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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적 삶을 위한 네 가지 열쇠...오쇼 라즈니쉬
네 가지 열쇠
그대는 창조를 할 때마다 생명의 진수를 맛볼 수 있다. 얼마나 진하게 맛볼 것인가는 그대의 치열함, 그대의 몰입에 달려 있다. 삶은 철학적인 문제가 아니라 종교적인 신비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신비로 통하는 문이 될 수 있다. 바닥을 청소하는 것마저도 신비로 통하는 문이 될 수 있다. 창조적으로, 전체적으로, 사랑으로 청소할 때 그대는 삶의 진수를 맛볼 수 있다.
1. 어린아이가 되라
어린아이가 되라. 그러면 창조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 어린아이는 모두 창조적이다. 창조를 위해서는 자유가 필요하다. 마음으로부터의 자유, 지식으로부터의 자유, 편견으로부터의 자유가 필요하다. 창조적인 사람은 새로운 것을 시도할 줄 아는 사람이다. 창조적인 사람은 로봇이 아니다. 로봇 같은 사람은 결코 창조할 수 없다. 로봇 같은 사람은 같은 일을 반복할 뿐이다. 그러므로 다시 어린아이가 되라.
어린아이는 모두 창조적이다. 어디에서 태어나든 하나같이 창조적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이가 자신의 창조성을 표현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아이가 창조성을 표현할라치면 눌러 죽인다. 그리고 ‘바른 길’이라는 것을 아이에게 강요한다.
창조적인 사람은 그릇된 길을 계속해서 시도하지 않는다. 이 점을 명심하라. 항상 바른 길을 따라가면 그대는 결코 창조적인 사람이 될 수 없다. 바른 길이란 이미 다른 사람이 발견한 길이기 때문이다. 물론 바른 길을 따라가면 유능한 사람이 될 수 있다. 효율적인 생산자가 되고 기술자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창조자는 될 수 없다.
생산자와 창조자는 어떻게 다른가? 생산자는 가장 바른 길, 가장 효율적인 길을 안다. 가장 적은 노력으로 가장 많은 효과를 낼 수 있는 길을 안다. 생산자는 이렇다. 이에 반해 창조자는 이것을 해보고 저것을 해본다. 그는 효율적인 바른 길을 모른다. 그래서 다양한 방향으로 길을 찾아 떠난다. 물론 잘못된 방향으로 가기 때문에 자주 길을 잃는다. 하지만 어디로 가나 그는 끊임없이 배운다. 그래서 점점 풍요로워진다. 그는 항상 아무도 해보지 않은 것을 시도한다. 만약 바른 길을 따랐다면 그는 결코 새로운 것을 창조하지 못했을 것이다.
여기 짧은 이야기를 들어보라.
어느 주일학교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성 가족의 그림을 그리라고 했다. 그래서 아이들은 그림을 그려 선생님에게 제출했다. 선생님이 그림들을 보니 대부분 우리가 아는 ‘성 가족과 구유’, ‘노새를 탄 성 가족’ 등등이었다.
그러다가 선생님은 이상한 그림을 발견했다. 그림 속에는 비행기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민 4명의 얼굴이었다. 그래서 선생님은 그림을 그린 학생을 불렀다.
“세 명은 요셉과 마리아, 그리고 아기 예수지. 근데 나머지 한 사람은 누구니?”
학생이 대답했다. “아 그 사람요. 그 사람은 본디오 빌라도예요!”
재치 발랄한 이야기다. 이런 것이 바로 창조다. 이 아이는 새로운 눈으로 새로운 것을 발견한다. 아이들만이 이런 것을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대는 두려워한다. 사람들이 멍청하다고 손가락질할까 봐 두려운 것이다.
창조자는 어리석어 보이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창조자는 언제든 자존심을 버릴 수 있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의 많은 시인과 화가, 무용수, 음악가들이 존경을 받지 못하고 산다. 그들이 존경을 받게 되었을 때, 노벨상을 받게 되었을 때 그들의 창조성은 사라지고 만다.
왜 그런가? 노벨상을 수상한 이후에도 걸작을 저술한 작가를 보았는가? 존경을 받는 사람들 중에 창조적인 사람을 본 적이 있는가? 노벨상을 타거나 존경을 받는 사람은 사람들의 시선을 두려워한다. 뭔가 잘못하면 어쩌나? 뭔가 잘못되면 나의 명예는 어쩌나? 존경을 받는 사람은 그런 추락을 감당할 수 없다. 그래서 예술가가 존경을 받는 사람이 되면 그의 창조성은 죽고 마는 것이다.
언제든 자신의 명예와 체면과 이름을 버릴 수 있는 사람만이,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는 길을 가는 사람만이…… 창조자는 언제나 미친 사람 취급을 받는다. 세상은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나서야 창조자를 인정한다. 창조자가 활동할 당시에 세상은 그를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 창조자는 이상한 사람이다.
모든 아이는 창조적 능력을 가지고 태어난다. 이 점을 잘 기억하라.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모든 아이는 창조를 하려고 한다. 하지만 우리는 아이의 창조를 허용하지 않는다. 아이가 창조를 하려는 찰나, 우리는 세상일을 바르게 하는 법을 가르친다. 하지만 아이는 바른 법을 배우면 로봇이 되고 만다. 그러면 이제 아이는 매일같이 바른 일을 반복한다. 그리고 유능한 사람이 되고 존경받는 사람이 된다.
아이들에게는 7살에서 14살 사이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난다. 심리학자들은 이 변화를 주목했다. ‘어떤 일이 왜 일어나는가?’ 인간의 뇌는 좌뇌와 우뇌, 이렇게 두 개의 반구로 되어 있다. 좌뇌는 비창조적이다. 좌뇌는 기술적인 면이 발달되어 있으나 창조적인 면은 발달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외부로부터 습득한 일을 반복하는 데 뛰어나다. 기계적인 일들을 효율적으로 완벽하게 해낸다. 이 좌뇌는 논리와 이성, 수학을 담당한다. 계산과 수련, 질서를 담당한다.
이에 반해 우뇌는 좌뇌의 반대 일을 한다. 우뇌는 질서를 담당하는 게 아니라 혼돈을 담당한다. 우뇌에서는 산문이 나오는 게 아니라 시가 나온다. 논리가 나오는 게 아니라 사랑이 나온다. 그래서 우뇌는 미적인 감각이 발달되어 있고 독창적인 직감이 발달되어 있다. 그러나 일을 효율적으로 하는 능력은 없다. 창조자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다. 그는 항상 새로운 것을 실험한다.
창조자는 어디에도 안주하지 않는다. 창조자는 방랑자다. 그는 텐트를 가지고 다닌다. 물론 어느 지역에서 하룻밤을 묵겠지만 다음날이면 또다시 길을 떠난다. 그래서 나는 창조자를 방랑자라고 부른다. 그는 결코 한 집안의 가장이 될 수 없다. 그에게 정착이란 죽음을 의미한다. 그는 언제든 모험 속으로 뛰어들 준비가 되어 있다. 모험이 그가 사랑하는 것이다.
이러한 일들은 우뇌가 하는 일들이다. 아이가 태어나면 우뇌가 기능을 시작한다. 좌뇌는 기능을 하지 않는 것이다. 아이가 어느 정도 자라면 우리는 아이에게 좌뇌의 기능을 가르치기 시작한다. 인간은 에너지를 우뇌에서 좌뇌로 이동시키는 법을 개발했다. 우뇌의 기능을 정지시키고 좌뇌의 기능을 활성화하는 법을 개발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교육이라는 것이다. 유치원에서 대학교까지 하는 교육은 바로 우뇌를 정지시키고 좌뇌를 활성화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7살에서 14살 사이에서 아이의 우뇌를 정지시키고 좌뇌를 활성화하는 데 성공한다. 그렇게 아이들을 파괴한다.
이렇게 되면 아이는 야성을 상실하고 바른 시민이 되어간다. 학교에서 아이는 교양과 언어, 논리, 산문 등을 배운다. 전쟁과도 같은 경쟁을 시작하고 에고이스트가 되고 사회에 만연한 온갖 정신병들을 받아들인다. 돈과 권력에 눈을 뜨기 시작하고 어떻게 하면 유능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고민한다. 어떻게 하면 돈을 잘 벌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좋은 집을 살 수 있을까, 이런 식으로 아이는 우뇌에서 좌뇌로 이동한다. 그리하여 우뇌의 기능은 점차 사라져간다. 그러면 아이의 우뇌는 꿈을 꿀 때나 작용한다. 혹은 어쩌다 마약을 할 때나…….
서양 사람들은 의무교육으로 인해 우뇌가 완전히 파괴되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마약을 한다. 서양은 교육에 중독되어 있다. 이는 너무 한쪽으로 치우친 것이다. 한쪽의 극단으로 가버린 것이다. 현재 다른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학교에서 우뇌를 재생시킬 수 있는 방법들을 도입하지 않으면 서양에서 마약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법으로만 마약을 근절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내면의 균형이 바로잡히지 않는 한, 법으로만 마약을 금지시킬 수 없는 것이다.
왜 마약이 서양사람들에게 어필을 하는가? 그건 마약이 즉각적으로 에너지를 좌뇌에서 우뇌로 이동시켜주기 때문이다. 마약이 하는 일은 그것뿐이다. 과거에는 술이 그런 일을 했지만 지금은 훨씬 더 강력한 마약―LSD, 마리화나, 실로시빈―이 그런 일을 한다. 아마 미래에는 이들보다 훨씬 더 강력한 마약이 나올지도 모를 일이다.
사실 마약을 하는 사람이 죄인이 아니라 정치인과 교육자들이 죄인이다. 정치인과 교육자들은 인간의 마음을 양쪽 극단으로 몰고 갔다. 때문에 이제는 반란이 필요하다. 정말로 절실히 필요하다! 우리의 삶 속에서 시가 사라졌고 아름다움이 사라졌으며 사랑 또한 사라졌다. 이제 돈과 권력과 힘이 우리가 받드는 신이 되었다.
사랑 없이, 시 없이, 기쁨 없이 어떻게 산단 말인가? 그렇게는 오래 살 수 없다. 세계적으로 신세대들은 마약을 함으로써 교육이라고 하는 것의 어리석음을 보여주었다. 마약을 하는 학생들이 학교를 중도에 포기하는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마약을 하는 학생은 대부분이 학교를 떠난다. 이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이것은 일종의 반란이다.
마약이 주는 기쁨을 안 사람이 마약을 끊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 마약보다 나은 방법, 시를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마약을 버릴 수 있다. 명상이 보다 나은 방법이다. 명상은 어떠한 화학약품보다 덜 파괴적이고 덜 해롭기 때문이다. 사실 명상은 전혀 해롭지 않다. 해를 준다기보다는 축복을 준다. 명상도 마약과 같은 일을 한다. 인간의 마음을 좌뇌에서 우뇌로 이동시켜주는 것이다. 마음이 좌뇌에서 우뇌로 이동할 때 비로소 창조력이 나온다.
마약이 가져올 거대한 재난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한 가지뿐이데, 그것이 바로 명상이다. 다른 길은 없다. 명상이 널리 퍼져서 사람들의 삶 속에 자리를 잡게 되면 마약이 사라질 것이다.
교육은 절대로 우뇌와 그 기능을 파괴하는 쪽으로 나아가서는 안 된다. 아이들이 좌뇌와 우뇌의 존재를 알고 양쪽을 모두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배우게 되면, 어느 쪽을 언제 이용해야 되는지를 배우게 되면…… 사업을 하거나 돈 계산을 할 때처럼 좌뇌를 사용해야 할 때도 얼마든지 있다. 또한 우뇌를 사용해야 할 때도 많이 있다.
어디까지나 우뇌가 목적이요 좌뇌는 수단임을 잊지 말라. 우뇌가 주인이다. 따라서 좌뇌는 우뇌를 따라야 한다. 왜 돈을 버는가? 우리는 어디까지나 삶을 즐기고 생명을 찬미하기 위해서 돈을 번다. 그대는 사랑을 하기 위해 저축을 한다. 놀기 위해 일을 한다. 삶의 유희가 목적이다. 그대는 휴식을 취하기 위해 일을 한다. 휴식이 목적이지 일이 목적이 아닌 것이다.
‘노동이 최고’라는 생각은 과거의 유물이다. 버려야 할 유물이다. 교육 분야는 참다운 혁명이 필요하다. 어떤 사람, 어떤 아이에게도 같은 일의 반복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 우리네 교육이란 무엇인가? 그대는 진정으로 우리의 교육이 무엇인지를 들여다보았는가? 생각해보았는가? 우리네 교육이라는 것은 그저 단순한 기억훈련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기억훈련으로는 누구도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없다. 지혜로워지기는 커녕 오히려 점점 더 어리석어진다.
그대는 교육을 통해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버렸다! 아이들이 처음 학교에 들어갈 때는 모두 지혜롭다. 하지만 대학교육까지 받고 나서도 지혜로움을 간직한 아이들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대학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모든 학생을 어리석은 자들로 만들어버린다. 번쩍이는 학위를 가지고 대학 문을 나올지 모르나 그대는 학위를 위해 과도한 대가를 지불했다. 자신의 지성을 상실하고 기쁨을 상실하고 삶을 상실한 것, 이것이 그대가 학위를 위해 치른 희생이다. 우뇌의 기능을 마비시킨 것, 이것이 학위를 위해 지불한 대가이다.
그렇게 해서 무엇을 배웠는가? 지식이다. 그대는 머리에 수많은 지식들을 밀어넣었다. 그대는 그런 지식을 되풀이할 수도 있고 재생할 수도 있다. 그대는 시험에서 지식을 재생한다. 우리는 자신에게 쑤셔넣은 것을 잘 토해내는 사람을 머리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대는 수많은 정보들을 끊임없이 집어삼킨다. 그리고 시험지에 토해낸다. 사회에서는 시험지에 잘 토해낸 사람이 머리 좋은 사람이 된다. 집어삼킨 것을 모두 토해내면 머리가 대단히 뛰어난 사람이 된다.
그대가 계속 토해내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대가 소화하지 못한 것이다. 이 점을 잘 이해하라. 만약 그대가 소화를 했다면 똑같은 것을 자꾸만 토해낼 수 없다. 그대가 소화한 것은 피가 되고 살이 될 뿐이지, 다시 나올 수는 없는 법이다. 그대가 먹은 것은 몸 속으로 사라진다. 그래서 다시는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사회에서는 자신이 먹은 것을 소화하지 않은 채로 위 속에 간직했다가 언제든지 토해내는 사람을 머리 좋은 사람이라고 한다. 사회에서는 가장 어리석은 자를 가장 지혜로운 자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사회가 요구하는 것에 부응하지 못한다. 아인슈타인이 수학 시험을 잘 보았으리라 생각하는가? 아인슈타인처럼 창조적이고 지성적인 사람은 사회가 요구하는 것에 부응을 하지 못한다.
중학교와 고등학교, 대학교의 우등생들을 보라. 그들은 모두 어디로 갔는가? 그들은 사회에 나와서 아무런 능력도 보여주지 못한다. 그들의 영광은 우등상장과 더불어 끝나는 것이다. 그리고는 과거 속으로 사라진다. 그들은 세상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한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사회와 교육이 그들을 파괴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학위를 받은 대가로 삶의 모든 것을 잃는다. 그리고는 학위를 평생 걸고 다닌다.
우리는 이런 교육제도를 완전히 바꿔야 한다. 학교 교실을 기쁨으로 넘쳐흐르게 하라. 대학교 강의실을 생명으로 꿈틀거리게 하라. 춤과 노래, 시, 창작, 지성이 넘쳐흐르게 하라. 지식에 대한 의존성에서 벗어나게 하라.
우리는 학생들을 좀 더 세밀히 관찰해서, 지성을 개발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창의적으로 대답하는 학생들을 더 격려해주어야 한다. 바른 대답이란 있을 수 없다. 그런 건 없다! 있다면, 어리석은 대답과 지혜로운 대답이 있을 뿐이다. 옳고 그름의 평가는 그 자체가 틀린 것이다! 맞는 대답도 없고 틀린 대답도 없다. 학생의 대답은 어리석고 기계적이거나, 아니면 창의적이고 지혜로울 뿐이다. 대답에는 옳고 그름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기계적인 대답은 일견 맞는 듯 보이나 실은 높게 평가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대답은 암기한 것을 반복하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지혜로운 대답은 일견 완벽해보이지 않을 수도 있고 기존관념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으나 높게 평가해주어야 한다. 왜냐면 그런 대답에서 새로운 창조가 나오기 때문이다.
창조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창조적인 사람이 되려면 사회가 그대에게 가르친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 부모와 선생이 그대에게 가르친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 정치가와 성직자가 가르친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 그렇게 할 때 그대는 다시 창조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 어린시절의 떨림을 다시 느낄 수 있다. 그런 창조와 떨림이 억압된 채, 그대 안에서 기다리고 있다. 감긴 것을 다시 풀어내면 된다. 창조 에너지가 다시 풀려 나올 때 그대는 참 종교인이 된다. 나에게 있어 창조적인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종교적인 사람이다. 모두가 창조적인 사람으로 태어나지만 창조적인 사람으로 성장하는 사람은 참으로 드물다.
사회가 파놓은 함정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이는 다름 아닌 그대 자신이다. 그대는 할 수 있다. 물론 그대에게는 대단한 용기가 요구된다. 왜냐면 사회가 가르친 것을 버리기 시작하면 명예를 잃게 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대를 존경할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대는 사람들의 눈에 이상하고 기이한 사람으로 비쳐진다. 괴짜로 보인다. 사람들은 ‘이 불쌍한 친구, 정신이 나갔군’ 하고 생각할 것이다. 사람들이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보아도 자신의 삶 속으로 뛰어드는 것, 이것이야말로 더없이 큰 용기다.
창조적인 사람이 되고 싶다면 그대는 명성과 명예를 잃을 각오를 해야 한다.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 이것은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 작은 창조마저도 이 세상 모두보다 귀한 것이기 때문이다.
2. 배우는 자세로 임하라
‘수행’이라는 말은 대단히 아름다운 말이다. 하지만 과거에 많은 아름다운 말들이 잘못 사용된 것처럼 수행이라는 말도 잘못 사용되었다. ‘수행(discipline)’이라는 말은 ‘제자(disciple)’라는 말에서 왔다. 그러므로 수행이라는 말은 배움의 과정을 뜻한다. 배울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을 우리는 제자라 한다. 배우는 과정을 우리는 수행이라 한다.
지식인은 배울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그는 이미 모든 걸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의 존재는 지식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지식은 그의 에고를 살찌우는 영양분이다. 그는 결코 제자가 될 수 없다. 따라서 그는 결코 참된 수행을 할 수도 없다.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만을 알 뿐이다.” 이런 자세가 수행의 시작이다. 그대가 아무것도 모를 때 찾고 살펴보고 탐구하려는 열망이 솟아오른다. 배움을 시작하면 곧바로 자신이 배운 것들을 놓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배운 것들은 지식으로 전락해버리며 지식은 이후의 배움을 방해한다.
참된 수행자는 아무것도 쌓지 않는다. 매 순간 자신이 알게 된 것에 죽고 다시 모르는 사람이 된다. 이 모름은 세상을 밝히는 광명이다. 디오니시오스(Dionysios)는 이런 모름을 밝게 빛나는 광명이라 했다. 나는 그의 말에 동의한다. 모름의 광명 속에 있는 것, 이것은 더없이 아름다운 체험이다. 그렇게 모름의 상태에 있을 때 그대는 아무런 장벽 없이, 마음 문을 열어 놓고 삶을 탐험한다.
여태껏 사람들은 수행이라는 말을 잘못 해석했다. 사람들은 “이것을 수행하고 저것을 수행하라. 이것을 하지 말고 저것을 하라”는 말을 듣고 살았다. 무수히 많은 의무와 금기 사항을 강요받았다. 그렇게 강요를 받고 사는 사람은 창조적인 사람이 될 수 없다. 그는 사방의 벽이 옥죄는 감옥에 갇힌 처지가 된다.
창조적인 사람은 모든 의무와 금기 사항들을 버린다. 그에게는 자유와 공간이 필요하다. 광대한 공간이 필요하다. 그에게는 드넓은 하늘과 별들이 필요하다. 그렇게 금기를 버리고 자유를 획득할 때라야 내면에서 자발성이 자라기 시작한다.
내가 말하는 수행은 기독교의 십계와 같은 것이 아니다. 이 점을 명심하라. 나는 어떠한 계율도 주지 않는다. 나는 배움을 계속하면서도 지식에 빠지지 않는 길을 보여줄 뿐이다. 그대의 수행은 가슴에서 나와야 한다. 그래서 그대 자신의 수행이 되어야 한다. 다른 사람의 수행법은 그대의 것이 될 수 없다. 다른 사람의 수행을 따라서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같다. 그런 옷은 너무 헐렁하거나 너무 끼일 것이다. 그런 옷을 입고 다니면 항상 모자라는 사람처럼 보일 것이다.
마호메트는 이슬람교인들에게 수행의 계율을 가르쳤다. 그 계율은 자신에게는 좋았을지 모르나 타인에게는 좋지 않은 것일 수 있다. 붓다는 수많은 불교도들에게 수행의 계율을 가르쳤다. 그것은 붓다 자신에게는 좋았을지 모르나 다른 사람에게는 좋지 않을 수도 있다. 수행이란 개인의 일이다. 수행의 계율을 다른 사람에게서 빌려오면 그대는 정해진 계율에 따라 살아야 한다. 삶은 생명이다. 결코 죽은 게 아니란 말이다. 삶은 매 순간 끊임없이 변화한다. 삶이란 흘러가는 강물이다.
“흐르는 물에는 두 번 손을 담글 수 없다”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은 옳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흐르는 물에는 한 번마저도 손을 담글 수 없다. 강물이 너무나 빠르게 흐르기 때문이다!” 그대는 매 순간 깨어서 지켜보아야 한다. 타인이 준 수행의 계율이 아니라 가슴에서 나오는 느낌에 따라 순간순간 반응해야 한다.
그대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본 적이 있는가? 5천 년 전에 인도의 마누는 힌두교인들에게 수행의 계율을 가르쳤다. 힌두교인들은 아직도 이 계율을 따르고 있다. 3천 년 전에는 유대의 모세가 유대교인들에게 계율을 가르쳤다. 유대교인들은 아직도 이 계율을 따르고 있다. 온 세상이 계율 천지가 되었다. 하지만 그런 계율은 모두 낡은 것들이다. 아주아주 오래 전에 땅 속에 묻었어야 하는 것들이다. 그대는 아직도 송장들을 짊어지고 다닌다. 송장들에서 지독한 냄새가 나는 데도 말이다. 그대는 송장들에 둘러싸여 대체 어떤 삶을 살겠다는 것인가?
나는 그대에게 순간, 순간의 자유, 순간의 책임을 가르친다. 어떤 것이 이 순간에는 옳지만 다음 순간에는 틀릴 수 있다. 그러므로 무리하게 일관성을 유지하려고 하지 말라. 무리하게 일관성을 유지하려고 하면 그대는 죽은 사람이 된다. 죽은 사람만이 언제나 일관성을 유지한다. 설사 모순이 있다 해도 생생히 살아 있는 삶을 살라. 과거에 집착하지 말고 미래에도 집착하지 말며 지금 이 순간을 살라. 순간순간 깨어서 살라. 전체적으로 반응하라. 이런 전체성이 아름다움이요 창조성이다. 그렇게 할 때 그대가 하는 모든 것에서 아름다움이 배어나올 것이다.
3. 일상에서 열반을 찾으라
정원을 아름답고 풍요롭게 가꾸는 정원사가 노벨상을 받았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논밭을 경작하여 사람들을 먹여살리는 농부가 적절한 대접을 받았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아니다, 그들은 애초에 없었던 사람들처럼 이 땅을 살다가 간다.
이는 추한 차별이다. 모든 영혼은, 어떤 것을 창조하든, 마땅한 대접을 받고 존경을 받아야 한다. 우리는 창조 자체를 소중히 여길 수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가들조차 노벨상을 받는다. 사실은 영리한 범죄자인데도 말이다. 세상에 일어난 잔학한 학살을 보라. 누구 때문에 일어났는가? 모두 정치가들 때문에 일어났다. 지금도 정치가들은 지구 자멸을 불러올 수 있는 핵무기를 양산하고 있다.
이 사회가 진정으로 아름답고 진실한 사회라면 모든 창조행위를 귀하게 생각하고 존경할 수 있어야 한다. 창조적인 영혼은 신의 일을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미학에 대한 인간의 감각은 보잘 것 없는 것이었다.
아브라함 링컨이 생각난다.
링컨은 구두장이의 아들로 태어나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다. 그래서 귀족들은 이 사실을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링컨이 암살을 당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귀족들은 구두장이 아들이 나라의 대통령이 된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링컨이 상원에서 첫 연설을 하는 날이었다. 링컨이 연설을 하기 위해 막 일어서려고 하는데 어느 나쁜 귀족이 일어나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어떻게 해서 당신이 우리나라의 대통령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신이 당신 아버지와 함께 구두를 수선하기 위해 우리 집에 왔던 사실을 잊지 마시오. 당신 아버지는 여기 많은 상원의원들의 구두를 만든 사람이었음을 잊지 말란 말이오. 자신의 출신을 잊지마시오.”
이 귀족은 링컨을 모욕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브라함 링컨과 같은 사람을 누가 모욕할 수 있단 말인가? 오직 왜소한 사람만을, 열등감으로 시달리는 사람만을 모욕할 수 있을 뿐이다. 위인들은 모욕을 초월한 사람들이다. 귀족의 모욕적인 말에 링컨이 대답을 했다. 이 링컨의 말은 우리 모두가 가슴 깊이 새겨야 할 말이다.
링컨이 이렇게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상원에서 첫 연설을 시작하기 전에 저의 아버지를 상기시켜 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제 아버지는 참으로 훌륭한 분이셨습니다. 창의력이 풍부한 장인이셨습니다. 저는 그렇게 훌륭한 구두를 만드는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저는 잘 압니다. 저는 아버지의 장인 정신을 뛰어넘을 수 있을 만큼 대단한 대통령이 될 수 없음을요. 저의 아버지가 만든 여러분들의 구두에 이상이 있다면 제게 말씀해주십시오. 아버지만큼 뛰어나지는 않지만 저도 왠만큼은 합니다. 말씀만 해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여러분들의 집으로 달려가겠습니다.”
침묵이 흘렀다. 상원들은 링컨을 모욕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링컨은 모욕을 당하기는 커녕, 창조성에 대한 크나큰 존경심을 보여주었다.
그대가 무엇을 하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그대는 그림을 그릴 수도 있고 조각을 할 수도 있고 구두를 만들 수도 있다. 또는 정원 일을 할 수도 있고 농사 일을 할 수도 있고 목수 일을 할 수도 있다. 그대가 무슨 일을 하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하는 일에 창조적인 영혼을 쏟아붓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 그대가 창조한 것에서는 신성이 배어나올 것이다.
창조는 일의 종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창조는 의식의 질을 높이는 작업이다. 그대가 하는 일은 무엇이나 창조적인 일이 될 수 있다. 창조의 의미를 깨닫기만 한다면 그대가 하는 일은 무엇이나 창조적인 일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창조란 자신이 하는 일을 명상으로 즐기는 것을 말한다. 무슨 일이든 깊은 사랑으로 하는 것을 말한다. 깊은 사랑으로 한다면 이곳 오디토리움을 청소하는 일도 창조적인 일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사랑으로 하지 않으면 이곳을 청소하는 일은 허드렛일이 되고 의무가 되고 짐이 될 것이다. 이곳 청소가 짐이 될 때 그대는 창조적인 일은 다른 시간에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시간에 무엇을 하겠다는 말인가? 자신의 창의력을 표현할 수 있는, 더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림을 그리면 더 창조적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하지만 그림 그리는 행위는 바닥을 청소하는 행위처럼 일상적인 일일 뿐이다. 그림은 캔버스에 물감을 묻히는 행위요 바닥 청소는 바닥을 문지르는 행위다. 여기에 어떤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친구와 한담을 나누는 것은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요 대단한 책을 저술하는 것은 창조적인 일이라고 생각하는가? 친구하고 한담을 나누는 것도 얼마든지 훌륭한 창조적 행위가 될 수 있다.
위대하다고 하는 세상의 경전들은 모두 창조적인 사람들이 풀어낸 한담에 다름 아니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한담을 나누는 것이다. 나의 말들이 어느 날 복음이 될지 어떨지는 모르겠으나, 지금 이 순간 내가 그대들과 한담을 나누고 있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나는 한담을 즐긴다. 나는 언제까지고 한담을 계속할 수 있다. 듣는 그대는 어느 날 지칠지 모르겠으나 나는 지치지 않을 것이다. 내게 그것은 순수 기쁨이다. 그대는 어느 날 지치고 지쳐서 이 자리를 떠날 것이다. 하지만 나는 계속해서 한담을 할 것이다. 이렇게 그대가 뭔가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것은 창조적인 일이 된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찾아온다. 처음 온 사람들은 이렇게 부탁한다. “오쇼, 어떤 일이라도 좋습니다! 청소도 좋습니다!” 각기 다른 사람들이지만 한결같이 이렇게 말한다. “청소라도 좋습니다. 당신의 일이라면 기쁜 마음으로 하겠습니다.” 그리고는 며칠도 안 돼서 이렇게 말한다. “청소하는 일은 좀 그렇습니다. 뭔가 창조적인 일을 하고 싶습니다.”
조크 하나를 이야기해주겠다.
맥이 빠진 성생활을 염려하던 젊은 아내가 최면요법이라도 받아보자고 남편을 졸랐다. 그래서 몇 번의 최면요법 치료를 받고나자 밤일에 대한 남편의 열정이 다시 살아났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남편이 행위를 하다가 종종 욕실로 달려갔다가는 다시 돌아오곤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호기심을 참지 못한 아내가 어느 날은 남편의 뒤를 따라가보았다. 남편이 욕실로 들어가자 아내는 발돋움을 하고 욕실 안을 들여다보았다. 남편은 거울 앞에 서서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나의 아내가 아니다. 그녀는 나의 아내가 아니다…….”
어쩌면 성생활에 지친 남편이 밤일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상대가 자신의 아내가 아니라고 믿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남편들은 그렇게 믿고 밤일을 하고 즐기고 다시 남편으로 돌아온다. 또다시 일상으로 돌아온다. 남편은 아내의 얼굴도 몸도 지형지물도 너무나 잘 안다. 그래서 권태 속으로 빠져든다. 위 조크에서 최면요법사가 치료를 잘한 것 같다. 그는 남편에게 밤일을 할 때는 꼭 ‘이 사람은 아내가 아니다. 이 사람은 아내가 아니다’라고 자기암시를 하라고 일러준 것이다.
사정이 그렇다면 그대가 청소할 때는 그림을 그리고 있다고 생각을 하라. ‘이것은 청소가 아니다. 이것은 위대한 창조행위다.’ 하지만 이는 그대의 마음을 달래는 방책일 뿐이다. 그대가 진정으로 깨우치면 모든 일을 창조적으로 할 수 있게 된다.
이해의 사람은 계속적으로 창조한다. 그가 창조를 하려고 노력한다는 말이 아니다. 그에게는 앉는 것도 창조적인 행위가 된다. 그가 앉는 것을 잘 지켜보라. 그의 움직임 속에서 춤이 보이고 기품이 보인다. 일전에 우리는 한없는 기품으로 구덩이 속에서 서서 죽은 선사 이야기를 읽었다. 그는 죽는 것마저도 창조적으로 했다. 그야말로 완벽하게 했다. 더 이상 고칠 데가 없게 했다. 그는 죽을 때마저도 서서 아름답게 죽은 것이다.
그대가 깨우칠 때, 청소를 하든 요리를 하든 그 무엇을 하든…… 작은 일들이 모여서 우리의 삶이 된다. 사실 에고의 눈에만 이 일들은 작게 보일 뿐이다. 그대는 항상 위대한 것을 하고 싶어한다. 위대한 시를 쓰고 싶어한다. 그대는 셰익스피어나 칼리다스, 밀턴이 되고 싶어한다. 문제를 만드는 것은 그대의 에고다. 그러므로 에고를 놓으라. 그러면 모든 일들이 창조적인 일들이 될 것이다.
이런 얘기를 들었다.
채소가게 소년의 신속한 배달에 감동을 받은 한 주부가 소년에게 이름을 물었다.
그러자 소년은 “셰익스피어”라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건 유명한 사람의 이름이잖니.”
“그렇지요, 유명한 사람의 이름이지요. 전 이 동네에서 무려 3년 동안이나 배달을 하고 있거든요.”
맞는 말이다! 누가 셰익스피어에 신경을 쓴단 말인가? 같은 동네에서 3년 동안이나 배달을 하고 있는데. 채소배달도 책이나 소설이나 시집을 쓰는 것만큼이나 아름다운 일이다.
우리의 삶은 작은 일들로 되어 있다. 그대가 사랑으로 할 때 작은 일은 위대한 일이 된다. 모든 것들이 더없이 위대한 일들이 된다. 사랑으로 하지 않으면 에고는 계속해서 이렇게 떠들 것이다. “이건 하찮은 일이다. 청소라고? 이건 너에게 어울리는 일이 아니다. 뭔가 위대한 일을 하라. 잔다르크가 되라!” 이것은 말도 안 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잔다르크가 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것이다.
청소도 위대하다. 에고의 함정에 걸려들지 말라. 에고가 찾아와서 뭔가 위대한 일을 하라고 꼬드기면 즉시 이를 깨닫고 에고를 내려놓으라. 그렇게 하면 사소한 일들이 점점 신성한 일들로 변화될 것이다. 그 어느 것도 세속적이지 않다. 모든 것이 신성하고 거룩하다.
모든 것이 신성해보이지 않는다면 그대의 삶은 아직 종교적인 삶이 아니다. 흔히 사회에서 말하는 성인은 진정으로 성스러운 사람이 아니다. 그는 에고의 함정에 빠진 사람이다. 그가 대단한 일들을 했다고 사람들이 생각하기 때문에 성스러워 보일 뿐이다.
진짜 성스러운 사람은 평범한 일상을 사랑하는 평범한 사람이다. 나무를 베고 물을 긷고 요리를 하고…… 그가 손을 대는 것은 무엇이나 성스러운 것으로 화한다. 그가 위대한 일을 한다는 말이 아니다. 그는 무슨 일을 하든 위대하게 한다는 말이다. 위대함은 하는 일에 있지 않다. 위대함은 그대의 의식에 있다.
이렇게 해보라. 크나큰 사랑으로 조약돌을 만져보라. 그러면 그 조약돌은 거대한 금강석이 될 것이다. 웃어보라. 그러면 그대는 왕이 된다. 기쁨으로 웃어보라. 삶의 매 순간을 명상적인 사랑으로 변형시켜라.
창조적인 사람이 되라는 말은 그대들 모두가 가서 위대한 화가나 시인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나의 말은 그대의 삶이 그림이 되고 시가 되게 하라는 말이다.
이를 항상 기억하라. 그렇지 않으면 에고는 그대에게 수많은 문제를 안겨줄 것이다. 범죄자에게 가서 왜 범죄를 저질렀는지 물어보라. 그들은 위대한 일을 할 게 없어서 그럴 수밖에 없었노라고 항변할 것이다. 그들은 국가의 대통령이 될 수 없었다. 물론 모두가 대통령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그들은 대통령을 암살하는 일을 택한다. 그 일이 훨씬 쉽기 때문이다. 대통령을 암살한 사람은 대통령만큼이나 유명해진다. 그의 사진이 중앙 일간지의 일면 톱을 장식한다.
몇 달 전에 어떤 남자가 일곱 명의 무고한 시민을 죽였다. 죽은 일곱 명은 그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사람들이 왜 무고한 사람들을 죽였는지 물었다. 그는 대단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고 말했다. 어떤 신문도 그의 시나 글을 실어주지 않았다.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은 채, 그의 삶은 지나가고 있었다. 그래서 무고한 사람들을 죽였다고 했다. 죽은 사람들은 그 남자와 아무런 관계도 없던 사람들이었다. 남자는 단지 유명해지고 싶은 욕구 때문에 살인을 저지른 것이었다.
정치가나 범죄자나 별로 다르지 않다. 모든 범죄자들은 정치적인 술수를 부리며 모든 정치가들은 범죄적인 행위를 자행한다. 리처드 닉슨만이 아니다. 불쌍한 닉슨은 현장에서 붙잡혔을 뿐이다. 다른 정치가들은 대단히 영리하고 교활하기 때문에 잡히지 않을 뿐이다.
모스코비츠 여사가 한껏 우쭐한 마음으로 자식 자랑을 하고 다녔다.
“내 아들 루이 얘기 못 들었죠?” 그녀가 이웃에게 물었다.
“아니요. 루이가 무엇을 어쨌는데요?”
“루이가 요새 정신병원에 다닙니다. 일주일에 두 번 정신과 의사의 상담을 받아요.”
“그게 무슨 대수예요?”
“대수지요. 한 시간에 40달러를 내요. 무려 40달러나! 근데 걔가 한 시간 내내 내 얘기만 한데요, 글쎄.”
실제 자신의 모습보다 허황되게 유명하거나 대단한 사람이 되려는 마음을 항상 조심하라. 지금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완벽하다. 있는 그대로 평범한 모습이 완벽한 모습이다. 대신, 그대의 평범한 삶을 비범한 방법으로 살라. 이것이 바로 열반 의식이다.
이제 마지막 이야기를 해보자. 열반을 자신의 목표로 삼는 사람은 악몽의 삶을 산다. 그런 사람에게 열반은 성취할 수 없는 무엇이다. 그래서 더없는 악몽이 된다. 그러나 작은 일들 속에서 열반을 찾으면, 작은 행위 속에서 신성을 발견하고 기도를 찾으면 그런 사람의 집은 사원이 되고 신의 거주처가 된다. 그가 보는 곳마다, 그가 손대는 것마다 아름답고 신성한 것으로 변한다. 그에게 있어 열반은 궁극의 자유가 된다.
열반이란 평범한 삶을 깨어서 사는 것이다. 평범한 삶을 충만한 의식과 빛으로 사는 것이다. 그렇게 살 때 모든 것이 찬란하게 빛날 것이다. 이런 삶은 누구에게나 가능하다. 내가 그렇게 살았고 그렇게 체험했기 때문에 나는 그렇게 말할 수 있다. 나는 나 자신의 체험으로 이야기할 뿐이다. 나는 붓다도 예수도 인용하지 않는다. 나 자신만을 인용할 뿐이다.
평범한 삶 속에서 열반을 체험하는 일이 나에게 가능했다. 그러므로 그대에게도 가능하다. 그저 에고를 따라다니지만 말라. 삶을 사랑하고 삶을 신뢰하라. 삶이 그대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줄 것이다. 삶이 그대에게 축복이 되어주고 지복이 되어줄 것이다.
4. 몽상가가 되라
프리드리히 니체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세상의 몽상가들이 모두 사라지는 날, 엄청난 재난이 불어닥칠 것이다.” 인간의 진화는 모두 꿈꾸는 사람들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어제의 꿈이 오늘의 현실이 된다. 그리고 오늘의 꿈이 내일의 현실이 된다.
시인은 모두 몽상가들이다. 음악가들도 모두 몽상가들이다. 신비가들도 모두 몽상가들이다. 사실 창조는 꿈의 부산물이다. 하지만 내가 말하는 꿈은 프로이트가 분석하는 꿈이 아니다. 그대는 시인과 조각가, 건축가, 신비가, 무용수 등의 꿈과 병든 자의 꿈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프로이트가 인류 진화의 초석이 된 위대한 몽상가들을 연구하지 않은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었다. 그가 상대한 사람들은 모두 병든 사람들뿐이었다. 프로이트가 일생 동안 정신병 환자의 꿈을 분석했기 때문에 ‘꿈’이라는 말은 부정적인 단어가 되고 말았다. 미친 사람도 꿈을 꾼다. 하지만 그의 꿈은 자기파괴적이다. 창조적인 사람도 꿈을 꾼다. 하지만 그의 꿈은 세상을 풍요롭게 만든다.
미켈란젤로 생각이 난다. 어느 날 미켈란젤로가 대리석 시장을 걷고 있었다. 시장을 걷다가 우연히 아름다운 대리석을 보게 되었다. 미켈란젤로가 가게주인에게 대리석에 대해 물었다.
그러자 가게 주인이 이렇게 설명해주었다.
“원한다면 공짜로 가져가세요. 지난 12년 동안 아무도 찾지 않아 그냥 자리만 차지 않고 있었답니다. 이 대리석은 별 가치가 없는 것 같아요.”
미켈란젤로는 그 대리석을 가지고 가서 근 1년 동안 작업을 했다. 그리고 더없이 아름다운 조각품을 완성시켰다. 그 작품은 아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조각일 것이다. 근데 몇 년 전에 어떤 미친 사람이 그 조각을 부수려고 했다. 바티칸에 있는 이 조각품은 십자가에서 내려온 예수의 시신이 마리아의 무릎 위에 놓여 있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나는 그 조각품을 사진으로밖에 보지 못했는데 예수가 어느 순간에라도 깨어날 듯한, 정말 살아 있는 조각이었다. 우리는 참으로 기막힌 예술성을 표현한 이 작품에서 예수의 힘과 연약함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 또한 언제라도 눈물방울이 떨어질 듯한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의 슬픔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불과 몇 년 전 한 미친 사람이 미켈란젤로의 이 작품을 해머로 부숴버리고 말았다. 왜 그런 짓을 했느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도 좀 유명해지고 싶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1년 동안 작업을 했잖아요. 그리고 후에 유명해졌잖아요. 이걸 부수는 데 5분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내 이름이 전세계 신문에 났습니다.”
두 사람 다 대리석을 가지고 일을 했다. 한 사람은 창조적인 일을 했고 다른 한 사람은 파괴적인 일을 했다. 1년 후 미켈란젤로는 조각을 완성한 뒤, 대리석을 공짜로 주었던 가게주인을 초대해서 작품을 보여주었다.
가게주인이 물었다.
“어디서 이런 아름다운 대리석을 구했습니까?”
그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미켈란젤로가 대답했다.
“모르겠습니까? 이게 당신의 가게 앞에서 12년을 기다리고 있던 바로 그 대리석입니다.”
가게주인이 물었다.
“그렇게도 못생긴 대리석에서 이렇게도 아름다운 작품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을 대체 어떻게 알았습니까?”
미켈란젤로가 대답했다.
“생각을 해보진 않았는데요, 당시 나는 이런 작품을 꿈꾸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신 가게 앞을 지나가다가 우연히 대리석을 보게 되었습니다. 내가 대리석 앞을 지나는 순간, 예수님이 ‘내가 바위 안에 갇혀 있다. 나를 꺼내다오. 내가 바위 밖으로 나갈 수 있도록 도와다오’ 하고 저에게 말을 하는 것이에요. 대리석을 보는 순간, 나는 그동안 꿈꿔왔던 작품을 볼 수 있었습니다. 내가 한 일은 별것 아닙니다. 나는 그저 예수님을 감싸고 있던, 불필요한 부분들을 떼어냈을 뿐입니다. 불필요한 부분들을 떼어내자 예수님과 마리아가 자유의 몸이 된 거지요.”
프로이트와 같은 재능을 지닌 사람이 병든 사람의 꿈을 분석하는 대신에 건강한 사람, 나아가서 창조적인 사람의 꿈을 분석했더라면 세상에 엄청난 기여을 했을 것이다. 그들의 꿈을 분석했더라면 꿈에는 억압에서 비롯된 것만 있지 않음을 발견했을 것이다.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창조적인 의식에서 나오는 꿈도 존재함을 발견했을 것이다. 그들의 꿈은 보통 사람들의 것처럼 병들어 있지 않다. 인류의 의식과 그 진화는 이런 몽상가들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전 존재계는 하나의 유기체다. 사람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을 뿐 아니라 사람들은 나무들과도 연결되어 있다. 사람들이 서로 함께 호흡할 뿐 아니라 온 우주가 서로 함께 호흡을 하고 있다.
우주는 깊은 조화 속에 있다. 오직 인간만이 조화의 언어를 잊어버렸을 뿐이다. 이곳에서 나는 그대에게 잊어버린 언어를 다시 상기시켜주는 일을 하고 있다. 없는 조화를 만들어내는 게 아니다. 조화가 그대의 실재이다. 그대는 자신의 실재를 잊어버렸을 뿐이다. 어쩌면 그런 조화가 너무나 당연해서 잊어버리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그대가 조화 속에 있기 때문에 그 조화를 보지 못하는지도 모르겠다.
물고기와 관한 옛 우화를 들어보았는가? 어느 철학적인 물고기가 다른 물고기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나는 바다에 대해 들은 바가 많소. 바다는 대체 어디 있소?” 이렇게 물은 물고기는 바로 바다 속에 있었다! 그 물고기는 바다 속에서 태어났고 바다 속에서 자랐으며 바다를 벗어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그 물고기는 자신과 떨어져 있는 객체로써의 바다를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때 나이 든 물고기가 바다를 찾는 물고기에게 말했다. “우리는 지금 네가 찾는 바다 속에 있다!” 젊은 물고기가 대들었다. “농담을 하시는 게지요. 이건 물이에요. 어떻게 물을 바다라고 할 수 있습니까? 좀 더 지혜로운 사람을 찾아봐야겠습니다.”
물고기는 어부에 붙잡혀서 바다 밖으로 나올 때라야 비로소 바다의 존재를 지각하게 된다. 그때에 비로소 자신이 평생 바다 속에 있었음을, 바다가 자신의 삶이었음을, 바다 밖에서는 살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인간의 경우는 어렵다. 그대를 존재계 밖으로 데려갈 수 없기 때문이다. 존재계에는 한계가 없다. 밖으로 빠져나와 ‘아, 저기가 존재계구나’라고 말할 수 있는 경계가 없다. 그대가 어디를 가든 그곳은 존재계의 일부일 뿐이다.
우리는 모두 호흡을 같이 하고 있다. 우리는 전체 오케스트라의 악기들이다. 이를 이해하려면 깊은 체험을 해야 한다. 이를 꿈이라 부르지 말라. 꿈은 프로이트로 인해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다. 원래 꿈은 세상 어느 낱말보다 아름다운 말이요 시적인 말이었다.
그냥 침묵해보라. 그냥 기뻐해보라. 그냥 존재해보라. 그러면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사람들의 생각은 제각기 모두 다르다. 그래서 그대는 생각 속에서 다른 사람들과 분리되어 있다. 그러나 생각을 멈추면 사람들을 나누고 있는 장벽들이 무너져내린다. 둘의 침묵은 결코 둘이 아니다. 둘의 침묵은 하나인 것이다.
사랑과 침묵, 지복, 환희, 신성 등 삶의 귀중한 가치를 깨달을 때 그대는 무한한 하나됨을 깨닫는다. 무한한 하나됨 속에서는 그대뿐이다. 우리는 모두 하나의 실재에서 나온 다양한 존재들이다. 하나의 가수가 부르는 다양한 노래들이다. 하나의 춤꾼이 추는 다양한 춤들이다. 하나의 화가가 그리는 다양한 그림들이다. 화가는 한 명이다.
하지만 이를 꿈이라 하면 이것이 실재임을 깨닫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를 꿈이라 부르지는 말라. 실재는 어느 꿈보다 아름답다. 실재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찬란하고 아름답다. 실재는 더없이 기뻐하고 춤을 춘다. 하지만 그대는 너무 깊은 무의식 속에 잠들어 있다.
자신이 타인과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 이것이 우리들의 첫째 무의식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은 섬으로 나뉘어 있는 존재가 아니라 광대한 대륙의 부분들임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물론 현상에서는 다양하게 나타나 있다. 그렇게 보인다고 우리가 분리되어 있지는 않은 것이다. 다양성은 삶을 풍요롭게 만든다. 우리의 한 부분은 히말라야 속에 있고 다른 부분은 별들 속에 있으며 또 다른 부분들은 장미 속에 있다. 우리의 한 부분은 비상하는 새 속에 있고 다른 부분은 푸른 나무 속에 있다. 우리는 온 세상에 퍼져 있다. 이를 실재로 체험할 때 그대의 인생관이 송두리째 변하고 그대의 모든 생활이 변하고 그대의 존재 자체가 변하게 된다.
우리가 하나임을 깨달을 때 그대는 사랑으로 넘쳐흐를 것이다. 생명에 대한 경외심으로 넘쳐흐를 것이다. 그때 그대는 기독교와 힌두교, 이슬람교 등을 뛰어넘어 참다운 종교인이 될 것이다. 순수하고 진실된 종교인이 될 것이다. ‘종교(religion)’라는 말은 사실 아름답다. 종교라는 말은 무지로 갈라진 사람들을 묶어줄 뿐 아니라 사람들의 의식을 깨워서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음을 깨닫게 해주는 어근(語根)에서 나왔다.
그렇게 의식이 하나로 깨어날 때 그대는 나무조차도 해할 수 없다. 그럴 때 그대의 사랑은 억지로 닦는 사랑이 아니라 그냥 흘러 넘치는 사랑이 될 것이다. 계율이 된 사랑은 가짜 사랑이다. 억지로 배운 비폭력은 가짜 비폭력이다. 넘쳐흐르지 않는 자비는 가짜 자비다. 사랑이든 비폭력이든 자비이든, 인위적인 노력 없이 흘러 넘칠 때 더없이 진실된 것이 된다.
사람들은 종교의 이름으로 수많은 범죄행위를 자행했다. 종교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일반 사람보다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물론 범죄행위를 자행한 종교들은 가짜요 사이비들일 뿐이다. 이제 우리는 참 종교를 낳아야 한다.
웰스가 자신의 걸작인 "생명과 인류의 평범한 역사: 세계사 대계" 출판을 하게 되었을 때 이런 질문을 받았다. “문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웰스는 이렇게 대답했다. “문명이라고요? 그거 좋은 말입니다. 한데 문명을 만들려면 노력을 해야지요. 아직까지 문명은 존재해본 적이 없습니다.”
아직까지 문명도, 문화도, 종교도 없다. 문명의 이름으로, 문화의 이름으로, 종교의 이름으로 우리는 온갖 야만적이고 원시적이고 비인간적인 행위들을 저질렀다. 인간은 진리에서 타락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가 하나라는 진리를 다시 깨달아야 한다. 우리 모두가 하나라는 말은 결코 가설 따위가 아니다. 그것은 모든 명상가들의 체험이다. 전 존재계가 하나의 유기체임은 인간의 역사가 시작되고부터 하나의 예외 없이 모든 명상가가 체험한 진리다.
그러므로 명상의 아름다운 체험들을 꿈으로 오인하지 말라. 진리의 체험을 꿈이라 부르면 진리가 오도된다. 꿈을 실현하라! 하지만 진리를 꿈으로 만들지는 말라!
깨달음 후에는 어떤 삶이 펼쳐지는가?
문: 어떤 사람이 모든 사념과 욕망을 비워버린 경지에 이르면 그의 외적인 삶과 내적인 삶에는 어떤 변화가 일어납니까? 그는 어떤 식으로 행동하며 어떤 식으로 사물을 볼까요? 그는 이 세상 속에서 어떤 식으로 살아갈까요? 여기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답: 그것은 개인마다 다르다. 모든 개인은 저마다 독특한 존재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대해 정형화된 기준을 제시할 수는 없다. 바쇼(Basho)는 깨달음을 얻었을 때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붓다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크리슈나는 깨달음을 얻었을 때 노래하고 춤추기 시작했다. 그러나 마하비라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마하비라는 깨달음을 얻은 후 몇 년동안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그러나 미라(Meera)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녀는 깨달음을 얻은 후 이 마을 저 마을을 떠돌며 춤추었다. 그녀는 신의 영광을 노래했다. 그러므로 여기에 대해 분명한 정설(定說)을 제시하기란 매우 어렵다.
어떤 사람들은 깨달음을 얻은 후 세상을 버리고 산 속으로 은둔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산 속에 있다가도 깨달음을 얻은 후 다시 세상 속으로 돌아와 사람들과 어울려 살기 시작했다. 깨달음을 얻은 후에도 황제의 자리를 지킨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선사(禪師)들은 전과 다름없이 평범한 삶을 살아간다. 만일 그대에게 꿰뚫어보는 눈이 없으면 그들을 알아보기 힘들 것이다.
임제선사(臨濟 禪師)에 대해 이런 이야기가 전해진다.....어느 날 황제가 임제를 만나려고 찾아왔다. 임제가 산문(山門) 앞에서 장작을 패고있는데 황제가 다가와 “그대의 스승은 어디 계신가?”하고 물었다. 그러자 임제는 “안에 계십니다.”하고 대답했다. 당연히 임제가 절 안에 있다는 말로 알아들은 황제가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임제는 다른 문을 통해 절 안으로 뛰어 들어가 법좌(法좌)에 눈을 지긋이 감고 앉아있었다. 안으로 들어온 황제가 그를 보고 “이 사람은 바로......아까 장작을 패던 그 자로구나.”하고 알아보았다.
황제가 말했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 그대가 누구길래 그 자리에 앉아있는 것인가? 나를 바보취급하는가? 아니면 정신이 어떻게 된 자인가?”
임제가 말했다.
“나는 이미 그 분이 안에 계신다고 말했는데 당신은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소. 당신이 내 말을 알아듣지 못했기때문에 나는 얼른 달려와 이 자리에 앉아야 했소. 아마 당신은 겉모습만 알아보는 모양이군요. 절 밖에서도 나는 이미 나자신을 내보일 준비가 되어 있었거늘 당신은 한시도 가다리지 않았소. 자, 내가 바로 그 스승이니 이제 말해 보시오. 원하는 게 뭐요? 그리고 내 시간을 너무 많이 뺏지 마시오. 밖에는 아직 패야할 장작이 많이 남아있소.”
선사들은 아주 평범한(ordinary) 삶을 살아간다. 그들은 장작을 패고, 우물에서 물을 길어오고, 부엌에 들어가 음식을 장만한다. 그러므로 눈이 없는 자는 그들을 알아보기가 매우 어렵다. 그들은 비범한(extraordinary) 삶을 살지 않는다. 그들은 “비범해지려는 욕망 자체가 에고의 발상이다.”하고 말한다. 평범해지고자 하는 것이 진정으로 종교적인 사람의 태도이다. 그리고 이것을 명심하라. 비범해지고자 하는 욕망은 아주 평범한 것이다. 여기엔 어떠한 비범함도 깃들어있지 않다. 모든 사람이 비범해지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평범해지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비범함이다. 평범해지기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그대의 질문에 대해 특별한 기준을 제시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나는 어떠한 판단의 기준도 제시하지 않을것이다. 그 기준들은 아주 파괴적이고 해로운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일단 정형화된 기준을 갖게 되면 그대는 진짜는 알아보지 못하고 사이비에게 속아넘어갈 것이다. 그대의 기준을 만족시키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깨달은 사람으로 보일 것이다.
예를 들어, 마하비라는 벌거벗고 지냈다. 그렇다면 벌거벗고 서 있는 것은 누구든지 할 수 있다. 거기엔 특별한 게 없다. 미친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할 수 있는 일이다. 나체주의자 클럽에 가보라. 거기가면 온통 벌거숭이들 뿐이다. 그러나 그들은 마하비라가 아니다. 붓다는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었다. 이것은 그대도 할 수 있는 일이다. 동양인에게는 아주 간단한 일이다. 그대가 서양인이라면 6개월 정도의 훈련이 필요하겠지만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이것이 그대를 붓다로 만들어주지는 못할 것이다. 물론, 흉내를 내는 것은 아주 쉽다. 온 세상에 흉내쟁이들이 만연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자이나교 승려를 만나보라. 그들은 완벽하게 흉내낸다. 하지만 흉내 외엔 아무 것도 없다.
깨달음은 항상 새롭고 신선하다. 깨달음은 모방이 아니다. 깨달음은 복사판이 아니라 언제나 원본(原本)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대에게 각자(覺者)가 정확하게 어떤 식으로 행동할지 말해줄 수 없다. 그러나 그의 존재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흡수해야 하는지는 말해줄 수 있다. 미지의 신비한 분위기를 발산하는 사람이 있을 때, 그를 어떻게 받아들여 하는가?
그대가 기준으로 생각하고 있는 모든 관념을 버려라. 그가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말라. 그에게 그런 것을 요구하지 말라. 다만 그와 함께 존재하라. 그와 함께 조용히 앉아서 그에 대해 열려 있어라. 만일 그가 깨달은 자라면 돌연 그대는 지금까지 전혀 느끼지 못했던 진동이 내면에 일어나는 것을 느낄 것이다. 그대의 에너지가 용솟음치기 시작할 것이다. 그대의 주변에 거대한 침묵이 일어나고, 물방울이 떨어지듯이 그대 내면의 중심이 말할 수 없는 지복으로 젖어드는 것을 느낄 것이다.
그대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허용되기만 한다면 깨달은 사람은 자명(自明)한 증거를 제시할 것이다. 그러나 이 증거들은 지적인 것이 아니다. 이 증거들은 마음의 주장이 아니다. 그의 존재 전체, 그의 현존 자체가 깨달음의 증거이다. 그러니 그의 현존을 허락하라. 어떠한 기준도 마음 속에 품지 말라. 만일 그대가 자이나교의 기준을 갖고 있다면 그대는 붓다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그대는 크리슈나와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대가 기독교인이라면 그대는 마하비라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그대는 고정된 관념, 정형화된 사고 패턴에 물들어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고정관념을 갖지 말라. 어떤 사람에게서 그가 그대보다 더 생생하게 살아있다는 느낌, 그대보다 더 밝게 빛난다는 느낌, 그대보다 더 깊은 이해를 간직하고 있다는 느낌, 그의 존재로부터 자비가 흘러넘치는 느낌을 받는다면, 그럴 때에는 다만 그의 현존과 함께 존재하라. 이것이 우리가 사트상(satsang)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만일 그가 깨달음을 이룬 자라면 그대는 돌연 그대자신의 존재 안으로 끌려들어가는 것을 느낄 것이다. 미지의 중심을 향해 끌려가는 것을 느낄 것이다. 그대는 엄청난 아름다움과 지복, 축복이 그대 위에 쏟아져내리는 것을 느길 것이다. 이것이 유일한 기준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먼저 그대가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한다.
흔히 사람들은 “우리에게 객관적인 기준을 알려 달라.”고 말한다. 그러나 객관적인 기준은 없다. 그대가 열려있어야만 한다는 것, 이것이 기준이다. 이 꽃이 장미인지 아닌지 알 수 있는 기준은 무엇인가? 그대의 눈으로 보고 코로 냄새 맡는 것이 유일한 기준이다. 이것이 장미꽃의 존재를 알려줄 것이다. 그러나 그대에게 볼 눈도 없고 냄새맡을 코도 없다면 그 꽃이 장미인지 아닌지 알기란 매우 어려울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플라스틱이나 종이로 만들어진 장미일지도 모른다. 그대는 이 조화(造花)에 속을 수 있다.
그러므로 깨달은 자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객관적으로 묘사할 수 없다. 그것은 개인에 따라 다르다. 결코 같을 수 없다. 다만 나는 그것을 느끼는 주관적인 방법은 제시할 수 있다.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미친듯이 날뛰는 검객이 마을에 들어와 남자와 여자, 어린아이 할 것없이 마구 베어 쓰러뜨리며 온 동네를 공포의 도가니로 만들었다. 어느 선원(禪院) 앞에 당도한 그가 문을 박살내고 안으로 뛰어 들었다. 그가 좌선(坐禪) 중인 선사 앞에 떡 버티고 서서 칼을 높이 들고 막 내려칠려는 찰라, 요지부동으로 앉아있는 선사의 고요함이 그의 마음을 건드렸다. 그가 분노에 찬 고함을 터뜨렸다.
“당신 앞에 서 있는 이 사람이 눈도 깜짝하지 않고 당신을 두 동강낼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가!”
선사가 조용히 응답했다.
“그대 앞에 앉아 있는 이 사람이 눈도 깜짝하지 않고 두동강날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가? 자,어서 계속하라. 나의 침묵때문에 망설이지 말라. 그대가 하고싶은대로 하라.”
그러나 선사의 침묵이 미치광이 검객을 건드렸다. 그 침묵이 검맥의 가슴에 와 닿았다. 이제 선사를 베는 것은 불가능했다.
설령 그대가 미치광이라해도 열려있기만 하다면 깨달음을 알아볼 것이다. 깨달음이 어디에 있는지, 어떤 형상을 취하고 있는지 알아볼 것이다. 반면, 그대가 아주 지적이고 논리적인 철학자라해도 침묵과 지복의 영혼을 흡수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면 전혀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그대는 최대한으로 열려있어야 한다. 모든 것을 내맡기고 완전히 방임(let-go)해야 한다. 이때, 깨달음의 증거가 너무나 강하게 다가온다. 그 증거가 너무나 확실하기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부정할 수 있을지언정 깨달은 사람을 부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증명해 보일 수는 없을것이다. 증명할 방법이 없다. 그러나 그대에게는 너무나 확고한 일이다. 일단 이렇게 확고한 증거를 체험하고 나면 그대는 깨달은 자와 연결된다. 다리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제 그대는 예전과 똑같은 사람으로 돌아갈 수 없다. 깨달은 사람을 알아볼 수 있었던 그 경험자체가 그대자신에게 깨달음의 토대를 마련해준다. 그것은 그대에게 새로운 방향, 새로운 존재, 새로운 탄생을 가져다 주기에 충분한 경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