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문덕 : 모두 다 자기 한풀이 입니다.
남 보기 그럴듯한 거 좋아하지 마시고 자신을 그런 거짓 된 삶에 묶어두려 하지 마십시오.
가묘는 있 조신으로 들어오면서 시작됐다고 합니다.
그전 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는 불교가 있었습니다. 아시죠?
고려가 불교를 국교로 정했었다는 것을요. 그때는 사람이 죽으면 화장을 했습니다.
또한 무덤이 있었다 해도 지금처럼 매장할 곳이 없어 사회적으로 큰 문제화 되지는 않았습니다.
따지고 보면 화장을 했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기일(忌日) 때마다 조상을 섬긴다고 절에 가 빌고 했으니, 이게 또 큰 문제 아닙니까?
이런 말을 하면 말도 안 된다 하겠지만 우리나라에서도 티벳처럼 시체를 풍장하거나 유기장,
또는 세골장했던 풍습이 있었답니다.
없는 집에서는 시체를 들판 같은 곳에 유기( 遺棄) 시키는 일이 다반사였어요.
인 자 : 아욱, 끔찍해라. 그런 짓거리는 못 배운 집안에서아 그렇지 어디 뼈대있는
집에서 상스럽게 그런 짓거리를 해요. 말도 안되지.
조문덕 : 이미 영혼이 떠난 껍데기일 뿐인데 뭐가 그렇게 아깝고 끔찍합니까?
그 시대에는 말입니다,
화장을 하지 않으면 오히려 극락이나 서방정토에 태어나지 못할까 봐 이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런데 조선시대 때에는 유교의 영향으로 인해 화장하는 것이
오랑케나 하는 못 배운 짓거리가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나라에서 화장제도가 없어진 이유는 다른 게 아닙니다.
고려를 멸하고 조선의 등극을 정당화시키기 위한 이성계와 정도전의 정책적인 전략에 의해서 입니다.
고려의 흔적을 없애자니 국교였던 불교를 탄압해야 했고,
물론 불교의 부패도 심각한 문제이긴 했습니다.
그렇다고 화장제도까지 없앨 필요는 없었는데 공자가 가르친 대로 무덤을 만들고
제사를 지내야 하니 서민들에게 뿌리 깊게 배어 있던 화장이 없어져야만 했을 겁니다.
향교를 지어 제사 문화와 가묘를 귀족들과 백성들에게 강요하고 사당을 지어
조상의 위패를 모시게 했으니, 이게 혼령을 모시고 계속 혼령의 사주를 받겠다는 것이지
그 속에 자신의 삶이라는 것이 어디 있습니까?
김 선생님 : 원장님, 공자가 가묘와 제사를 중요시한 원인이 있습니다.
도올 김용옥 교수님이 쓴 '도올 논어(공자의 생애와 사상)'를 보면
공자가 어떤 내력을 가지고 있는지 신랄하게 밝혀져 있습니다.
공자의 아버지(숙량흘)는 늙은 장수였고, 어머니(안징재)가 무녀였는데
그 안씨 집안이 무속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었답니다.
공자가 어렸을 때 제사놀이를 했다는 것이 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영향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나이 차이도 너무 큽니다. 공자의 아버지가 64살이 넘어 공자의 어머니를 만나 들판에서
관계를 하게 되었는데, 나이가 16살밖에 안 됐답니다.
그래서 일부의 학자들은 이들의 결혼을 예의에 어긋난다하여 '야합(㙒合) 이란 표현까지 썼습니다.
이 사실들은 공자를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에서는 정설로 알려져 있다고 합니다.
무엇보다 어진 사람이 덕으로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德治主義)고 주장했던
사상과 반대로 공자의 가르침을 받았던 많은 문사들의 사상에는
부모의 원수를 절대로 용서하지 않는 복수주의(復讐主義,불구대천지원수)가 숨겨져 있습니다.
수호전 같은 고서를 보면 "부모의 원수를 죽여 간을 씹어 먹어 복수를 하겠다."는
말들이 수도 없이 나옵니다.
회 원 1 : 듣고 보니 그러네요, 집안에서 보고 자란 것이 제사였으니 그게 뼛속 깊이 스며들고 말았던 거군요. 그래서 아이를 키울 때는 보고 듣는 걸 조심해야 합니다.
민 혁 : 그뿐만이 아닙니다,
'축첩제도(蓄妾制度)' 와 '남존여비(男尊女卑)' 사상이 누구 때문에 확장된 줄 아세요?
그게 다 공자 때문이었어요.
중국 주나라왕이 여인들을 애 낳는 도구로 이용하기 위해 정책적으로
유포한 거짓말이 후대까지 고스란히 남았고,
이를 기정사실화 하고 확장시킨 장본인이 공자 였습니다.
몇몇 왜곡돤 인간들의 거짓된 욕망이 수천 년 전부터 지금처럼
사람들의 의식을 병들고 비뚤어지게 만들었습니다.
남녀의 균형을 무너뜨렸고, 수많은 여인들의 삶을 고통과 비극으로 유린했어요.
현 아 : 말도 안 돼. 우리가 그런 파렴치한 목적에 이용당하고 있었다니...
김선생님 :우리 생각에는 유교가 중국에서 건너왔으니
그곳에는 유교나 성리학이 가장 많이 알려졌을 거라 생각하시지요?
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가장 범국민적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던 사상은 노자의 도교였습니다.
노장사상이 왕성했던 때에는
상대적으로 불교나 유교, 성리학은 위축되어 그리 인정받지도 알려지지도 않았습니다.
때론, 불교나 유교가 의도적(정책적)으로 이용될 시점에는 일시적으로 도교가 주춤한 적도 있었지요, 그러나 국민들의 의식 속에는 언제나 도교가 우선이었고,
그들 사상의 밑바탕에 노자가 살아있었습니다.
미 자 : 어머나, 그런거예요?
김선생님 : 이런 유교가 조선 땅에서 크나큰 인기를 끌었던 원인은
원장님 말씀처럼 조선 건국시에 불교를 근간으로하는
고려의 기존 세력을 억합할 목적으로 고려 말에 들여온 성리학을
정책적으로 이용하고 장려했기 때문입니다.
그 바람에 지금처럼 유교사상이 강하게 남은 것이지요.
회 원 2: 맞아, 중국 무협영화를 보면 왜 그렇게들 원수를 갚는 내용들이 많이 나오는지
허구한 날 원수를 찾아다니고 칼부림만 하잖아요.
아유~ 애들은 재미있다고 보는데 나는 도대체 정신 사나워 보기가 싫어요.
조문덕 : 그들의 의식이 그 정도밖에 안 되었다는 반증(反證)입니다.
용서와 사랑을 모르는 사람을 어떻게 성인(聖人) 이라고 칭할 수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