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천사들의 소리바다 원문보기 글쓴이: 운영자
[뉴스데스크] - 유관순열사의 마지막 유언 -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 유관순 열사의 이화학당의 보통과 졸업 사진
1996년 이화여고에서 명예 졸업장을 추서하였다
![]()
1919년
1월 22일 광무황제가 갑자기 서거하였다.
2월 8일 일본 동경 유학생 400여명이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 모여 독립선언을 하였다.(2.8독립선언)
3월 1일 3.1운동이 발발하였다. 유관순은 학교 담을 넘어 서울 시위운동에 참여하고 학교로 돌아왔다.
3월 3일 광무황제 국장례가 거행되었다. 이날은 시위가 자제되었다.
3월 5일 서울에서 학생단 시위운동이 일어났다. 유관순은 이화학당 친구들과 함께 이 시위운동에 참여했다가 경무총감부에 붙잡혔다 풀려났다.
3월 10일 각급 학교에 휴교령이 내렸다.
3월 13일 서울에서 기차를 타고 고향 천안으로 왔다. 유예도는 이 때 학교 선배그룹으로부터 독립운동 자금모금의 사명을 받았다고 하였다.
3월 14~31일 유관순은 아우내 장터 만세시위운동을 준비하였다. 머리에 수건을 쓰고 각 부락을 다니면서 시위운동 참여를 권유하였다.
3월 14일 오후 4시 목천보통학교 학생 120명(목천 기미독립운동기념 사업회에서는 171명이라 함)이 교정에서 시위운동을 하였다.
3월 31일 유관순, 매봉산에 봉화를 올렸다.
4월 1일(음력 3.1) 아우내 만세시위 발발하다. 아버지 유중권, 어머니 이소제, 숙부 유중무, 속장 조인원과 함께 시위를 주도하였다. 오빠 유우석은 공주에서 시위운동에 참여하다 부상당해 붙잡혔다.
5월 9일 유관순은 공주법원에서 5년형을 받았다.
6월 유관순과 아우내 만세 주역들이 경성복심법원에 항소하였다. 이에 따라 유관순과 이들은 서대문감옥에 수감되었다.
6월 30일 유관순은 경성 복심법원 재판에서 3년형을 언도받았다. 유관순은 상고를 포기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고등법원에 상고하였다.
8월 29일 유우석은 공주법원에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9월 11일 유관순을 제외한 병천과 수신.성남지역 시위 주도자들의 상고가 고등법원에서 각각 기각되었다.
11월 6~11일 정동 제일교회에서 열린 기독교 미감리회 조선연회에서 천안지역 3.1운동 피해보고와 함께 수감 교역자에게는 20원, 기타 수감자에게는 5원의 구제금을 지급하기로 하였다.
1920년 3월 1일 오후 2시, 유관순이 서대문감옥에서 옥중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4월 28일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 결혼기념 특사령으로 형기가 절반인 1년 6개월로 단축되었다.
9월 28일 오전 8시 20분 모진 고문에 의한 방광파열로 서울 서대문 감옥에서 순국했다.
10월 12일 이화학당에서 유관순의 시신을 인수하여 수의를 해 입혔다.
10월 14일 정동교회에서 김종우 목사 주례로 유관순의 장례식이 거행되어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1962년 3월 1일 대한민국정부에서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유관순 열사의 시신이 보관됐던 석유상자>
사적 제324호 서대문서대문형무소역사박물관은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일제와 싸운 6천여 애국지사들이 온갖 고문에 시달려야 했던 호국의 현장이다. 이곳에서 목슴을 잃은 400여 순국선열의
추모비 앞에서 경건하게 옷깃 여미고 드높은 하늘을 우러러 보았다. 오로지 조국독립을 위해 일제와 싸우다 순국하신 선열들의 강열한 눈빛이 느껴졌다. 우리가 순국선열들의 애국정신 앞에 떳떳할 수 있을까?
일제하. 해방. 6.25. 4.19. 5.16. 10.26. 12.12. 광주시민항쟁. 민주화의 물결 등
가시밭길을 맨발로 걸어 이제 '세계 10대 강국'으로 도약한 대한민국 ! 일본은 재국주의로 회귀하면서 '독도'를 일본의 영토라 주장하며 여전히 한반도 침략의 야욕을 버리지 않고 있다. 북한은 6.25전쟁을 일으켜 수백만명의 인명 피해와 전 국토를 폐허화시키고도 핵폭탄으로 대한민국을 불바다로 만들겠다며 협박을 거듭하고 있다.
순국선열께서는 지금의 대한민국을 어떻게 바라보고 계실까?
간절히 기원했다. 순국선열들의 명복과 함께 대한민국의 국운 융성을 ! 서울시 서대문구 현저동 101번지 일본이 우리나라에 대한 침략을 본격화하기 위해 1907년 인왕산 기슭에 일본인이 설계하여
* 옛 서대문 형무소 최초 건축도면 발견
통곡의 미루나무-높이 30m 이 미루나무는 1923년 사형장 건립 당시 식재됐다. 사형장으로 끌려 가는 애국지사들이 마지막으로 이 나무를 붙잡고 조국의 독립을 이루지 못 하고 생을 마감해야 하는 원통함을 눈물로 토해내며 통곡했다 하여 '통곡의 미루나무'라 이름 지어졌다.
사형장
시신출구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시간별 프로그램 전일 프로그램 ●● 문의 02)360-8590~1 /홈페이지 : www.sscmc.or.kr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