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마의 눈꺼풀
하재일
파란시선 0068 / B6(128×208) / 154쪽 / 2020년 10월 24일 발간 / 정가 10,000원 / (주)함께하는출판그룹파란
■ 신간 소개
길은 꿈에서 꿈으로 이어진다
하재일 시인의 일곱 번째 시집 <달마의 눈꺼풀>을 통독한 독자들은 불교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깊고도 독특한 시 세계와 만나는 경험을 했을 것이다. 시집 제목인 “달마의 눈꺼풀”에 대한 일화는 다음과 같다. 참선 중인 달마가 그만 잠이 들었는데, 잠에서 깨어난 그는 자신에게 화가 나서 자신의 눈꺼풀을 잘라 버렸다. 그런데 땅에 떨어진 눈꺼풀이 차나무로 자라났으며, 그 이후 선승들은 참선 중에 차를 마시며 졸음을 떨쳐 버리는 전통이 생겼다고 한다.
그런데 달마는 왜 눈꺼풀을 잘라 버린 것일까? 그것은 언제나 뜬눈으로 살아가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 아니겠는가. 깨어 있는 정신으로 살겠다는 의지. 하재일 시인은 이 일화를 가져와서 표제작을 썼고, 「시인의 말」에서도 이 일화를 활용하여 자신의 시 세계에 대해 응축적인 말을 남겨 놓았다. “내가 스스로 베어 낸 눈꺼풀을/이제 아득한 별자리에 버리겠다”는 시인의 말. 시인에 따르면 그 “머나먼 우주”에 있는 “아득한 별자리”에는 ‘마이트레야(미륵)’ ‘혈액형’의 피가 흐르고 있다고 한다. 먼 미래에서 도래할 부처인 미륵은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와 같은 존재 아닌가. 그러한 구원의 피가 흐르는 곳이 저 “머나먼 우주”의 “아득한 별자리”라고 한다면, 그 ‘별자리’는 시인의 마음속 우주에 있는 것이기도 할 터이다. 미륵의 세상이 도래하는 구원에 대한 시인의 희구가 시인의 마음속 우주에 미륵의 ‘별자리’를 형성했을 것이기에. 시인은 자신이 자른 ‘눈꺼풀’을 그 ‘별자리’에 버린다. 그곳에서는 달마의 차나무와 같은 ‘나무-시’가 자라날 터, 그 나무의 이파리(시편들)의 모음이 이 시집이겠다. (이상 이성혁 문학평론가의 해설 중에서)
하재일 시인은 충청남도 보령에서 태어나 태안에서 자랐으며, 공주사범대학교 국어교육과를 졸업했다. 1984년 <불교사상>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시집 <아름다운 그늘> <타타르의 칼> <코딩> <동네 한 바퀴> <달마의 눈꺼풀>, 청소년시집 <처음엔 삐딱하게>(공저) 등을 썼다. <달마의 눈꺼풀>은 하재일 시인의 일곱 번째 신작 시집이다.
■ 추천사
하재일 시인은 수립된 범주의 사유에서 벗어나려 한다. 삶의 흔적에서 미륵을 찾는 그의 시는 노마드 일상에 의미를 두는 오도송이다. 인연의 속삭임과 날것들이 지닌 내음을 잊지 않는다. 종소리에 실린 무쇠 같은 인연들과 탑의 그림자를 담은 용의 꿈틀거림을 마구니조차 보듬는 사랑이어야 한다고 구어로 노래하니 이는 오로지 통찰과 직관의 힘이다. 시인은 질서와 힘을 앞세운 거대한 세력을 거부한다. 하찮게 여겨질 것은 어디에도 없다. 초록과 어울린 게국지, 배불리 쌀을 담은 가난한 주꾸미, 살덩이는 떠나도 투명하게 남은 박대묵, 시인은 그것들을 갈무리하여 햇살을 담은 광목천을 타고 천수만을 나서서 유영한다. 천수만은 시인의 갠지스다. 갠지스를 떠난 시인의 여정은 험난하다. 우기에도 비가 오지 않는 사막을 지나고, 우주를 향할 때에는 여인이 보내 준 문자를 타고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다. 그 우주선은 무릇 마이트레야다.
나는 시인의 우주선에 동석하려 한다. 시인의 고독한 식사에 동석할 수 없으니 가끔 우주선 밖에 머물 수도 있다. 그렇다고 아파할 일은 아니다. 시클라멘 꽃송이를 오려 붙인 문자를 받거나 다가와 속삭이는 눈발을 듣게 되기 때문이다. 그냥 지나칠지도 모를 일이니 구름 위를 밟는 새털 걸음 소리에도 귀를 기울일 참이다. 혹시 나도 시인을 따라 뜨겁게 우는 새 떼가 되거나 닭 울음에 막 피려는 도라지꽃을 보거나 크레용으로 입술을 그린 채송화 꽃씨를 받을 수 있거나 천둥소리를 듣고도 눈을 살포시 감는 달마를 만나게 될지.
―김홍정(소설가)
■ 시인의 말
내가 스스로 베어 낸 눈꺼풀을
이제 아득한 별자리에 버리겠다.
밤하늘에 빛나는 저 물고기자리처럼,
내 별의 혈액형은
머나먼 우주, 마이트레야(彌勒)다.
천애절벽에서 허공을 보며
다시 한 번 헛발질을 한다.
■ 저자 소개
하재일
충청남도 보령에서 태어나 태안에서 자랐다.
공주사범대학교 국어교육과를 졸업했다.
1984년 <불교사상>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시집 <아름다운 그늘> <타타르의 칼> <코딩> <동네 한 바퀴> <달마의 눈꺼풀>, 청소년시집 <처음엔 삐딱하게>(공저) 등을 썼다.
■ 차례
시인의 말
제1부
사막에서 사는 법 - 11
눈발이 착륙했다 - 12
택배 - 14
백록이 뿔이 돋아 우물에 갇혔다 - 16
달빛 없는 간월암(看月庵) - 18
소금 창고 - 20
나비야 장에 가자 - 22
신장(神將)은 나를 가엾게 여겼다 - 24
신의 사자(使者)들 - 26
사랑의 가면 - 28
아귀(餓鬼) - 30
박대의 표정 - 32
수상한 계절 - 34
노각의 꿈 - 36
우럭젓국 – 37
제2부
연기(煙氣) - 41
나무장사 - 42
야콘 한입 먹고 - 44
사람만 우는 건 아니다 - 46
소리에 놀란 회화나무 꽃 - 48
봄의 그림자만 왔다 – 50
달마가 취해서 혼잣말로 - 53
뼈 - 54
꽃씨를 틔워 주세요 - 56
밥은 하늘이다 - 58
굿바이! 꽃게야 - 59
농어와 숨바꼭질 - 62
옛날 통닭 - 64
치통을 물고 질주하라 - 66
모감주나무 꽃이 피었습니다 – 68
제3부
동쪽 버드나무 아래에서 - 73
신맛은 하염없이 - 74
날아라, 여우원숭이 - 76
얼룩무늬 두꺼비와 함께 - 78
만추의 식탁 - 80
종이 상자 - 83
철봉에 매달린 짐승 - 86
나의 갠지스, 천수만 - 88
손님 - 92
힘내라 짜장면 - 94
그녀의 비린내 - 95
샛별바다 쌀썩은여 - 98
달마의 눈꺼풀 - 100
머위꽃 하얗게 두르고 – 102
제4부
빙도(氷島)를 아시나요? - 105
게국지 먹고 웃어라 - 106
타워크레인 당간지주 - 108
화목난로의 즐거움 - 110
모기에 대하여 - 112
석양 속으로 - 114
내 마음대로 돈가스 - 116
전복(全鰒) - 118
꽃의 연대기 - 120
파라솔 장터 - 122
별빛이 내려 번진 것처럼 - 124
열매는 지루하다 - 128
미산(嵋山) - 130
나의 연못과 미륵사지탑 - 132
해설 이성혁 경전을 읽으며 꿈의 길을 걷는 낙타 - 133
■ 시집 속의 시 세 편
나의 갠지스, 천수만
겨울 철새의 새오름이 하늘로 솟구치는 천수만 상펄은
조금 사리가 뒤바뀌는, 달이 태어난 바다의 배꼽이다.
라텍스 피부를 가진 바닷물이 양수처럼 가득 차오르는
천수만은 원래 초승달에 생일로 태어났지만
천 개의 연꽃잎을 어둠에 감추고 매일 밤 한 장씩만 떼어서
유백색 둥근 얼굴로 바다의 장지문을 열었다 닫았다 한다.
장대 키를 훌쩍 넘긴 달빛이 머리를 산발하고 옆구리에 물 항아리를 둘러멨다.
항아리에서 연신 국자로 물을 퍼 수량을 조절하며 부드러운 입김으로
바람을 불러 체에 모래를 곱게 거른다
비옥한 여신의 보름사리.
주름 잡힌 달의 옆구리에 밀물 들면
바다는 살과 살이 맞닿은 강줄기의 안주머니 깊숙이 가죽 지갑 속에
외씨를 심듯 패류(貝類)의 꿈을 꼭꼭 숨겨 둔다.
아무도 알 수 없는 은밀한 밤에 섬들이 토한
잠 덜 깬 모시조개의 탯줄을 받아 내며
밤마다 천수만에 뜨는 바르한의 초승달은
별과 바람과 노을을 통해 모든 생명을 제각각 길러 낸다.
그중 세 번째 통로인 상현달은 하늘의 미간에 위치해 있기에
생각이 너무 무거워 차라리 눈을 감고 있다가,
결국 밝은 해를 보지 못하고 섬이 만든 캄캄한 그리움 속에서
바다의 음성을 겨우 매만지다 어둠의 동공에 투신했다
두 갈래의 길로 빛이 새어 나와 다시 불꽃을 만들어 낸다.
놋쇠로 만든 폭풍의 삼지창을 미풍에 삭힌 다음 남게 되는
그날그날의 불 꺼진 재는 바다의 지붕 위에 낙조로 흩뿌려져
주꾸미와 새조개를 기른 양막에 오래 유등으로 흘러 부활한다.
철새 울음이 쌍발 썰매를 끌고 온 겨울,
찾아온 새들이 하늘이 내준 빈 관절 하나를 입에 물 때
석화는 혹한을 털모자로 짜 머리에 쓰고 살을 채운다.
이때 바다에 가득 찬 달빛은
눈발이 날아와 앉았던 느린 염기를 활활 태워
우둔한 결빙을 온몸으로 버티며 건너가고
햇살이 내려앉는 대낮엔 집게발을 높이 쳐든 황발이가
앞마당 갯벌 가득 떼를 이루어 양귀비 꽃밭을 일군다.
붉은 만다라를 게들이 연신 비눗방울처럼 퐁퐁 게워 내며
경건하게 강심을 향해 오체투지하는 순간,
붉은 구름은 반들반들한 썰물을 하루 종일 멍석처럼 말고 갔다
다시 가볍게 밖으로 펼치고 나온다
천수만엔 낮과 밤을 지피는 파도의 키에 맞춰
무려 삼억 삼천의 달빛이 퍼뜨린 물고기들이 이웃하며 산다.
밤마다 그들은 마른 나문재 가지로 어둠을 먹물로 찍어
풍요를 비는 색색의 타르초를 상형문자로 새긴 다음,
해 질 녘 가창오리 떼의 길게 목 뺀 울음소리에
마지막 햇살을 얹어 광목천으로 펼치는 것이다
*상펄: 서해 천수만 한복판에 있는 모래땅. 물이 따뜻하고 모래가 얕아 물고기들이 산란하러 모여드는 장소. ***
우럭젓국
도라지를 찹쌀고추장에 찍어 몇 잔 사발을 들이키니 도라지 냄새가 간밤을 지나 새벽까지 왔다. 닭 울음소리에 놀라 자리에서 눈을 떠 보니 어느새 나는 산속에 외따로 떨어져 피어 있는 한 송이 도라지꽃! 이럴 때면 으레 바닷가 고향 마을에서 먹던 간간한 우럭젓국이 생각났다.
우선 곱게 소금을 친 후 한 사나흘 동안 꾸들꾸들 그늘에 말린 우럭 포에 뽀얀 쌀뜨물을 붓고 두부와 청양고추 다진 마늘을 넣고 푹 끓이기만 하면. 이때 새우젓으로 간을 맞춰서 맑은 탕으로 솜씨를 부리지 않아도 우럭 안에 숨은 마른 햇볕을 잘 꺼내기만 하면 그만인데.
깊은 바닷속 그 맛의 진국이 펼쳐진 검은 늪에 노랑부리저어새처럼 빠질 수밖에 없었던 것을. 시원하면서도 뒤끝이 개운한 맛인, 억센 우럭 뼈가 내뱉은 해탈의 맛이 새벽 꽃밭에서 서늘하게 나를 불러 세웠다. 비리지 않은 목소리로 허공에 담백하게 외칠까. 진미 났다!
*진미 났다: 독살에서 우럭이 많이 잡히면 ‘진미 났다!’ ‘꽃이 났다!’고 외치면서, 동네 사람들과 잡은 물고기를 나눠 먹던 풍습이 오래전부터 서해 바닷가에 있었다. 충남 태안 지방 방언. ***
달마의 눈꺼풀
지금 풀잎이 내게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대나무 지팡이 같은 거 땅에 꽂아 놓고
근사한 당나귀 타고 여인숙 앞을 지나간
눈먼 건달 이야기를 하는 건가요
무쇠 가마솥에서 미인의 속눈썹이 나왔다고,
박박 우기는 거죠
당신께선 붉은 수염을 구하려고 이 밤중에
서역으로 급히 떠나신다고요
자신의 업적을 남기기 위해서 신던 미투리를
방문 앞 문고리에 척 걸어 놓는다고
어둠을 밝힐 불밝이쌀이라도 생기나요?
거기서 잎이 나고 꽃이 피고 가지가 뻗고
열매를 맺어 아름다운 향기를 천하에 풍긴다고,
세상이 달라질까요?
쇠약하신 아버지께선 큰집엔 왜 가셨죠
대뜸 냉대를 당하자 굽은 허리를 막대에 의지한 채
길바닥에 쓰러져 돌아가신 후 그 자리에서
푸른 나뭇잎이 돋아났다고요, 영혼을 위로하는
풀잎 한 잎이 내 심장에서 자랄 수 있을까요
버드나무 지팡이를 삼거리 입구에 세웠다고요
나무에 움이 트면 너를 데리러 오마, 하고 달랜 뒤
새처럼 홀연히 길을 지우고 멀리 떠나셨다고요
그렇게 스쳐 간 늑골을 기다리는 풀잎도 있을까요
당신이 대뜸 꽂아 놓은 지팡이에서 싹이 나와
이제 풀잎이 돋고 그림자가 우거져 제법
초록이 속으로 까매졌습니까?
그것만이 사람들이 바라던 기적이었을까요
끝없이 영생을 꿈꾸는 주문(呪文)에 시달렸고
몽상에 잠겨 날마다 단잠을 설쳤나요
인간들은 영문도 모른 채 비장하기만 합니다
잔에 풀잎 몇 장 띄워 놓고 복면 쓴 사내들이 모여서
중얼중얼, 그래서 무얼 어쩌자는 겁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