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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해 (15)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긍휼
창 25:19~34
I. 서론
오늘 이야기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이삭으로 세대 교체가 된 이후의 첫 번째 이야기입니다. 모세는 간략하게 이삭과 리브가의 가계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를 합니다. 19~20절,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았고 이삭은 사십 세에 리브가를 맞이하여 아내를 삼았으니 리브가는 밧단 아람의 아람 족속 중 브두엘의 딸이요 아람 족속 중 라반의 누이였더라” 그런데, 그 다음부터 시작되는 본격적인 이야기부터 이야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는 리브가가 임신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고, 둘째는 리브가가 드디어 임신을 해서 쌍둥이를 가졌는데, 두 아이가 뱃속에서부터 싸웠기 때문입니다. 21~22절, “이삭이 그의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므로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의 간구를 들으셨으므로 그의 아내 리브가가 임신하였더니 그 아들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그가 이르되 이럴 경우에는 내가 어찌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무슨 메시지를 주고 있을까요? 세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II. 본론
1. 첫째, 하나님은 생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21절, “이삭이 그의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므로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의 간구를 들으셨으므로 그의 아내 리브가가 임신하였더니”
아이를 쉽게 가지는 가정에서는 결혼하면 당연히 아이가 태어나는 것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경우가 그랬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100세가 될 때까지 아이를 갖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아브라함의 나이 99세 때, 하나님께서 보내신 천사가 와서, 내년 이 맘 때에 사라가 아이를 가질 것이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삭이 40세에 결혼을 했지만, 60세가 될 때까지 아이를 갖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이삭이 리브가를 위해 기도하자, 이삭의 나이 60세가 되어서야 아이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26절, “후에 나온 아우는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그 이름을 야곱이라 하였으며 리브가가 그들을 낳을 때에 이삭이 육십 세였더라” 아브라함과 이삭은 분명히 알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생명을 가져가시는 분이시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생명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 월요일, Manuel Moya 씨가 돌아가셨습니다. Moya 씨를 처음 만났을 때가 2015년 12월 13일 주일이었습니다. 그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햇수로는 6년 전이고, 만으로는 4년이 조금 더 됐습니다. 지난 주일, 주일 예배를 마치고, Osceola 병원의 ICU에 가서 모야씨가 병상에 누워 있는 것을 보고, 헬렌 집사님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다행히 의사의 말에 의하면, 위기는 넘겼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함께 모야 씨의 건강을 위해 기도 드리고, 병실을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날, 월요일 아침, 헬렌 집사님이 다시 전화를 주셨습니다. 이제 꼭 필요한 장치를 제외하고는 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불필요한 생명 연장은 하지 않고, 모야씨가 자가 호흡을 할 수 있는 만큼 자연스럽게 사실 수 있도록 하겠다고 의사와 가족 분들이 결정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시간이 몇 주가 될 지, 한 달이 될 지는 모른다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금방 돌아가시는 응급한 상황은 아니라고 생각을 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저녁 9시가 조금 안 된 시각에 헬렌 집사님이 떨리는 목소리로 다시 전화를 주셨습니다. 인공 호흡기를 떼자, 갑자기 건강이 악화되어서 이제 얼마 살 수 없게 되었으니, 10분 후에 임종 기도를 해 달라고 부탁을 하셨습니다. 10분 후, 전화로 임종 기도를 해 드린 후, 온 가족이 함께 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이미 모야씨는 돌아가셨고, 헬렌 집사님과 아드님 부부만 병원 Waiting Room에 계셨습니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기도를 드린 후, 헬렌 집사님이 댁으로 가실 수 있도록 마중을 해 드렸습니다. 그런데, 제 아내가 헬렌 집사님의 가시는 뒷모습을 보고, 안타까운 마음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같이 병원에 오셨다가 이제 혼자 집으로 돌아가시네요.” 수요일에 부부가 함께 남편의 검사를 받으려 병원에 왔다가 5일만에 남편은 돌아가시고, 헬렌 집사님만 댁으로 돌아가신 것이었습니다.
누가 이렇게 될 줄 알았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가야 되는 것이 인생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명을 도로 찾으시는 때를 정확히 모르고 이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든지 하나님을 만날 준비를 하고 이 땅을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날 준비를 하지 않고, 이 땅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비유로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눅 12:16~21, “또 비유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시되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여기서 강조되는 단어는 “내가”입니다. 그리고, 대조되는 단어는 “여러 해”와 “오늘 밤”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교훈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사람의 영혼을 “도로 찾으신다”는 것입니다. 둘째, 이것을 모르고, 이 땅에서 “자기만을 위해” 사는 사람을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생명의 주인이신 것을 믿고 있습니까? 그리고, 이 세상을 살 동안, 하나님을 만날 준비를 하면서 살고 있습니까?
2. 둘째, 하나님은 구원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22~23절, “그 아들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그가 이르되 이럴 경우에는 내가 어찌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리브가가 쌍둥이를 임신했을 때, 두 아이가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리브가가 이를 이상히 여겨서 하나님께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리브가에게 두 아들로부터 두 국민이 나올 것이고, 큰 아들의 나라가 작은 아들의 나라를 섬길 것이라고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이런 것입니다. 큰 아들 에서의 후손은 에돔이라는 나라를 세울 것이고, 작은 아들 야곱의 후손은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세울 것인데, 큰 아들의 나라 에돔이 작은 아들의 나라 이스라엘을 섬길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아주 단순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 속에 심오한 진리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에서와 야곱의 운명 그리고 이들 후손의 운명은 이들이 아직 태어나기도 전에 결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창세기에 나타난 이 말씀을 중심으로 아주 중요한 진리를 하나 끄집어 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행위가 아닌 당신의 뜻에 따라 구원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말씀인지 성경을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롬 9:10~13, “그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는데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에서와 야곱의 조건은 똑같았습니다. 같은 아버지인 이삭 / 같은 어머니인 리브가 / 아직 나지도 않았고 / 아직 선이나 악을 행하지도 않았습니다. 에서와 야곱의 조건이 모두 똑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상태에서 하나님께서는 야곱은 사랑하셨고, 에서는 미워하셨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야곱은 택함 받아 구원받은 것과 에서는 택함받지 못해 구원을 받지 못한 것은 인간의 조건에 달린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달린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신학에서 삼위일체와 함께 가장 어려운 부분입니다. 이것이 어려운 이유는 설명하기가 어려워서가 아니라, 받아들이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삼위일체라는 말은 하나님은 한 분이신데, 하나님께서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으로 존재하신다는 것입니다. 설명하기는 쉽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이성으로 이것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습니다. 어떻게 한 분이 세 위로 존재로 존재할 수가 있습니까? (신학에서는 세 분이라고 하지 않고, 삼 위라고 말합니다.)
마치 이런 것입니다. 제가 여기서 설교하고 있으면서, 여러분처럼 자리에 앉아서 설교를 듣고 있으며, 밖에서 안내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여전히 한 명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이성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이성으로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우리가 모두 이해할 수 있는 분이라면, 우리의 하나님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믿는 우리는 삼위일체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와 같은 사람이 아니라 유일한 하나님으로 믿고 예배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조금 간단합니다.
하지만, 야곱과 에서의 선택의 문제는 조금 더 복잡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구원과 바로 연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도 설명하기는 쉽습니다. 야곱과 에서가 태어나기도 전에, 그들이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야곱은 사랑하여 구원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여 구원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설명하기는 참 쉽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이성으로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질문이 당연히 나올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아니라, 일부 사람만 구원하십니까? 왜 모든 사람을 구원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부족해서 입니까? 아니면 능력이 부족해서 입니까? 이런 하나님은 정말로 있다면, 불공평한 하나님이거나 무능한 하나님이 아닙니까? 어떻게 사람의 운명이 자신의 태어나기도 전에 결정될 수 있습니까? 어떻게 자신의 삶과 상관없이 어떤 사람은 천국을 가도록 결정되고, 어떤 사람은 지옥을 가도록 결정될 수 있습니까? 이런 하나님은 불의한 하나님이 아닙니까? 이 질문에 대답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삼위일체와 함께 기독교에서 다룰 수 있는 가장 어려운 주제일 것입니다.
아마도 가장 간단한 대답은 조금 전에 말씀드린대로, “하나님이 생명의 주인이심”으로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구약과 신약 성경에 공통적으로 하나님은 토기장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토기장이가 진흙으로 자기가 원하는 모양을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조금 더 긴 대답을 원합니다. 성경에서도 이 문제에 대한 조금 더 긴 대답을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바울 당시에도 하나님의 택하심에 대해서 하나님을 불공평한 분, 불의한 분이라고 비난을 했습니다. 이에 대해서 바울은 단호하게 대답하면서 설명을 했습니다.
롬 9:14~16,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여기서의 중심 단어는 “긍휼”입니다.
긍휼이라는 단어로 이 문제를 풀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긍휼”이라는 단어의 뜻이 무엇입니까? 긍휼이라는 단어는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주는 것이 긍휼입니다. 받을 자격이 있는 자에게 주는 것은 삯이지 긍휼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바울의 설명은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을만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의 두 구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롬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롬 6:23, “죄의 삯(wages)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gift)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기 때문에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삯은(그 결과는) “사망”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망”은 하나님과의 영원한 단절을 의미하는 “영적인 죽음”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심으로 우리에게 선물(gift, 즉 우리의 노력이나 행위나 조건이 아닌)을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생”은 우리가 받아 마땅한 것이 아니라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예를 하나 들어 드리겠습니다.
Tim Keller, “도심 빈민가의 학생 스무 명을 택해 이들에게 학비 전액을 지원하기로 결심한 부자를 예로 들어 봅시다. 사실상 비슷한 자격을 갖춘 수천 명의 학생들이 있을 것이고, 그 부자도 스무 명이 아니라 더 많은 학생들을 도울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부자가 스무 명만 도왔다고 해서 다른 학생들에게 불공평하게 처신했다고 어느 누가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 부자에게는 특별히 어느 누구를 도와주어야 할 의무가 전혀 없습니다. 그가 베푼 것은 긍휼이기 때문에 불공평하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비슷한 예를 한 더 들어 보겠습니다. 여러분이 선교 여행을 아프리카에 갔습니다. 그 나라에 가 봤더니 깨끗하게 정수된 물을 마시는 사람이 없어서 어린 아이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이 질병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자, 여러분의 마음에 긍휼의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미국으로 돌아온 후에, 그 곳에서 선교하시는 선교사님 편으로 5만불을 붙이면서, 그 지역 마을에 정수시설을 설치해 달라고 요청을 했습니다. 이런 행동은 마땅히 칭찬을 받아야 할 일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의무적으로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여러분을 찾아 와서 아프리카에 54개국이 있는데, 왜 나머지 53개국은 돕지 않고, 그 나라만을 돕느냐고 여러분을 비판을 한다고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은 어떤 마음이 들겠습니까? 하나님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원해 주시는 것은 긍휼이지 의무(삯)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택하심에는 믿는 자의 구원을 끝까지 책임지시는 하나님의 긍휼이 있다는 것입니다. 로마서는 일차적으로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그래서, 로마서의 메시지가 믿는 자들에게 주신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믿지 않는 자들에게 당신들은 하나님께서 택하지 않는 자라고 분노를 일으키기 위해서 주신 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이 믿는 자들에게 들려주는 복음의 핵심은 로마서 8장에 잘 나와 있습니다.
롬 8:29~30,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이것을 “The Golden Chain of Salvation”이라고 말합니다. “구원의 황금 사슬입니다.” Chain 의 핵심은 고리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목걸이가 되었든지, 자전거 바퀴의 체인이 되었든지, 고리가 연결되지 않으면, 체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미리 아시고, 미리 정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셨다”는 다섯 가지 고리가 서로 체인처럼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더 쉬운 말로 말씀 드리면, 이 모든 다섯 가지 요소가 한 사람에게 적용된다는 것입니다.
Tim Keller, “바울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묘사한 다섯 개의 능동적인 동사를 열거합니다. 이 동사들을 이해하는 열쇠는 모두가 같은 사람들을 지칭한다는 통찰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사람들 중 일부를 부르시고, 부르신 사람들 중 일부를 의롭다 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미리 아신 사람들을 정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의 핵심은 하나님의 긍휼에는 끝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요소들을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에게 모두 주신다는 것입니다. 왜 이 말씀이 중요할까요? 이 말씀은 일차적으로 누구에게 주신 말씀일까요? 믿는 사람에게 구원의 확신을 주기 위해서 주신 말씀입니다. 당시 로마에 있던 그리스도인들은 다신교적인 로마 문화에 둘러싸여 있었고, 기독교를 향한 박해가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유혹과 박해가 함께 있던 세상이었습니다. 이런 유혹과 박해의 상황 가운데 있던 성도들에게 구원의 확신을 주기 위해서 이 말씀이 주어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을 우리에게 적용해서 말씀 드리면, 이런 것입니다. 혹시 우리 중에 하나님께서 분명히 나를 부르셔서 예수님을 믿게 하셨는데, 내가 죽어서 천국 갈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지신 분이 계십니까? 만약 그런 분이 계시다면, 이 말씀이 바로 여러분을 위한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만약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어 의롭게 되었다면,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미리 아신 자들이고, 미리 정하신 자들이며, 부르신 자일 뿐만 아니라 의롭다 하신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의롭다 하셨다면, 여러분은 반드시 천국에서 영화롭게 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예수님을 믿게 된 우리는 천국 갈 것에 대해서 흔들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3. 셋째, 성경은 하나님의 택하심도 강조하시지만, 인간의 책임도 동시에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는 물과 기름처럼 서로 밀어내는 것 같이 보이지만, 성경은 이 두 가지를 함께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두 곳 찾아 보겠습니다.
요 1:12~13,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12절만 보면, 우리 편에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13절을 보면, 이렇게 믿게 된 사람들은 스스로 결정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책임과 하나님의 택하심이 동시에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행 13:46~48,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그것을 버리고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주께서 이같이 우리에게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46절을 보면, “너희가 그것을 버리고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유대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구원을 받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48절을 보면,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하나님의 택하심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책임과 하나님의 택하심이 동시에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에서는 아브라함과 이삭으로부터 이어지는 믿음의 혈통을 이어받지 못했을까요? 한 쪽 면에서는 하나님께서 그가 나기 전에 그렇게 되도록 택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더 읽어 나가다 보면, 에서가 자신의 장자 명분을 가볍게 여겼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에서의 책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29~34절, “야곱이 죽을 쑤었더니 에서가 들에서 돌아와서 심히 피곤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피곤하니 그 붉은 것을 내가 먹게 하라 한지라 그러므로 에서의 별명은 에돔이더라 야곱이 이르되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 내게 팔라 에서가 이르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야곱이 이르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걷어찬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 두 가지를 어떻게 조화시켜야 할까요? 삼위일체와 똑같습니다. 한 분! 삼 위! 이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둘 다 모두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구원에 관해서 하나님의 택하심과 인간의 책임 사이에서 하나를 선택할 것이 아니라, 두 가지 모두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에 감사하고, 우리의 책임인 복음을 받아들여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III. 결론
말씀을 맺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셨다는 것은 우리를 겸손하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실 때는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이었고, 우리가 어떤 선행을 하기도 전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자격을 보고, 우리를 택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우리를 택하셔서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구원받은 자는 첫째도 겸손, 둘째도 겸손, 셋째도 겸손하게 살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