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송 전형필(全鎣弼)> 1906년 서울 한성부(현 종로구)에서 전영기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증조부는 중군(中軍, 西班, 정3품) 전계훈(全啓勳)이며 그의 작은 아버지 전명기는 내부주사(內部主事) 및 참서관(參書官)을 지냈다. 전형필의 집안은 증조 때부터 배우개(지금의 종로4가) 중심의 종로 일대의 상권을 장악한 10만 석 대부호 가문이였다.
작은 아버지 전명기가 후손을 얻지 못하자 전형필은 당시의 관례에 따라 작은 아버지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학창시절에는 외사촌 형 월탄 박종화(月灘 朴鍾和)와 교류하며 보냈으며,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아 국문학을 전공하고자 했으나 부친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1921년 어의동 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6년에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와세다 대학 법학부에 진학했다.
1919년에 작은 아버지 전명기(양부)와 맏형 전형설이 사망하고 1929년에 생부 전영기 마저 사망하자 가문의 많은 재산을 단독으로 상속받아 23세의 젊은 나이에 '조선거부 40인'에 들어갈 정도로 엄청난 부자가 되었다. 그가 상속받은 부동산 중에 논의 면적만 헤아려보면 무려 800만 평이 넘었는데, 이는 여의도 면적의 약 10배가 된다. 이곳에서 매년 2만 석 이상의 쌀을 수확했다. 그 밖에도 밭과 상가, 상권등 많은 것을 물려받았다. |
훈민정음이 1443년 창제되었지만 해례본이 발견된 것은 500년이 지난 1940년이다. 《훈민정음》 해례본을 지켜낸 인물이 바로 문화재 수집가 간송 전형필이다. 조선어어학회 회원들과 더불어 우리 민족의 얼과 혼을 지켜낸 위인이다.
전형필은 1940년 국문학자 김태준을 통해 《훈민정음》 진본이 존재한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훈민정음》은 김태준의 제자인 이용준이 보관하고 있었다. 이용준의 선조가 여진 정벌에 큰 공을 세워 세종대왕에게 《훈민정음》을 하사받아 가문 대대로 내려온 것이다.
당시 《훈민정음》은 앞부분 두 장이 없었다. 연산군 시대에 언문책을 가진 이를 처벌하는 언문정책으로 앞의 두 장을 찢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훈민정음의 원리와 사용 방법에 대한 내용은 이전에 내려오던 그 어떤 기록들보다 자세했다. 김태준과 이용준은 경성제대 도서관의 《세종실록》을 보고 훈민정음을 복원하기 시작했으며, 앞의 찢어진 두 장 또한 이용준의 글씨로 보완했다.
하지만, 김태준이 일제에 검거되면서 《훈민정음》 해례본의 발굴은 그대로 멈춰지는 듯 했다. 김태준은 2년 뒤 석방되어 아픈 몸과 마음을 추스르지도 못한 채 《훈민정음》의 진위를 확인하고 전형필에게 연락을 해 《훈민정음》을 구할 방법을 찾는다. 둘은 노력 끝에 마침내 일제의 눈을 피해 《훈민정음》 소유주와 연락하게 된다.
《훈민정음》 소유주는 《훈민정음》의 값으로 천 원을 불렀지만, 전형필은 김태준에게 사례비 천 원을 주고 《훈민정음》을 만 원이라는 가격에 사들였다. 당시 만 원이라면 집 한 채 가격이 훌쩍 넘는 값이지만, 《훈민정음》에 담긴 가치는 그 값을 제대로 받아야 한다며 전형필은 만 원이라는 큰돈을 선뜻 내놓은 것이다.
<《훈민정음》 해례본>
그렇게 많은 노력 속에서 《훈민정음》이 전형필의 손 안에 들어왔다. 그 후 전형필은 해방 전까지 오동나무 상자 안에 《훈민정음》을 집어넣고 일제의 탄압, 한국전쟁의 위험 속에서 지켜냈다. 해례본은 1956년 해방 후 통문관의 제안을 받아 조선어학회 간부들과의 연구를 통해 영인본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다.
훈민정음 원본 혹은 해례본은 세종의 한글 창제 원리를 설명한 책이다. 이 <훈민정음 해례본>은 크게 ‘예의’와 ‘해례’로 나뉜다. 세종대왕이 직접 지은 ‘예의’는 한글을 만든 이유(서문)와 사용법을 간략하게 한문으로 설명한 글이다. ‘해례’는 세종의 명을 받들어 한글을 만든 집현전 ‘8학사’가 한글의 자음과 모음을 만든 원리와 용법을 상세하게 설명한 글이다. 하지만 이 <훈민정음 해례본>은 1940년 조선일보의 보도 전까지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18세기 실학자들은 해례본의 서문을 포함한 ‘예의’ 부문만 한글로 풀어쓴 <언해본>을 찾기는 했다. 이것이 ‘나랏말이 중국과 달라…’로 시작되는 익숙한 <언해본>인데, 세종의 한문 서문을 우리말로 바꾼 것이다. 그런데 서문을 포함한 ‘예의’는 <세종실록>과 <월인석보> 등에도 실려있다. 하지만 해례가 빠진 <언해본>으로는 한글의 창제 원리와 용법을 알 수 없었다. 외솔 최현배는 이를 두고 “훈민정음(한글) 반포 뒤 훈민정음(해례본)을 찍어 폈다는 기록이 없었다.”면서 “최세진(1468~1542)·신경준(1712~1781)·유희(1773~1837) 같은 한글 학자도 그 원본을 보지 못했다”고 토로한 바 있다.
해례본이 발견되기 전 훈민정음은 창제원리나 사용법에 대해 수많은 추측이 가득했지만, 영인본이 출판된 후 많은 학자들이 훈민정음의 연구에 몰두할 수 있게 되며 모든 논란에 마침표를 찍고 그 비밀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일제는 훈민정음의 가치를 떨어뜨리기 위해 급기야 ‘화장실 창살설’까지 등장했다. 화장실에 앉아 새 문자 창제를 고심하던 세종대왕이 화장실 창살 모양을 보고 훈민정음을 창제했다는 얼토당토 않은 설이었다. 대부분은 일제강점이 일본 어용학자들의 한글폄훼론이다. 일제 관학자들은 <언해본>마저도 위작이라고 깔아 뭉갰다.
6.25 전쟁 때 북한군들이 훈민정음 해례본, 고려청자 등 국보급 문화재를 포장할 것을 명령해 도난당할 위기에 맞았으나, 문화재들을 일부러 늦게 포장했다고 했다. 당시 북한군은 서울 점령 후 유물들을 평양으로 가져가기 위해서 포장하라고 협박했는데, 북한군의 선전으로 인해 경계가 다소 약해진 것과 문화재에 대한 지식이 적은 점들을 고려해서 문화재 포장을 지연시켰다고 한다. 당시 전형필은 모처에서 은신하면서 지냈고 전형필이 소장한 문화재들의 가치를 익히 알고 있었던 최순우, 손재형 등의 도움을 받았다. 이미 포장한 유물들도 이런저런 이유들을 갖다 붙이면서 다시 꺼냈다 포장하기를 반복하고 문화재를 나무 궤짝에 담아야 한다며 궤짝이 제작되기까지 시간을 끌었다고 하며 심지어 어느 날은 일부러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다리를 부러뜨리기 했으며 허구한 날 북한군에게 화이트 홀스 위스키와 우키요에, 춘화도를 주면서 경계심을 풀게 했다고 한다. 마지막에는 이를 들키고 말았으나 고작 3일 만에 서울이 탈환되면서 북한군들은 결국 문화재를 챙기지 못한 채 헐래 벌떡 평양으로 도망갔다고 한다.
끝내 해례본이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면 한글은 그저 ‘세종대왕이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다가 우연히 만든 글자’로 전락할 수도 있었다. 우리말과 글을 말살하고 신문까지 강제폐간하던 바로 그 암흑기에 <훈민정음 해례본>이 홀연히 나타났으니 외솔 최현배 선생이 “하늘이 한글의 운을 돌보시고 복 주신 것”이라고 외친 것이다. 한글반포(1446년) 이후 무려 494년만의 일이었다.
훈민정음은 연구를 통해 그 가치가 밝혀지면서 전 세계 언어학자들의 놀라움과 관심을 한 몸에 받게 된다. 이후 《훈민정음》은 1962년 12월 국보 제70호로 지정되고 1997년 10월 그 중요성을 세계적으로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 기록 유산으로 등재된다. 현재 《훈민정음》은 그 값을 매길 수 없는 세계적인 보물로 평가받는다.
우리 민족의 얼과 혼을 지켜낸 조선어어학회 회원과 간송 전형필 선생님에게 무한한 존경을 보냅니다.
참고문헌 : 이충렬, 「간송 전형필」 및 한글학회 기사 등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