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수형님이 붙여준 싸움
기억과 추억 사이/옛날 고향 이야기
2006-02-16 20:53:27
정신없이 잘 놀다가도 친구들은 가끔 토닥거렸다. 가을걷이가 끝난 들에서 활놀이를 하다가도 들판에 세워 놓은 집가리를 넘나들며 술래잡기를 하다가도 서로 마음이 맞지 않으면 원수진 듯 토닥거렸다. 잡아먹을 듯 으르릉거리며 오이순 같은 손에 불끈 힘을 주며 주먹 몇 방 날리다가 풀어지곤 했다. 감정도 오래가지 않았다. 꾸역꾸역 눈물을 찍어내다가 금방 친해져 히히덕거렸다. 어린 마음에도 서로 미안했는지 눈빛으로 화해를 하곤 했다. 친구들은 보통 여린 게 아니었다. 꽃들이 만발한 산과 들을 헤쳐 술래잡기를 하거나 장수나무에서 불어오는 꽃바람을 쐬며 놀아서 그런지도 모를 일 이었다 보나마나 꽃을 닮은 게 틀림없었다. 꽃에서 퍼져 나온 향기가 아이들 심성에 스며들어 마음을 여리게 만든 지도 모를 일이었다. 피를 나눈 형제처럼 똘똘 뭉친 친구들은 초등학교 때 한 교실에서 함께 공부한 아이들이 전부였다. 간혹 한 해 선배들도 있었지만 그들과는 그렇게 살갑게 어울리지는 못했다. 해용이가 꼬마대장 노릇을 하며 제 앞에 금을 긋고 친구들을 줄 세우거나 상무가 차돌같이 단단한 머리로 장독을 깬 경우는 있었으나 친구들의 심성은 한결 같았다. 들꽃처럼 순박하고 여린 녀석들, 이름을 부르면 뛰어올 것 같은 녀석들,
그러나 그 중에서 심술궂은 녀석이 있었다. 눈은 약간 찢어지고 심심하면 눈곱을 매달고 나와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친구들의 가슴을 콩콩 찍어놓던 녀석, 가끔은 뒤집어지는 목소리로 붉으락푸르락 화를 잘 내던 녀석, 몹쓸 욕은 다 수집한 듯 심심하면 침까지 튀겨가며 육두문자를 날리던 녀석, 그 녀석이 바로 한 해 선배인 수용이였다. 수용이는 이름과는 달리 친구들을 배려하지 못하고 ‘수용’하지 못했다. 그 녀석의 성깔을 보고 있으면 하루의 기분을 망칠 때도 있었다. 녀석은 수릿골에 살았는데 심심하면 삵괭이처럼 동네로 기어 들어왔다. 늘 자갯골의 좁은 골짜기를 타고 내려와 경용이네 집 앞을 거쳐 동네로 기어들어 심술통을 내 부렸다. 회오리처럼 심술을 한번 부리고 나면 친구들과 아웅다웅 말다툼을 벌일 때도 많았다. 그러나 녀석의 말발은 형편없었다, 더듬거리기 일쑤였다. 제 뜻대로 말이 튀어나오지 않으면 “겨겨겨겨”하고 한참을 더듬거리며 숨이 넘어갈 듯 하다가 풀어졌다. 세월이 가도 녀석의 심술통은 여전했다.
저수지에서 일어났던 사건을 보면 녀석의 심술통이 언제 끝날지 여간 걱정되는 게 아니었다. 큰 산이 하늘을 막은 웃골 아래 들어앉은 저수지엔 땡볕이 쏟아지는 여름이 오면 아이들이 많이 몰려들었다. 버드나무 밑동에 묶인 황소의 처량한 울음을 들으며 아이들은 물놀이를 했다. 불볕더위에 찍힌 물은 물고기 비늘처럼 반짝거렸고 발가벗은 채 물놀이를 하며 떠드는 목소리들이 허공을 타고 멀리 퍼져 흘렀다. 물놀이가 얼마나 재미있었던지 물귀신이 와도 모를 지경이었다.
그 때였다. 한참 물놀이를 하고 있는데 누군가 내 머리를 누르며 물을 먹이는 놈이 있었다. 그 힘이 얼마나 센지 나는 꼼짝 못하고 버둥거렸다. 숨이 차 물위로 얼굴을 내밀면 도로 물속으로 집어넣고, 물을 잔뜩 먹고 캑캑거려도 내 몸뚱이를 짓굳게 따라다니던 손이 있었다. 도저히 그 손의 정체를 알 수 없었다. 보이지 않는 손과의 싸움은 오래 계속되었다. 혹시 물귀신이 아닐까. 저수지에 나도 모르는 물귀신이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배가 터지게 물을 먹고 괴로워하자 그 손은 순간 사라졌고 그 때 나는 죽을 힘을 다해 물위로 얼굴을 내밀었다. 그런데, 나는 분명히 보았다. 유들유들 웃는 녀석의 얼굴을, 보이지 않는 손이 누구 것인지, 힘센 손이 누구 것인지, 나는 분명 보았다. 나를 물 먹인 것도 모자라 다시 물속을 다이빙하여 다른 아이들 괴롭히는 녀석은 분명 수용이였다.
수용이는 늘 그랬다. 한시라도 가만히 있으면 좀이 쑤셔 못살 것처럼 친구들을 보면 괴롭힐 궁리만 했다. 몇 해의 세월이 흘러 수릿골 사는 순이가 저수지에서 죽다 살아난 사건을 생각해도 그 녀석의 얼굴이 떠올랐다. 순이가 물놀이를 하다가 죽을 뻔한 사건은 아이들에게 오랫동안 공포심을 안겨주었다. 그 때도 저수지는 평화로웠다, 푸른 풀들이 뒤덮은 둑엔 소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었고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햇살이 물위에 뒹굴고 있었다. 바람 한 점 없어 물도 잔잔했고 아이들 몇이 서로 물장난을 치는 와중에 순이에게 사고가 터진 것이다. 물을 잔뜩 먹은 순이가 물속에서 요동을 치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몇 번을 물위에 떠올랐다가 가라 앉았다를 하더니 그냥 물속으로 빨려들고 말았다. 그 때 아이들이 달려가 순이를 끄집어 내 물을 토해내고 구조를 했지만 정말이지 이상했다. 바람 한 점 없이 잔잔한 물속에서 저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은 누가 생각해도 귀신 곡할 노릇이었다. 얼키설키 얽힌 말풀이 순이의 몸을 휘감아 일어난 사건이라고 짐작은 했지만 웬지 수용이의 얼굴이 물귀신처럼 오버랩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몇 번의 계절이 바뀌면서 이 사건도 그저 평범한 일상 속으로 묻히고 말았다. 순이의 사건도 잊어졌고 순조롭게 세월도 흘러갔다. 그런데도 수용이의 성격은 여전했다. 남을 괴롭히는 일은 고쳐지지 않았다. 병처럼 굳어 이제는 습관이 된 지가 오래되었다. 거기다가 여자에게 무엇을 밝히는지 끄덕하면 이상한 동작을 했다. 다리가 쭉쭉 빠진 야한 여자들이 지나가면 손가락을 동그랗게 오무려 구도를 맞춰보곤 했다. 나는 예전부터 그 표시가 무언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수용이와 친구들만 아는 비밀스런 동작이었다. 보나마나 성에 관한 표시였다.
그리고는 왼쪽 손으로 오른쪽 주먹을 싹 훑어 내리면서고 욕 한방을 매겼다. 그것이 그 녀석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비포장 국도로 나가 미군에게도 이 욕을 매겼고 친구들에게도 수시로 욕을 매겼다. 누구든지 이 욕을 한방 먹으면 더럽게 기분이 나빴다. 물론 욕 한방을 얻어먹은 아이들도 수용이의 별명과 함께 욕을 되돌려 준건 사실이었다.
“사바우, 너도 먹어라”
녀석의 별명은 사바우였다, 일곱 형제중의 넷째인 수용이 아버지의 별명이 사바우인데 그 별명이 늘 수용이에게 붙어 다녔다. 바우가 무슨 뜻인지 모르지만 하여튼 그 바우라는 별명때문에 고통을 겪는 건 수용이였다, 아예 수용이는 사바우로 통했다. 더 정감이 있고 인간적인 별명이라 그런지 심술궂은 수용이도 화를 내지는 않았다.
그런 별명과 함께 한 시절을 풍미하며 남을 괴롭히는 녀석, 그런 녀석에게도 임자가 딱 걸려들었으니 그 사람이 바로 진수 형님이었다. 진수 형님이 누군가. 우리 동네 근방에서는 진수형님을 따라잡을 주먹이 없었다. 근육으로 뭉친 땅땅한 체구, 털로 숭숭히 뒤덮인 몸을 보면 누구든지 오줌을 지렸다. 게다가 유들유들한 웃음을 띠며 주먹 한방 날리면 상대방은 속절없이 고꾸라졌다. 그 덩치와 깡다구로 한 시절을 주름잡던 진수형님, 비포장도로를 덜덜거리며 올라가는 트럭위에 몰래 타 물건을 스릴있게 훔쳐 내리던 진수형님의 재빠른 동작은 인근에서 익히 잘 알려진 실화였다. 그런 무시무시한 진수형님을 모르고 조카인 영준이를 괴롭혔으니 일은 크게 터지고 말았다.
수용이의 버릇을 고칠 방법으로 진수형님이 영준이와 싸움을 붙인 것이다. 그런데 싸움이 공정하면 얼마나 좋을까. 진수형님이 턱 버티고 서있는 싸움판이 공정할 리 없었다. 일방적으로 힘이 딸리는 영준이가 수용이 밑에 깔리면 진수형님이 수용이를 넘어뜨려 영준이가 배위를 깔고 앉게 했다. 몇 번을 그렇게 했더니 아무리 힘에 센 놈도 지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몇 번을 뒤집고 넘어뜨리고 하다 보니 수용이도 힘이 딸렸는지 울음을 터뜨렸다. 소문을 듣고 수용이네 가족들이 달려와 울고불고 했지만 진수형님은 눈 하나 깜작하지 않았다. 진수형님의 근성은 누구도 못말렸다. 말뚝처럼 서서 끄덕하지 않은 저 깡다구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주눅 들게 했다.
결국은 수용이가 항복을 해 싸움은 끝났지만 어린 마음에 한동안 가슴앓이를 해야 했다. 그러나 그 이후로 수용이와 어울린 기억은 나지 않았다. 중학교 2학년 때 내가 옆 동네로 이사를 가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수용이의 얼굴을 본지 꽤 오래되었다. 녀석은 이제 심술통 고치고 잘 살고 있겠지, 문득문득 얼굴이 떠올랐지만 잠깐씩 꿈을 끈 것처럼 아련해졌고 대학생활하랴 바쁜 와중에 그만 녀석의 얼굴을 깡그리 잊고 말았다.
그러다가 대학 재학 중 문득 녀석을 만나게 되었다. 그 때가 명절 끝인가 아니면 시골에서 볼일을 보고 내려가는 길인지는 모르지만 사람들로 아수라장 된 황간역 개찰구에서 녀석을 만나게 되었다. 그것도 내가 먼저 본 게 아니라 한껏 욕설이 뒤범벅된 녀석의 찢어지는 욕설이 내 뒤통수를 치는 소리를 듣고서였다.
그러며 그렇지 녀석의 성깔이 어디 가냐. 제 버릇 남 못준다고 더듬으며 튀어나오는 욕설은 여전하고 눈 밑이 발갛게 뒤집어지며 흐어학 웃는 모습이 여전하다. 그래도 50줄에 들어선 지금 생각해도 반갑기 그지없다. 녀석의 얼굴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푸릇푸릇 물든 고향의 봄 내음이 간절하고 한걸음에 고향에 달려가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