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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경주한옥연구회 원문보기 글쓴이: 도리도리
문화재제자리찾기 사무총장. 조선왕조실록환수위 간사. 조선왕실의궤환수위 사무처장. 대한불교조계종 승려
- 일제시기 일본인들이 3마리를 강탈, 1 마리만 남아
- 원래는 네 귀퉁이에 있어야, 현재 위치는 제자리 아니야
백제의 석공 아사달과 아사녀의 순정하고 슬픈 사랑의 이야기를 기억한다. 석가탑과 다보탑의 완공을 둘러싼 이야기는 전설이 되어 천년세월을 우리들에게 굽이굽이 전해 내려오고 있었다. 바로 그 이야기의 주인공 아사달이 혼신을 다해 조성한 다보탑의 돌사자가 일본인에 의해 도난당한 사실, 그리고 아사달이 조성한 그 자리가 아닌 엉뚱한 곳에 반세기 가량이나 서 있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지금이라도 나는 아사달과 아사녀의 혼을 생각해서라도 국보 20호 다보탑의 돌사자가 반드시 제자리로 가야한다고 생각한다.
첫째, 다보탑 돌사자는 전통적 미술양식상 네 귀퉁이에 위치해야 한다. 국보 35호 화엄사 3층 석탑, 국보 30호 분황사 모전석탑은 모두 네 귀퉁이 돌사자가 위치하고 있다. 현재의 다보탑 돌사자처럼 중앙에 위치한 경우는 미술사적으로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다. 따라서 전통 미술사의 전통에 맞춰 원래의 자리, 귀퉁이로 이동시키는 것이 맞다.
분황사 석탑과 화엄사 삼층석탑에 위치한 돌사자(전부 모서리 부분에 위치하고 있다)
둘째, 돌사자가 원 위치에 가는 것이 ‘문화재의 역사성’과 부합하는 일이다. 다보탑의 돌사자중 3구가 일제에 의해 수탈되고 하나만 남았다면, 사실 그대로를 알리는 일도 중요하다고 본다. 민족문화재란 수많은 세월을 함께 하면서 가치를 더하는 것이므로, 일제시기 일본인에게 강탈당한 현장을 보존하고, 기억하는 것도 중요한 역사교육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나아가 불국사를 찾는 일본 관광객들에게도 일제가 저지른 반문화적 행위에 대해 분명히 고발하는 역할을 하리라고 판단한다.
일제시기 촬영된 다보탑 돌사자 (귀퉁이에 위치하고 있다. 출전 : 조선고적도보)
셋째, 다보탑 돌사자의 위치가 ‘주관적 평가’에 의해 좌우되어선 안된다. 돌사자 1구만 원위치에 있으면, 미관상 좋지 않다는 주장은 단순한 개인적 주장에 불과하다. ‘아름다움’이란 절대적 기준에 의해 평가되는 것이 아니며, 보는 사람의 입장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오히려 세월의 풍상 속에서 3구의 돌사자가 사라졌음에도 아직도 자리를 지키고 있는 한구의 돌사자가 더욱 아름다워 보일 수 있음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넷째, 잘못을 고치는 일을 두려워 해선 안된다. 60년대 우리 사회는 아직 식민지의 아픔과 전쟁의 참화에서 자유롭지 못한 시기였다. 이 당시 문화재 보존정책이 지금처럼 학문적 고증을 거쳐 이뤄지지는 않았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런 시기 다보탑 돌사자를 중앙에 배치한 오류는 나름대로의 이해가 갈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때의 실수를 변명하고 마치 그것이 옳은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특히 문화재 복원의 결정권을 가진 문화재청이나 문화재위원들이 불국사의 요청으로 ‘가운데에 놓았다’는 말은 핑계에 불과하다. 잘못된 점이 발견되면 시정하는 용기가 더욱 필요한 시점이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