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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마음공부와 신념의 재구성 원문보기 글쓴이: 와룡
안과 저-밖의 환상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돌고 있다는 사실을 코페르니쿠스가 발견하기 이전에는 태양이 우주의 다른 천체와
더불어 지구 둘레를 돌고 있다는 것이 공통된 신념이었다.
지구는 만물의 고정된 중심이었다.
좀 더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인도에서 이러한 지구중심적 좌표가 인간에게 주어졌다.
심리적으로 말해서 한사람 한사람이 우주의 중심으로 인정되었다.
얼핏 이와같은 관점은 이기적으로 보일지 모르겟으나 각자가 하나님의 현신으로 인정되었던 만큼
반드시 그렇다고 할 수도 없었다.
아름다운 힌두의 한 폭 그림에는 야나무강의 둑에서 달빛을 받으며 춤추고 있는 크리슈나가 아리따운
브라야 여인들이 원을 그리고 잇는 한복판으로 들어간다.
그녀들은 한결같이 크리슈나를 사랑하며, 그와 함께 춤추고 있다.
크리슈나는 이 세계의 온갖 영혼들과 더불어 춤추고 있으며 -사람은 자기자신과 춤추고 있다.
만물의 창조자인 신과 함께 춤춘다는 것은 우리자신과 함께 춤추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새로운 물리학인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이 지향하고 있는 듯한 방향이기도 하다.
상대성이라는 혁명적 개념과 양자역학의 논리 부정적인 역설에서 고대의 어형변화표가 나타나고 있다.
막연한 형태나마 우리들은 우리 한 사람 한사람이 물리적 현실 창조에 아버지 구실을 한 몫하게 되는
개념의 틀을 얼핏보기 시작한다.
무기력한 방관자로서 표현된 우리들의 옛 자화상, 다시말하면 보기는 하되 영향을 주지 못하는 존재는
헤체되고 있다.
우리들은 모름지기 인류 역사상 가장 짜릿한 행위를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입자가속기의 힘찬 진동을,컴퓨터의 경쾌한 타자음,그리고 춤추는 계기 가운데서, 거대하고 형체없는
힘앞에서 느끼던 무력감을 비롯하여 우리들에게 그처럼 많은 것을 주어온 옛 '과학'이 그 자체의 기초를
밑바닥에서부터 뒤집고 있다.
우리들이 주었던 어마어마한 권위를 과시하며 과학은 우리들이 믿음을 두어왔던 자리가 잘못 잡혔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들은 불가능한 것, 다시 말하면, 우주에 있어서의 우리 역할을 포기하려 했었던 것 같다.
우리는 우리의 권위를 과학자들에게 넘겨주어 이 일을 하려고 노력해왔다.
그 과학자들에게 우리는 창조.변화.죽음의 신비를 캐는 책임을 맡겼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무심한 삶의 틀에 박힌 일상사를 맡겼다.
과학자들은 거리낌없이 그들의 과업을 떠맡았다. 우리들도 끊임없이 증가하는 현대과학의 복잡성과
점차 확대되는 현대기술의 전문화 앞에서 무기력한 역할을 하는 우리 과제를 쉽사리 맡아하게 되었다.
3세기가 지난 오늘날 과학자들은 그들이 발견한 결과를 들고 돌아왔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 딱 잘라 말하기는 어려워요. 하지만 우리들은 우주를 이해하는 열쇠가
당신이라는 점을 밝히는 증거를 쌓아 올려왔어요"
이건 단순히 지난 3백년동안 우리들이 세게를 보아온 방법과는 다를 뿐만 아니라 그 정반대다.
과학이 그 위에 서있는 '이안'과 '저밖'의 구분이 몽롱해지고 있다. 그것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사정을
말해준다. 과학자들은 '이안-저밖의 구분을 이용하여 '이안-저밖'의 구분이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음을
발견했다.
'저 밖'은 철학적 의미에서만이 아니라 엄격한 수학적 의미에 있어서도 우리들이 '이안'에서 결정하는
것에 좌우된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
새 물리학은 관찰자는 그가 보는 대상을 관찰할 때 반드시 그 대상을 변화시킨다고 말해준다.
관찰자와 관찰되는 것은 현실적이고 근본적인 뜻에서 서로 관계하고 있다.
이 상관관계의 정확한 본질이 밝혀지지는 않았으나 '이 안' 과 ' 저 밖'의 구분은 환상이라는 증거가
점차 늘어나고 있다.
방대한 실험자료가 뒷받침하고 있는 양자역학의 개념적 틀이 현대 물리학자들로 하여금 풋나기가
아닌 사람들에게마저 신비주의자들의 소리와 같은 어투로 그들의 견해를 표현하게 하고 있다.
경험을 통해서 물리세계에 접근한다. 그런데 모든 경험의 공통단위는 그 경험을 치르는 '나'이다.
요컨대 우리들이 경험하는 것은 외적 현실이 아니라 그것과 우리와의 상호작용이다.
상보성-컴프턴산란
이것이 상보성의 기본적인 가정이다.
상보성은 닐스보어가 빛의 파동-입자 이중성을 설명하고자 개진한 개념이다.
지금까지는 그 누구도 이보다 더 훌륭한 개념을 생각해내지 못했다. 이 논리에 따르면 파동과 같은
성격과 입자와 같은 성격은 빛의 상호배타적이거나 상호보완적인 측면들이다. 비록 어느 한쪽이 언제나
다른 한쪽을 배척하지만 이 둘은 모두 빛을 이해하는데 필요하다.
어느 한쪽이 항상 다른 한쪽을 배척하는 이유는 빛 또는 그 밖의 어느 것도 동시에 파동과 같으면서 입자와
같을 수 없다는 데 있다.
그렇다면 서로 배타적인 파동같고 입자같은 행태가 어찌하여 한가지 빛의 공동 성질일 수 있는가?
그들은 빛의 성질이 아니다. 그들은 빛과 인간과의 상호작용의 성질을 가리킨다. 우리들이 선택하는 실험방법에
따라서 빛이 입자적 성질과 파동적성질의 어느 한쪽을 나타내게 된다.
가령 빛의 파동적 성질을 증명하려면 간섭현상을 일으키는 쌍슬릿 실험을 하면된다. 만약 빛의 입자적 성질을
입증하기로 한다면 광전효과를 설명하는 실험을 하면된다. 그리고 컴프턴의 유명한 실험을 실시하면 빛은
파동적인 성질과 입자적인 성질을 함께 보여준다. 1923년 컴프턴은 세계 최초로 원자이하의 미립자로 당구놀이를
했으며 그것으로서 17년이나 된 아인슈타인의 빛의 광자이론을 확인했다.
그의 실험은 개념적으로 볼 때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그는 전자를 향하여 단순히 X선을 발사했는데, 누구나 아는
바와 같이 X선은 파동이다. 그런데 X선은 마치 입자처럼 전자에 퉁겨나왔으니 대나수의 사람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예를들어 전자들을 슬쩍 때린 X선들은 원래의 진로에서 살짝 빗나갔다. 그 충돌과정에 에너지를 많이 잃지는 않았다.
그런데 전자와 좀 더 정면으로 부딧친 X선들은 진로를 크게 바꾸었다. 그리고 이러한 x선들은 충돌과정에 상당량의
에너지를 상실했다. 콤프턴은 추돌 전후에 x선의 주파수를 측정하여 편향된 x선의 에너지 상실량을 계산할 수 있었다.
거의 정면으로 충돌한 x선의 주파수가 충돌 전에 비해서 충돌 후에 눈에 띄게 낮아졌다. 이것은 그 x선이 충돌전보다
충돌후에 에너지가 많이 떨어졌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컴프턴의 발견은 양자이론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만일 플랑크가 주파수는 에너지와 비례한다는 법칙을 발견하지
않았더라면 컴프턴이 x선의 입자성 행태를 밝혀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 법칙이 컴프턴에게 그의 실험에 이용된
x선들이 입자성 충돌에서 에너지를 상실했다는 증명을 가능하게 하였다.
컴프턴 실험에 나타난 이 개념적 역설은 파동입자 이중성이 양자역학에 얼마나 깊이 뿌리박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x선 같은 전자기복사의 주파수를 측정하여 입자성을 증명한 것이 컴프턴이었다. 물론 입자는 주파수가 없다.
파동만이 주파수를 가지고 있다. x선에 일어났던 사실을 기려 컴프턴이 발견한 현상을 가리켜 컴프턴 산란이라고 부른다.
간단히 말해서 빛은 광전효과를 통해서 입자와 같음을 쌍슬릿실험으로 파동과 같음을, 그리고 컴프턴 산란으로
그 파동-입자성을 증명받을 수 있었다. 빛이 두가지 상보적 측면들은 빛의 본질을 이해하는데 필요하다.
어느것 하나 만이 진정한 빛의 성질이냐고 묻는 것은 무의미하다.
빛은 어떤 실험방식을 택하는냐에 따라 파동처럼 행동하기도 하고 입자같이 움직이기도 한다.
그 실험을 우리들이 입자로서의 빛과 파동으로서의 빛을 이어주는 공통적 연계이다. 쌍슬릿실험에서 우리가 관찰하는
파동적행태는 빛의 성질이 아니라 인간과 빛과의 상호작용을 표현하는 성질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들이 광전효과에서
관찰하는 입자적 특성은 빛의 성질이 아니다. 그것 역시 빛과 우리와의 상호작용에서 나온 성질이다.
파동적행태와 입자적행태는 모두 상호작용의 성질이다.
입자와 같은 행태와 파동과 같은 행태만이 우리가 빛에 돌리는 성질이며 이제 이들 성질이 빛자체가 아니라 빛과 우리와의
상호작용에 속한다는 점이 인정되므로 빛은 우리와 독립된 성질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인상을 준다. 어떤 대상이 전혀 성질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그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이 논리의 다음단계를 피할 수는 없다. 우리들 인간이 없으면
빛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으레 빛에 귀속시키는 성질들을 우리와 빛과의 상호작용에 전이하면 빛으로부터 그 독립된 존재를 박탈하게된다.
우리가 없으면 또는 거기에서 유추하여 상호작용할 다른 것이 없으면 빛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놀라운 결론은 이야기의
절반에 지나지 않는다. 그 나머지 절반은 마찬가지 방식으로 빛이 없거나 거기서 유추하여 상호작용하는 다른 것이 없으면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보어는 스스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평범한 물리적 의미에서 독립적 실재를 그 현상에 되돌려 줄 수 없을뿐더러 관찰기능에 귀속시킬 수 없다.
관찰기능이라는 용어로 그는 사람이 아니라 도구를 가리켜ㅅ을 가능성이 있으나 철학적으로 상보성은 이 세계가 사물로 구성
되어 있지 않고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져있다는 결론을 이끌어낸다. 성질이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빛과 같은 사물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작용에 귀속된다. 이것이 보어가 빛의 파동-입자 이중성을 해결한 방법이다.
파동-입자 이중성은 만물의 특성이라는 발견과 더불어상보성의 철학적 함축이 더욱 뚜렸해지게 되었다.
드브로이-물질파
우리들이 양자역학 이야기를 잠시 중단했을 때 그 이야기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대목까지 와 있었다.
1900년에 막스 플랑크는 흑체복사를 연구하여 에너지는 덩어리로 흡수 방출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그 에너지 덩어리를 양자라고 불렀다.
이러한 견해는 1803년 토머스 영이 빛이 간섭을 일으키고(쌍슬릿실험), 파동만이 그런 현상을 일으킨다는
점을 밝혀 놓았기 때문에 나온 것이었다.
플랑크의 양자발견에 자극을 받아 아인슈타인은 광전효과를 이용하여 에너지 흡수.방출 과정만이 양자화
되는 것이 아니라 에너지 그 자체가 일정한 규모의 꾸러미로 나온다는 그의 이론을 설명했다.
이것이 양자역학의 기본이 되는 이름난 파동-입자 이중성이다.
물리학자들은 어떻게 파동이 입자가 될 수 있느냐를 설명하려고 노력하고 있을 때, 프랑스의 젊은 귀족
드브로이는 고전적 견해의 잔해를 궤멸시키는 폭탄을 떨어뜨렸다.
그의 제의에 따르면 파동이 입자일 뿐아니라 입자들 역시 파동이다.
드브로이의 사상(그의 박사 논문에 담겨있다.)을 빌리면 물질은 그에 '상응하는' 파동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그 사상은 철학적 추리 이상이었다. 그것은 또한 수학적 추리이기도 했다.
플랑크와 아인슈타인의 단순한 방정식을 활용하여 드브로이는 자신의 단순한 방정식을 도출했다.
이 방정식이 물질에 '상응하는' 물질파동의 파장을 결정한다.
그에 따르면 입자의 운동량이 크면 클수록 그것에 상관적인 파장은 짧아진다는 것이다.
이것이 물질파동이 거시세계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드브로이의 방정식은 우리들이 볼 수 있는 최소의 대상에 까지도 상응하는 물질파동은 그 대상의
크기에 비해 너무나 작아서 그 효과는 보잘 것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전자처럼 아원자 입자만큼 작은
대상에 이르면 전자의 크기가 그에 연관되는 파장보다 작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파동과 같은 물질의 행태가 또렸해지며 물질은 우리들이 습관적으로 생각해온
물질과는 다르게 행동한다. 이것이 그 현상의 정확한 표현이다.
드브로이가 이 가설을 내놓은 뒤 불과 2년만에 데이비슨이 그의 조수 거머와 벨전화연구소에서
공동작업을 하며 실험적으로 그것을 입증했다.
데이비슨과 드브로이는 다 같이 노벨상을 받았고 물리학자들에게 파동이 어떻게 입자일 수 있고
또한 입자가 어떻게 파동일 수 있느냐를 설명해야할 과제가 맡겨졌다.
우연히 실시했다가 유명해진 데이비슨-거머 실험으로 전자가 파동이라야만 설명할 수 있는 형태의
전자의 수정표면 반사효과를 밝혀 놓았다. 그러나 전자가 입자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오늘날 용어상의 모순이 분명한 전자회절이 평범한 현상의 일종이 되기에 이르렀다.
전자선을 전자의 파장과 같거나 그보다 작은 구멍에 이를테면 금속종이에 있는 원자사이의 공간에
통과시키면 그 전자선의 광선이 회절하는 것과 꼭같이 회절한다.
고전 물리학으로는 이러한 현상이 일어날 수 없으나 실제로는 일어난다.
파동으로 이루어진 빛이 입자와 같이 했을 때에는 참으로 혼란이 컸엇다.
그러나 전자가 파동처럼 행동하게 되자 사태는 견딜 수 없으리만큼 심각했다.
양자역학의 발전은 고도의 아슬아슬한 드라마였다. 하이젠베르크는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나는 보어와 나눈 토론(1927년)을 기억하고 있다. 이 토론은 밤이 이슥할 때까지 몇시간이나
계속되고 거의 절망적인 상태로 끝이 났다. 그리고 토론이 끝나고 가까운 공원으로 혼자 산책을
나가서 나는 나 자신에게 거듭 질문을 던졌다.
과연 자연이 이러한 원자실험에서 나타난대로 그다지도 부조리할 수 있을까?"
그 뒤에 있는 실험을 통하여 아원자 입자들만이 아니라 원자의 분자들 역시 연관된 물질파가 있음을
밝히게 되었다.
휴즈의 개척적 저서 << 중성자 광학>>이 드브로이의 박사학위 논문에서 탄생을 알린 파동과 입자의
융합을 웅변적으로 증언하고 있다.
사실상 이론적으로는 만물이 일정한 파장을 가지고 있으며 - 야구공,자동차,사람이 모두 예외가 아니다.
- 다만 그들의 파장이 너무 작아서 의식하지 못할 뿐이다.
드브로이 자신은 자기이론을 설명하는데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다만, 데이비슨-거머실험이 증명한 내용, 즉 전자와 같은 물질이 파동과 같은 측면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예측하는 데 지나지 않았다.
그의 방정식은 나아가서 이 파동의 파장을 예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파동이 실제로 무엇인지 아무도 몰랐다.(지금도 모른다) 드브로이는
그것들을 물질에 '상응하는' 파동이라 불렀지만 그는 '상응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설명하지 않았다.
어느 물리학자가 무엇을 예측하고 그것을 표현하는 방정식을 산출하고 나서도 자신이 말하고 있는
대상이 무엇인지 모를 수가 잇을까?
그렇다. 러셀은 아래와 같이 밝혔다.
수학은 우리들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며, 우리가 하는 말이 참된 것인지 아닌지도
모르면서 다루고 있는 과목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코펜하겐에서 물리학자들이 양자역학을 완전한 이론으로 받아들이기로 한 이유가 여기 있다.
양자역학은 그 세계가 '실제로 어떻게 생겼는지' 설명하지도 못하는, 예측하는 내용도 실제적인 사건이
아니라 확율에 지나지 않는데도 말이다.
그들은 양자역학이 경험을 정확하게 상호관계 지워준다는 이유로 완전한 이론이라고 인정하게 되었다.
양자역학 그리고 실용주의자의 견해에 따르면 모든 과학은 경험사이의 상관관계의 연구이다.
드브로이의 방정식은 경험의 상관관계를 올바르게 설정한다.
드브로이는 토머스 영과 아인슈타인의 천재를 통하여 빛을 보게 되었던 파동-입자 역설을 융합시켰다.
말을 바꾸어 그는 가장 혁명적인 물리학의 두가지 현상,에너지의 양자적 성질과 파동-입자 이중성을
이어 주었다.
드브로이는 1924년에 그의 물질파동이론을 내놓았다.
그 뒤 3년 동안에 양자역학은 현재의 그것과 본질적으로 같은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뉴튼 물리학의 세계, 단순한 심상, 그리고 상식이 사라지고 말았다.
새 물리학이 인간정신을 비틀거리게 한 독창성과 힘을 지니고 형성되었다.
슈뢰딩거
드브로이의 물질파동이 오스트리아 비인의 물리학자 에르빈 슈뢰딩거에게는
보어의 원자행성 모델보다 한층 더 자연스러운 원자현상의 관점으로 생각되었다.
단단하고 구형인 전자들이 일정한 수준에서 다른 수준으로 뛰어감으로서 광자를
방출한다는 보어의 모형은 단순한 원자의 색채 스펙트럼을 설명해주었다.
그러나 각 원자 껍질의 왜 일정한 수의 전자들 만을 거느리리고 있으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없느냐를 풀어주지 못했다.
또한 그의 모델은 전자들이 어떻게 뜀을 하느냐를 설명하지 않았다.
정상파
드브로이의 발견에 자극을 받아 슈뢰딩거는 전자가 구형의 물체가 아니라
정상파의 패턴이라는 가설을 제시했다.
정상파는 빨래줄을 가지고 장난을 쳐본 사람에게는 누구나 눈에 익은 현상이다.
말뚝하나에다 줄의 한쪽 끝을 매고 팽팽히 당겨들고 있다고 하자.
이 줄에는 정상파건 진행파이건 일체없다. 이제 우리들이 팔목을 날카롭게 아래로
꺾었다가 위로 젖혔다고 하자. 줄에 혹이 나타나고 그것이 줄을 따라 말뚝까지
가서는 거기서 그 혹이 뒤집혀 다시 우리 손으로 돌아온다.
이처럼 진행하는 혹이 진행파이다.줄을 따라 일련의 혹을 내려보내어 우리들은
다음에 보여주듯 서있는 파동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이들 가운데 제일 간단한 것이 그림 B이다.
이 무늬는 직접적인 파동하나, 그리고 반대방향으로 진행하며 반사된 파동,
이 두 개의 진행파를 중합시켜 만들어 낸 것이다. 움직이지 않는 것은 줄이 아니라
그 무늬다. 정상파에서 가장 폭이 넓은 부분의 점은 항상 정상상태로 머물러 있으며
정상파의 두 끝에 있는 점도 마찬가지다. 이들 점을 마디라고 부른다.
제일 간단하게 머므른 상태의 경우에는 마디가 두 개가 있으며 하나는 우리 손에
그리고 다른 하나는 줄이 묶여있는 말뚝에 있다.
이들 정지상태에 있는 무늬들 즉 진행파의 중첩을 정상파라고 한다.
우리가 쓰는 줄이 길든 짧든 상관없이 그 줄에 나타나는 정상파의 수는 정수이다.
달리 표현하면 그들은 하나의 서 잇는 파동의 무늬, 또는 2개의 서있는 파동을 가진
무늬와 3,4,5개 등이 나타나는 무늬를 그릴뿐, 3/2이나 9/4 등의 서있는 파동무늬를
그리는 법은 없다는 말이다.
그 서있는 파동 수는 정수로 나뉘게 마련이다. 다른 말로 바꾸어 줄에 나타나는
서 있는 파동의 수는 정수 배로만 늘이거나 줄일 수 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어느 줄에 나오는 서있는 파동의 수가 증가하거나 감소하는 방법은
오직 불연속적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줄에 서 있는 파동은 어떤 크기라고 정해
질 수가 없다.
그것은 언제나 그 줄을 고르게 나누게 마련이다.
그 파동의 실제 크기는 그 줄이 얼마나 긴가에 달려 있으나 그 줄이 얼마나
길든 간에, 그 줄을 등분하는 일정한 길이에 한정된다.
1925년에 와서는 이 모두가 낡아빠진 이야기 거리였다. 기타 줄을 뜯으면 그 위에
정상파 모형이 생긴다. 오르갠의 파이프에 공기를 불어 넣으면 거기에 정상파
모형이 나타난다. 여기서 새로웠던 것은 슈뢰딩거의 인식- 정상파는 원자현상과
마찬가지 방법으로 양자화 된다는 사실이었다. 실제로 슈뢰딩거는 전자가 정상파
라는 견해를 내놓았다.
돌이켜보면, 이것은 당초에 받은 인상만큼 황당무계하지는 않다.그러나 당시에는
그것이 천재의 발상이었다. 원자핵 주변의 궤도에 있는 전자를 그려보자.
그 전자가 원자핵 둘레를 한 바퀴 돌 때마다. 그것은 일정한 거리를 움직인다.
그 거리는 우리가 사용한 줄의 길이가 일정하듯 정해져 있다.
마찬가지로 정수개의 정상파만이 이 길이 속에서 형성될 수 있으며 정수이외 개의
파동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 길이가 무슨 길이냐는 질문에는 해답이 나오
지 않는다.)
슈뢰딩거는 이 정상파 하나 하나가 전자라는 가설을 제시했다.
말을 바꾸어 전자는 마디로 묶여진 진동의 한토막이라고 그는 말했다.
지금까지 우리는 빨래줄이나 기타줄과 같은 선 상에 정상파를 이야기해 왔으나
물과 같은 매질에도 정상파는 일어난다.
우리가 둥근 연못에 돌하나를 던졌다고 하자. 파동이 그 낙하점에서 방사된다.
이 파동들은 때로는 한번이상 연못의 다른 가장자리에 반사된다.
반사되어, 퍼지는 파동이 서로 간섭할 때, 이들은 정상파의 복잡한 무늬를 만들어
내며 이것이 우리의 옛친구 '간섭무늬'이다.
한 파동의 정점이 다른 파동의 골과 만나면 이 둘은 서로 상쇄되며, 이 상호작용
선을 따라 나 있는 수면은 잔잔하다.
이 잔잔한 영역이 정상파를 분리하는 마디들이다.
쌍 슬릿 실험에서는 빛과 어둠이 엇갈리는 무늬의 검은 띠가 마디를 가리킨다.
밝은 빛의 띠는 정상파의 정점을 말한다.
슈뢰딩거는 복잡하고도 정교한 간섭무늬가 나타나는 작은 물통을 모델로 선택하여
원자의 본질을 설명했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이 모형은 원자크기의 대야에 일어나는 전자파와 비슷한
것이라고 한다.
"재치있는 그러나 어느 정도 인위적인 "보어의 원자모델 가설은 드브로이의
파동현상에 나타난 한층 더 자연스러운 가설로 대체 된다. 파동현상은 원자의
현실적인 몸을 형성한다. 그것은 보어모형에서 원자껍질 주변을 우글거리고
있는 개별적 점 모양의 전자들을 대체한다."
빨래줄에 서 있는 정상파는 두가지 차원 즉 길이와 너비를 가진다.
물과 같은 매질안, 또는 콩가 북의 가죽면에 일어나는 정상파는 길이 너비, 깊이
라는 3차원을 가지고 있다. 슈뢰딩거는 제일 단순한 원자, 오직 전자 하나 밖에
없는 수소의 정상파의 무늬를 분석했다.
수소만으로도 그는 자신의 새 파동방정식을 이용하여 가능성 있는 다양한 형태의
정상파를 산출해냈다.
한 개의 줄에 나타나는 모든 정상파는 똑같다. 이러한 논리는 원자의 정상파에
적용되지 않는다. 그들 모두가 3차원이요, 그 모두가 서로 다르다.
그 중 일부는 동심원의 모양을 하고 있다. 그리고 다른 정상파는 나비처럼 생겼고
또 다른 파동은 만다라같이 생기기도 했다.
파울리의 배타원리
슈뢰딩거의 발견이 있고 난직후 다른 오스트리아 물리학자 파울리가 한 원자에
있는 이들 정상파 무늬의 너으것도 똑 같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일단 어느 특정한 파동형태가 원자 안에 형성되면, 그것이 같은 종류의 다른
무늬를 배척한다.
이런 이유로 파울리의 발견은 배타원리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파울리의 발견으로 수정된 슈뢰딩거의 방정식에 의하면 보어의 에너지 수준 또는
껍질의 최저단계에서는 오직 두 가지 파동무늬가 가능하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전자가 2개밖에 없다.
그 다음 에너지 수준에는 8개의 정상파무늬가 있을 수 있으므로 그 안에는 8개의
전자 밖에 없다.
이들이 바로 보어의 모델에 따라 각 에너지 수준에 부여하는 전자의 수이다.
이와같은 각도에서 이들 두 모형은 같다.
그러나 다른 중요한 각도에서는 서로 같지 않다.
보어의 이론은 전저긍로 경험적인 것이다. 즉 그는 실험을 통해 관찰한 사실을
에워싸고 그 이론을 세워 그 사실을 설명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슈뢰딩거는 드브로이의 파동-입자 가설위에 자기이론을 세웠다.
그의 이론은 실험적으로 입증된 수학적 가치를 산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일관되게 설명해주고 있다.
예를 들어 각 에너지 수준에는 일정한 수의 정상파 무늬만이 존재할 수 있으므로
각 에너지 수준에는 일정한 숫자의 전자밖에 없다.
한 원자의 에너지 수준은 어느 특정한 수치에서 다른 특정 수치로만 도약한다.
오직 일정한 차원의 정상파 무늬만이 원자와 맺어지고 다른 것은 이루어지지
않는 까닭에서다.
슈뢰딩거가 비록 전자는 정상파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더라도 그는 무엇이
파동치는가를 확실히 몰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무엇인가가 물결치고 있다고 굳게 믿고 그것을 그리스어
알파베트 '사이'(Ψ)로 표시했다.
슈뢰딩거의 파동방정식을 사용할 경우 거기에 문제되는 원자의 일정한 특성을
대입하게 된다.
그러면 원자 안에서 일어나는 정상파 무늬의 시간적인 진화를 보여준다.
만일 우리들이 한 개의 원자를 제 1 차 단계에 두고 그것이 고립하여 전파하게
하면 그 1차 단계가 고립하여, 전파하는 과정에 시간이 흐름에 따라 상이한 정상파
무늬로 발전한다.
이 무늬의 순서는 계산이 가능하다. 슈뢰딩거 파동방정식은 물리학자들이 이들
무늬의 순서를 산출하는데 이용하는 수학적 장치이다.
달리 말하면 한 개의 원자 안에서의 정상파 무늬의 발전은 결정론적이다.
최초의 조건을 부여하면 한 개의 패턴은 슈뢰딩거 파동방정식에 맞추어 다른
패턴의 뒤를 따른다.
슈뢰딩거의 파동방정식
슈뢰딩거의 파동방정식은 수소원자의 규모에 대한 조리정연한 설명을 마련해주기
도 한다.
그에 의하면 우리가 수소원자라고 부르는 전자와 양성자 각 1개씩의 체계가 지닌
파동무늬는 그 최저 에너지 상태에서 보어의 최소 궤도의 지름에 해당되는 범위
안에서만 식별할 수 있는 강도를 가지고 있다. 말을 바꾸어 그러한 파동무늬는 한
개의 수소원자의 바닥상태와 같은 크기라는 것이 밝혀졌다.
슈뢰딩거의 파동방정식이 오늘날 양자역학의 기둥이 되었으나 보어의 원자이하
현상의 모형 가운데서 쓸모있는 측면들은 파동이론이 적합한 결과를 내지 못할
경우에 아직도 이용하고 있다.
그러한 사례에서는 물리학자들이 정상파라는 관점에서의 사고를 중지하고 입자라는
각도에서 다시 생각을 시도하게 된다.
이 문제에 그것들이 적용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슈뢰딩거는 자기의 방정식이 수학적 추상이 아니라 현실적인 사물을 묘사하고
있노라고 확신했다.
그는 얇은 구름의 형태로 파동무늬 위에 펼쳐져 있는 상태의 전자를 그렸다.
만약 그 그림이 정상파가 3차원만을 가진 전자 한 개뿐인 수소원자에 한정한다면
쉽사리 상상할 수 가 있다.
그러나 전자 2개를 가진 원자의 정상파는 6개의 수학적 차원으로 존재하며 4개의
전자를 가진 원자의 정상파는 12개의 차원으로 나타난다.
이것을 그려보기에는 제법 힘이 든다.
막스보른-확률파
이 시점에 이르러 독일 물리학자 보른(M.Born)이 아원자현상의 새로운 파동해석에
마지막 손질을 했다.
그의 말을 빌리면 이들 파동을 실제의 사물이 아니라, 확률파이므로 가시화할
필요도 없고 할 수도 없다.
....사건의 모든 노선은 확률법칙에 따라 결정된다. 공간의 어떤 상태에 대해서
그에 상응하는 결정적 확률이 있으며 그것을 그 상태와 연관된 드브로이
파동이 제시해준다.......
주어진 상태의 확률을 얻기 위해서는 그 상태와 연관된 물질파의 폭을 제곱한다.
드브로이의 방정식과 슈뢰딩거의 방정식이 실제적인 사물을 대표하느냐 하는
문제가 보른에게는 분명했다.
그로서는 3차원 이상의 상태로 존재하는 실제적인 사물을 생각해내려고 애를
쓰는 것은 무의미했다.
....우리들은 두가지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우리들이 3차원 이상의 공간에서
파동을 사용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3차원의 공간에 머물러 있으면서 파동
진폭이 일반적인 물리적 강도라는 단순한 그림을 내팽개치고 그것을 우리들이
들어갈 수 있는 순수추상적인 수학개념으로 대체하느냐.....
그는 빈틈없이 그대로 했다.
'물리학이란'
결정되지 않은 사례의 본질과 연관되어 있으며 따라서 통계의 문제이다.
이것이 보어, 크라메르스와 슬레이터가 그 이전에 생각했던 것과 동일한
관념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드브로이와 슈뢰딩거 수학을 이용하여 그 숫자들이
정확하게 나왔다.
슈뢰딩거의 이론에 보른이 기여한 바를 들자면 양자역학으로 확률을 예측할 수
있게 한 점이다.
어떤 상태의 확률은 그것과 연관된 물질파의 진폭을 제곱하면 되고, 최초의 조건을
부여하면 슈뢰딩거 방정식이 이 들 파동 패턴의 발전을 예측하므로, 이 둘을 합치면
확률의 결정적 발전을 보여준다.
어떤 최초의 상태를 제시하면, 물리학자들은 어느 특정 시간에 주어진 또 다른
상태에서 어느 관찰되는 체계가 관찰되는 확률을 예측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상태가 그 시점에 가능성이 제일 큰 상태라고 하더라도 관찰되는 체계가
그러한 상태로 관찰되느냐 하는 것은 우연의 문제이다.
다시 말하면, 양자역학의 '확률'은 그것이 주어진 최초상태로 준비가 되었을 경우
주어진 시간에 주어진 상태로 관찰되는 체계를 관찰하는 확률이다.
그리하여 양자역학의 파동적 측면이 발전되기에 이르렀다.
파동이 입자와 같은 특성을 지닌 것과 꼭 마찬가지로(플랑크,아인슈타인), 입자 역시
파동과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다(드브로이). 사실상 입자는 정상파라는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슈뢰딩거). 최초의 조건이 주어지면, 정상파무늬의 정확한 진화를
슈뢰딩거 방정식을 통해 계산할 수 있다. 물질파(파동함수)의 진폭을 제곱하면 그
파동에 상응하는 상태의 확률을 얻게된다.(보른).
따라서 일련의 확률을 슈뢰딩거 파동방정식과 보른의 단순한 공식을 사용하여
최초의 조건에서 산출할 수 있다.
우리들은 갈리레오의 낙체실험으로부터 시작하여 먼 길을 왔다.
이 길을 따라온 한걸음 한걸음이 우리를 보다 높은 추상의 단계로 이끌어 주었다.
제일 먼저 지금까지 아무도 보지 못한 사물의 창조단계로,
그 다음으로 우리들의 추상작업을 그려보려는 노력까지를 포함한 모든 시도를
포기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원자의 양자모델
그러나 문제는 인간본성이 변하지 않는 한 우리들은 이들 추상작업을 중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들은 이들 추상이 무엇에 관한 것이냐를 끊임없이 묻고 있으며
그것이 무엇이든 가시화하려고 노력한다.
앞서 '물리학자들이 현재 원자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느냐'는 나중에 보기로 약속
하고 보어의 행성원자모델을 뒤로 미루었었다.
자, 이제 때가 되었으나 이과업은 매우 까다롭다. 우리들은 아주 쉽사리 낡은 원자
모델을 내팽개쳤는데, 그것은 좀 더 뜻있고 그에 못지 않게 명쾌한 다른 것으로
대체되리라는 전제가 섰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알고보면 우리들이 대체하는 그림도 그림이 아니라 가시화할 수 없는
추상이다. 이렇게 되면 불편해진다. 원자는 어떤 의미로도 현실적인 사물이 아니
었음을 우리에게 깨우쳐주니까 말이다.
원자는 실험 관찰을 이해할 수 있도록 짜여진 가설적 실체이다.
어느 한 사람도 아직까지 원자를 제대로 본적이 없다. 그렇지만 우리들은 원자가
하나의 물체라는 관념에 너무 습관화되어 그것이 하나의 관념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다. 이제 우리는 원자는 하나의 관념에 그치지 않고 심지어 우리들이 그릴 수
없는 관념이라는 말을 듣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리학자들이 언어로 수학적 실체를 언급할 때 그들이 사용하는
낱말들은 그것을 듣기는 하지만 물리학자들이 거론하는 수학에 익숙하지 않은
비전문가들에게 필연적으로 영상을 자아낸다.
따라서 그렇게 할 수 없는 이유를 이처럼 장황하게 설명하고나서, 우리는 지금
물리학자들이 오늘날 어떻게 원자를 그리고 있느냐 하는 문제에 도달한다.
원자는 원자핵과 전자로 구성되어 있다. 원자핵은 원자의 중심에 자리잡는다.
그것은 원자 체적의 아주 작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을 뿐이지만, 그 질량의 거의
모두를 차지하고 있다.
이것이 행성모델에 나오는 것과 꼭같은 원자핵이다.
행성모델에서와 마찬가지로 전자는 원자핵의 주변에서 움직이며 '전자구름'이라고
보통 표현한다.
그런데 이 모형에서는 전자들이 '전자구름' 내부 어디든 있을 가능성이 있다.
전자구름은 원자핵을 에워싸고 있는 갖가지 정상파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 정상파는 물질이 아니다.그것들은 위치에너지의 패턴이다.
전자구름을 이루고 있는 여러 가지 정상파의 형태는 그 구름 안 어느 주어진 자리
에서 특정 전자를 찾아내게 될 확률을 물리학자에게 알려준다.
요컨데 물리학자들은 아직도 원자를 주변에 전자들이 돌아다니는 원자핵으로 생각
하고 있으나, 작은 태양계마냥 그리 간단하지는 않은 그림을 그리고 있다.
전자구름은 물리학자들이 그들의 경험을 상호연관시키고자 만들어 놓은 수학적
개념이다. 전자구름은 원자 안에 존재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사실은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전자구름의 개념이 원자의 원자핵 주변에 있는 여러 장소에서 정해진 전자
를 찾아낼 확율을 밝혀주며, 이 확률은 경험적으로 정확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러한 뜻에서 전자구름은 파동함수와 같다. 파동함수 역시 물리학자들이 그들의
경험을 서로 연관짓기 위해서 꾸며 놓은 수학적 개념이다.
파동함수는 '실제로 존재'할 수도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이와 같은
언명은 생각과 물질사이에 질적 차이를 두고 있으므로 좋지 못한 가설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파동함수 개념은 그것이 주어진 방법대로 준비가 될 경우 주어진 시간에
주어진 상태에 있는 어느체계를 관찰할 확율을 제시하는 것만은 부정하지 못한다.
파동함수와 같이 전자구름도 일반적으로는 가시화 할 수 없다.
단 한 개의 전자를 포함하는 전자구름은 3차원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그 이외의 전자구름은 하나 이상의 전자를 내포하고 있으므로 3차원 이상의
상태로 존재한다. 이를테면 6개의 전자를 거느리고 있는 단순한 탄소원자의 핵은
18차원의 전자구름에 싸여있다.
마음 속으로 그림을 그려본다면 이러한 상황은 분명히 불분명하다.
이와 같은 모호함은 제약된 개념(언어)으로 똑같은 제약을 받고 있지 않은 상황을
그리려는 시도에서 빚어진다.
그것은 또한 보이지 않는 아원자 영역에서 실제로 무슨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우리들은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위장하고 있다.
우리들이 사용하는 모델들은 아인슈타인의 말을 빌리면 '인간정신의 자유로운
창조물이며 경험을 합리적으로 상관지으려는 내재적 요소를 충족시켜주는 것이다.
그들은 알 수 없는 시계 안에서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추측한
것이다. 그들이 실제로 어떤 사물을 묘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큰 잘못이다.
하이젠베르크-불확정성원리
실은 젊은 독일 물리학자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는 보이지 않는 아원자 세계에서
실제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결코 알 수 없을 터이고 그러므로 우리들은
'원자작용의 지각적 모델을 구축하려는 일체의 노력을 포기해야 한다"
고 단정했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우리들이 정당하게 따를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직접 관찰할 수
있는 것에 한정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어떤 실험의 출발점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 그리고
실험의 끝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전부다.
이 두 상태 - 살펴지는 상태- 사이에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것을 설명하는 어떤
작업도 추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거의 같은 시기(1925년), 그러나 드브로이와 슈뢰딩거와는 독립적으로
25세의 하이젠베르크가 실험자료를 도표로 편성하는 수단을 개발하는 일에 착수
했다. 그 보다 66년전 해밀튼이라는 수학자가 자료를 행렬이라는 수학적 일람표로
작성하는 방법을 개발해 놓았으므로 하이젠베르크로서는 다행한 일이었다.
그당시 해밀튼의 행렬식은 순수수학의 한계라고 생각했었다.
미래의 어느 날 그들이 미리 맞추어 잘라놓은 조각처럼 혁명적 물리학의 구조에
딱 들어 맞으리라고 누가 짐작할 수 있었겠는가.
하이젠베르크의 일람표를 이용하면 우리는 그냥 최초의 조건과 연관된 확율이
얼마인가를 읽거나 계산하면 된다.
하이젠베르크가 행렬역학이라고 이름지은 이 방법을 이용하여 우리들은 물리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대상만을 다룬다.
관찰할 수 있는 대상이란 우리가 실험을 시작할 때 알고 있는 것과 실험이 끝났을
때 알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그 중간에 무엇이 일어났는냐에 대해서 우리는 추리를 하지 않는다.
뉴튼물리학을 대체할 이론을 찾아내려고 25년 동안 벅찬 씨름을 하고나서
물리학자들은 문득 그들 앞에 두 개의 다른 이론이 놓여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 하나 하나가 모두 동일한 사물에 접근하는 독특한 방식이었다.
드브로이 물질파에 바탕을 둔 슈뢰딩거의 파동역학과 아원자현상의 분석 불가능성
에 기초를 둔 하이젠베르크의 행렬역학이 그것이다.
하이젠베르크가 그의 행렬역학을 개발한지 1년이 채 되기도 전에 슈뢰딩거는
그것이 그 자신의 파동역학과 수학적으로 등가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들 두 이론이 아원자 연구에 값진 도구였기 때문에 모두 양자역학으로 알려지게
된 물리학의 새 분야에 통합되기에 이르렀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하이젠베르크는 행렬역학을 고에너지입자물리학의 입자 충돌
실험에 응용했다.
그러한 충돌은 예외없이 입자산란을 가져오므로 그것을 산란행렬, 줄여서 S행렬
이라 부르게 되었다.
오늘날 물리학자들은 양자역학 실험의 출발점에서 관찰한 내용과 실험의 종점에서
관찰한 내용사이의 천이확율을 계산하는 두가지 방법을 쥐고 있다.
첫째 방법이 슈뢰딩거의 파동방정식이요, 둘째 방법이 S행렬이다.
슈뢰딩거 파동방정식은 확률의 시간적 전개를 기술하며, 그 확률 가운데 하나가
우리들이 양자역학 실험을 하는 과정에 돌연 현실화 된다.
S행렬은 시간 상의 발전, 또는 그것의 부재, 기타 어떠한 상태도 지적함이 없이
살펴지는 둘사이의 천이 확률을 직접 제시한다.
둘 다 제 기능을 가지고 있다.
하이젠베르크가 새 물리에 행렬역학을 도입한 것에 못지 않게 중요한 그의 다음
발견으로 '정밀과학들'의 기초가 뒤흔들렸다.
그는 아원자 수준에서는 '정밀과학'이란 있을 수 없음을 증명했던 것이다.
하이젠베르크의 경이적인 발견을 통하여 인간이 동시에 자연의 여러과정을 정확
하게 측정할 수 없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러한 제약들은 우리들의 측정기구가 투박하고 우리들이 측정하려는 실체가
지극히 작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자연이 인간에게 표현되는
바로 그 방법에 더 큰 이유가 있다.
말을 바꾸어 우리가 불확정성의 영역으로 모험해 들어가지 않고는 통과할 수 없는
모호성의 장벽이 존재한다.
이와 같은 이유로 하이젠베르크의 발견을 '불확정성'원리'라고 부르게 되었다.
불확정성원리는 우리가 아원자의 세계를 깊이 파고 들면 들수록 우리들의 자연상의
어느 한 부분 또는 다른 부분이 몽롱해지는 지경에 도달하며 그 부분을 다시
분명하게 하려면 반드시 또 다른 부분을 모호하게 해야 한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그것은 우리가 마치 초점이 빗나간 움직이는 그림을 조정하려는 것과 같다.
마지막으로 조정하고 나서 보면, 그 사진의 오른쪽이 똑똑해지면 왼쪽은 완전히
초점을 잃고 아무것도 알아 맞힐 수가 없게 된다.
사진 왼쪽에 초점을 맞추려고 애를 쓰면 오른쪽이 희뿌였게 되기 시작하여 상황은
뒤 바뀐다.
이 두 극단 사이에 균형을 유지하려고 하면 사진의 양쪽이 알아 볼 수 있는 상태로
돌아오기는 하지만 최초에 있던 그 흐림을 제거할 방법이 전혀없다.
불확정성원리의 원형에 따르면 사진의 오른쪽은 움직이는 입자의 공간적 위치와
상응한다. 그런데 사진의 왼쪽은 그 운동량과 일치한다.
우리들이 동시에 움직이는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정확하게 측정할 수 없다는
것이 불확정성원리의 가르침이다.
이 성질의 어느 하나를 정확하게 결정하려고 하면 할수록 다른 것을 점차 알 수
없게 된다. 가령 우리들이 입자의 위치를 정확하게 밝히면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우리들은 그 운동량에 대해서 전혀 알 수 없다.
만일 우리들이 그 입자의 운동량을 정확하게 결정하면 그 위치를 알아낼 방법이
없다.
이처럼 기이한 언명을 설명하고자 하이젠베르크는 비상한 고도확대력을 가진
초고성능 현미경- 실제로 궤도를 선회하는 전자를 볼 수 있으리 만큼 강력한-
을 상상해보라고 했다.
전자는 너무 작으므로 전자를 보기에는 지나치게 긴 파장을 가진 일반광선을
우리 현미경에 사용할 수는 없다.
그것은 긴 파장을 가진 바다의 파도가 물위에 튀어나온 가느다란 막대기에 영향을
받을 수 없는 이치와 같다.
만약 우리들이 밝은 빛과 벽사이에 머리카락 한 가닥을 들고 있으면, 그 머리털은
벽에 뚜렸한 그림자를 던지지 않는다.
그 머리털은 빛의 파장에 비겨 너무 가늘어서 빛이 그것에 장애를 받기보다는
그 주위를 돌아간다.어떤 대상을 보려면 우리가 이용하여 보려는 광파를 가로
막아 주어야만 한다.
표현을 바꾸어보면, 무엇을 보기 위해서는 그 대상보다 파장이 짧은 빛을 비추어
야 한다.
이러한 까닭으로 하이젠베르크는 그의 가상적인 현미경에 보이는 빛을 감마선으로
대체했다.
감마선은 알려진 빛 가운데서 파장이 가장 짧으며 전자를 보는데 필요한 바로
그 빛이다. 전자는 감마선의 파장에 비교하면 크고 그것을 방해할 만하다.
말하자면, 벽에 그림자를 남길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들이 전자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게 된다.
양자물리학이 영상화되어 들어오는 이곳에서의 오직 한가지 문제는 플랑크의
발견에 따르면 눈에 보이는 광선보다 훨씬 파장이 짧은 감마선은 한편으로
가시광선보다 아주 센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감마선이 상상의 전자를 때리면 그것은 그 전자를 밝히지만 불행히도 전자를
제 궤도에서 쳐내어 예측할 수 없고 제어할 수 없는 방법으로 그 방향과 속도
(운동량)를 변화시킨다.(전자와 같은 입자의 감마선과 같은 파동사이의 반동각을
정확하게 계산할 방법이 없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들이 전자를 추적하기에 알맞은 짧은 파장을 가진 빛을 사용하면
그 전자의 운동량에 결정 불가능한 변화를 일으킨다.
그 유일한 대안으로는 그보다 에너지가 낮은 빛을 이용하는 길이다.
그렇지만 한층 에너지가 떨어지는 빛은 우리가 처음 부딪쳤던 문제를 불러온다.
전자의 운동량에 영향을 주지 않을 만큼 약한 에너지의 빛은 파장이 지나치게
길어서 전자가 어디 있는지 보여주지 못한다.
따라서 우리들이 움직이는 입자의 위치,운동량을 동시에 알 길이 없다.
이것이 불확정성원리의 제 1차적인 의의다.
아원자 수준에서 우리는 그 대상을 변화시키지 않고 관찰할 수 없다.
그 대상에 영향을 주지 않고 자연스레 제길을 달리는 광경을 바깥에서 지켜볼 수
있는 독립된 관찰자란 있을 수 없다.
어떤 의미로는 그것이 그처럼 놀라운 말은 아니다.
어느 낯선 사람이 여러분을 돌아다 보게하는 좋은 방법의 하나는 그 사람의 등을
뚫어지게 쏘아보는 것이다.
우리모두가 이 사실을 알고 있으나 우리는 가능하다고 가르침을 받은 것과 모순되는
일이 벌어지면 아예 그것을 믿지 않으려 든다.
고전물리학은 우리와는 독립된 우리 현실이 엄격한 인과법칙을 따라서 시간과
공간을 달리고 있다는 가설에 바탕을 두고 있다.
우리는 그것이 전개되는 과정을 눈치 채이지 않고 관찰할 수 있을뿐더러 인과법칙을
최초의 조건에 적용하여 그 미래를 예측할 수도 있다.
이러한 의미로 본다면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원리는 대단히 놀라운 진술이다.
우리는 뉴튼의 운동법칙을 최초의 좌표와 운동량이 밝혀지지 않은 개별적 입자에는
적용하지 못한다.
바로 불확정성원리가 그 좌표와 운동량을 동시에 동시에 결정할 수 없음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말을 바꾸어, 원리로서 만이라도 3세기동안 물리학의 기초엿던 뉴튼의 운동법칙을
적용할 수 있으리만큼 원자이하의 영역에 있는 입자에 관한 지식을 쌓기는 불가능
하다. 뉴튼의 법칙은 아원자의 영역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엄격하게 말한다면 뉴튼
의 법칙이 아원자영역에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그들은 연산자방정식으로서
계속 효력을 가진다. 또한 아원자적 입자를 포함하는 실험에서는 뉴튼의 법칙이
일어나고 있는 현상을 기술하는 훌륭한 근사치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전자빔이 주어지면 주어진 시간, 주어진 공간에서의 전자확률 분포를 양자이론이
예측할 수 있다.
그런데 양자이론은 원리에 있어서 마저도 단일 전자의 진로를 예측할 수 없다.
인과의 우주라는 전체적인 관념이 불확정성원리에 의해 송두리째 뒤집히고
말았다. 그와 관계되는 맥락에서 닐스보어는 양자역학이 본질적으로 담고 있는
내용을 이렇게 밝히고 있다
... 인과율이라는 고전적 이념의 궁극적인 포기의 필요성 , 그리고 물리적 실재의
문제에 대한 우리태도의 급진적인 수정....
그런데 불확정성원리에는 따로 다른 하나의 놀라운 함축된 의미가 있다.
위치와 운동량의 개념들은 우리들이 움직이는 입자라고 부르는 대상에 관한 우리들
의 관념과 밀접하게 묶여있다.
우리들이 지금까지 늘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왔던 것과는 달리 우리가 움직이는
입자 즉, 운동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결정할 수 없다면 우리가 운동입자라고
부르는 그 대상은 그 정체가 무엇이든 간에 우리가 그러하다고 생각한 바와는
다르게 '움직이는 입자'가 아니라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왜냐하면 '운동입자들'은 지금까지는 언제나 위치와 운동량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막스보른은 이렇게 말한다.
.... 만일 이 두가지 성질( 일정한 위치와 운동량을 가진)의 어느하나 이상을 실제로
결정할 수 없고, 어느 한쪽이 결정될 때 동시에 다른 성질을 전혀 확인할 수 없
다면 우리 실험에 관한한, 실험을 받고 있을 '대상'을 그 용어의 일반적 의미에
서 입자라고 결론을 내릴 정당한 근거가 없다.
우리들이 관찰하고 있는 대상이 무엇이든 그것은 결정가능한 운동량을 가지고
있을 수 있으며, 또한 결정가능한 위치를 가질 수 있으나, 이 두가지 성질 가운데서
주어진 시간에 어느 쪽에 초점을 맞출 것인지 우리가 선택해야한다.
아무튼 '운동입자'에 관한 한 우리들은 그들의 '실제 모습대로'는 절대로 볼 수
없으며 오직 우리들이 선택하는 데 따라 그 대상을 볼 수 있다는 뜻이 된다.
하이젠베르크는 이런 말을 남겼다.
"우리가 관찰하고 있는 것은 자연 그자체가 아니라 우리들의 질문 방법에 노출된
자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