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 武俠之道(무협의 길)
공주는 나를 때리고 스스로 놀란 모양이었다. 내공을 운기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런 보호가 없는 내 뺨은 벌겋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꽁주 너......"
"유세엽......"
공주는 무척 화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난, 난, 너를 걱정해서. 혹시 제대로 돌아오지 못할까봐......"
도무지 화를 낼 계제가 아니었다. 부어 오른 뺨을 만지면서 공주를 바라보는데 가슴이 찡한 것이 무척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구냥 농담이었다. 미안하돠......"
공주는 고운 손으로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내밀어 나를 바라보았다.
"아프냐?"
"웅, 무척......아니, 별로 안 아프다."
"강무태......아니 유세엽......여자가 그렇게 좋니?"
공주의 말이었지만 공주의 말투가 아니었고 굉장히 슬프게 들려오는 목소리였다. 대답하기 가 무척 난감한 질문이었다.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고 있는데 문이 열리고 은성노모가 들어왔다. 그녀는 유세엽이 된 나를 발견하고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려웠을 텐데 잘 했구나. 그럼 내 내력을......"
"아닙뉘다. 노모, 괜찮쑵니다. 이제 제가 약속울 지킬 차례입니다."
노모는 돌변한 내 모습에 다소 놀란 표정이었다.
"다시 강무태로 변할 내력이 남아있느냐? 아무래도 내 내력을 보내줄 필요가 있지 않을까?"
"왜여?"
"유세엽의 그 혀 짧은 목소리는 아무래도 긴 이야기를 하는데 문제가 있으니까 말이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넉넉한 것 같아요. 지굼 변할 테니 노모눈 호법을 서주세요."
"알았다."
노모는 그제야 공주의 눈물 자국과 내 얼굴의 부기를 발견한 듯 잠시 멈춰 서서 나와 공주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고개를 흔들며 밖으로 나갔고 공주는 멍한 표정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무리하는 것 아니냐?"
"아뉘, 이건 익숙하니까 괜찮울 꼬다."
"그래, 등을 돌리고 있으마, 다 되면 이야기 해라."
무척 쓸쓸하게만 들려오는 목소리였다. 무언가 말을 걸고 싶어도 분위기가 영 아니었다.
즉시 세 가지 내공을 이리 저리 돌린 다음 빠르게 반골장과 천외경을 운행했다. 역행에 걸리는 시간에 비하면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무척 빠른 시간이었고 성공적으로 강무태가 될 수 있었다.
"옷을 갈아입어야 하니까 잠시 기다리고 있어."
"알았다."
나는 옷을 입고 침상에서 내려와서 다시 입을 열었다.
"주정란."
한 번도 그렇게 불러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말하는 나는 무척 어색했지만 공주는 순순히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왜 그러느냐, 강무태?"
"그 동안 너를 놀리고 괴롭혔던 일 사과하고 싶다."
공주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진심이냐?"
"응, 언제라도 내 힘이 필요하다면 말해라. 아직은 그리 큰 도움이 안 되겠지만 도와줄게,"
내 목소리가 워낙 의젓하고 점잖았기 때문에 말하는 나도 현실감이 없었다. 공주도 그런 모 양이었다.
"네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는데......나는 괜찮다. 넌 이미 나를 충분히 도와주지 않았느냐?"
공주의 입에서 상당히 당황하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니야...... 그건......"
말을 하면서 나는 공주와 나 사이에 보이지 않는 스파크가 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 다. 그렇다. 공주는 나를 좋아하는 것이다. 공주를 벗겨놓고 노닥거렸을 때는 긴가 민가 했 는데 지금 보니 정말로......
"필요하면 언제든 말해, 큰 조건 없이 들어주도록 할 테니까,"
"작은 조건은 있다는 것 아니냐?"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말이 애매하구나,"
공주의 눈빛은 무척 부드러웠고 실내의 분위기도 상당히 좋았다. 그렇다. 이렇게 정상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도 좋은 일일 것이다. 무림의 첫 경험을 공주와 하고, 그렇게 해서 공주를 정실로 삼고, 은혜미를 세컨드로 삼고, 기타 등등을 세 번째, 네 번째로 삼고, 그 밖의 고급 미녀를 한 스무 명 정도 데리고 오손도손 천산대공자로 지내는 것도 나름대로의 복일 것이다.
인터넷 되는 PC와 패스트푸드샵, 기타 등등 현대 문명을 합해서 비교한다 하더라도 이 쪽이 확실히 매력적이었다. 이미 언젠가부터 은혜미를 중심으로 짜놓았던 여자관계 마스터 플랜은 유명무실해진 상태였다.
새로운 계획이 필요한 시기였다. 바로 공주를 중심으로......
"들어가도 되겠소?"
은성노모의 말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 아마 안으로 들어오려다 우리 분위기가 이상하자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공주는 황급히 내 쪽으로 기울였던 허리를 폈고 난 미소를 지었다.
"들어오세요."
공주가 입을 열자 노모는 무표정한 얼굴로 들어왔고 자기 의자에 앉았다. 난 침상에 걸터앉았고 입을 열었다.
"이야기를 시작할까요?"
"그렇게 하자."
그렇게 해서 나는 있는 그대로 모든 이야기를 두 여자에게 들려주기 시작했다. 전생의 내가 어떤 존재였고 무엇을 했으며 어떻게 해서 여기에 오게 되었는지, 그 모든 것을 말이다.
두 여자는 그러나 모든 것을 말하기는커녕 몇 마디 진행하기도 전에 이미 도무지 믿을 수가 없다는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그대가 대략 600년 이후에 조선땅에서 태어났다는 이야기로군?"
"뭐 정확한 계산은 어렵지만 대강 그렇지 않을까 싶은데요. 오백 년일까?"
"그런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믿으라고?"
"물증도 있어요."
"물증?"
"제가 첫돌잔치를 했을 때 자객문에서 선물이 왔는데 그 선물이 바로 저와 함께 딸려 나온 물건입니다. 도검불침의 투구라고 소개하던데 그건 아니고 바퀴 두 개 달린 마차......그런 걸 탈 때 쓰는 겁니다."
"아하."
명백히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의 은성노모, 나에 대한 신뢰감이 본래 1/100은 되었는데 이 제 1/10000정도로 떨어졌다는 듯한 얼굴의 공주를 보며 나는 벌떡 일어났다.
"믿지 못해도 상관없어요. 그래서 이야기를 하려고 하지 않았던 거죠. 내가 역천외경계록이 라는 책에 머리를 부딪치고 다시 깨어났을 때......"
"역천외경계록?"
은성노모의 얼굴표정이 순식간에 변했다.
"그 책을 보았더냐?"
난 다시 침상에 걸터앉으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네, 아주 똑똑히 보았어요. 책장을 들춰본 것은 아니었지만,"
"천산에 있던 책이다. 잊어버렸다는 말이 많았지, 그게 어떻게 해서......"
"혁필이도 그런 말을 하던데 난 그저 제목만 알아요. 머리를 책에 부딪치고......"
"천외천의 천외천주 천외노인이 죽어가며 남긴 세 권의 책, 그 중 천외경은 천외천의 무학 정수를 담고 있다. 무림의 난다 긴다 하는 사람들이 찾아 헤매던 그 책의 두 번째 임자는 바로 그대가 되었지, 멍청한 소림의 고승들은 그 책을 수백 차례 익힐 기회가 있었음에도 의리를 지켜 오직 보관만 했다. 불가에 있으면서도 인연이 무엇인지를 몰랐던 셈이야. 천외 천주가 소림에 준 이유는 바로 소림에서 인연에 맞을 것 같은 출중한 제자가 있고 또 소림 이 위기에 처하게 되면 천외경을 전해주라는 이야기가 아니었겠느냐? 멍청한 소림의 승려들 은 원나라 말 마교사상 극강의 마공과 패도로 강호를 일통할 뻔 했던 절대혈존(絶代血尊)이 소림을 쑥밭으로 만들어 놓았을 때도 오직 장경각의 천외경을 대달마심경이라는 이름으로 바꿔서 이리 저리 옮겨 보관을 하며 스스로 '우리는 의리를 지켰다.' 고 위안을 삼았던 것이다.
이후 마교의 우두머리가 된 두만력은 자기 가문에 전해 내려오는 천외경계록을 지고의 보물 로 삼아 숱한 학자들을 불러 연구를 하게 되었다. 물론 천산도 비슷한 일을 암암리에 하고 있었지, 아마 그 사고가 난 것은 그대가 태어날 무렵이었던 것 같은데, 혹시 들은 바가 있느냐? 마교에서 천외경계록을 놓고 엄청난 사고를 저질렀던 이야기?"
"남궁이 비슷한 말을 해주었습니다. 무당도 부르고 희생제물도 바치면서......"
은성노모는 쓴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만력은 무공은 물론이고 역학을 통달하여 천문을 살피고 지리를 보는 일세의 기재이다.
그는 오랫동안 연구를 한 끝에 자신이 천외경계록을 사용하여 무언가를 해낼 수 있다는 것 을 알게 되었던 모양이다. 사람이 다룰 수 없는 거대한 힘을 얻을 수 있다거나 하는 그런 일 말이다. 그런데 그 일을 위해서는 아무래도 피가 필요했던 모양이다. 그것도 선량한 사 람들의 순수한 정혈이 말이다. 당연히 마교내부에서는 그런 피를 구할 수가 없었을 것이기에 두만력은 정파를 공격하고 나섰다. 순전히 희생자를 붙들기 위해서 말이다. 엉덩이가 무거운 그가 스스로 일어나서 정파의 유력한 젊은이들을 수십 명이나 사로잡아갔다......"
"호오......"
"호오라고 감탄을 저지를 일이 아니다. 그들은 모두 불귀곡에서 처참히 희생되어 자신의 피를 바쳐야만 했다. 두만력의 10대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의식이 거행되었다.
책장의 하 나에 한 사람의 피를 바르고, 다른 책장에 다른 사람의 피를 바르고, 두만력은 축귀와 마교 의 독특한 배화의식을 하면서, 그렇게 하루 밤 하루 낮 동안 미친 짓을 했다고 한다."
"흐음 그래서 어떻게 되었나요?"
"네 말이 맞는다면 두만력은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아무런 소득이 없었으며 우리는 너를 얻게 되었다."
"오호라, 그렇다며 양쪽 모두 사실이라면 두만력이 모은 순수한 정혈의 화신이 바로 내가 된다는 거로군요?"
"두만력이 모은 순수한 정욕의 화산이 너겠지, 생각을 해보아라, 두만력은 선악을 구분하기 어려운 인간에 불과하다. 큰 실수를 저지른 것이지, 그가 사로잡은 것이 모두 정파의 젊은이들이라고 해서 사악하지 않은 인물만 있으리라는 보장이 없지 않겠느냐? 게다가 모두 젊은이들이라서 한결 같이 색기나 술에 굶주려 있었을 것이다. 너는 어떻게 보면 정확한 원인의 정확한 결과인 셈이다. 만일 두만력이 했던 짓을 내가 했다면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그대로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그 행위 자체가 사악하기 때문에 생각만 하고 말았겠지만 말이다."
무척 기분 나쁘게 만드는 말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딱 두만력에게 떨어졌어야 옳은 인간이었네요?"
"그렇다. 네 품성, 개성, 특성, 그 모든 것이 두만력에게 갔어야 옳았을 것이다. 하지만 두만력은 두 권의 책을 모아서 일을 하지 못했고 하나의 책은 천산에 있었다. 무엇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천산에서 보관하고 있던 역천외경계록이 네 시대로 날아가서 너와 바꿔져 버렸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설명은 그것이 고작이다."
"하지만 난 분명히 역천외경계록을 보고 박치기를 했는데요."
"역천외경계록이 너를 불러들인 것이겠지."
"웃기는 이야깁니다. 너무 비과학적이고 너무 편파적이고, 암튼 믿을 수 없어요."
"우리도 그대 이야기를 믿기 어렵다. 강무태."
공주의 나직한 음성이었다. 나는 두 여자를 바라보며 머리를 굴려보기 시작했다. 순수하게 내가 경험했던 일어났던 일을 회고해보면, 난 역천외경계록에 머리를 박고 이 시대에 환생 했다.
아마 헬멧을 포함한 오토바이의 다른 몇 가지 부품들도 같은 경로를 거쳤을 것이다.
비슷한 시간 두만력이라는 쓰레기 자식이 역천외경계록과 짝을 이루는 천외경계록이라는 책으로 쓰레기 같은 짓을 벌이고 있었다. 두 가지 일은 서로간에 아무런 관계가 없을 수도 있겠지만 무척 밀접한 관계가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천외경계록과 역천외경계록은 일종의 세트로서 힘을 발휘하는 스타게이트와 같은 것이 아닐까? 아님 강제적으로 미래나 과거의 인물을 전송시키거나 이 시대의 인물을 다른 시대로 보낼 수 있는 타임머신이 아닐까?
"다른 생각이라도 있는 건가?"
"천외경계록이라는 책을 입수할 수 없을까요?"
은성노모가 눈을 크게 뜨고 반문했다.
"마교에 있는 책을?"
"어쩌면 나라면 두 책의 비밀을 풀어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은성노모는 잠시 공주를 바라보다가 내게 시선을 돌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가 마두 두만력을 제거한다면 언제라도 그 책을 읽어볼 수 있겠지."
"하하, 두만력이오? 아버지도 할아버지도, 소림, 아미, 무당의 장문들도 못하고 은성노모도 못한 그 일을 내가 한단 말입니까?"
"그 중 누구도 하지 못했던 일을 그대는 해내지 않았던가?"
"뭐요?"
"천외경을 얻었지......그래, 진정한 인연은 그대에게 있었던 모양이야. 일어나라 강무태!"
의자에서 일어나며 내뱉는 은성노모의 목소리는 근엄하고 품위가 있는 가운데 항거하기 힘 든 명령의 뜻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저항을 한번 정도 해보는 것이 바로 나 강무태의 의기가 아니겠는가?
"왜요?"
"일어나라니까!"
난 주춤거리며 일어났고 은성노모는 진지한 음성으로 말을 계속했다.
"나 은성노모 유화는 전대 빙궁 궁주께 빙궁의 제자가 되어 평생토록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했다. 본래 역학에 능통하며 천문지리를 세밀하게 보실 줄 알던 전대 궁주께서는 말년에 그녀의 제자가 천외천의 인연자와 연을 맺게 되리라고 예언하셨다. 지금 와 생각해보면 빙 궁의 제자인 나는 천외천의 인연자인 강무태 그대와 인연을 맺고 있는 것이다. 예언이라고 하지만 사부의 말씀이 지금까지 틀린 것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나는 역천외경계록을 갖고 있는 천산의 연맹주 부부가 잉태하게 될 사내아이와 내 손녀딸을 미리 정혼시켰으며, 천외 경을 갖고 있는 소림에 유일한 남자 제자를 보내 인연을 맺게 했다."
"네에......"
"네 과거에 대해 네가 한 말, 그리고 앞으로 할 말에 거짓이 없느냐?"
"네, 아마도......"
"아마도 라는 말은 빼라. 지금은 너와 농을 나눌 기분이 아니다. 남해의 빙궁은 무려 1천 년간 세상이 풍파와 담을 쌓고 홀로 높은 수준의 무학을 쌓아온 여인들만의 공간이다. 난 여자만이 빙궁에 들 수 있다는 규율을 깨고 어린 사내아이를 제자로 받아들여 소림에 보냄으로 조상들께 씻을 수 없는 죄를 졌다. 또한 은성심경을 결코 빙궁외부로 유출시켜서는 안 된다는 맹세를 깨고 어린 유세엽에게 은성심경을 보내 또 한 번의 죄를 범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너를 내 후계자로 삼음으로써 다시 한 번 대죄를 짓고자 한다.
천산의 대공자인 유세엽이 아닌 조선의 협객 강무태! 너는 빙궁의 차기 궁주가 되어 빙궁을 빛내고 무림의 사마외도를 척결하며 마두 두만력의 목을 베어 무림의 평화를 가져올 수 있겠느냐!"
"말하자면 공주는 증인이라는 건가요?"
"내 질문에 대답을 해라."
은성노모의 목소리에는 분명한 살기가 느껴지고 있었다.
"그게 아무래도 며칠은 시간을 두고......"
"시간은 지금뿐이다. 싫다고 말한다면 내게도 선택의 여지가 없다. 다만 선택이 무엇인지 묻지 않는다면 좋겠다."
"하하하, 저를 죽인다면 천산이......"
"천산이 결국 신경을 쓰는 것은 유세엽, 강무태가 아니다. 어떻게 하겠느냐?"
추상과 같은 음성이었다. 옆에 있는 공주도 창백하게 질린 표정이었다. 그러나 이 정도에 밀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미 나는 천산의 대공자고 이걸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았던가?
"전 본래 벼슬을 싫어하지만 빙궁의 차기가 되었을 때 제가 갖게 될 권리 같은 것도 알아야 합니다. 무턱대고 받으라고 해서 짐만 잔뜩 되는 일을 받을 수는 없으니까요."
"빙궁의 모든 제자들이 네 명령에 충성할 것이며 넌 바로 내 아래로서 빙궁의 수장이 되는 것이다. 물론 내가 물러나게 되면 그나마 네 위에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렇다면 빙궁의 재산관계 같은 것도......"
은성노모는 눈살을 찌푸렸고 공주가 대신 입을 열었다.
"빙궁 천 년의 힘은 황궁을 능가한다고 알려져 있다. 강무태, 쓸데없는 질문은......"
"흐음, 그렇다면 빙궁의 차기가 되면 혼인을 못한다거나 하는 제약은......"
"없다! 어떻게 할 셈이냐. 강무태!"
"그러면 어른께서 주시는 것이니 우선 받도록 하겠습니다."
"우선이라는 말은 빼라. 좋아, 네 입으로 받겠다고 한 것이다."
"네,"
"네 사형 뻘인 인물은 이미 소림에 출가를 했다. 따라서 넌 이제 내 유일한 제자가 되는 것 이며 빙궁사수와 은혜미를 포함한 모든 인물들이 너를 볼 때 마다 나를 보듯 따르게 될 것이다."
은혜미라는 말이 내 뇌리에 짜릿한 감각을 일깨워주었다.
"그렇다면 빨리 진행을 하도록 하죠. 격식은 무릎을 꿇고 절을 아홉 번 하는 건가요?"
"그렇다."
"사부, 절 받으십시오."
나는 즉시 무릎을 꿇고 은성노모에게 절을 하기 시작했다. 공주는 의자에서 일어나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선 채 그런 내 모습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절 아홉 번을 칼같이 받아먹은 은성노모는 모든 일이 끝나자 의자에 앉았고 나는 침상에 걸터앉았다.
"다시 네 이야기를 들려주거라."
"네 노모......사부, 그러니까 제가 살았던 세상의 이야기를 하면 되는 거죠?"
"그렇다."
나는 다시 두 여자에게 내 과거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무척 긴 이야기였다. 두 여자가 이제는 꽤 신뢰를 하는 표정이었기 때문에 신나서 이야기를 하던 중, 문득 현대 한국에서 살 던 구질구질하고 평범한 생활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그리움은 말을 할수록 점점 더해갔고 화제가 내 부모님과 가족에 이르게 되자 갑자기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그 엄청난 그리움과 슬픔이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