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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증(證)을 변(辨)하다
토산(吐酸) 일증(一證)에 대하여 하간(河間)은 열(熱)로 말하였고 동원(東垣)은 한(寒)으로 말하였다. 이치(理)는 일정(一定)하여야 하는데, 이와 같이 서로 다르다면 어찌 그 잘못(:謬)을 용납(:容)하겠는가? 어째서 두 사람으로 인하여 이치(理)가 바뀔 수 있겠는가? 반드시 두 사람의 이치(理) 중에서 하나는 틀린(:悖) 것일 뿐이다.
이를 내가 말하지 않을 수 없으니, 곧 동원(東垣)은 맞고 하간(河間)은 틀린 것이다.
어째서 그렇게 보는가?
하간(河間)의 설(說)은 실은 내경([內經])에 근본(本)한 것이다. 경(經)에 이르기를 "제구(諸嘔) 토산(吐酸) 폭주(暴注) 하박(下迫)은 모두 열(熱)에 속한다." 하였으므로 하간(河間)의 병기([病機])에서는 모두 화(火)라고 가르쳤고, 심지어는 '한(寒)이 주(主)하는 것이 아니다.'고 하였다.
내경([內經])의 이 논(論)은 운기(運氣)에 속(屬)한 것으로 병(病)의 응(應)을 개괄적(:槪)으로 말한 것이지, '구토(嘔吐) 주사(注瀉)가 모두 내열(內熱)의 병(病)인 것은 아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만약 열(熱)이라고 말한다면, 어찌 또 '장위(腸胃)에 객(客)하면 궐역(厥逆)하여 위로 나오므로 통(痛)하면서 구(嘔)한다.'고 하였겠으며, 또 '태양(太陽)이 복(復)하면 심위(心胃)에 한(寒)이 생겨서 흉중(胸中)이 불화(不和)하고 타(唾)로 청수(淸水)가 나오며 얼(噦)이나 희(噫)가 된다.'고 하였겠는가? 이는 구토(嘔吐)에도 한(寒)이 있다는 말인데, 어째서 모두 열(熱)이겠는가?
또 이르기를 '태양(太陽)이 승(勝)하여 한(寒)이 하초(下焦)에 들어가면 전(傳)하여 유설(濡泄)이 된다.' 하였으니, 이는 설사(泄瀉)에도 한(寒)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어째서 열(熱)이겠는가?
이로 보건대 여기서는 열(熱)이라 말하고 저기서는 다시 한(寒)이라고 말하였으니, 스스로 모순(矛盾)이 되는데, 어찌 오류(:謬)가 없다고 말하는가?
내경([內經])의 이치(理)는 원통(圓通)하여, 상세히 다 갖추어 두루 갖추지 않음이 없으니, 이를 잘 모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상(常)이라 말하고 저기서는 변(變)이라 말하며, 여기서는 순(順)이라 말하고 저기서는 역(逆)이라 말하며, 이 편(篇)의 미진(未盡)함을 저 논(論)에서 채우고(:足), 속(屬)을 총괄적으로 말하기도 하고 병(病)을 상세하게 말하기도 한다. 이처럼 내경([內經])은 현묘(玄妙)하므로 인하여 쉽게 궁구(:窮)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이 책을 잘 보려면 마땅히 그 원류(源流)를 깨달아야 하고(:悟) 그 분(分)과 합(合)을 살핌에 힘써야 한다. 그 박통(:博)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천(千)이 되고 만(萬)이 되도록 밝혔고(:燭), 그 약속(:約)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일리(一理)에 모두 귀납(:歸)하도록 관통(:貫)하였다. 이와 같아야 그를 혜안(:明眼)을 가진 사람이라 족히 지칭(稱)할 수 있다.
그 전말(巓末)을 이해(:會)하지 못하고 단지 대롱 구멍(:管)으로 그 일부(:一斑)만을 추측(測)한다면 또 어찌 그 묘(妙)를 다하겠는가? 더구나 요지(:宗旨)에 분명(明)하지도 못하면서 이치(理)에 어긋나도록(:悖) 함부로 말하거나(:談), 내경([經])의 문장(文)을 빌려(:借) 잘못 그 편견(偏見)을 증명(證)하려고 하는 경우가 일일이 열거(擧)할 수조차 없고, 변론(辨)할 겨를조차 없다.
이로 인하여 두 사람의 논(論)을 함께 언급하며 다시 아래에 모두 갖추었으니, 보는 자로 하여금 이를 바로 잡는데 보탬이 되도록 하였다.
一. 하간(河間)의 토산(吐酸)에 대한 논(論)을 변론(辨)하자면 이는 틀린 것이다.
하간(河間)이 말한 것에 근거(據)하자면 "산(酸)이란 간목(肝木)의 미(味)이다. 화(火)의 성(盛)으로 말미암아 금(金)을 제(制)하니, 목(木)을 평(平)할 수 없으므로 간목(肝木)은 저절로 심(甚)하게 되므로 산(酸)이 된다. 예로 음식(飮食)이 열(熱)하면 쉽게 산(酸)하게 되는 것과 같다. 혹자(或者)는 '토산(吐酸)은 한(寒)이다.' 고 말하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따라서 한(寒)이라고 함부로 말하는 자는 단지 생경(生硬) 점활(粘滑)한 것에 상(傷)한 것이나 냉물(冷物)에 상(傷)하여 된 희산(噫酸) 탄산(呑酸)을 많이 말하는데, 속의(俗醫)들은 비위(脾胃)를 온화(溫和)하게 하는 것을 주(主)로 하고 있다. 경(經)에서 말한 '사람이 한(寒)에 상(傷)하면 병(病)으로 열(熱)하게 된다.'는 것을 어찌 알겠는가? 따라서 내(內)로 냉물(冷物)에 상(傷)하면 곧 음(陰)이 양(陽)을 승(勝)하여 병(病)으로 한(寒)하게 되거나, 한열(寒熱)이 서로 격(擊)하여 장위(腸胃)의 양기(陽氣)가 불울(怫鬱)하므로 열(熱)하게 된다. 또 생랭(生冷)에 내상(內傷)하여 도리어 병(病)으로 열(熱)하게 되는 경우도 있으니, 대한(大汗)하면 열(熱)이 설(泄)하면서 신(身)이 양(凉)하게 되면서 낫는다. 만약 오래도록 산(酸)한 것을 좋아하기를 그치지 않으면 온(溫)하게 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고, 마땅히 한약(寒藥)으로 하(下)하여야 하고 그 후에 양약(凉藥)으로 조(調)하여야 한다. 결(結)이 산(散)하고 열(熱)이 거(去)하면 기(氣)가 화(和)하게 된다." 하였다.
이는 모두 하간(河間)의 설(說)인데, 내가 매번 이를 볼 때마다 심히 탄식(嘆:)하기를 반복(反復)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가 병기(病氣)를 말한 것을 보면 '화(火)에서 금(金)에 급(及)하고 금(金)에서 목(木)에 급(及)하며 목(木)에서 비(脾)에 급(及)하여 산(酸)이 된다.'고 하였다. 정미(:微)한 이치(理)를 발(發)하여 말하는데 이와 같이 빙빙 돌려서 말한다면(:轉摺)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할 때도(:指鹿爲馬) 할 말이 없을 거라고 왜 염려하겠는가? 오직 열(熱)이라고 고집(:執)하려는 것이므로 그가 이와 같이 번잡(:委曲)하게 말하는 것이다.
만약 내가 한(寒)이라고 말한다면 그렇게(:위곡) 하지 않을 것이다. 산(酸)은 본래 간목(肝木)의 미(味)이다. 화(火)가 쇠(衰)하여 토(土)를 생(生)하지 못하니, 비기(脾氣)가 허(虛)하여 간사(肝邪)가 이를 모(侮)하므로 산(酸)이 되는 것인데, 왜 이렇게 말하지 못하는가? 그는 이치가 더 명절(明切: 명백하고 적절)하지도 않으면서 왜 그처럼 번잡(:曲折)하게 억지 해석(:解)을 하는 것인가?
또 내경([內經])에서 말한 '사람이 한(寒)에 상(傷)하면 병(病)으로 열(熱)하게 된다.'는 것은 상한(傷寒)의 증(證)에서 한사(寒邪)가 표(表)에 있으면 삼양(三陽)의 발열(發熱)이 되고, 리(裏)로 전(傳)하면 양명(陽明)의 내열(內熱)이 된다는 것을 말한 것인데, 어째서 냉물(冷物)에 내상(內傷)한 것에도 병(病)으로 열(熱)하게 된다고 말할 수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냉물(冷物)에 내상(內傷)한 것도 한(汗)으로 풀 수 있다는 말인가?
기혈(氣血)이 강성(强盛)한 사람이 우연히 생랭(生冷)에 상(傷)하고 오래 머물러 제거(去)하지 못하므로 울(鬱)하여 열(熱)이 되는 경우, 이는 울(鬱)이 오래되어 열(熱)로 화(化)한 것이므로 간혹 있을 수 있지만, 어째서 생랭(生冷)으로 인하였는데 도리어 열(熱)하게 된다는 것인가?
하물며 내경([內經])은 본래 외감(外感)으로 말하였는데 하간(河間)은 이를 내상(內傷)을 증명(證)하는데 인용(引)하였으니, 이 또한 심(甚)히 잘못(:謬)된 것이다. 이는 헌기(軒岐)의 뜻(:旨)을 크게 해(害)칠 뿐만 아니라 후인(後人)들이 이를 고집(:執)하며 핑계거리(:藉口)로 삼으니, 그 피해(害)가 또한 어떠하겠는가?
一. 동원(東垣)의 토산(吐酸)에 대한 논(論)을 변론(辨)하자면, 이는 옳은 것이다.
의학발명([發明])에서 말한 것을 근거(據)하자면 "내경([內經])에서 말하기를 '제구(諸嘔) 토산(吐酸)은 모두 열(熱)에 속(屬)한다.' 하였는데 이는 상초(上焦)가 외래(外來)한 객사(客邪)를 받은 것이다.
위기(胃氣)는 외사(外邪)를 받지 않았으므로 구(嘔)하게 되니, 이를 중경(仲景)은 생강(生薑) 반하(半夏)로 치(治)하였다. 잡병(雜病)으로 논(論)하자면 산수(酸水)를 구토(嘔吐)하는데, 심(甚)하면 산수(酸水)가 그 심(心)을 침(浸)하고, 그 다음은 산수(酸水)를 토(吐)하므로 상하(上下)의 아(牙)가 산삽(酸澁)하여 같이 서로 대화(對)할 수조차 없게 된다.
이를 크게 신열(辛熱)한 약(藥)으로 치료(:療)하면 반드시 감(減)하게 된다. 산미(酸味)는 수(收)하는 기(氣)이니 서방(西方) 폐금(肺金)이 왕(旺)한 것이고, 한수(寒水)는 곧 금(金)의 자(子)이니 자(子)는 모(母)로 하여금 실(實)하게 한다. 따라서 크게 함열(鹹熱)한 제(劑)로 그 자(子)를 사(瀉)하고 신열(辛熱)로 이를 보좌(佐)한다면 폐(肺)의 실(實)을 사(瀉)할 수 있다.
병기([病機])에서는 열(熱)로 작(作)하여 공(攻)하였으니, 이는 잘못된 것이다.
잡병(雜病)에서의 초심(醋心)은 탁기(濁氣)가 강(降)하지 못하여 중만(中滿)하려는 것이니, 한약(寒藥)으로 어찌 치료(治)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는 동원(東垣)의 부족한(:乏) 설(說)이긴 하지만, 나는 가장 이치(理)에 맞은 것이라고 말한다. 다만 사람들이 크게 꺼리는(:太諱) 말을 앞세웠으니(:立言), 곧 그가 말한 '기(氣)를 수(收)한다.'는 것이나 '서방(西方) 금(金)이 왕(旺)하다.'는 것이나 '수(水)는 금(金)의 자(子)이다.'는 등인데, 그 의미(:義)를 사람이 이해(:達)하지 못하므로, 이를 대부분 경홀히(忽) 여기는 것이다.
또 단계(丹溪)도 말하기를 "동원(東垣)은 외(外)에서 얻은 풍한(風寒)을 말하지 않았고, 기(氣)를 수(收)한다는 설(說)을 세워서 폐금(肺金)의 실(實)을 사(瀉)하려고 하였다." 하였다.
또 이르기를 "(동원은) '한(寒)한 약(藥)은 산(酸)을 치료(治)할 수가 없다.'고 하면서 안위탕(安胃湯) 가감이진탕(加減二陳湯)을 쓰면서도 모두 정향(丁香)을 잘못 범(犯: 사용)하였고, 또 열(熱) 습(濕) 울(鬱)의 적(積)을 치료(治)하는 법(法)은 없었으니, 경의(經意)에 합(合)하지 않는다." 하였다.
이로 인하여 단계(丹溪)의 치법(治法)을 상고(考)하여 보니 수련환(茱蓮丸) 이진탕(二陳湯)을 사용하였다. 또 그가 말하기를 "마땅히 초(炒)한 오수유(吳茱萸)를 사용하여야 하니, 그 성(性)을 순(順)하게 하여 절(折)하는데, 곧 반좌(反佐)의 법(法)이다." 하면서도, 반드시 황연(黃連)을 군(君)으로 쓰면서 치료(治)하였다.
이처럼 단계(丹溪)의 뜻(:意)도 열(熱)이 주(主)한 것이므로 동원(東垣)과 서로 반(反)한다. 황금(黃芩) 황연(黃連)으로 토산(吐酸)을 치료(治)하려면 반드시 변(辨)하지 않을 수 없으니, 따라서 청(請)하건대 동원(東垣)의 설(說)로 소통(疏)하려 한다.
소위 '기(氣)를 수(收)한다.'는 것은 금기(金氣)이니 곧 추기(秋氣)이다. 내경([內經])에 이르기를 "추기(秋氣)는 위에서 시작(始)된다." 하였다. 음(陰)이 점차 성(盛)하는 것은 반드시 추(秋)에서 시작(始)하니 양기(陽氣)가 퇴(退)하려는 것이다. 점차 한숙(寒肅: 몹시 한하다)하는 것은 반드시 위에서 시작(始)하니, 양기(陽氣)가 날로 강(降)하기 때문이다.
'금(金)이 왕(旺)하다.'는 것은 폐기(肺氣)의 충실(充實)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한기(寒氣)의 유여(有餘)를 말하는 것이다.
'자(子)는 모(母)를 실(實)하게 한다.'는 것은 한(寒)이 상초(上焦)에 있으면 기(氣)의 수(收)가 더 심(甚)하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치료(治)할 때 함열(鹹熱) 등의 제(劑)를 써서 그 자(子)를 사(瀉)하는 것은 또한 부양(扶陽) 억음(抑陰)하는 도(道)가 아님이 없으니, 매우 합당(:切當)한 것이다.
단계(丹溪)는 그 뜻(:意)을 깨닫지(:達) 못한 채 도리어 틀렸다고 하였으니, 도대체(:抑) 어떻게 된 것인가? 정향(丁香)의 기미(幾微)는 신상(辛爽)하고 무독(無毒)하므로, 중초(中焦)의 한체(寒滯)로 기(氣)가 불순(不順)할 때 매우 마땅한 것인데, 어째서 '범(犯)'이라는 글자로 경계(:戒)하여 후인(後人)들로 하여금 호랑이(虎)와 같이 두려워(:畏) 하도록 하였는가? 단계(丹溪)는 단지 정향(丁香)은 범(犯)할 수 없다는 것만 알았지, 황연(黃連) 황금(黃芩) 또한 탄산(呑酸)의 증(證)에 쉽게 범(犯)할 수 있다는 것은 왜 몰랐는가?
그런데 비록 이와 같은 설(說)이라도 그 설(說)에 미진(未盡)함이 있으니, 한(寒)이라 말하여도 열(熱)이라 말하여도 의혹(:疑)이 없는 것이 아니다.
이에 다시 아래와 같이 그 설(說)을 다하고자 한다.
一. 토산(吐酸)의 증(證)은 모두 열(熱)이라고 하는 자들에게 어찌 (각자 주장하는) 그 설(說)이 없겠는가?
유하간(劉河間)은 "음식(飮食)은 열(熱)하면 산(酸)으로 바뀐다(:易)." 하였고, 대원례(戴原禮)는 "곡(穀)과 육(肉)이 기(器)에 있을 때 습열(濕熱)하면 산(酸)으로 바뀐다(:易)." 하였다. 또 이를 서로 전(傳)하는 자들은 "주(酒)를 조(造)하는 것을 보면 양(凉)하게 작(作)하면 감(甘)하고 열(熱)을 과(過)하게 하면 산(酸)한다. 어찌 산(酸)이 열(熱)로 말미암지 않겠는가?" 하였다.
여러 설(說)들이 이와 같이 거의 믿을 만하여 사람들이 따르지 않을 수 없도록 하였으니, 모든 사이비(:似是而非)가 이러한 종류(類)들이다. 궁술(:射)에 비유(譬)하자면, 단지 전후(前後) 좌우(左右)를 벗어나지만(:離) 않는다면 바로 고수(高手)라고 말하는 꼴이니, (전후좌우의) 네 글자의 범(犯)을 모르고서 어떻게 족(足)히 궁술(:射)을 말할 수 있겠는가? 제가(諸家)의 설(說) 또한 이와 같을 뿐이다.
어째서 그렇게 보는가?
병(病)을 살피려면 당연히 이치(理)로 살펴야 하고 이치(理)를 살피려면 당연히 진실(:眞)됨으로 살펴야 한다.
'음식(飮食)이 산(酸)하는 것은 열(熱)로 말미암는다.'는 것은 이치(理)에 가까운 듯 한다. 그런데 식(食)이 솥에서 화(化)할 수는 있지만 산(酸)할 수는 없으니, 이는 화력(火力)이 강(强)하면서 속히 화(化)하여 유(留)함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꺼내어서(:起) 그릇(:器) 속에 오래 두면(:置) 그 후에 산(酸)하게 되니, 이는 정적(停積)으로 산(酸)하게 된 것이고, 열(熱)로 인하여 산(酸)하게 된 것이 아니다. 일찍이 보건대, 수장(水漿)을 냉(冷)하게 적(積)하기를 오래하면 산(酸)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이것이 또 어찌 열(熱)이겠는가? 모두 불행(不行)으로 인한 것이다.
또 이르기를 '주(酒)를 조(造)할 때 열(熱)로 작(作)하면 산(酸)한다.'고 하였는데, 이것 또한 이치(理)에 가까운 듯 한다. 그러나 반드시 2~3일 후 울열(鬱熱)이 개(開)하지 못한 연후에 산(酸)하게 되니, 열(熱)로 작(作)한 즉시(:時)에는 바로 산(酸)이 되지 않다.
또 사람의 위기(胃氣)는 원래부터 열(熱)한다. 따라서 삼찬(三餐: 세 끼)이 위(胃)에 들어가면 모두 경각(頃刻)에 소화(消化)가 되니, 이것이 진양(眞陽)의 화후(火候)가 응(應)하는 것이다. 만약 주(酒)를 제조(造)할 때처럼 반드시 날이 다하기를 기다렸다가 그 후에 된다면 하루에 다시 식사(:餐)하지 않으면 위기(胃氣)가 비(憊)하지 않겠는가?
만약 반드시 냉(冷)하게 작(作)하면 산(酸)하지 않는다는 것은 화(火)가 없다는 말인데, 그렇다면 음식(飮食)의 화(化)도 또한 반드시 열흘이라야 될 것이니, 이는 위중(胃中)의 양기(陽氣)가 이미 갈(竭)한 것이 아닌가?
이로 위기(胃氣)는 본래 마땅히 난(煖)하여야 하지 조금이라도 양(凉)하면 안 되고, 술독(:酒甕)은 본래 마땅히 소(疏)하여야 하지 울민(鬱悶)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술독(:酒甕)의 화(化)가 또 어찌 위기(胃氣)의 신속(速)함과 같으며, 위기(胃氣)의 건(健)이 또 어찌 술독(:酒甕)의 지(遲)함과 같겠는가? 이처럼 그 성리(性理)가 서로 다름(:相懸)이 어찌 10배 뿐이겠는가? 변별(辨)을 기다리지 않아도 이는 분명(明)한 사실이다.
또 사람의 음식(飮食)이 위(胃)에 있으면 오직 속히 화(化)하는 것이 귀(貴)한다. 만약 위중(胃中)의 양기(陽氣)가 쇠(衰)하지 않아 평상(:常)처럼 건운(健運)하다면 어찌 산(酸)이 있겠는가? 화력(火力)이 도달(:到)하지 못하면 그 화(化)가 반드시 지(遲)하게 되고 식(食)의 화(化)가 지(遲)하면 정적(停積)하여 행(行)하지 못하니 산(酸)이 되고 부(腐)가 된다. 이처럼 산(酸)은 곧 점차 패(敗)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병(病)으로 탄산(呑酸)하면 대부분 음식(飮食)의 불쾌(不快)가 나타나고 식(食)의 불쾌(不快)로부터 반드시 점차 중만(中滿) 비격(痞隔) 설사(泄瀉) 등의 증(證)에 이르니라.
이것이 어찌 비기(脾氣)의 불강(不彊: 굳세지 않다)이나 위완(胃脘)의 양허(陽虛)로 인한 병(病)이 아니겠는가? 그래도 이를 화(火)로 안다면 잘못이 없을 수 있겠는가?
내가 예전에 북경(:燕都)에 있을 때 일찍이 탄산(呑酸)을 앓는 어떤 관리(縉紳)를 치료(治)하였다. 치료(治)하여 주기를 간구하길래 내가 한(寒)이라고 고(告)하였더니 그가 열(熱)이라고 고집(:執)하였다. 주(酒)를 제조(造)하는 설(說)을 견지(堅持: 굳건히 지키다)하여 상간(相間: 말을 섞다)하기가 어려워 같이 변론(辯)할 수 없었다. 그가 결국 황금(黃芩) 황연(黃連)의 속(屬)을 써서 폐(斃: 죽다)하게 되었으니, 끝내 깨달을(:悟) 수 없었다. 어찌 앞의 설(說)의 잘못이 아니겠는가? 이 또한 애석(:哀)하도다!
따라서 내가 이르기를 "사람이 이치(理)를 살피려면 당연히 진실(:眞)함으로 살피는 것이 귀(貴)하다." 하였다. 만약 이치(理)를 볼 때 진실(:眞)하지 않고, 의사(疑似)하지만 그것을 고집(固執)한다면 큰 피해(:大害)를 양성(釀成)되니, 이러한 무리들(:類)이 아님이 없다. 이처럼 사이비(:似是而非)의 말(:談)들은 변(辨)하지 않을 수 없다.
一. 탄산(呑酸)과 토산(吐酸)의 증(證)에는 3종류(:種)가 있다.
후간(喉間)에서 애(噯) 희(噫)하면 곧 초(醋)와 같은 산수(酸水)가 있어 심(心)을 침(浸)하여 심(心)이 조잡(嘈雜)하여 감당할 수 없으니, 이를 명(名)하여 탄산(呑酸)이라 한다. 곧 세속(俗)에서 말하는 작산(作酸)이다.
이 병(病)은 상완(上脘)의 최고(最高)의 처(處)에 있고, 불시(不時)에 산(酸)이 나타나면서 미슥미슥(:泛泛 fanfan)하게 불녕(不寧)한 그것이다.
그 다음은 탄산(呑酸)과 같이 가까이 상완(上脘)에 있지는 않고 중초(中焦) 위완(胃脘)의 사이에 있으니, 때로 구오(嘔惡)가 많고 토(吐)하는 것은 모두 산(酸)하니, 곧 이를 명(名)하여 토산(吐酸)이라 한다. 농후(:渥渥)하여 행(行)하지 못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또 그 다음은 본래 탄산(呑酸) 토산(吐酸) 등의 증(證)이 없으면서 오직 우연히 구토(嘔吐)로 인하여 산(酸)하거나 고(苦)하거나 여러 가지 감당할 수 없는 미(味)를 나오는 것이니, 이는 모두 장위(腸胃) 중의 담음(痰飮)의 적취(積聚)가 화(化)한 것으로 그 기미(氣味)가 항상 이와 같이 탁(濁)하고 악(惡)한다. 이는 중완(中脘)의 하(下)에 있는 것이다. 다만 순(順)하여 하행(下行)하면 사람이 느끼지 못하지만 역(逆)하여 위로 나오면 후구(喉口)가 감당하기가 어려운 정도이다.
이 세 가지에서 상완(上脘) 중완(中脘)에 있는 것은 비위(脾胃)의 허한(虛寒)으로 운화(運化)되지 못하여 된 병(病)이 아님이 없으니, 이를 치료(治)하려면 온(溫)이 아니면 안 된다.
하완(下脘)에 있어 우연히 나오는 것은 한(寒)과 열(熱)이 모두 있으니, 단지 마땅히 그 증(證)으로 인하여 구토(嘔吐)를 치료(治)하여야 한다. 구토(嘔吐)가 그치면 산(酸)이나 고(苦)가 따라서 나타나지 않게 된다.
비록 그렇지만 이 또한 나의 논증(論證)이므로 그 설(說)을 자세히 말(:曲盡)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실리(實理)로 말하자면 위(胃)가 강(强)한 자에게 산(酸)이나 고(苦)에 이를 여지(:暇)가 있겠는가? 산(酸)이나 고(苦)가 있다면 반드시 그 정적(停積)이 불행(不行)하여 그런 것이니, 마땅히 그 증(證)을 따라 잘 살펴야 한다.
만약 근거(據)할만한 열증(熱證)이나 열맥(熱脈)이 없으면서 '습(濕) 중에 열(熱)이 생(生)한 것이다.'고 고집(:執)하여 말하거나 강약(强弱)의 구분(:分)이 없이 오직 한량(寒凉)만을 쓴다면 잘못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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