부인 세자빈 강씨는 흔히 ‘강빈(姜嬪, 1611~1646)’이라 칭해진다. 우의정을 지낸 문정공(文貞公) 강석기(姜碩期, 1580~1643)의 딸로 1627년 12월, 소현세자와 가례를 거행하고 세자빈이 되었다
▣ 병자호란시에 청나라는 소현세자(1612~1645)를 인질로 요구했다. 소현세자는 세자빈 강빈, 동생 봉림대군을 비롯한 186명의 조선인들과 함께 1637년 당시 청의 수도였던 심양으로 끌려갔다.
▣ 인조 15년 2월 서울을 떠나서 4월에 심양관(瀋陽館 : 주청 조선대사관격)에 도착하였다.심양관에 정착한 조선인 일행은 192명이었는데 이 대식구의 식생활을 해결하는 것 자체가 큰 문제였다.
▣ 당시 심양의 남탑거리에는 조선인 포로를 매매하는 노예시장이 있었는데 돈이 있으면 이들을 속환(贖還)할 수 있었다. 세자강빈은 이들을 구할 수 있는 현실적 수단이 돈이라는 사실에 주목한 것이다.
▣ 강빈은 청국에서 남편 소현세자를 돕기 위해 농사를 짓고 장사도 하여 거액의 돈을 벌었다. 그 돈으로 청국과의 외교 자금으로도 사용하고 개, 돼지만도 못한 생활을 하는 조선 포로 노예들을 많이 환속시켜 가족이 있는 고국 조선으로 보내주어 백성들의 인기가 대단했다. 강빈의 이런 활동이 권력에 대하여 항상 의심을 갖고 있는 시아버지 인조의 시기와 미움을 사는 것은 물론 제거대상이 되는 원인도 되었다. 1643년 강빈의 부친 강석기가 죽어 강빈이 잠시 귀국하였는데 인조는 강빈이 미워 강빈에게 친정 부친상에 문상조차 못하도록 왕명으로 명령하였다.
▣ 소현세자 부부는 인조 23년(1645) 2월 9년 간의 청나라 인질 생활을 끝내고 부푼 가슴으로 귀국했다. 이때 심양관에는 4700석의 곡식이 남아 있었다 하니 그녀의 경영수완을 잘 알 수 있다. 이방송(李邦訟) 등 천주교 신자인 중국인 환관·궁녀를 대동하는 한편 서양의 각종 과학기구·서적들을 가져왔다.
▣ 그러나 세자는 귀국 두달 만에 부왕 인조에 의해 독살되었다. 그녀 또한 비참한 운명에 처해졌다. 인조는 재위 24년 3월 강빈을 폐출해 친정으로 쫓아내고 당일로 사약을 내려 강빈을 죽였다.
▣ 조선의 종법(宗法)은 장자가 죽으면, 동생이 아니라 장손이 뒤를 잇는 것인데 인조는 세자의 장남 석철이 아니라 동생 봉림대군(효종)에게 뒤를 잇게 했다. 뿐만 아니라 석철을 제주도로 귀양보내 죽였고 강빈의 친정 어머니와 두 친정 오빠까지 죽였다. 자신이 소현세자 독살을 주도했음을 드러낸 것이다.
영회원 : 소현세자 강빈 묘
경기 광명시 노온사동 산141-20
<36살에 인조에 의해 사사당한 강빈은 역적이 되어 소현세자 옆에 묻히지 못하고 이곳 선산에 묻혔다.>
■ 세자빈 강씨
우의정을 지낸 문정공(文貞公) 강석기(姜碩期)의 딸로 인조 5년(1627)에 세자빈(민회빈(愍懷嬪) 이 되었고 병자호란 때는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가서 많은 고생을 하고 귀국하였다.
그러나 소현세자가 세상을 떠나자 평소 민회빈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인조(仁祖)의 후궁(後宮) 조씨(趙氏) 등이 민회빈이 소현세자를 독살하였고 왕실을 계속 저주한다고 거짓 꾸며대는 바람에 인조 23년(1645)에 폐빈(廢嬪)되고 그 다음해 사약을 받고 죽음을 당하였다.
그 뒤 숙종(肅宗) 44년(1718)에 세자빈 강씨의 결백함이 밝혀져 민회빈으로 복위되고 고종 7년 (1903)에는 이 묘를 영회원(永懷園)이라 이름 지었다.
이 능원의 시설은 봉분(封墳)·혼유석(魂遊石)·장명등(長明燈)·문인석(文人石)·석마(石馬)·석양(石羊)·석호(石虎) 등이 있으나 비석(碑石)과 정자각(丁字閣)은 남아 있지 않다.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소현 세자 강빈이 명복과 왕생극락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