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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6․25전쟁과 장성
(1) 북한군의 전면남침
1) 북한의 침략동기 및 배경
6․25는 제 2차 세계대전 후 미․소간에 벌어진 냉전의 산물이다. 자유 대 공산주의 국가 간의 이념투쟁이 하나의 전쟁 형태로 세계 무대에 등장한 것이 바로 6․25라고 할 수 있다. 6․25의 원인을 정확히 가려내기는 어렵지만 여러 가지 사실(史實)을 참작해보면 다음 몇 가지를 그 배경과 동기로 들 수 있다.(한국전쟁사 제2권국방부)
①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전후(戰後)처리문제로서 한반도를 북위 38선에서 남북으로 분단하여 미소가 각각 점령함으로써 내전이 조성되었다.
② 소련은 그들의 괴뢰인 김일성 일당을 북한에 들여보내 적화의 기지작업을 탄압과 숙청으로 감행한 뒤 괴뢰정권을 만들어 국제회의에 의한 한국에서는 합법적인 통일정책수립을 방해하고 나아가서는 적화통일의 침략군을 급속히 양성했다.
③ 남한에 주둔했던 미군의 철수로 힘의 공백기가 조성됐고 당시 초창기의 한국군은 자위력이 미약했다. 그 뒤 미군이 한국에 대한 군사 및 경제적 원조에 있어서 소극적인 정책을 유지함으로써 호랑이 앞에 먹이를 던져준 인상을 공산주의 침략자들에게 주었다.
④ 중국대륙에서 국․공(國․共)분쟁으로 장개석(蔣介石) 정권이 중공군에 의해 대만으로 쫓겨나자 소련은 아시아를 석권해 확고한 위성권을 형성하게 됐고, 중공은 그들의 동북군(東北軍․滿州方面軍)에 속했던 한국인계의 의용군 3개 사단을 북괴군에 편입시켜줌으로써 김일성으로 하여금 남한적화에 고무적인 야심을 품게 만들었다.
⑤ 미국은 극동 방위선을 태평양으로 후퇴시켜 한국과 대만을 방위권에서 제외시켰다. 이와 더불어 애치슨 미 국무장관이 “남한을 사수할 생각이 없다.”고 성명함으로써 남한침략을 촉진시키는 동기가 되었다.
⑥ 북괴와 소련은 이승만 대통령이 부르짖은 태평양방위 공동문제가 더 이상 확립되기 이전에, 그리고 한국의 국방력이 강대해지기에 앞서 속전속결로써 남한을 점령하면 미국이 중국에서와 같이 한국사태를 방관할 것이라고 오판했다.
⑦ 남한에서 공포된 농지개혁법의 유상(有償)매수, 유상분배가 일반농민들에게 실리(實利)를 주지 못하리라고 억측했고, 5․30선거 결과 여당이 크게 패한데다 중간파인 무소속이 대거 당선된 것을 보자 이를 남한 국민의 반정부적인 표현으로 잘못 판단했다.
⑧ 남한의 국방력은 북괴에 비해 너무 미약한데다 군부 안의 적색반란으로 인한 토벌작전과 북한이 남파한 유격대 및 지방공비들의 도약으로 군․경부대가 과도하게 분산되어 있는 군사적 약점을 포착했다.
⑨ 남노당의 지하 당책 김삼룡(金三龍), 이주하(李舟河) 일당이 체포되자 그 잔당들도 대부분 개과천선해 보도(保導)연맹에 전향하여 왔음에도 불구하고 박헌영(朴憲永)은 당 정책위원회 회의 때 김일성에게 아부하기를 “남노당의 지하당원이 남한에 50만명이나 건재하고 있으므로 남침만하면 남한 각 지방에서 폭동이 일어나 남한 석권은 시간문제”라고 허세를 부렸는데 김일성은 이 점에서도 큰 승산을 가지게 되었다.
지금까지 열거한 여러 가지 배경과 조건들이 소련과 김일성 일당으로 하여금 남침동기의 원인을 조성케 하였는데, 그 첫 동기를 포착한 것이 49년 6월 남한에서 미군이 철수한 후이며 구체적 계획이 이때부터 짜여지기 시작했다.
2) 한국군 수뇌부의 무사주의
국방부 수뇌부가 북괴의 남침 가능성에 대해 최초로 보고를 받은 것은 49년 12월 말 육본 정보국에서 작성한 연말통합정보보고서를 통해서였다. 이 보고서는 정부 요로와 미 당국에까지 보고됐으나 남침론이 회의론으로 바뀌어졌고 그 뒤 모든 새로운 정보보고는 반신반의 속에 낙관과 무사로 귀결지어졌다.
신성모(申性模) 국방장관은 북괴의 침공위협이 임박했다고 내외기자들에게 발표까지 하면서도 이에 대한 대비책은 하나도 갖추지 않고 호언장담만 했다. 이는 결과적으로 국민들로 하여금 국군에 대한 신뢰를 기대이상으로 갖게하여 경적(輕敵)사상을 심어주었다.
3월부터 38선 북측의 북한주민들이 소개(疏開) 당하기 시작했고 38경비대와 정규사단이 부대 교체를 하는 등 이동상황이 빈번했다.
6월 중순 이후에는 중포(重砲)가 진지를 점령하고 전차와 공병(工兵) 주정(舟艇)이 집결하는 등 공격 준비의 징후가 나날이 증가하기 시작하자 이를 군 수뇌부에 보고하면서 남침은 시간문제임을 경고했다.
그러나 육군참모총장 채병덕(蔡秉德) 소장, 신 장관 등은 이런 보고에 관심을 별로 갖지 않았다. 이들은 북괴군이 심리적 위협을 주기 위해 기동연습하는 정도로 치부했다. 이와 같은 안일한 사고방식을 갖게된 데는 군 수뇌부가 공산주의자들의 전략전술에 대한 인식이 결여되어 있는 데다 미국 의존도가 너무 깊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6월 24일 토요일 오전 중까지 육본 정보국 작전정보실에서 종합 분석한 결과 북괴군의 전면공세가 임박했다는 것은 알았으나 그 시기를 판단할 만한 특수정보가 없었다. 따라서 정보국장이나 참모총장에게 일단 해제된 비상경계를 다시 펴자고 건의할 수가 없었다.
육본에서 비상해제조치를 내리자 일선 각 부대는 연대장 재량에 따라 주말 외박과 외출이 허용되었다.
3) 6․25말기의 38선
25일 새벽 4시를 기해 북괴군은 38선 상의 전 전선에서 일제히 공격준비 사격을 하며 전차부대를 앞세우고 아군 경계진지에 대하여 공격 해왔다. 24일 밤부터 38선 중부지대에는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포천(抱川) 북방 양문리(梁文里)에는 아군 제9연대 1개 전초(前哨)중대가 배치되어 있었다. 이 부대 정면 운천(雲川) 방면에서 적 제3사단은 전차부대를 선두로 포천군 영평면(永平面) 성동리(城東里)로 남하했다. 38선 북방 1km에 위치하고 있는 이 부락 주민 가운데는 전차소리에 놀라 방문을 열고 내다보다가 사살된 사람도 있었으며 새벽 용변을 보고 나오다 수상한자로 지목되어 죽기도 했다.
북괴군 전차부대가 영중교(永中橋)를 건너 단숨에 양문리 지서(支署)를 포격으로 분쇄하고 포천으로 내달았다. 양문리 경계초소에서는 3~4대의 전차가 남하하고 있다고 연대 본부에 긴급 보고했다.
전군에 비상명령이 하달된 것은 25일 새벽 6시 30분 경이었다. 그러나 주말 외출로 전 장병이 흩어져 있었기 때문에 부대수습에 대혼란이 일어난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4) 무력(無力)한 작전지도
육본 작전국에서 가장 큰 관심사는 후방에 있는 3개 예비사단(제2사단대전, 제3사단대구, 제5사단광주)이 언제 서울에 도착하느냐였다. 명령은 밤 12시 안으로 서울에 도착하도록 되어 있었다.
전선의 상황은 육군본부에서도 제대로 파악하기 힘들었다. 특히 춘천(春川)의 제6사단과 강릉(江陵)의 제8사단, 옹진(甕津)의 제17연대 등의 상황은 전혀 알 길이 없었다. 경비행기를 띠워 보내 대충 파악할 정도였다.
채병덕 육참총장은 적의 주공(主攻) 방향이라고 본 우리 제7사단의 현황을 알아보기 위해 미 고문관 하우스만 대위와 함께 의정부에 있는 제7사단 사령부를 찾았다. 7사단은 예비연대도 없이 2개 연대 병력이라고 하면서도 사실상 2개 대대 병력 밖에 안 되는 숫자로 싸우고 있었다. 탱크를 앞세우고 남하하는 적을 막을 길이 없다고 하자 채 총장은 육탄공격으로라도 막으라고 명령했다. 로케트 포(砲)로도 막지 못하는 적의 탱크를 육탄으로 막으라는 건 무모하기 짝이 없는 방법이었지만 다른 묘책이 없었던 것이다.
후방에서 올라오고 있는 병력을 투입하는 길 외에는 응급책이 없었다. 채총장을 보좌하는 참모들도 어떻게 조치를 해야할지 몰라 갈팡질팡하며 기분내키는 대로 지시를 내렸다. 신성모 국방장관겸 국무총리는 채 총장의 보고를 받고 경무대로 가서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이 대통령은 신 장관에게 즉각 미국에 있는 장면(張勉) 대사에게 연락, 미국 정부에 긴급무기원조를 요청하라고 지시했다.
미 군사고문단장 로버트준장은 그때 임기만료로 본국에 가 있었고 참모장인 라이트 대령이 단장대리직을 맡고 있었으나 그마저 주말휴가를 즐기러 일본에 가 있었기 때문에 고문단측과도 협의를 할 수가 없었다. 작전지도면에서 그들이 도와준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한편 이날 긴급 소집된 국회에서는 국방장관에게 질문이 쏟아졌다. 이 대통령도 참석해 사태를 시급히 수습하라고 유시(諭示)를 내렸지만 회의에선 어떤 결론도 도출해 내지 못했다.
채 총장은 신랄한 책임추궁을 받았는데 후방사단의 도착을 기다려 역습을 하겠다고 호언한 것 이외에는 전략에 대해 한마디도 언급하지 못했다.
38선에 배치된 우리 국군은 저항 한번 제대로 해보지 못한 채 후퇴 일로에 놓여 있었다. 이날 밤 육본 작전국과 정보국 작전팀은 후방사단 도착을 기다려 26일 새벽을 기해 의정부 선에서 역습 하기로 결론을 얻었다. 채 총장도 저녁에 제7사단의 전황을 살피고 와 우선 대전에서 도착한 제5연대 병력으로 역습을 하려고 구상했다.
그러나 후방부대 동원과 열차의 긴급배차에는 상당한 혼란이 있었다. 유사시 수송계획이 교통부에 마련돼 있었으나 막상 선로 상에서 운행중인 열차를 빼돌려 배차하다보니 시간계획이 맞아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5) UN군의 참전
공산군의 남침이 있자 정부는 곧 미국에 무기원조를 요청했고 UN한국위원단도 이 사태가 종래와 같은 국지적 충돌이 아닌 북한의 전면적 침입임을 확인 25일 UN본부에 보고했다.
미국은 25일 새벽 3시(미국시각) UN안전보장이사회를 긴급 소집하도록 요청, 그날 오후에 열린 이사회에서 ‘적대행위의 즉시정지와 북한군의 38선 이북으로의 즉시철수’를 요구하고 UN가맹국에 대해 ‘이 결의의 실시를 위해 UN에 모든 원조를 제공’하도록 요청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미국은 전쟁이 터지자 즉시 한국에 대한 무기원조를 결정했으며 맥아더 사령부는 25일부터 무기수송을 시작했다.
그러나 북한은 UN안보리의 정전(停戰) 요구와 미국의 원조개시에도 불구하고 남하를 계속, 28일 아침 서울이 공산군에게 점령됐다. 사태가 이처럼 긴박해지자 트루먼 미 대통령은 6월 27일 맥아더 장군에게 UN의 명령을 실행하기 위해 미 해군과 공군을 한국에 보내도록 명령하고 대만의 중립화를 위해 제7함대를 파견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또 6월 30일 UN안보리 결의에 따라 ① 미 공군의 북한 군사목표 공격 ② 미 해군의 한국연안 봉쇄 ③ 맥아더 원수의 미 지상부대 사용을 허가했다.
안보리 결의안에 의거해 영국, 오스트렐리아, 캐나다, 뉴질랜드, 네델란드 등 각 국이 해․공군 제공을 약속함으로써 미군을 주력으로 한 UN군이 실질적으로 형성됐다. 7월 7일에는 통일사령부 설치와 UN기(旗) 사용이 안보리에 의해 의결됐다. 트루먼 대통령은 이 결의에 따라 맥아더 원수를 UN군 총사령관에 임명하고 UN기를 사용하도록 명령하는 한편 7월 25일에는 UN군 사령부가 동경에 설치됐다.
낙동강 전선까지 후퇴를 거듭했던 국군과 UN군은 9월 15일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를 역전시켜 서울을 탈환하고 북한을 수복했다. 그러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다시 서울을 내놓고 후퇴했다가 반격에 성공, 현재의 휴전선근처에서 교착상태가 이루어졌다.
(2) 6․25전쟁과 장성
1) 호남지방의 전황
서울을 함락시킨 북한군은 우세한 기동력을 발휘 천안(天安)을 손안에 넣고 남하했다. 7월에 들어섰을 때까지도 호남지구의 방비는 허술하기만 했다. 적은 제 105전차사단의 지원을 받으면서 남하한 제3․4사단과 최강부대인 제6사단이었다. 제3사단은 조치원(鳥致院)을 경유 대전(大田)으로 육박하고 제4사단은 전의(全義)에서 공주(公州)를 거쳐 대전으로 접근해 왔다.
제6사단의 일부병력은 온양(溫陽)과 예산(禮山)을 거쳐 장항(長項), 군산(群山), 이리(裡里), 전주(全州)를 차례로 점령하고 서해안 일대를 따라 계속 남하 목포(木浦)까지 진출해 호남지구를 석권하려는 것이 적의 기도였다. 또 공주에서 논산(論山), 강경(江景)에 진출한 적 제6사단 주력은 정예부대인 제4사단과 합세하여 대구(大邱)쪽으로 진출 호남지구를 제압하려는 계획이었다. 이 같은 적 제6사단의 동태에 대해 미8군과 한국군 사령부는 7월초까지도 확실한 정보를 입수하지 못했다. 미8군은 소재불명의 예비대거나 금강(錦江) 서북쪽으로 이동하는 예비대 정도로만 판단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적 최고사령부의 명령에 따라 특수임무를 부여받은 제6사단은 서해안을 따라 은밀히 전진하면서 무방비 상태에 있는 호남지구를 아무 저항 없이 빠른 속도로 석권할 계획이었다.
제3․4사단이 대전을 공격하고 있을 무렵 제6사단 일부 부대는 7월 13일 예산을 떠나 금강하류를 건너 장항, 군산에서 한국해병대와 경찰의 저항을 물리치고 점령한 다음 한국군 제7사단의 잔존부대의 저항을 받았으나 전주마저 쉽사리 손안에 넣었다.
여러 갈래로 나눠 남하한 적은 7월 23일 광주에 집결, 다시 북진했는데 제6사단 예하의 제13연대는 목포 방면으로 제14연대는 보성 방면으로 제15연대는 순천을 거쳐 여수방면으로 각각 향했다.
7월 25일 순천(順天)에서 일단 합류한 적은 동쪽으로 나가 진주(晉州)를 공격하기에 이르렀다. 적 제6사단장 방호산(方虎山) 소장은 진주와 마산(馬山)을 해방시키겠다고 큰 소리쳤다. 미 8군사령부는 적의 너무도 빠른 남하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군사령부는 미8군이 남부의 위협에 대비하여 이동시킨 미 제24사단과 손잡고 적의 공세를 견제하는 작전방침을 세웠다. 이에 따라 육본은 금강이란 천연방어선을 이용하여 적을 막고 전남경찰대의 증원을 받아 군산, 강경 사이의 요소요소에 포진함으로써 중부전선을 방어중인 미군과 균형 있는 전선을 형성하려 했다. 한국군 사령부는 이 같은 의도와 방침에 따라 서해안지구 전투사령부를 설치했다. 당시 대전에 있던 육군본부는 호남지구에 산재한 한국군과 경찰대를 장악하게 하는 동시에 이 지역에서 소집하는 인원으로 전투부대를 편성하도록 신태영(申泰英) 소장에게 구두명령을 하달했다.
이리하여 호남지구에는 빈약하나마 한국 서남부를 방어하고 적이 서남부로 우회 전진하는 것을 막기 위한 서해안지구 전투사령부가 설치됐으며 그 밑에는 전남(광주)과 전북(전주)에 각각 편성(編成) 관구(管區)사령부를 두었다. 서해안지구 전투사령관에는 신태영 소장이 취임하고 부사령관에는 원용덕(元容德) 준장이 임명됐다. 전주에 설치된 전북지구 편성관구사령관은 신 소장이 겸했으며 전남지구는 이응준(李應俊) 소장이 맡았다.
전북지구 편성관구사령부 산하에는 민기식(閔機植) 대령이 지휘하는 제7사단과 송덕준(宋德俊)대령이 지휘하는 오(吳)부대 및 김병준(金秉俊) 소령이 지휘하는 김(金)부대가 있었다. 한편 전남 편성관구 사령부 산하에는 이형석(李炯錫) 대령이 제5사단장으로 임명돼 제5사단의 제15연대가 여수(麗水)와 순천에서, 제20연대가 광주에서 각각 새로 편성됐다. 이밖에 해병대 김성은(金聖恩) 중령이 지휘하는 김부대와 전남경찰국장 김응권(金應權)이 지휘하는 경찰대가 있었다. 당시 제5사단에는 병기가 거의 없었는데 정일권(丁一權)참모총장의 명에 따라 병기를 전부 전방으로 차출했기 때문이었다. 이리하여 광주에는 제26연대가 이백우(李百雨) 중령 지휘 아래 실 병력 1개 대대로 편성되어 있었고 김병휘(金炳徽) 중령이 지휘하는 제15연대는 여수에 1개 대대, 순천에 2개 대대를 배치함으로써 실병력은 1,500명 정도였다.
이때 순천에 있는 순천고교에서는 신익희(申翼熙)국회의장, 이시영(李始榮)부통령, 이범석(李範奭)장군 등 정부요인들이 시국강연회를 가졌는데 연대장 김병휘 중령도 네번째 연사로 나와 열변을 토함으로써 5백여명의 학생이 지원 부족한 병력을 확보했다.
적이 서해안을 따라 남하, 정읍(井邑) 방면으로 침입하던 7월 20일께 광주에 있던 제5사단은 급히 이를 저지코자 제26연대 본부중대를 중심으로 한 학병 등을 보완하여 소총만의 1개대대를 편성, 장성방면으로 출동했다. 이때 조시형(趙始衡) 소령은 자원하여 이를 지휘하고 정읍으로 진출했다. 또 순천에 있던 제15연대는 남원으로 출동하라는 육본과 사단본부의 명령을 받았는데 연대장 김병휘 중령이 부상 지휘가 곤란했기 때문에 부연대장 이영규(李映奎) 중령이 이끌고 남원으로 출동했다.
정읍으로 나간 제26연대 일부 병력은 지연작전을 전개하면서 장성(長城)을 거쳐 광주로 철수했으며 제15연대 이영규 부대는 남원에서 구례를 거쳐 화개장터에서 일대격전을 벌였다.
광주에서 적의 공격을 받은 사단본부 및 남은 병력과 이응준 소장 등은 순천으로 이동, 순천우체국에 지휘소를 설치했다. 순천에서 다시 여수로 온 이 소장은 마산으로 갔다가 결국 부산에 합류했으며 이형석 대령도 욕지도(慾知島)를 거쳐 부산에 도착, 본대와 합류했다. 이렇게 해서 6․25가 터진지 1개월만에 전남지방은 완전히 적의 손안에 들어갔고 수복될 때까지 3개월 간 모진 수난을 겪어야만 했다.
2) 적치하(敵治下)의 장성
장성에 인민군이 첫발을 내디딘 것은 7월 23일 새벽이었다. 물론 아무 저항 없이 들어온 무혈입성이었다. 인민군은 장성을 함락시킴으로써 전남지방에 첫발을 내디딘 셈이 되었다. 그러나 인민군이 들어오기 전부터 이미 장성지방 좌익분자들은 설치기 시작했다. 여기에 여순(麗順)반란사건 이후 입산했던 빨치산들이 고향이나 연고지를 찾아 내려와 합세하기 시작했다.
당시 장성경찰은 지원부대로 차출돼 있어 사실상 무방비 상태였다. 호국군(護國軍) 3군(장성, 영광, 담양) 1개 중대는 사흘 전부터 노령산맥을 따라 진을 치고 있다가 적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철수해 버린 뒤였다. 이들은 제5사단 이응준 사령관의 명에 따라 철수한 것이었다. 그 만큼 적에 대한 상황판단이 어두웠다는 걸 입증한 셈이다.
장성에 인민군이 들어온 것이 7월 23일 새벽 6시쯤이었는데 이들은 들어오자마자 경찰서를 점거 대담하게도 전남경찰국으로 전화를 걸었다. “우리는 너희들을 때려잡으러 온 인민군이다. 2시간 뒤면 거길 갈테니 꼼짝말고 기다려!” 우리측은 적의 전화를 받고서야 전황을 알 정도로 정세판단을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군이나 경찰 모두 무모한 작전계획을 세워 인적, 물적, 시간적으로 막대한 소모만 가져왔을 뿐이다.
이날 새벽 장성읍민들은 좌익청년들의 고함소리에 잠을 깨어 거리로 나왔다. 어깨에 완장을 두른 적색분자들이 거리를 누비며 “인민군을 환영하자”고 외쳐대는 등 하룻밤 사이 세상은 바뀌어져 있었다. 오래 전부터 남노당원(南勞黨員)으로 암약해 온 김모(金某)가 20여명의 청년을 이끌고 다니며 날뛰었다(‘광복 30년’ 제3권 김석학 임종명 공저).
읍 내무서가 경찰서에 설치됐다. 소위 정치보위부는 대창동(大昌洞) 강(姜)병원에, 노동당 사무소는 충무동(忠武洞) 왕흥식당 자리에, 인민재판소는 등기소에, 유격대 사령부는 매화동(梅花洞) 천주교 건물에, 조국보위후원회가 충무동 민가(民家)에 각각 들어섰다. 그리고 남노당원과 투쟁경력이 많은 좌익분자들에게 감투가 안배되었다. 일명 ‘허사령(許司令)’으로 이름이 떨쳤던 유격 사령관 김모도 과거 빨치산 경력을 인정받아 서슬이 시퍼런 감투를 썼다. 성이 김인데도 ‘허사령’이라고 불리운 것은 그의 어머니가 허씨였기 때문이다. 김은 그의 애인을 여성동맹 위원장에 앉히기까지 했다.
이들은 조직을 대강 갖추자 바로 우익진영 색출에 들어갔다. 겁을 먹고 숨어버린 인사들에게 감언이설(甘言利說)로 자수를 권유했다. 곳곳에 벽보를 써 붙이고 가족과 친지를 통해 스스로 걸어 나오도록 유도했다. 좌익폭도들의 달콤한 말에 속아 자수한 우익인사들은 3일만에 50여명이나 됐다. 살려준다니까 모두 제발로 걸어나온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시일이 지나자 50여명 중 하나 둘씩 불려나간 사람의 행방이 묘연해졌다. 개별조사를 받은 다음 처형당했기 때문이었다. 이를 뒤늦게 눈치챈 나머지 인사들은 선무공작반에 자원하기도 했다. 저들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체 하면서 달아나려는 속셈이었다. 이 계략은 들어맞아 내무서 유치장을 나와 돌아다니다 밤을 이용 잠적했다. 장성경찰서에 근무했던 박모 경위도 이같은 방법으로 달아났는데 그의 아내가 폭도들에게 모진 수모를 당해야만 했다.
장성군수를 지냈던 하헌종(河憲種)은 가족들을 미리 대피시켜 놓은 다음 삼서면(森西面)에 사는 사돈집에 숨어있다 광주(光州)로 피신했으나 끝내 잡혀 처형당하고 말았다. 장성읍장 서기풍(徐基豊)은 조카집에 피신했고, 경찰서장 정소실(鄭小實) 경감은 경찰부대를 따라 후퇴했다. 거물급 우익인사들의 색출에 여념이 없는 폭도들에게 3군 호국군 대대장을 지낸 박남순(朴南淳)도 당연히 지목 대상이었다. 박은 일단 대원들과 함께 산으로 숨어들어 갔다가 광산군(光山郡) 임곡면(林谷面) 외가로 갔다. 그러나 그곳까지 냄새를 맡고 찾아온 폭도들 때문에 비아면(飛雅面) 어느 민가 안마당 짚더미 속에 숨어 지내다 발각되고 말았다. 그들은 박을 죽이지 않고 월북(越北) 시키려고 갖은 회유책을 쓰다 광주형무소로 넘겨버렸다. 광주형무소에서는 현준호(玄俊鎬), 최영욱(崔泳旭) 등 굵직한 우익인사들이 하나씩 불려나가 처형되곤 했는데 박은 순간적인 기지(機智)로 간수 호명에 응답하지 않고 버틴 끝에 형무소를 탈출 살아 나올 수 있었다.
(3) 장성의 반공투쟁
1) 태극(太極)결사대
좌익분자와 폭도들이 날뛰는 속에서도 우익청년들은 맨주먹으로 항쟁을 벌였다. 낮에는 주로 산 속에 숨어 지내다 밤이면 마을로 내려와 활동했다. 그 좋은 예(例)가 장안리(長安里)에서 조직된 ‘태극결사대’였다.
태극결사대라는 이름의 반공청년단체는 변진일(邊鎭壹)이 주동이 되어 조직했다. 변은 국방부 문관으로 첩보 업무를 맡고 있었는데 6․25가 터지자 단신으로 남하하여 7월 23일에 고향으로 왔다. 장안리는 봉암(鳳岩), 월봉(月奉), 장재(長在) 등 3개 마을로 이루어져 있는데 6백여호 대부분이 변씨 문중이었다.
고향에 온 변은 먼저 좌익들의 계보부터 파악했다. 남노당으로 암약해 온 청년들을 중심으로 머슴살이하던 청년, 일꾼 등이 죽창을 깎아들고 설쳐댔다. 이들이 80여명의 우익인사들을 색출해 처형할 계획까지 세우고 있음을 알았다. 변이 고향에 내려온 지 사흘째 되는 날 밤 벌써 마을 청년 8명이 잡혀가 희생당했다. 그들은 서삼면(西三面) 중동산 속으로 우익청년들을 끌고 가 죽창과 칼등으로 찔러 죽였다.
변은 먼저 20세 전후의 마을청년들을 비밀리에 모았다. 그리고 1대 1로 좌익세력과 싸우기로 결의 이름을 태극결사대라 붙였다. 8월 18일에 조직된 태극결사대는 모두 32명이었다. 모두 장성읍 장안리(長安里) 출신들이었다. 대원들은 각자 단도 한자루씩을 품고 다니도록 했다. 변은 일제때 중국에서 임시정부 유격대원으로 활약한 바 있었기 때문에 게릴라전에 훌륭한 솜씨를 발휘했다. 정보원까지 2명을 두고 밤에만 기습을 감행했다. 좌익폭도들이 한 두명씩 지나갈 때 갑자기 달려들어 해치우는 수법이었다.
변은 대원들을 산 속에 모아 기습훈련도 시켰다. 허수아비를 세워놓고 단검으로 심장을 찌르는 연습이었다.
변대장 자신도 기습을 감행, 어느날 밤 새벽 2시께 좌익 두목급인 고모(高某)를 살해하기도 했다. 흥양촌(興陽村) 언덕바지 버드나무 밑에 매복해 있다가 혼자서 총을 메고 지나가는 그를 일격에 해치운 것이다.
태극결사대원들이 이렇게 처치한 폭도들의 수효는 9월하순까지 모두 21명에 이르렀다. 집안에서 문 열어놓고 잠자다 죽었는가 하면 논두렁에서 밥 먹다 살해되기도 하고 밤길을 가다 목졸려 죽기도 했다. 이들을 그냥 놓아두었더라면 양민의 희생이 더욱 컸을 일이었다.
9월말이 가까워오자 폭도들은 한층 더 발악하기 시작했다. 수효도 더욱 늘어 140여명에 달했다. 이들은 자기네 편이 감쪽같이 살해당하자 면밀한 탐색을 한 끝에 태극결사대의 정체를 알아내고야 말았다. 그리하여 9월 29일 마침내 장안리 일대를 이잡듯이 뒤져 태극결사대원 16명을 잡아냈다.
폭도들은 잡은 결사대원들을 태봉(泰峰)이란 산 속으로 끌고 들어가 20여명이 차례로 돌아가며 칼과 죽창으로 찔러 죽였다. 좌익 폭도들에게 쫓기던 한 대원은 낫으로 자신의 목을 찔러 자결하기도 했다. 죽기 전 “대한민국 만세!”를 소리높이 외치고 쓰러지자 좌익폭도들도 고개를 내저었다.
10월 6일 저녁 국군이 입성한다는 소문이 퍼지고 장성 못재까지 이르렀다는 귓속말이 오가자 장안리 주민들은 모두 들떠 마을 앞 월봉 공회당에 모여들었다. 어린아이, 노인은 말할 것도 없고 태극결사대원들도 모였다. 얼굴에 환한 빛이 감돌고 모두 웃음꽃을 피웠다. 모여 앉은 주민은 50여명이나 되었다.
그런데 이때 느닷없이 백명 가까운 숫자의 좌익폭도들이 몰려와 공회당을 포위하고 그 중 10여명이 마을사람 가운데서 소위 ‘악질반동분자’들을 가려내기 시작했다. 지목 받은 사람은 고개를 떨구며 걸어나갔다.
군중 맨 뒤쪽에 서있던 변대장은 느닷없이 두 손가락으로 폭도 한 명의 두 눈알을 찔러 쓰러뜨린 다음 결사적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뒤에서 마구 총을 쏘아대 일부러 맞은 척 밭고랑에 쓰러져 있다가 기어서 숨었다.
폭도들은 변을 놓치자 더욱 분통이 터져 부녀자 12명을 포함 모두 42명을 가려내 태봉으로 끌고 올라갔다. 남자들은 대부분 태극결사대원이었고 부녀자들은 대원부인이거나 우익청년들의 아내였다. 폭도들은 얼마전 태극결사대원 16명을 처형한 바로 그 곳에서 양민 42명을 또 학살했다. 여자들을 정면으로 세워놓고 유방과 국부를 찔러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폭도들은 또 여순반란사건 때의 공비잔당을 신고했다는 이유로 기산리(岐山里) 이온공(李溫公) 순경의 어머니를 비롯해 아내, 장남, 차남 등 일가족 7명을 몰살시키기도 했다. 생후 7개월 된 아기도 죽였다. 이 순경은 그 전에 붙잡혀 광주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다 파옥(破獄)사건으로 나오기는 했지만 이미 가족들은 몰살된 뒤였다.
적치하의 장성에서 반공투쟁을 한 단체는 태극결사대 이외에도 상당수 있었다. 북일면(北一面) 신흥리(新興里)의 광복형제단(光復兄弟團단장 변대옥), 북상면(北上面) 용곡리(龍谷里)의 화랑단(花郞團단장 변옥기), 서삼면(西三面) 봉연리( 鳳淵里)의 결사단(決死團단장 이중석) 등이 맹활약했다. 좌익폭도들에 잡히기가 싫어 자결한 청년도 많았는데 태극결사대의 유지현(柳池鉉)은 쫓기다가 강변에서 낫으로 자신의 목을 쳐 자결했고 광복형제단은 발목에 돌을 매달고 북일면 저수지에 뛰어들어 죽었다. 진원면(珍原面) 적선리(積善里)의 김종원(金鍾元)도 쫓기다 방죽에 뛰어들었고, 태극결사대의 변석기(邊錫基)는 포위 당한 채 만세를 부르고 죽어갔다.
2) 잔인한 보복
장성군내에서 우익인사가 있는 집안으로 피해를 가장 크게 본 것은 북이면 사가리(四街里)의 강(姜)씨 집안과 북하면(北下面) 일대의 울산 김(金)씨들이었다.
국군이 입성할 무렵인 11월 3일 새벽에 좌익폭도들은 북이면 사가리 일대에 사는 강씨 집안들을 덮쳤다. 장성군 독촉 국민회 총무부장인 강민수(姜珉秀), 강권수(姜權秀) 집안이었다. 오래전부터 열렬한 우익진영인 강씨 집안을 박살내려고 계획해 온 폭도들은 이날 밤 갓난아이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강씨 문중 47명을 끌어냈다. 조사해서 죄가 없으면 돌려보내겠다고 꾀어 끌어낸 폭도들은 집에서 1km쯤 떨어진 속칭 흥꼬리 언덕배기에 이르렀을 때 본색을 드러냈다. 내무서로 향하지 않고 산으로 끌고 올라갔다. 반항하는 노인들의 입에 칼을 쑤셔 넣어 살해했다. 죽창과 칼 그리고 총으로 마구 학살했다. 이 같은 아비규환 속에서도 강대훈(姜大薰) 등 5명은 중상을 입고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폭도들은 시체확인을 했지만 모두 피투성이어서 죽은 줄로 착각했던 모양이었다.
한편 북하면 약수리(藥水里)와 중평리(中坪里) 일대 울산 김씨 문중은 집안청년들이 ‘태극반(太極班)’이라는 반공단체를 만들었기 때문에 대상이 되었다. 태극반은 8월 초순 김병용(金炳龍)등 17명이 도착, 마을마다 다니며 ‘타도하자 빨치산’ ‘몰아내자 공산당’ 등의 표어와 포스터를 붙이고 전단을 뿌리기도 했다. 이를 본 좌익폭도들은 비밀리에 태극반원의 명단을 파악 일거에 38명을 잡아냈다. 중평리장 김상완(金相完)을 비롯해 김병용(金炳龍)의 부친 김상선(金相善) 등도 포함됐다. 붙잡힌 38명 가운데는 부녀자도 10명이나 있었는데 태극반원들의 부인이거나 누나들이었다. 이들은 모두 중평리 뒷산으로 끌려가 칼과 죽창 세례를 받았다. 넓직한 구덩이를 파놓고 시체는 한꺼번에 묻었다. 잔인한 폭도들은 저희들 손으로 죽이기가 싫증났던지 아버지를 시켜 아들을 찌르게 하는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지르기까지 했다. 한마디로 울산 김씨 문중은 태극반 조직에 대한 보복을 철저히 당한 셈이었다.
(장성군청 홈페이지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