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의존교회141212a (직분)―이 근호 목사
디모데전서 5장 17절부터 할 해 차례입니다.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디모데전서를 하던 또는 히브리서를 하던 사도 바울이 하는 모든 일은 천국과 관련된 일입니다. 천국과 관련 된 일이니까 이 세상에 있는 조직하고는 상관이 없습니다. 흔히 말하기를 사도 바울이 말하는 모든 것이 교회와 관련되어 있지 않느냐 그렇게 이야기를 할 거예요. 그런데 이 교회라는 것이 그 원리상 천국의 원리가 적용될 때만 그게 교회가 돼요.
그러면 천국의 원리가 적용된다는 말은, 우리가 이제 아는 이야기를 해 봅시다. 이 세상과 천국은 어떻게 구분되는가 물으신다면 예수님의 십자가로 구분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구분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뭐냐고 물으면 인간세계와 천국이 서로 반대되는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반대되지 않으면 예수님이 죽을 이유가 없잖아요. 그렇잖아요? 사람들이 메시아를 환영했으면 예수님을 죽일 이유가 없지요. 심지어 제자들도 예수님을 배반했다는 말은 이미 인간세계에서 천국과 역행되는 반대되는 이미 성질과 성격이 이 세상에 자리를 잡았다는 이야기이고 이것을 의도적으로 아시고 이 땅에 오셨다는 말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 그대로 죽으려고 오신 거예요. 그런데 죽었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이 세상에서 필요하지 않는 인물이란 그런 뜻이잖아요. 그렇잖아요?
흔히 말하기를 막 싸우면서 너 죽인다. 하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나에게 너는 필요 없다는 그런 뜻입니다. 네까짓 것 없어도 나는 잘 살아라! 그런 뜻이거든요. 예수님을 죽였다는 말은 뭡니까? 네까짓 것 없어도 우리는 잘산다. 그런 뜻입니다. 이미 그것이 우리는 하나의 성질로서 이 세상의 원칙으로서 굳어져 있는 겁니다.
예수 없이도 잘 사는데 예수를 믿는다? 이것은 말이 안 되죠. 아마 예수 없이도 잘 사는데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를 이용할 가능성이 많죠. 예수님의 능력만 빼 먹고 능력 안 주면 안 믿을 요양들이 많이 있다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신약 성경을 보면 세리와 창기와 이런 사람들이 믿는데 문둥병자들이 소경이 예수님을 믿었는데 그들이 예수님에게 그렇게 어떤 기대를 했을까요?
이 점이 상당히 난해 한 점이 있어요. 처음에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를 봅시다. 처음 만날 때 베드로가 예수님을 요구했습니까? 안 했습니까? 요구 안 했죠. 예수님이 필요 없지요. 강의 처음부터 다시 해 볼까요? 예수님을 죽였던 이유가 뭐냐 하면 예수님이 구태여 우리에게 필요치 않은 인물이라는 거죠. 필요치 않아요. 그렇다면 처음에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필요했느냐 이 말입니다. 고기 잡을 때 필요했습니까? 필요 없었죠. 고기가 안 잡힐 때 배의 오른 편에 그물을 던지라고 베드로가 요청했습니까? 예수님이 먼저 언급했습니까?
예수님이 먼저 언급했죠. 이게 중요한 겁니다. 왜 중요하느냐, 어떤 인간도 예수님을 알아보고 믿는 인간은 아무도 없다 이 말입니다. 예수님이 꼭 필요해! 라고 하면서 믿는 사람은 없다 이 말입니다. 인간들은 자기가 뭐가 필요한지는 본인이 알아서 챙길 정도는 돼요. 따라서 예수님을 필요로 한다는 말은 예수님을 오해했을 경우에만 그런 현상이 일어나겠죠. 지금 보세요. 교인들이 예수님을 많이 오해하고 있잖아요. 가짜 예수님을 섬기게 시키잖아요. 왜냐 하면 원래는 예수님이 우리한테 필요하지 않은데 예수님이 필요하다는 말은 예수님이 그 예수가 아니고 다른 예수이기 때문에 그들은 그렇게 믿게 되는 겁니다.
내가 뭔가 마음이 힘들 때에 예수님이 도와주시면 참 좋겠습니다. 그것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내가 마음이 참 힘들 때 예수님이 있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라고 할 때 그게 예수님의 뜻입니까? 힘든 본인의 요구사항입니까? 본인의 요구사항이잖아요. ‘그래, 힘들 때 내가 너의 위로가 되어 줄게’ 이렇게 나온다면 그 예수는 100% 가짜 예수에요. 그런데 그 가짜 예수 믿고 예수 믿고 편안해 졌어요. 라는 간증을 하는 사람들이 교회마다 그렇게 많아요.
예수 믿고 이익 봤다는 겁니다. 예수 믿고 손해 본 게 아니고 예수 믿고 이익 봤다는 사람들이 교회에서 많이 나와요. 더 어렵게 할 필요 없이, 사울이라는 사람이 예수님을 필요로 했습니까? 예수님을 필요치 않다고 봤습니까? 전혀 예수님이 필요치 않죠. 그런데 사울이 예수님을 찾았습니까? 예수님이 사울을 찾았습니까? 예수님이 사울을 찾았지요. 그렇다면 사울의 입장에서 예수님이 이렇게 이렇게 해서 나는 필요하다는 소리를 하겠어요? 안 하겠어요? 이 말을 하지를 못하죠.
신약성경에 세리와 창기와 그리고 과부들이 어려운 사람들이 예수를 믿었는데 그 예수를 믿는다 할 때 그 믿음을 주위 깊게 봐야 돼요. 그 믿음이 자기한테 필요로 해서 믿는 믿음이라면 여전히 그 믿음은 엉터리 믿음이에요. 그런데 그게 하나의 계기가 되어서 막상 예수님을 알고 보니까 처음에는 이용가치가 있는가 싶어서 예수를 믿었는데 나중에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보니까 오히려 자신들이 예수님의 그 뜻에 말려 든 거죠.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예를 들면 문둥병 10명이 가는데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했을 때에 10명이 다 나았는데 돌아온 사람은 단 한 명밖에 없죠. 자기 병이 나으면 볼일 다 봤잖아요. 그러면 가면 될 텐데, 그 말은 뭐냐 하면 내가 병들었을 때는 무엇을 기대하느냐? 예수든 부처든 내 병만 낫게 하면 내가 얼마든지 존경하겠습니다. 라는 생각을 하고 예수님을 나한테 필요한 존재로 생각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예수님이 나한테 필요한 존재라고 여기는 그 자체가 진짜 예수님의 뜻과 일치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게 되었죠.
처음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의 눈을 주께서 뜨게 했습니다. 떴을 때 그 사람이 예수님을 믿었습니까? 안 믿었습니까? 안 믿었죠. 눈을 떴는데 자기 눈을 떴으면 그만이에요. 그런데 눈을 떴으면 사태가 조용해 졌으면 좋겠는데 눈 뜬 것 때문에 말썽이 생겨버린겁니다. 그 당시에 권력자가, 요새 말하면 경찰이죠. 권력자가 불러서 야, 누가 너를 눈 뜨게 했어? 라고 자꾸 시비를 거니까 본인이 입장이 난처해 진거예요.
특히 요한복음 5장에 보면 38년 된 병자, 본인이 병이 낫게 했습니까? 그냥 호숫가에 있는데 예수님이 오셔서 병을 낫게 했죠. 그 때부터 38년 된 병자는 괴롭게 되는 거예요. 너는 왜 안식일에 담요 들고 왜 걸어가느냐? 마느냐? 그 사람은 그냥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인데 그 모든 공격을 본인이 받는 겁니다. 그 사람은 굉장히 힘들게 되었어요.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뭔가 예수님이 이용가치가 있어 믿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에 의해서 믿어지게 되고 병 고침을 받은 사람은 그 사람은 본인이 예수를 믿는 게 아니에요. 하지만 예수님께서 계속해서 그 사람을 예수님을 믿게 하는 공작에 주님의 작업에 들어가시는 겁니다. 그런데 그 작업에 들어가면서 그 사람은 각오를 해야 돼요. 뭐냐? 욕을 얻어먹어야 된다는 거예요.
마르다 마리야 오빠가 나흘 만에 살아났잖아요. 살아나고 난 뒤에 주변 사람들이 그 나사로에 대해서 대우가 어떻습니까? 칭찬했습니까? 싫어했습니까? 어땠습니까? 미워했습니까? 요한복음 11장에서 미워했잖아요. 네가 왜 예수님한테 걸려 나흘 만에 왜 살아났어? 이게 시비 꺼리가 돼서 네가 왜 살아났는데 감옥에 가만히 있지 왜 살아났냐고 시비 당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나사로가 나흘 만에 살아나서 시비를 당하는 것은 이게 자기 책임이 아니고 누구책임이에요? 예수님과 한 통속이라는 그 이유 때문에 계속 어려움을 당하고 있죠. 그 말 자체가 무엇을 의미합니까? 나는 예수님을 이용할 생각에서 예수를 믿었다는 것이 전혀 해당이 안 되죠.
예수님께서 일방적으로 찾아와서 나를 살게 만들었고 그 덕에 주위사람들로부터 예수 이름으로 욕을 얻어먹는 그러한 괴로운 세월을 겪고 있는 겁니다. 이 중에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 복 받은 거예요. 내가 예수님을 이렇게 이용할 가치가 있다, 뭐 천국가기 위해서 예수 믿으면 되겠다, 이런 식으로 예수를 이용하는 것 말고 주님에 의해서 구원받기로 부름을 받은 사람들은 자기는 자꾸 설레발을 쳐요. ‘나 아니에요. 아니, 나 아니라니까요, 저 보고 그렇게 하시면 안 됩니다. 이렇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왜 자꾸 저보고 이야기해요?’ 라고 이야기해야 돼요.
예수님에 의해서 믿게 된 사람은 어떤 의미에서 세상 적으로 봐서 재수가 더럽게 없는 사람입니다. 예수님 것을 빼먹어볼까 이렇게 시작했다가 도려 된 통으로 세상 사람들한테 예수님을 미워하는 이 세상으로부터 같이 예수님과 한 묶음으로 욕을 얻어먹는 그런 팔자가 되어 버린 겁니다. 흔히 교회에서 믿으세요, 믿습니다, 믿습니까? 신자는 믿는 자입니다. 그 놈의 믿음, 믿음, 그렇게 믿는 믿음을 강조하는데 진짜 성경에 나오는 믿는 자는 뭐냐 하면 오히려 반문하는 사람, ‘주님이여! 저는 이런 대우를 받으려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누구한테 이야기하는 거야?’ ‘너는 몰라도 돼!’
주님과 이야기하면서 제가 이렇게 주님 때문에 이렇게 힘든 인생을 살아가는 것을 주께서 알고는 계십니까? 하고 오히려 주님한테 반문할 정도가 돼 있어줘야 그 사람은 수동형 인생이 되는 겁니다. 주님에 의해서 피동적으로 구원받은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언제인가 우리교회에서 설교할 때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믿기 싫거든 참 좋은 기회가 왔습니다. 믿기 싫거든 안 믿어보세요. 믿지 마라 말이죠. 내가 예수를 안 믿기로 작정할 때부터 굉장히 마음이 평안이 찾아보면서 ‘내게 강같은 평화’ 이제는 두 번 다시 예수 믿는가 봐라! 이렇게 오시거든 그동안 믿은 것이 가짜인줄, 뭔가 예수님을 이용해 먹으려고 한 줄 아시기 바랍니다. 어릴 때 부모 따라서 억지로 교회에 나오다가 이 핑계, 저 핑계대면서 아빠 눈치 안 받으니까 이제는 교회도 안 다니고 자기 마음대로 살잖아요. 얼마나 내게 강같은 평화에요? 그 종교란 굴레에서 벗어나니까 그게 자기의 본래 본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부를 때 이렇게 부릅니다. 이렇게 불러요. “아무개” 무자격 적으로 아무개, 우리가 이름이 있더라도 아무개, 하나님이 특별히 우리 이름을 부를 때는 그것은 언약적인 내용이 삽입된 것을 전제로 해서 부릅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사울……. 그러나 일반 사람들한테는 그것은 이름이 있어도 이름으로 쳐주지 않아요. 그냥 아무개, 의미 없는 거예요.
이렇습니다. 천국에 소용없는 인간은 소용없는 인간이에요. 그런데 그 천국이라 하는 것은 어떻게 등장하느냐 이 세상이 이유도 모른 채 미워해야 될 나라가 천국이에요. 제가 이런 말 하는 것이 굉장히 어려운 말인 줄 압니다. 왜냐 하면 이 세상 인간치고 죽어서 천국 안 가고 싶은 사람 아무도 없잖아요. 전부 다 껌벅 넘어지고 교회는 안 나가도 천국은 가고 싶어 하잖아요. 그런데 실제 천국의 주인공이 누구냐 하면 예수님이거든요.
예수님이 없는 천국은 남들이 다 좋아해요. 그런데 예수님의 나라는 사람들이 안 좋아해요. 예수님의 나라는 사람들이 좋아하지를 않아요. 왜냐 하면 예수님께서 하시는 모든 말씀은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하등 보탬도 안 되고 도움도 안 되고 이익도 안 됩니다. 예수님 믿어서, 예수님을 알아서 어디 써 먹을 건데요? 아무데도 써 먹을 때가 없어요. 왜냐 하면 예수님은 천국의 예수님이지 이 지상의 예수님이 아니기 때문에 써 먹을 때가 없어요.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 자신들을 아무개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실례하지만 누구십니까? 아무개입니다. 이렇게 하지 않아요. 나 누구라고 이야기하죠. 만약에 어떤 사람이 당신이 누구십니까? 하면 나는 아무개입니다. 아무개라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아무 가치도 없습니다.’ 이런 뜻이거든요. 아무 가치도 없는 뜻이라면 그러면 내가 당신의 때리고 돈을 뺏어도 당신은 뭐 이의 없지? 왜? 당신은 처음부터 아무 것도 아니니까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나는 적어도 이 정도입니다. 라는 뜻은 무슨 뜻이냐 하면 나를 건드리지 마세요. 나에 대해서 시비 걸지 마세요.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할 때 정말 가치 있는 나에게 보탬이 되고 도움이 되는 행동만 하게 되어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예수 믿고 하나님 믿는 그런 일이라는 것이 제 말입니다. 그 만큼 자기한테는 가치가 있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 보세요. 예수님의 말씀을 듣게 되면 어떤 말씀도 나한테 넘겨올 가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어요.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는 말씀을 우리한테 했을 때 우리가 어쩌라고요? 그래서 어쩌라고?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 참새도 집이 있고 제비도 새끼들의 보금자리가 있지만 나에게는 머리 둘 곳이 없다, 그래도 나를 믿을래? 그러면 우리는 뭐라 합니까? 미쳤습니까? 가치도 없는데 왜 믿어요? 그러니까 내가 너희들을 아무개라 부른 거다!
성경은 내용 전체가 예수님의 십자가 중심이기 때문에 성경 전체가 무슨 내용이냐 하면 디모데전서 5장 17절을 보면 성경책 내용이 사람들이 왜 예수를 못 믿는가? 거기에 대해서 성경에 내용이 나와 있는 거예요. 왜 사람들은 예수를 못 믿는가? 쉽게 말해서 왜 인간은 천국에 갈 수 없는 존재인가? 거기에 대해서 성경이 이야기하는 겁니다. 저는 성경을 그렇게 보는데 여러분은 달리 볼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그렇게 보이는 거예요.
왜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였는가? 그 말은 예수님이 자기한테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은 누구를 증거한 것이다?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한 것이다. 따라서 성경은 왜 인간은 구원받을 수 없고 천국갈 수 없는가를 이유를 보여 준 책이 바로 이 성경책이다. 끝!
당황하지 말고 성경 읽어보세요. 그게 끝이에요. 그러면 성경 안 읽지! 이렇게 하잖아요. 성경 밖에서 찾는 예수는 또 가짜네? 교회의 목사들이 이야기하는 것이 가짜가 되는 거예요. 가짜는 백날 믿어봐야 5천명, 만 명 모여 봐야 아무 짝에 소용없는 겁니다. 교회가 사람을 구원하는 게 아니잖아요. 성경 속에 나오시는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는데 성경에 앞장세운 자체가 이러면 나를 믿어라가 아니라 이래서 너는 나를 믿을 수 없는 존재야! 그러니까 너는 아무개야! 하늘나라에 전혀 소용없어! 그런 뜻으로 성경은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것을 가지고 쓰면 “걸림돌” 이라 합니다. 유치원에 자기 아들이 지금 1등으로 달리고 있는데 밉상 같은 못된 어떤 학부모가 우리 아들 1등하고 자기 아들 2등하니까 1등하는 우리 아들의 발을 걸어서 탁 걸어서 엎어져 2등하는 아들이 이기게 만들 때 잘 달리는 것을 탁 넘어지게 다리를 거는 거, 요게 걸림돌이에요.
예수 믿고 천당 가려고 달리고 있는데 발을 탁 걸어서 팍 하고 엎어지죠. 가기는 어딜가? 네가 가는 길이 못돼! 가는 세상이 아니야! 발을 걸을 때 그게 바로 걸림돌이에요. 걸려 넘어질 때 누가 넘어지게 하느냐?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가지고 걸려 넘어지게 하는 거예요. 십자가 가지고 넘어지게 하는 거예요. 그것은 가는 방향이 네가 추구하는 방향이 결국은 너 좋으라는 세상밖에 안 된다는 겁니다. 네가 고해와 같은 이 세상에서 빨리 벗어나서 행복을 영원토록 누리고 가겠다는 네 욕구와 욕망, 있지도 않은 세상을 되지도 않는 그런 세상을 향하여 달리고 있는 그것을 발을 탁 걸어 버린 거예요. 그러면 탁 자빠지죠.
그곳은 천국이 아니고 그곳은 바로 가상세계, 마귀가 지어낸 세계입니다. 천국은 이런 세계에요. 하나님이 인정한 사람은 아들, 예수님 밖에 없다는 그것을 같이 동의해 주는 사람들만의 집합이 천국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으로 간주하시는 분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음을 그런 하나님의 조치에 대해서 흔쾌히 저도 동의합니다. 하고 동의 했을 때 비로소 그 사람은 주님을 주라고 섬길 수 있는 사람으로 간주되어서 예수님의 나라에 합류가 가능합니다.
요한복음 9장에서 날 때부터 소경된 자의 병을 낫게 해 줬습니다. 자기는 기분 좋았죠. 눈 감겼다가 눈을 떴는데 문제는 거기서 멈추면 안 됩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을 믿어야 돼요. 내가 예수를 믿고자 하지 않았는데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찾아와서 예수 믿게 하신이유가 뭐냐? 그것은 눈 뜬 것은 아무 것도 아니에요. 예수님의 준비된 나라고 있는데 인간이 생각 못한 나라가 있는데 그 나라는 바로 나에게 병을 낫게 한 그 예수님 중심의 나라에요. 어떤 사람은 눈떠서 온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멀쩡한 눈이 반대로 소경이 되어서 천국 온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가난하다가 부자 돼서 가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부자 됐다가 졸지에 가난하게 돼서 오는 사람들도 있고 그런 여러 가지 사람이 있어요.
수학에서 이런 것이 있어요. 기하학이 있어요. 현대수학에서 위상 기하학이 있는데 이것은 위치에 대해서 연구하는 수학학문입니다. 내용은 깊이 알 필요는 없는데 이 취지는 뭐냐 하면 같은 지평에서 같은 판에서는 그 사람이 약간 1미리가 들어가던 홀이 되던 관계없이 같은 판에서는 전부 다 똑같이 쳐준다는 것입니다. 모양새가 큰 모양이던 관계없이 그 뿌리가 같이 있으면 전부 다 같은 성질로 쳐 주는 것이 위상기하학이라는 거예요. 도너스와 커피 잔을 동일한 도형으로 보는 겁니다.
도넛과 커피 잔이 구멍이 하나밖에 없으니까 늘리고 조작하다 보면 똑같은 형이 돼요.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17절에 보면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하는 그 대목입니다.
딤전 5:17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
교회에서 어떤 직분이라 하는 것이 있을 때 위상기하학을 집어넣어 버리면 전부 다 같은 질에 속한 지평에 속한 사람으로 간주해 버린다 이 말이죠. 그렇게 되려면 뭐가 날아가 버리느냐 하면 사적인 개인 가치가 없어요. 개인 가치라는 이것을 줄로 그어 버려요. 개인 가치 자체가 없어집니다. 우리가 세상을 사는데 힘든 이유가 뭡니까? 나는 이런데 너는 이렇다. 이것 때문에 힘들잖아요. 그런데 위상기하학에서 똑같은 것이라면 별 의미 없죠.
여러분, 던킨도너츠에서 파는 도넛하고 여기 신곡시장에서 값싼 튀김으로 하는 도너스하고 물론 사적으로 보면 질이 다르죠. 그런데 그 구성 성분이 뭡니까? 기름하고 밀가루하고 설탕하고 그렇죠. 먹어보면 위에 들어가면 똑같잖아요. 똑같은 것을 우리가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을 사는 것이 심적으로 처음부터 힘들게 들어가요. 나는 왜 저 사람처럼 못 되는가? 같은 도너스이면서도 나는 왜 저 사람처럼 못 사는가? 왜 저 사람처럼 저렇게 잘 먹고 못 사는가? 나는 왜 이렇게 직살 나게 고생만 하는가? 질이 똑같은데 전부 다 아담에 속한 사람, 인간자체가 똑같거든요.
예수님에 속해야 되는데 아담에게 속한 것이 똑같다 말이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누구를 찾아올 때 먼저는 내가 예수님에게 부름 받은 인간이라는 저나 나나 똑같다는 것을 느껴야 돼요. 그 다음에 다른 점이 있다면 그 사람은 예수님께서 건져 내지 않았을 뿐이고 나는 건졌을 뿐이고 든지 예수님의 손 데심, 예수님의 촉, 그게 중요하지 그 원판, 원재료는 똑같아요.
나, 예수님 때문에 눈 떴다! 이렇게 할 수가 없어요. 그 다음에 나오는 것이 누가 너에게 눈뜨게 했는데? 누구더라? 가버리고 나는 몰라! 나중에 예수를 만나서 네가 나를 믿느냐? 라고 할 때 자기가 예수님을 이용한다든지 예수님을 잘 믿어볼까 하는 그런 생각과는 전혀 관계없이 예수님 쪽에서 적극적으로 일방적으로 나를 눈을 뜨게 했다는 것을 그 소경이 받아드리면 그 소경의 모든 운명은 누가 장악하게 돼요? 본인이 어떻게 자기를 관리하는 것이 아니고 누가 관리하죠? 찾아오신 주님이 일방적으로 관리하시기 때문에 그런 주님의 손길 때문에 그 사람은 다른 지평, 다른 차원, 다른 세계에 소속된 사람이 되는 겁니다.
지금 까지 한 것을 정리해 봅시다.
천국이라 하는 것은 이 세상과 다르다. 그런데 사람들은 천국을 좋아하는가? 좋아한다. 좋아하는데 진짜 천국은 사람들에게 좋아하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사람들에게 싫어하신바가 된, 이미 싫어한다고 확정이 난 그 분의 따로 만든 세계가 천국이에요. 그러니까 어떤 인간도 천국에 갈 수가 없는 겁니다. 왜? 그 예수를 모든 사람들이 싫어가게 되어 있으니까, 왜 싫어하는데? 물으면 예수님에게 나오는 모든 말씀이 우리의 이익과 우리의 편리와 우리가 기대하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를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까 이야기했지만 인자는 머리둘 곳이 없다고 그 정도로 이야기했지만 사실은 그것 보다 더 심한 것은 네 오른 눈을 빼버리라! 세상에 오른 눈을 빼버릴정도가 돼요? 네가 오른손을 잘라버려라! 이렇게 나올 때 그런 분을 누가 좋아합니까? 전도대회할 때 아이고 202호 아줌마, 우리 교회 부흥회 하는데 가요! 교회가면 뭐하는데요? 교회가면 오른손 잘라낸데요. 이렇게 전도하는 사람 봤습니까? 왼뺨을 때리면 오른뺨 까지 내 놔야 된데요. 얼마나 좋은 분인지……. 미쳤습니까?
어떤 사람이 교회 간 뒤에 사업도 잘되고 애가 공부도 잘한데요. 그런 것으로 꾀잖아요. 그런 것으로 꽤야지 거기에 가게 되면 오른 눈을 빼버리고 뭐 비판하지 마라고 했어요. 무엇을 입을까 먹을까 그런 것은 염려하지 마래요. 그런 것은 이방인들이 지옥갈 사람들이 한답니다. 이런 이야기해 가지고서는 전도 자체가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교회까지 올수 있어요. 교회까지 올 수 있는데 교회까지 온들 이게 무슨 소용 있어요? 교회에서 천국가기가 하늘과 땅차이인데 교회까지 온들 이게 무슨 구원입니까? 등록한들 세례를 받던지 머리에 물을 바른들 카스테라 먹고 포도주스 먹은들 그게 무슨 구원입니까?
주께서 하신 모든 것은 인간이 백날 몸부림 치고 백날 교회 만들고 예배드리고 성경보고 찬송을 백날 해봐도 어떤 누구도 인간은 진짜 하나님의 나라를 좋아할 리가 있다는 거예요. 왜냐, 인간은 자기가 좋아하는 천국을 따로 만들었기 때문에 진짜 있는 천국은 아무도 관심두지 않고 아무도 갈 수가 없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 천국은 누가 채우는가? 주님이 직접과서 채우지요. 그러면 그런 사람이 있습니까? 있죠. 있으니까 주님한테 대들죠. ‘주여, 내 인생 왜 망쳐놨습니까? 제가 원하는 인생이 아닌데 왜 제 도화지에 이렇게 낙서를 했습니까? 하나님이면 다입니까? 예수님이면 다입니까? 하나님이여, 왜 내 기쁨을 뺏어갑니까?’ 주께서 이렇게 이야기할 겁니다.
그 기쁨 때문에 내가 죽었으니까, 네가 원하는 기쁨, 네가 기대하는 기쁨, 네가 소망하는 그 기쁨 때문에 내가 죽었으니까 내가 주는 기쁨보다도 너희들이 기대치 않고 있던 네가 먼저 알고 있던 그 기쁨을 위해서 예수 찾고 하나님 찾다보니까 내가 너한테 밀쳐 버렸습니다.
한번 정리하게 되면 천국은 갈 수 없습니다. 천국은 가지 못합니다. 천국에 가지 못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겨야 됩니다. 왜냐 하면 그 가지 못하는 곳을 가게 해 주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세상의 은혜와 이 고마움을 무엇으로 다 표현합니까? 아무리 어떤 수를 써도 갈 수가 없는 곳인데, 갈 수가 없어요. 왜, 내가 좋아하는 것은 내 기쁨이 되는 것은 하나도 없으니까, 그런데 그 곳에 가게 했다면 이것은 로또 복권 1등 당첨보다 더 큰, 더 센 행운이 찾아와야 가능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 디모데전서 5장 17절 딤전 5:17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
이 말씀은 어디서 무엇 때문에 나온 것이냐 물으신다면 성경에 나오는 모든 것은 개인소유욕이 아닙니다. 기능이에요. 기능 같으면 이것은 천국과 관련된 기능입니다. 천국과 관련된 기능은 천국이 오직 예수님의 능력으로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라는 것을 보여 주는 거기에 관한 기능을 이야기합니다. 내가 당신을 잘 가르쳤기 때문에 나를 배나 존경하세요. 이런 소리하라고 주는 말씀이 아니고 이미 구원 받은 사람 보기에 ‘아우 저분은 너무 잘 가르쳐!’ 이렇게 하거든 그것은 그 사람의 재주나 능력이 아니고 지금 갈 수 없는 천국에 여러분들을 넣어주신 주님의 그 기능이 계속 여러분에게 작용을 하는 거예요.
제가 이런 말한다고 여러분들이 이해한다고 기대하지는 않습니다. 지금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이 디모데전서 5장 17절, 배나 존경하라 할 때에 어떤 장로가 있는데 우리가 이 사람을 배나 존경하라고 하는 것처럼 보이잖아요. 그게 아니고 반대라니까요 내가 존경하려는 마음을 가진 이 기능에 존경하라는 말입니다. 나라는 자존심이 있고 나도 나름대로 한가닥 하는데 아이고 장로님 어떻게 이렇게 잘 가르치십니까? 라는 겸손함이 나왔다는 것은 결국은 나에게 디모데전서 5장 17절이 내위에 지금 작용하고 있다는 증거잖아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어떤 잘 가르치는 모델이 있어서 이것처럼 해봐라가 아니고 잘 가르치는 모델이 없어요. 없는데 저 사람이 참 잘 가르치네! 라고 생각이 난다면 그 사람이 정말 배나 존경 받아야 될 고백자가 된다 이 말입니다.
큰 바위 얼굴이라는 소설이 있어요. 큰 바위 얼굴 되는 사람이 온다는 겁니다. 와서 마을을 부흥시킨다는 겁니다. 마을을 잘되게 한다는 겁니다. 아마 그 사람이 부동산 업자가 되는 모양이죠. 요새 재개발하지 않는 이상 개발될 일이 없는데 어쨌든 간에 너무나 큰 바위 얼굴이 이렇게 보니까 너무 인자스러운데 그 인자한 사람이 오시면 이 마을이 잘 된다고 희망을 걸었어요. 그런데 10년 지나도 안 돼 20년 30년, 어릴 때부터 그것을 바라보면서 그분이 오신다, 오신다! 기다렸는데 나중에 70대 80 돼서 자기가 늙어서 길을 가는데 황혼에 얼굴을 보니까 사람들이 “야, 큰 바위 얼굴, 드디어 나타났네! 하더라 말입니다.
큰 바위 얼굴 기다리가 세월 70년 보낸 본인이 남들 앞에 큰 바위 얼굴로 보여 지는 거예요. 그때 그 소망이 바로 소망하는 본인이 바로 그 소망의 주체, 내용이 된 거예요. 디모데전서 5장 17절 배나 잘 가르치는 사람이 어디 있는 게 아니에요. 있는 게 아니고 본인이, 예수님이 오셔서 이 이야기를 하려고 이렇게 서론이 긴 겁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잖아요. 앞에 것 안 믿는다 치고 믿는다 치고 우리가 천국을 못 가요. 주께서 우리에게 찾아와서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과 함께 욕을 얻어먹게 되어 있다 말이죠.
그런 인생을 비비꼬인 인생을 살게 되는데 그런 사람에게 자기 인생은 망하게 되었으니까 희망이 뭐겠어요? 아이고 이제 인생 주님 따라 천국이나 가야지 이렇게 하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나타나서 잘 가르치는 거예요. 그러니 본인이 하는 말이 야, 정말 배나 잘 가르치네! 라고 하니까 본인이 큰 바위 얼굴이 되는 거예요. 왜냐 하면 주님께서 직접 디모데전서 5장 17절 말씀의 내용을 가지고 나에게 지금도 적용을 시키고 있구나를 본인이 수긍을 하게 된 거예요.
말을 줄여버리면 주께서 우리가 갈 수 없는 천국을 주께서 홀로 구원했습니다. 하는 것이 수긍이 되는 사람만 구원되는 사람입니다. 라고 제가 아까 언급했죠. 거기서 좀 더 나가 보자 말이죠. 디모데전서 5장 17절의 이 말씀을 지금도 이 말씀이 말씀이니까 빈틈없이 우리에게 적용시킨다는 사실을 본인이 수긍이 되는 사람이 정말 남들로부터 배나 존경 받아도 합당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이런 예가 될 수 있어요. 자기가 어릴 때 원래 엄마가 있었는데 엄마가 시장가서 한 눈팔다가 어떻게 도둑 같은 여자를 만나 도둑이 자기 자신을 뺏어가서 어릴 때 뭐 압니까? 뺏아가서 자기가 30년간 키운거예요. 나중에 30년 동안 키워놓고 나중에 보니까 사랑하는 엄마로 여겼던 엄마는 도둑이고 진짜 엄마는 30년 동안 계속 딸이 돌아오기를 계속 찾고 있고 그런데 도둑인 여자가 자기를 학대를 했으면 아프지가 않는데 그 도둑여자가 7살 때 세상에 아프다고 맨발로 병원까지 와서 돌봤으니까 어릴 때 그 엄마의 지극한 사랑을 보고 감동을 받은 거예요.
감동을 받았는데 이제 와서 진짜 엄마 따로 있고 키운 엄마는 도둑이라 한다면 엄마 찾는 기쁨은 좋은데 30년 동안 키워준 엄마는 뭐가 됩니까? 졸지에 도둑, 나쁜 여자가 돼서 교도소 갈판이니까 그 사이에서 이 은현수는, 은현수가 누구인지 아세요? 청담동 스캔들에 나오는 주인공입니다. 은현수는 괴로워하는 겁니다. 괴로워하니까 바로 이 마음씨는 어떤 겁니까? 두 엄마를 제치고 가장 아름다운 마음씨는 어떤 마음이에요? 그 괴로워하는 마음이잖아요.
나 같은 인간, 나같이 지옥가도 되는 인간을 주께서 친히 성령을 주셔서 배나 잘 가르치는 사람을 잘 가르치는 것처럼 믿도록 성령께서 역사하니까 누가 존경 받아야 돼요? 그런 마음을 품은 자가 존경받아야 합당하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교회, 천국에서는 어떤 모델도 없습니다. 배나 잘 가르치는 모델도 없습니다. 오직 모든 일은 어디서 나왔다? 모든 천사가 주의 일에서 나온 것처럼 모든 일은 예수님에게서 나온 예수님의 기능입니다. 성경말씀을 합당한 모델을 찾지 마세요. 성경 모델을 찾으면 우상돼요. 절대로 그러면 안돼요. ‘가만 있어보자 배나 잘 가르칠 사람을 찾아볼까?’ 이러면 그 사람은 우상이 돼 버립니다. 그 사람은 망해요. 큰일 나는 겁니다.
또 같은 비슷한 예가 있죠. 에베소서 5장,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교회를 위해서 예수님이 목숨 바친 것처럼 사랑하고 아내 된 자들은 남편 사랑하기를 교회가 주께 하듯하라는 대목이 있잖아요. 그렇다면 아가씨가 결혼하려고 하면 보통 애로사항이 아닙니다. 교회를 위해서 목숨을 바친 예수님 같은 남편을 찾아야 돼요. 만약 그런 남편이 안 생기면 그런 남편인줄 알고 결혼했다가 그런 남편이 아닌 게 들통 났으면 그때부터 아내는 그 남편에게 하등에 복종할 의무가 없죠.
자기부터 말씀을 안 지키는데 내가 미쳤다고 지켜! 쌍방합의 했는데 먼저 남자가 나를 위해서 목숨을 바칠 그런 남자 같으면 그 남자를 존경 할 텐데 남자가 자기 마음대로 살고 나를 돌보지 않는데 내가 그 남자에게 복종하면 자기는 신났다고 얼마나 좋아하겠어요? 그래 가지고 또 나중에 돈 안준다고 질질 끌어 엘리베이터에 집어넣어가지고 폭행하고 말이죠. 서세원 이야기입니다. 돈 안 준다고 자기 부인을 그렇게 패잖아요. 목사님이 돈 안 내놓는다고 전세금 25억 안 내놓는다고요.
자, 어디서 잘못됐을까요? 그런 모델을 찾은 것이 잘못이죠. 이 땅에 아무도 구원 못 받습니다. 따라서 모델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모델? 없습니다. 아무도 구원 못 받아요. 모델 자체 없어요. 그러면 천국은 어떤 나라이냐 하면 예수님 홀로 주가 되신 나라에요. 혼자 나라에요. 그러면 그 천국에 예수님만이 참된 분이 되는 그 나라에 가려면 그 나라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우리는 나는 내가 이 세상에 들어올 사람이 아닌 것을 확정 받으면서 들어와야 되겠죠. 자칫하면 주님과 경쟁관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님, 당신만 잘났습니까? 나도 잘났다, 주님만 젠틀맨이냐 나도 젠틀맨이다. 주님만 잘났냐? 나도 잘났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안되잖아요. 천국에 가려면 예수님 덕분에 못난 자도 들어왔다 이렇게 돼야 되잖아요. 예수님 덕분에 그러면 못난 자라 하는 것이 뭐냐 하면 나는 못난입니다. 못난 자라 하는 것은 못난 자가 아니에요. 못난 자라고 반복하면서 내가 얼마나 잘난 자라서 스스로 알아서 못난 자라 하겠느냐? 이런 꼼수를 쓰는 인간들이에요.
그것은 때리는 시어머니 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얄미운 거예요. 그런 인간이 어디 천국을 들어가요? 꼼수를 써도 사람을 상대로 써야 될 꼼수를 하나님 가지고 그런 꼼수를 씁니까? 부족합니다. 부족합니다. 그래 부족해라 지옥가게……. 부족하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고 나는 못나는 사람입니다. 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 대들어야 돼요. 주님 때문에 내 인생 망했다고 대들어야 돼요. 그래야 구원받은 사람이에요.
나를 이렇게 엉망진창으로 이렇게 내 허락도 없이 일방적으로 망하게 하시면 나는 숨도 못 쉬고 나는 아무 것도 아닌 존재가 되는데 나의 가치를 이렇게 묵살해 버리면 답니까? 주님이면 다에요? 이렇게 대들 수 있는 사람이 돼야 돼요. 주께서 박수를 칩니다. 그래 바로 내가 이때를 기다렸다, 이때를 위함이다. 박수를 칩니다.
전에도 그런 강의를 했지만 사람이 왜 부부 사이가 싸움을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서로가 나쁜 짓을 안 해서 그래요. 서로가 너무나 착해서 그래요. 나쁜 짓을 해서 한 쪽이 갑이 되고 한 쪽이 을이 돼서 한 쪽이 쿡 찌르면 예, 하고 끽소리 못하고 있으면 가정이 화목해요. 그런데 둘 다 나쁜 짓 한 적이 없으니까 둘 다 잘났어! 젠틀맨이다. 둘 다 잘났어요.
그래서 천국은 주님만 잘나고 우리는 아무 소리 못하는 사람이 돼야 돼요. 말로? 아니에요. 가만있어요. 가만히 있으면 주께서 진짜 못난 사람으로 만들어 주시는 행운이 찾아 올꺼에요. 기도 열심히 하고 운전대에서 주여, 오늘도 아무 사고 없게 하시고 하면서 기도 하고 차 출발한지 5분 만에 빗길에 미끄러져 차 박아서 결혼식한지 두 시간밖에 안된 신혼부부 다 죽었다, 가상입니다. 가상이지만 나는 기도 하고 운전대 잡았는데 내 차로 말미암아 그 신혼부부가 결혼한지 두시간도 안돼서 다 죽었다. 방금 애 낳아서 산부인과병원에서 나오는 애 세 명을 다 죽여버렸다, 그럴 때 어떻게 됩니까? 그 인생 망했죠. 그 집안도 다 망하고 내 인생도 망하고 다 망한 거죠.
집안 부모님 같으면 등을 때리면서 야야, 너 때문에 이런 게 우리 집안에 있어서 가지고 하면서 고함지르고 하겠죠. 그러면 우리는 누구를 때려야 되죠? 주님을 때려야 되죠. 주님께서 전부 다 그렇게 기도까지 해서 운전대를 잡았는데 하면서 주님을 때려야죠. 그러면 누가 맞아요? 주님이 맞잖아요. 더 때려라! 더 때려라! 주님이 퍼렇게 멍들어요. 얼굴에 퍼렇게 멍들어서 이게 바로 메시야다, 네가 때린 자국들이 다 내 얼굴에 새겨져 있다.
이렇게 때렸지? 때린 너를 구원할 때 그 사람은 누구 덕분에 구원받는 겁니까? 바로 피해자가 오히려 가해자를 용서함으로 구원받는 그게 바로 천국입니다. 이것은 실생활에 앞으로 그렇게 적용시킬 거예요. 천국은 그렇게 숨어 있어요. 이것은 숨은 찾기 백날해도 안 나와요. 보물찾기해도 안 나와요. 절대로 찾지 못하는 곳에 있고 우리가 거기서 틈이 반짝 열리면서 잠시 우리를 집어넣고 다시 문 닫아버려요. 다른 사람 못 들어오게 그러면 졸지에 우리만 구원받고 동시에 우리는 쪼다가 되고
너 어떻게 구원받았는데? 주께서 교통사고를 일으켜 구원받았다! 이게 무슨 소리야? 글쎄 말이야! 너 나 욕하려고 했지? 나 욕하고 싶다! 그래 주님 때문에 욕 얻어먹는구나! 이렇게 살아 갈 수밖에 없는 것, 이유도 없이 구원받은 것에 대한 어떤 해명 꺼리를 전혀 주지 않는 주님! 오직 기껏 해명한다는 것이 예수그리스도 십자가 외에는 달리 못 나오게 만드는 주님, 그것이 천국의 작용입니다. 10분 쉬고 합시다.
서울 의존교회141212b (직분)―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배나 존경하는 사람이 어떤 모델로 정해 버리면 그때부터 어떤 문제가 생기게 되느냐 하면 모델이 되어 버리면 시간이 정지되어 버리죠. 그러면 그 사람은 직분을 소지한 한 게 돼요. 직분을 소지한 게 되면 어떤 현상이 벌어지게 되느냐 하면 그 사람이 뭔가 말할 때 성경 본문이 어떻게 해당되느냐 하면 말을 계속할 수 있도록 나중에 밥도 못 먹고 물도 못 마시고 굶어서 헉헉하게 되면 그 말을 못하잖아요. 말을 못하잖아요. 말을 못해서 복음이 안 나오니까 이것은 마치 일을 시켜야 되는데 일을 못해서 망을 씌우게 되는 격이 되니까 망을 벗겨서 계속 일을 하도록 하게 하려면 망을 씌우지 말아야 하는 것처럼 그 사람에게 복음이 나오게 하려면 그 사람이 복음 말고 딴 데 신경 못 쓰도록 그러니까 주유소의 아르바이트 같은 그런 것 하지 말고 생활비 되도록 그렇게 해야 된다고 해석하면 땡이 됩니다.
딤전 5:18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군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느니라
그 해석이 잘못된 해석이 됩니다. 그렇게 해석을 해 버리면 그게 특정 인물이 돼 버리죠. 특정 인물이 되어 버리면 그 사람에게 생활비를 주고 하는 그것은 주님의 기능이 아니고 인간의 기능이 되어 버려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나님이 하게 돼요. 그러면 천국 만드는 일에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관여가 되고 섞이게 되고 개입이 되면 그것은 종교 놀이터지 그것은 천국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송사할 때는 두 세 증인이 없으면 고소도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19절에 나오죠. 딤전 5:19 장로에 대한 송사는 두 세 증인이 없으면 받지 말 것이요
두 세 사람 증인 못 만들까 싶어요? 증인 다 만들죠. 내리라고 하면 승무원들 아무나 불러 이 사람이 내리라고 큰소리 쳤다고 하면 대한항공 부사장 고소하죠. 두 세 사람이 뭡니까? 10명도 더 하겠네요. 인간이 할 수 있는 기능은 일체 천국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기능은 여기서 다 빠져 나가야 됩니다. 인간이 할 수 없는 일들만 기능으로 작용해야 그게 바로 참된 교회요 천국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이 되려면 본문을 어떻게 해석해야 되는가? 일단 이런 사람에게 망을 씌우지 말아야 되고 일군이 삯을 받아야 되고 그리고 송사할 때 두 세 사람 증인이 있어야 비로소 송사가 되는 그런 사람 없습니다. 그런 장로 자체가 없습니다. 주님의 능력 없이는 인간의 능력으로 이런 사람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에이 목사님 이렇게 하나 저렇게 하나같은 말 아닙니까? 도찐이나 개찐이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런 마찬가지 아니에요. 왜냐 하면 그 뒤에 말이 나옵니다. 그 뒤에 말이 21절에 보면 ‘딤전 5:21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와 택하심을 받은 천사들 앞에서 내가 엄히 명하노니’ 여기 천사가 등장하죠. 그 다음에 22절에 보면 아무에게도 경솔히 안수하지 말라는 말이 나오죠. 지금 사도 바울이 이 이야기를 쭉 하면서 이것은 이렇게 해서 교회를 세워라 이렇게 해서 교회를 운영해라는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에요. 과연 아직 너희가 천국이냐를 묻는 겁니다.
아직도 너희들이 기능과 너희들의 노력과 힘으로 유지 되지 않는 단체가 맞느냐고 묻는 거예요. 그러면 사람의 힘으로 하니까 주님의 힘으로 되는 교회, 그런 단체라면 그게 어떻게 운영될 수 있습니까? 라고 물으신다면 저는 이렇게 답변합니다. 반복해서 출애굽 돼야 됩니다. 한번 출애굽 됐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늘 이 세상으로부터 출애굽 되는 기능이 있어 줘야 그게 주님의 기능이 되는 겁니다. 회사에서 한번 과장되면 계속과장이죠. 한번 차장되면 오과장에서 오차장되면 계속 오차장되는 거죠.
계약직으로 와서 일 잘하면 열심히 하게 되면 나중에 정식됩니까? 그럴 수 없어! 이러면 못되는 거죠. 그러면 미생으로 남는 거죠. 완생 안되고 미생으로 남는 겁니다. 사람은 어떤 직분을 갖게 되면 그게 소유가 됩니다. 소유가 되어 버리면 그 소유가 있는 곳에 뭐가 생기느냐? 존재가 생겨요. 존재라 하는 것을 뜯어보면 그 안에 반드시 소유된 게 있어요. 반드시 뭔가 갖고 있는 게 돼요. 갖고 있는 것이 있을 때만 그 사람은 존재감을 느낍니다.
오토바이도 없는 청소년이 빠라바라바 입으로 백날 해 봐야 존재감 없어요. 진짜 오토바이 타면서 빠라바라바 해야 진짜 스릴감 느끼고 존재감 느끼잖아요. 혼자 입에서 빠라바라바 백날 해 봐야 존재감 안 느끼죠. 뭔가 소유하고 있어야 되고 그 소유는 뭐냐 하면 결국 이 소유는 힘이 되고 힘은 바로 마귀에서부터 세상에서부터 나와요.
돌이 떡 되는 힘, 그리고 인기 있는 힘, 세상 부귀영화 내가 누리고 장악하는 힘입니다. 그 힘은 이 세상을 지배고 있는 악마의 힘에서 나왔습니다. 마귀의 힘에서 나온 거예요. 그것을 니체는 권력의지라고 했어요. 인간은 모든 행동에 노림수가 있다는 겁니다. 반드시 노림수 없는 행동은 없다는 겁니다. 그 노림수가 뭐냐, 보다 많은 힘을 소지함으로서 그것이 나의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나의 존재감을 느끼게 하는 그것이 사람 사는 이유이고 목적입니다.
그렇게 힘을 모을 때 우리는 무엇을 느끼느냐, 안정감을 느끼고 안정감을 느낄 때 우리는 비로소 행복을 느낍니다. 이게 고정된 존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은 뭡니까? 고정된 존재가 아니고 정착이 아니고 move, 떠나는 거예요. 움직이는 거예요. 뭔가 아니야, 아니야, 아니 아니야 계속 떠나는 거예요. 어딘지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이 세상눈에 보이는 세상에서는 떠나야 되는 나그네 현실을 갖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방에서 갖고 있는 나의 존재의 힘은 나를 정착하려고 만들고 주님은 그 힘을 빼고 그저 바람에 가는 구름처럼 달처럼 그냥 떠나게 만들고 인자는 뭐가 없다?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이상하게 예수님께서 능력이 나온 것 같죠. 그러나 예수님에게서 나온 모든 능력은 우리보고 소지하라고 주신 능력이 아니고 떠나라고 주신 능력이에요. 자, 어때? 괜찮지 내 능력? 오병이어 능력 괜찮지? 그러면 됐어, 이제 나와 함께 떠날래? 이런 능력이에요. 어릴 때부터 내가 모든 말씀을 다 지켰습니다. 라고 하니까 그러면 네 모든 것을 팔고 그 다음에 빈손 들고 누구를 따르라? 나를 따라 오너라! 이야기하잖아요.
그럴 때 부자는 어떻게 됩니까? 아, 왔다 장보리! 이거다! 진짜 왔다! 주님이다! 이러고 따라갔습니까? 어땠습니까? 그렇게 한 것이 아니고 근심하여 땅콩회항, 근심하여 다시 뒤돌아 가버렸죠. 그놈의 땅콩이 뭔데 땅콩 때문에 뒤돌아 갔죠. 다시 뒤 돌아가잖아요. 그 땅콩이 뭡니까? 그게 바로 갑이죠. 그 갑이 어디서 나왔습니까? 바로 부사장, 권력이잖아요. 권력은 힘이 있잖아요. 힘은 나는 바로 부사장이다. 이거예요. 존재감이잖아요. 그 존재감으로 어디를 가요? 천국을 가요? 미쳤습니까? 천국을 넣어주게요? 나는 잘 가르치는 장로다. 존재감이잖아요. 왜? 잘 가르치기 때문에 나는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 존재감이죠. 그러니까 너희들은 생활비를 다 바쳐야 되고 나를 고소할 것 같으면 두 세 사람 증인이 있어야 돼! 라고 한다면 그것은 보나마나 지옥 가는 겁니다.
그런 사람한테는 아까 말한 천사도 빠져야 되고 천사는 언급하지 말아야 되고 겸손히 안수하는 것도 빠져야 돼요. 권력은 권력을 낳기 때문에 자기 좋아하는 사람을 안수하게 되면 그게 하나의 교단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목사님, 그렇게 안 되게 하려면 그런 사람을 어디서 찾습니까?’ 찾아서 뭐할 건데요? 찾아서 생활비 다 주렵니까? 왜 찾아요? 존재감이 없는 사람, 존재감이 없이 가르치는 기능만 있는 사람이 있어요. 아마 그런 사람이 있을 거예요. 전혀 존재감이 없이 나는 주님의 소유라고 나는 이 땅을 떠나야 돼! 뭔가 이 땅에 정착보다도 내가 이 신분이다. 이런 자격자가 있다, 나는 이런 라이선스가 있다, 나는 목사다, 이게 아니고 나는 주님 계신 곳에 떠나고 싶은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은 본인의 능력이 아니고 주의 능력으로 그렇게 된 사람이 있어요. 그런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런 사람이 선지자에요. 그런 사람이 구약에 나오는 선지자에요. 선지자의 특징이 자꾸 하나님께 따질 줄 알아요. 주여, 제가 안 한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왜 자꾸 일 시킵니까? 정말 진짜 안하고 싶습니다. 주께서 정을 힘들게 하십니다. 만날 주님하고 그 이야기하는 사람들……. 받쳐라, 그런 소리 하는 게 아니죠.
세계적인 음악가 정명훈, 세계 3대 음악가 중에 한 사람이에요. 현존하는 3대 음악가 중의 하나이고 한국 사람이란 말입니다. 그러면 한국 사람을 위해서 봉사하는 것 같으면 없어서 봉사하는 마음으로 해야 되겠죠. 나, 이 정도 되니까 연봉 15억 받는다. 이렇게 나올 것이 아니고 봉사하는 마음으로 해야겠죠? 그렇잖아요? 그런데 나는 지휘를 잘한다. 따라서 지휘 잘하는 이게 나의 존재이다. 내 존재 안에는 지휘 잘함이 들어있다. 따라서 너희는 배나 존경해야 된다. 그리고 필요한 연봉 15억 정도는 줘야 세계 등급에 내 자존심, 품위에 손상되지 않는다. 이것을 주장해 버리면 천국에서도 그렇게 할래요? 천국에서는 주님 앞에 어떻게 됩니까? 주님 앞에 찍 소리 못하고 죄를 뒤집어 쓸 정도로 욥처럼 그렇게 되는데 그것을 진작 천국 가기 전에 이 땅에서 못합니까? 선지자들은 그게 되는 거예요. 왜? 무엇을 봤기 때문에? 천상, 하늘나라 윗선에서 하는 회의를 참석 했거든요. 아랫동네 말고 윗동네 회의에 참석 했거든요.
참석 해 보니까 기가 차더라 이 말이죠. 모든 사람은 다 죄인이고 오직 의인은 누구 밖에 없다? 예수님 밖에 없음을 알고 그 주님께서 죄인가운데 의인되는 작업을 본인이 그것을 봤으니까 이제는 눈에 보이는 게 없죠. 이제는 세상의 부귀영화 같은 것이 눈에 들어오겠어요? 안 들어오겠어요? 그게 미움 받겠습니까? 미움 받지 않겠습니까? 미움 안 받죠.
어떤 아이가 자기 소망이 딱지 왕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애가 나이 한 40돼서 딱지 왕이 되면 그것은 이상한 겁니다. 어른들에게 딱지를 주면 안 좋아해요. 돈으로 바꿔오너라 이래 되지 안 좋아 하잖아요. 이미 천상회의 가서 하늘나라 영광을 본사람, 예를 들면 사도 바울 사람 같은 사람들 그 사람은 삼층천에 올라갔잖아요. 삼층천에 올라가고 난 뒤에 그 사람이 세상에 대해서 무엇을 부러워하겠습니까? 배나 존경해야 되고 도와드려야 되고 굶지 않도록 해 줘야 되고 그렇게 해야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제 중요한 부분인데 그렇다면 어떤 교회가 권력이나 이런 것을 탐하고 그것을 소지해서 거기 존재로 떠나는 나그네 같은 교회가 아니고 이 땅에서 근사한 교회로 정착하려는 목회의 방침으로 정해서 교인수 몇 명 불었다, 헌금 얼마 나왔다, 우리교회 잘 커나가니까 하나님의 기적이라는 그것을 뽐내려고 예수님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교회 커지는 것을 자랑 질하는 그런 교회가 어떻게 참된 천국에 합류할 수 있는 교회가 되겠습니까? 라고 물으신다면 제가 아까 언급을 했죠. 한번 출애굽 해서 안 되고 어떻게 해야 됩니까? 반복해서 계속해서 출애굽 되는 상황이 일어나야 한다고 했죠.
그러면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원리에 의해서 이루어지는가를 출애굽기 18장을 보시겠습니다. 거기에 이드로 라는 사람이 나와요. 에스더라는 영화에 이드로가 잠깐 나오는데 에스더 영화는 성경적이지 않지만 성경적으로 애썼던 흔적이 보이는 영화입니다. 거기에 이드로가 나오는데 십보라의 아버지죠. 모세의 장인어른, 그 사람의 직업이 뭐냐 하면 그 동네, 미디안 제사장, 그 동네 제사장이에요. 그 동네의 제사장이라는 의미에 대해서 프로이드라는 정신분석학자가 나름대로 분석한 것이 있어요.
뭐냐, 신이라 하는 것은 모든 고대 민족에서는 공통점이 신을 믿어요. 신을 믿는데 그 신의 내용이 뭐냐 하면 신의 고객은 거룩한 질서가 있다는 겁니다. 거룩한 질서가 있고 그 땅에 있는 사람이 그 질서를 위반했을 경우에는 하늘에 벌을 받고 그 질서를 순응했을 때는 하나님께 복을 받는 그러한 체계가 고대의 모든 민족에게 공통적으로 다 들어있는 겁니다.
문제는 그거에요. 하늘에 있는 질서 있잖아요. 그 질서를 인간이 어떻게 간파하느냐 그 문제가 남겠죠. 어떻게 간파하겠어요? 계명이 있는 것도 아니고 십계명이 구체적으로 있으면 좋겠는데 그런 것도 없는데 어떻게 아느냐? 이렇게 알아요. 내가 어떤 행동을 했을 때 뭔가 일이 잘 안 풀리고 꼬이면 이것은 결국은 하늘의 숨어있는 질서를 위반한 징표, 신호로 보는 거예요. 그런데 일이 잘 풀린다. 잘 풀린다 했을 때는 하나님이 보시기에도 지금 정상적으로 잘하고 있다는 징표로 내가 인정하는 겁니다. 그렇게 해 놓고 그것을 일기장을 쓴다던지 기록을 한다든지 아니면 자식들에게 계속 그것을 기억을 작업을 전수를 하게 되면 자식 대에 와서 아빠 엄마가 경험했던 신비로운 경험에 자기 경험을 더 보태서 또 추가 되는 경험이 되면서 그 자체도 영적이고 신비로운 경험이 되겠죠. 그래서 그것을 몇 대를 지내보세요. 몇 대를 지내다 보면 그 종교에 맞는 관습법이라는 것이 이미 형성이 되어 있는 겁니다.
네가 이런 짓을 하게 되면 너희 3대손 할아버지가 이런 짓을 해서 매를 맞았으니까 너도 매 맞을 가능성이 농후하겠죠. 더 중요한 것은 법의 위반절차가 아니고 더 중요한 것은 뭐냐 하면 100명이 산다고 합시다. 그중에서 한 명이 잘못됐을 때는 한 명만 벌주면 되겠는데 경험상 그 한 명 때문에 여러 사람이 피해를 보더라 말이죠. 그런 경우에는 그 한 명의 죄를 색출해서 그 자손을 몰살시키고 그 가족을 광야로 내 보내게 되면 그 뒤부터 그 사람이 없는 이상, 그 죄가 모든 것이 잘 풀리게 되면, 잘 풀리게 되면 우리가 그 사람을 추방한 조치는 하나님 보시기에 정당했다? 정당하지 않았다? 정당한 법령이 되는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그래서 고대 국가에서는 말썽을 일으키는 사람을 뽑아서 일 년에 한 차례씩 광야로 쫓아내 보내면 나머지 사람들이 너희들이 인생이 망하는 그런 어려운 일을 당하는 그 요인을 잘 골라냈으니까 내가 복을 흠뻑 주마! 해서 복을 받아서 잘 되는 거예요. 그러면 그렇게 되려면 사전에 그런 벌을 받기 전에 그 범인을 색출해서 추방하려면 자체적으로 또 뭐가 형성되겠습니까? 또 법이 만들어 지겠죠. 저 김씨네 애가 말썽꾸러기가 있는데 그냥 놔두면 하늘에서 벌을 내려서 다른 사람까지, 멀쩡한 사람까지 피해를 보니까 우리가 알아서 우리 선에서 김씨네 애를 징역 보냅시다, 또는 때립시다, 또는 태형합시다, 또는 추방합시다. 라고 조치하게 되면 그것이 질서를 유지하는 법이 되겠죠.
그래서 모든 고대 국가는 그런 식으로 질서가 잡혀간 겁니다. 이해되시겠죠. 신라시대때, 고려시대때, 삼한 시대, 변한 진한 마한 시대 때, 고조선 시대 때 거기에 나오는 계명들 보세요. 다 베낀 거예요. 비슷비슷해요. 함무라이 법전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그 모든 법령은 제가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힘을 누수 시키지 않고 힘이 있을 때만 그 나라가 존재감을 느낍니다. 만약에 전쟁을 해서 힘을 빼앗겨 버리면 그 나라는 어떻게 되겠어요? 다른 나라 노예로 팔러 가겠죠. 요셉이 있을 때 히브리인들은 힘을 얻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요셉의 존재감으로 인하여 애굽 나라가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아서 잘 됐잖아요. 요셉이 죽어버렸습니다. 400년 동안이나 히브리인들이 애굽에 살았는데 요셉이 죽고 난 뒤에 새로운 왕, 바로 왕이 등장해서 람세스 2세가 등장했습니다. 바로 왕이 등장했어요. 히브리인들이 너무 애를 잘 낳거든요. 왜냐 하면 산파들이 하는 고백이 히브리여인들은 애를 얼마나 순풍 순풍 잘 낳는지 어떻게 말릴 수도 없이 애를 잘 낳는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바로 왕이 위기를 느끼는 겁니다. 왜 위기를 느끼는 겁니까? 아까 이야기했죠. 존재라는 것은 안에 뭐가 있어야 된다? 소유가 있어야 된다. 소유가 있는 것이 결국 뭐가 된다? 힘이 되죠. 힘이 있는 자가 승리하기 때문에 힘을 빼기 위해서 그 소유를 제거해야 되죠. 딸은 낳고 아들은 다 죽여 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히브리인들은 빈껍데기가 되겠죠. 빈껍데기가 되니까 존재감이 없으니까 있는 자 밑에서 무슨 생활해요? 노예 생활하겠죠. 노예생활을 하게 되면 그 노예생활을 벗어나려면 어떻게 돼요? 바로 보다 더 센 힘으로 존재성을 가지고 있어야 되겠죠.
그것을 갖기 위해서 모세가 나서서 민족해방운동을 벌렸습니다. 운동까지는 별로 없지만 그 애굽 사람을 자기가 때려서 죽였어요. 주먹도 세요. 히브리인들이 자기 존재감이 없고 자기의 권력이 없고 아무 가진 내용이 없으니까 힘이 있는 모세에 대해서 추적할 줄 알았죠. 그런데 히브리인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모세를 오히려 고발해 버렸습니다. 모세는 당황해서 도망을 쳤고 간 곳이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입니다.
여기서 중요합니다. 지금 모세는 어느 동네에 살았습니까? 정치적 권력이 있는 곳에 있었죠. 어디로 이동했죠? 정치적 권력에서 어디로 이동했습니까? 미디안 제사장이니까 종교적인 동네로 이동했죠. 그렇잖아요. 정치라는 것은 정치적 힘이고 종교적 힘이라 하는 것은 어디서 와야 돼요? 지상의 힘이 아니고 어디서 와야 됩니까? 위에서부터 와야 되죠. 장인어른 이드로가 미디안의 제사장이니까 제사장이라 하는 것은 성경 창세기 15장에도 나옵니다. 창세기 15장에 유명한 제사장이 나오는데 이름이 멜기세덱입니다. 이 멜기세덱이 하는 일이 뭡니까? 정치하는 겁니까? 권력입니까? 빌딩 세우는 일입니까? 뭐하는 일이에요? 하나님 언약의 아브라함에게 축복하는 일을 했죠.
축복이 뭐냐 하면 하늘에 있는 길을 터주는 거예요. 하늘이 내리는 그 하나님의 복을 받게 하는 겁니다. 그 복의 내용이 뭐냐 하면 복을 주시는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에요. 여호와 하나님의 복은 뭐냐, 먼저 하나님이 내 뱉은 말을 하나님이 알아서 실현하는 그 능력이 복이에요. 우리의 뜻대로 안 되는 것이 복이에요. 우리가 지어낸 우리의 희망사항을 들어주는 것이 복이 아니고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뜻을 주님께서 뒤따라와서 그것을 실현시키는 것이 바로 복입니다.
그래서 복을 받을 때는 반드시 약속이 근거가 되어 있어야 돼요. 시편 1편에 뭐라 되어 있죠. 복 있는 사람은 뭘 받는다? 주님의 약속을 받아요. 복 있는 율법을 주야로 묵상해요. 하나님의 계획, 청사진을 보는 거예요. 하나님이 이런 식으로 계획한다는 것을 보는 거예요. 뭐가 복인 줄 아세요? 이 신약시대에 이 세상 망한다는 것을 기쁨으로 받아드리면서 신곡시장에서 장사하는 사람이 복이 있는 사람이에요.
신곡 시장에서 도넛츠 구우면서 ‘아줌마, 이거 도넛츠 구우면 얼마 남습니까?’ ‘남기는 뭐 남아요? 결국 다 불 심판 불바다 될 건데’ 이게 복이에요. ‘아줌마, 이거 해서 애들 교육하는데 돈 되겠습니까?’ ‘뭐 못 키우면 할 수 없지 뭐 불바다 되는데’ 이게 복이라니까요. 그것도 억지가 아니고 기쁨과 즐거움으로 그 까짓것 뭐 대충해 어차피 10분후면 멸망하는데 어차피 이 세상 끝나는 건데, 복이라는 것은 주의 약속을 보면서 약속대로 마지막에 전 세계가 불바다 되는 것을 받아드리는 거예요. 옛날에는 물로 심판받았지만 마지막에는 불로 심판받는다는 겁니다. 그것이 얼마나 기대하지 않은 예상 밖의 큰 기쁨이 오는지 저는 이것을 기쁨의 폭탄이라고 표현했는데 기쁨의 폭발이에요.
마그마가 터지는 것처럼 화산을 우리가 만든 게 아닌 것처럼 화산이 알아서 폭발하는 것처럼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께서 말씀의 성취를 기쁨의 이름으로 폭발시켜 버릴 때 우리는 이 세상에 있었던 모든 근심걱정 부질없는 미련 집착 이런 것들이 그 기쁨에 의해서 다 날아갑니다. 주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활용하여 주시옵소서! 이 미천한 종이라도 주의 뜻에 있다면 주의 뜻대로 만들어 주시옵소서! 뭐 이러다가 또 내일 마리아처럼 임신하고 그런 일은 없겠지만 크리스마스가 뭐 하루만 있으면 되지 또 있게 되면 곤란하고 하여튼 어쨌든 간에 예상의 밖의 일들이 나를 통해서 자꾸 터져 나올 때에 우리는 일종의 마리아아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 복 속에 있는 거예요. 그래서 엘리사벳이 뭐라고 합니까? 이 복 받은 여인아, 하잖아요. 복 받은 그 아줌마, 일수했습니까? 왜 자꾸 복을 받았어요? 마리아가 얻은 게 뭡니까? 얻기는 뭐 얻었습니까? 인생 망했죠. 뭐 얻었겠습니까? 그런데 복 받은 여인이에요. 달라도 너무 달라요. 세상에서 사는 것과 모든 게 너무 달라요.
본격적으로 본론 들어 가 봅시다. 하나님의 제사장이라는 것은 위에서부터 오는 거예요. 그렇다면 위에서부터 오다는 것은 뭐가 내려온다고 했죠. 약속의 내용이 온다고 이야기했죠. 그 약속의 내용 속에 이드로가 이렇게 합니다. 18장에서 모세여, 네가 혼자서 왜 일을 다 하느냐? 너희가 천부장과 백부장과 오십부장과 십부장을 세워서 때를 따라서 그들에게 너 대신 가르치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이 전해야 될 내용은 뭡니까? 땅의 것입니까? 하늘의 것입니까? 하늘의 것이죠. 모세가 받은 하늘의 것입니다.
그러면 모세가 뭘 받았습니까? 주님의 계획서를 받았습니다. 주님의 청사진을 받았습니다. 그 청사진의 구체적 내용이 뭐였습니까? 십계명 + 제사법이었죠. 십계명에 의해서 하나님의 거룩한 계명 줘서 어떤 누구도 이 말씀대로 살지 못하면 졸지에 뭐가 된다? 죄인 되죠. 죄인 되면 벌 받아야 되겠죠. 그런데 그 죄를 그냥 십계명을 줘 버리면 다 벌 받으면 되는데 십계명 주고 그 다음에 뭐 줬다고 했습니까? 제사법을 줬습니다. 제사법을 줬다는 말은 죄가 있는 곳에 뭐가 있다? 은혜와 긍휼이 넘친다는 이야기입니다.
나는 십계명을 준 하나님인데 나는 긍휼과 자비가 넘친다고 이야기했거든요. 그렇다면 주께서 말한 자비와 긍휼이라 하는 것은 어떤 경우에 의미 있게 다가옵니까? 십계명대로 지켰을 경우에요? 못 지켰을 경우에요? 못 지켰을 경우잖아요. 말씀은 못 지킨다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한 거예요. 못 지켜요. 지킬 수가 없어요. 지키지 마세요. 왜냐 하면 우리가 바로 이드로이니까요. 우리가 하늘과 소통하는 제사장이니까요. 여기 지금 모세가 애굽의 감독을 떼어냈습니다. 애굽의 감독을 떼어냈을 때는 모세가 생각하고 있는 존재감은 정치적 존재감이에요.
너희 나라만 큰 나라이냐? 우리 히브리 민족도 큰 나라 될 수 있다는 어떤 정치적인 단체를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정치적 단체라고 하는 것은 어떤 힘으로 뭉쳐진 존재이죠. 창세기 4장이야기를 보세요. 창세기 4장 이야기에서 아벨은 어떻게 됐습니까? 제사한번 잘 드리고 형한테 맞아 죽었죠. 그런데 그 뒤에 나오는 도시 국가의 원 선조가 누구입니까? 아벨이 아니고 누구입니까? 가인이죠. 그렇다면 아벨의 나라가 어디 있죠? 이 지상에 없죠. 이 지상에 없는 겁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의 어떤 정치적 권력이 있으려면 힘이 있어야 되고 힘은 마귀로부터 도입하는 거예요. 여러분 힘을 가지고 살렵니까? 힘을 빼고 살렵니까? 힘 빼고 산 사람이 제사장이에요. 왜냐 하면 파이프라 하는 것은 그냥 물이 흘러가는 것, 그냥 계시가 흐르는 대로 살아가는 거예요. 내가 왜 밥을 먹는가? 주께서 밥 먹으라고 나한테 지시가 내려와서 주께서 힘을 주셔서 밥을 먹는 거예요. 그냥 우리는 밥을 먹어도 내밥 내가 먹어서 힘을 길러 내가 건강하다 이게 아니고 그냥 밥 먹는 기능이 통과하는 하나의 흐르는 관으로서만 기능할 뿐이에요. 그래서 오늘 본문의 디모데전서를 이해하십니까? 배나 존경하라는 말과 그들에게 흐르는 복음을 나누는 것을 흐르게 하라 라는 뜻은 무슨 입니까? 그 사람들은 전부 다 하나님이 쓰시는 기능인으로서 쓰시기 때문에 너의 존재감으로 그들의 기능을 막지 마라는 이 말이에요.
‘야, 저 사람한테 잘 대접하고 월급주고 스카우트시키면 우리교회 부흥되겠네,’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이 주신 기능을 이드로 라는 그 제사장을 마치 스카우트해 가지고 교회라는 이름에 애굽나라 바로 제국을 세우는 것과 똑같은 사고방식이에요. 이래 놓고 차이점을 생각해 보세요. 지금 이 디모데전서 본문이 어려우냐 하면 출발시작관점이 뭐냐 하면 나, 이런 교회하고 싶어요. 이런 교회 다니고 싶어요. 이게 있기 때문입니다. 그게 뭐냐 이 세상을 떠나는 마음이 아니고 괜찮은 교회 다니면서 그 교회 교인으로서 그냥 안착하고 싶고 마음이 평정하고 싶고 안정하고 싶고 정착하고 싶다는 의도가 강렬할 때는 어떤 이런 목사, 훌륭한 목사 없나? 알아서 배나 존경하고 싶고 생활비 어수히 드리고 위임목사 시켜 줄 건데 함부로 안수하지 않는 그런 목사 없나 뭐 이런 그렇게 찾는 것 자체가 본인은 기능이 될 의사가 없다는 뜻이죠.
괜찮은 교회에 앉아있으면 나도 괜찮은 교회의 덕을 보지 않겠느냐, 덕을 보게 되면 좋다고 소고기 사먹겠지, 덕 보면 누구 좋으라고? 내가 좋으라고? 내가 왜 좋은데? 이 땅에 살기 편하기 때문에, 떠나지 않고 왜 살아야 되는데? 이 땅에 살고 싶어서, 뭐로? 존재감으로 그러니까 본인이 문제이네! 저는 바라기는요 이 의존교회가 앉아있는 것 말고 허리 아픈데 좀 이렇게 의자 있고 건물도 전세 하지 말고 자기 건물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교인수도 한 많이도 필요 없고 한 250명 내지 300명 정도 됐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목사님이 위임 목사가 돼가지고 한번 목사는 영원한 목사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을 상상할 수 있거든요. 상상은 자유니까 해 보세요. 그러면 주께서는 뭐라 합니까? 그래 그렇게 했다 치자, 뭐? 그게 왜 좋은데? 우리교회 있다, 우리교회 부흥됐다, 300명 나온다, 그래서? 뭐?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어요. 뭔가 자꾸 떠난다는 것은 출애굽입니다. 바로 애굽에서 정치적 집단들이 뭘 통과 못하느냐 하면 홍해바다를 통과 못해요. 그러나 어린 양이라는 하나님의 계시가 묻어 있는 사람들은 그 홍해바다를 아무 탈 없이 다 통과 했습니다. 하늘나라는 누가 통과할 자냐? 누가 통과 못할 자를 명확하게 아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고 그런 하나님의 마음으로 안수를 주라 이 말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복음으로 전하라 말입니다.
구분할 줄 아는 사람, 이게 정치적 의도인지 이게 복음적인 의도 인지를 구분할 줄 아는 사람, 그런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 그런 사람들을 찾는 본인들이 구분할 줄 알아야 돼요. 그래서 디모데전서 5장 이 말씀은 이것을 형식적으로 정답을 내린다면 공동체가 원하는 사람을 장로로 인정해야 됩니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방금 이야기한 공동체가 누가 특정인이 미뤄준 사람 말고 공동체 다수가 인정한 사람이 장로가 됩니다. 이렇게 돼야 되는데 문제가 그것을 법정화 시켜 버리는 거예요.
법제화 시켜 버린 것이 3분의 2이 찬성이 돼 버리는 겁니다. 그것은 정치 집단이지 이것은 하나님의 계시가 살아있는 게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결정을 안 내리면 돼요. 자, 방법입니다. 늘 출애굽 되는 교회가 어떤 교회이냐 하면 늘 주께서 모든 것을 일임하는 교회가 되면 되겠죠.
늘 주께 모든 일임하는 교회, 주께 일임한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눈에 보이는 이것은 고정될 수가 없다는 겁니다. 만약에 고정되기를 시도한다면 가차 없이 거기에 대해서 반대하고 나설 사람들의 집합이 참된 교회입니다. 어떤 교회든 간에 그 교회 자체에 의미를 주고 복음이 아니고 예수님이 아니고 예수님 자랑이 아니고 교회자랑에 나선다면 그것을 자랑꺼리로 나선다면 그것을 과감하게 반대할 사람들이 있는 집합이 바로 그게 천국 백성이고 그게 바로 이드로에 속한 하나님의 계시에 관련된 새로운 이스라엘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불행이도 이스라엘은 정치적 집단에서 어린 양의 피로 홍해까지 건너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다시 움직이면서 결국 천부장 백부장 십부장 뭐 오십부장 그리고 이 장로제도 자체가 결국은 정치적 조직으로 변모하는데 기초가 되고 말았어요.
이것 때문에 제가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사람들은 이것이 봉사인데 소지가 아니고 봉사인데 봉사한 직분이 나한테 맞는 소유한 직분이 돼 버리면 그 사람은 콘크리트 돼요. 굳어져 버려요. 포기를 할 수가 없어요. 나는 그냥 섬기는 자에요. 라는 그런 생각보다도 ‘감히 나를?’ 감히 ‘내가 누구인지 줄 알고?’ 아까 누구인줄 알고? 할 때 첫 번째 시간에 정답을 했죠. 아까 정답을 세자로 뭐라 했습니까? “아무개” 이름조차 붙이는 것도 아까울 정도로 아무개! 아무 의미 없는 그냥 존재, 우리가 찾고 자하는 것은 주님이고 주님이 살아계신 활동이지 너, 너를 원한게 아니야!
자기가 남편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하고 결혼 안 했으면 좋겠어요. 내가 남편으로서 봉사할 수 있을까? 이런 사람 같으면 할 수 있는데 내가 남편이다. 이렇게 나오면 조금 살면 내가 하늘이다. 이렇게 나와요. 주께서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진 것도 모르고 땅으로 오신 것도 모르고 자기가 주님을 떠난 하늘 역할을 하고 있다 이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은 남자의 후손이 아니고 여자의 후손이에요.
정치적 세상에서 주께서는 오히려 소외당하는 약한 여인의 자손으로 남자 없이 태어난 자손으로서 남성이 지배하는 이 권력 세계를 전복시켜 버리죠. 이 사실을 만약에 여자들이 안다면 제발 여자 분들은 우리도 여자 목사 되게 해 달라고 데모하지 마세요. 그게 말이 됩니까? 남자 좋은 것은 자기가 다하고 우리 여자한테는 순종만 강요하고 복종만 강요하고 이게 되나? 여자도 목사 있어야 돼! 여자가 목사 있으면 칼기 부사장 됩니다.
존재가 아니고 그냥 살아있으니까 봉사하세요. 봉사하면 돼요. 같이 일하는 사람에게, 사무장에게 봉사하면 돼요. 제 생각에는 땅콩을 일등석 정도 되니까 오는데 1300백만 원 주고 이코노믹은 130만원 10배 차이나니까 땅콩을 이렇게 뜯는 수고보다 좀 해 주시면 어떠시옵니까? 이렇게 섬기는 자세로 하세요. 그러면 사무장이 싫어! 네가 나가라! 하면 예, 눈물 흘리면서 부사장이 비행기에서 내려서 걸어서 가야죠.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고 섬기러 왔다, 이 세상의 원리에 의해서 이 세상 안에서 살고 있느냐? 그렇다면 나처럼 섬겨버려라! 이 땅에서 어떻게 섬김을 받는다는 자체는 이것은 전혀 천국의 원칙과 출애굽이 안돼요. 이것은 애굽이지 출애굽이 안 된다는 말이에요.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장로를 모델로 삼아버리면 졸지에 이 사람을 정치꾼으로 만들어 버려요. 우리의 위대하신 우리의 당회장님, 당신은 배나 존경 받아야 되고 인간하나 부사장 만들기 쉽다니까요. 대단하신 분! 그렇게 하면 안 되거든요. 어떤 유명한 떡볶이 집이 있는데 그 떡볶이 집 할머니가 아무 욕심이 없어요. 돈도 관심없고 sbs에 나와서 한번 선전해 달라니까 관심이 없고 할머니 소원이 뭡니까? 그저 맛있는 떡볶이 만들어서 남들이 맛있게 먹어주면 더 이상바라는 소원이 없습니다. 이 할머니는 평생에 내가 희생해서 남들이 맛있게 먹으면 그게 바로 자기의 기쁨이 되는 거예요. 무슨 말인지 이해되시겠죠.
대가가 없어요. 이만큼 했으니까 이만큼 내놔라가 없어요. 남편 된 자들이여! 아내 사랑하기를 교회를 위해서 주님이 아무 대가 없이 주는 것처럼 그렇게 해라! 그런 남편에 대해서 아내는 주께 하듯이 존중하라! 참, 이런 본문을 보고 결혼할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아마 이것을 못 들어서 결혼을 하고 해 놓고 물릴 수 없고 애까지 생겼으니까요. 출애굽에서 정치적 집단에서 종교적 집단으로 하나님의 계시와 통하는 집단으로 이동하면서 생긴 것이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들이에요. 그들은 그들의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정 물어야 되겠거든 누구한테 물어야 되겠죠? 모세한테 물어야 돼요.
그러면 교회에서 모든 일에 심지어 청소하는 일이나 어떤 일도 하면서 누구한테 물어야 돼요? 당회장 목사한테 물을 일이 아니라 누구한테 물어야 됩니까? 주님한테 물어야 돼요. 교인들이 헌금한다, 헌금할 때 누구한테 상의해야 돼요? 주님한테 물어야 되죠. ‘목사님 이정도하면 되겠습니까?’ 그것을 목사한테 물을 일이 아닙니다. 그러면 이 교회를 누가 만들었는가? 본인들이 나 괜찮은 교회 다닌다는 그러한 되지도 않는 허영심이 한국교회를 이렇게 만들어 놓은 겁니다. 교회도 아닌 교회를 만들어 놓은 겁니다.
각자가 지은 존재감 때문에 나 적어도 이런 큰 교회 장로야! 그런 것 때문에 그것이 하나의 미혹, 악마적인 유혹이 돼서 이렇게 돼 버린 겁니다. 마귀는 귀신입니다. 마귀가 물론 귀신이죠. 마귀는 천재입니다.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고 딱 원하는 것을 채워줘요. 따라서 주께서 어떻게 하느냐? 우리가 원하는 것을 마귀한테 맡깁니다. 마귀도 주님의 종이니까 마귀를 붙여줘서 다 해요. 마귀 윗선에는 예수님이 계시니까 마귀를 무서워하지 마세요. 그 윗선을 바라봐야 돼요. 주님이 알아서 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마귀에게 흠뻑 빠져서 돈 뺏기고 시간 뺏기고 다 뺏기게 만들어버려요. 그리고 난 뒤에 우리가 무가치한 존재라는 것을 마귀를 통해서 우리의 본 모습을 밝혀주시는 겁니다.
우리교회 나오는 교인들이 다른데 돈 다 뺏기고 온 사람들이에요. 헌금할 돈도 없어요. 다 뺏겨서요. 직분은 무엇에 필요한 지분이냐? 천국에 합당한 직분이 직분입니다. 천국에 합당한 직분이 뭐냐?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받은 그 비난을 이유도 없이 계속 받고 있는 사람이 바로 천국에 합당한 기능을 하고 있는 사람이에요. 너는 교회에서 칭찬도 하지 않는데 왜 꽃꽂이를 하지? 보세요. 꽃꽂이 한다는 자체가 남한테 칭찬받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칭찬은커녕 안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래 너 잘났다고 비난 받을 일이 되어 버렸죠. 그래서 우리는 따져야 되죠. 주님, 하지 말까요? 그러면 주님이 뭐라 하시겠습니까? 너, 잘났다고 했냐? 네 솜씨 자랑하려고 했냐? 그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뭐 때문에 했냐? 주님을 섬긴다고 했죠. 그러면 계속 섬기지 이제 와서 할까요? 말까요? 그게 무슨 소리냐? 알겠습니다. 그랬더니만 주위 사람들이 핍박이 더 심해요.
사람은 행동을 하게 되면 자기 존재감을 드러내게 되어 있고 드러내게 되면 반드시 대가를 반대급부를 기대하게 되어 있습니다. 반대급부를 기대하게 되어 있는데 그 반대급부를 기대하는 그 기대로 인하여 우리는 더욱더 나는 강하다, 나는 멋있다, 나는 너보다 더 낫다는 것을 점점 더 강화시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바로 천국을 가로막는 훼방하는 하나의 오점으로 작용하는 거죠.
끝으로 아까 이야기한 하나의 세상 질서에서는 문제 있는 자가 쫓겨나서 나머지 사람들이 다시 원상회복된다고 했죠. 그런데 그게 하나의 존재를 확고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고 했죠. 이스라엘은 어떻습니까? 이스라엘은 존재에서 벗어나서 떼어내서 강제 철거해서 알 수 없는 나라, 미지의 나라로 지금 데려가는 중이죠. 거기에 대해서 피해자가 발생하는데 그 사람이 바로 선지자요 모세가 되는 겁니다. 그게 오늘날 성도가 되는 겁니다.
이 곳 말고 저곳이라 했는데 이곳을 주장하는 사람한테 많은 밉상을 받는 거예요. 그게 바로 배나 존경받을 만한 사람이에요. 왜? 성령이 아니고서야 그러한 생각이 들 수가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본인도 어쩔 수가 없어요. 이 곳이 전부가 아닌데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닌데 이런 소리 했다고 남한테 욕얻어 먹고 특히 설날에 이런 소리 했다가 온 집안한테 욕 얻어먹고 그러죠. 자식이 무슨 이야기를 하면 엄마가 있다가 ‘야야 소용없다! 세상은 끝! 끝났어!’하니까 아빠가 있다가 ‘엄마가 그런 소리를 하니까 되는 일이 없다!’ 뭐 그런 이야기 많이 듣죠. 지금 안양에 그런 가정이 있어요.
이 땅에 살면서 바로 우리가 끝을 자꾸 놓쳐 버리고 우리는 남들처럼 남들이 모델이 돼서 나의 희망이 돼서 나도 죽을 때 죽더라도 저 사람처럼 살아보고 호강하고 죽고 싶다! 그런 생각이 늘 들 겁니다. 그렇게 들수록 그 순간에 그것이 주께서 뭔가 새로 작업을 벌리는 중입니다. 그 뜻대로 되지 않고 다른 뜻대로 된다면 그 뜻을 통해서 미처 예상하지 못한 다른 감사가 나온다면 주께서 여러분들을 존재의 바탕을 들어서 다른 곳으로 지금 이동하는 중이라고 생각하시면서 되는 겁니다.
기도 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도 이미 천국의 직분을 맡은 것을 이제 알게 되었습니다. 특별한 사람이 직분 자가 아니라 성령 받은 모든 자가 직분자인 것을 서로 서로 확인해 가면서 이 땅에 머물 곳이 아니고 떠날 곳인 것을 날마다 기쁨으로 주께서 도리어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