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밧#이란#이스라엘
<알기 쉬운 이스라엘과 이란 관계>
현재 이스라엘과 전쟁 중인 하마스(팔레스타인), 헤즈볼라(레바논), 예멘 후티 반군, 시리아 등의 배후로 거론되는 이란은 과연 이스라엘과 어떤 관계로 그토록 적대적이 되었는지를 살펴본다.
역사적으로 이란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적대적이지 않았다. 문헌상으로 기록된 최초의 이란-이스라엘 사이의 접촉은 성경에 실린, 아케메네스 왕조의 키루스 2세(고레스)의 유대인 해방(고레스 칙령)이었으며, 이를 통해 바빌로니아의 포로 생활을 하던 많은 유대인이 귀향할 수 있었고, 키루스 황제의 지원으로 예루살렘 성전과 성벽이 복원되었다.
키루스 2세에 이어 크세르크세스 1세(성경 에스더에 나오는 아하수에로 왕)는 유대인을 몰살하려는 하만을 제거하였고, 유대인은 이날을 푸림으로 기억하며 오늘까지 축제를 벌인다. 이런 페르시아가 이란의 전신이다.
<사진설명: 위 - 고레스(키루스 2세) / 아래 - 아하수에로(크세르크세스 1세)>
이란은 중동에서 가장 큰 유대인 공동체의 본거지였다. 이란 유대인은 역사적으로 페르시아제국과 관련한 유대인의 후손이다. 페르시아제국이 절정에 달했을 때 유대인이 인구의 20%를 차지했다. 1948년 이란 내 유대인 인구는 10만~15만 명으로 추정된다. 1978년 이란 혁명 직전 약 8만 명으로 감소하는데, 대부분 이스라엘로 이민갔다. 중동에서 이스라엘 다음으로 많은 유대인 인구가 이란에 살았다.
페르시아는 7세기에 신흥종교인 이슬람이 들어오면서 국교가 조로아스터에서 이슬람으로 바뀌었다. 1501년 사파비 왕조 때는 이슬람 중에도 다수인 수니(Sunni)파가 아니라 소수인 시아(Shia)파의 전통을 따르는 국가가 되겠다고 선언, 시아파의 맹주가 되었다. 오늘날 대다수 중동 이슬람 국가들은 아랍 민족에다 아랍어를 사용하는 수니파이지만, 이란은 아리안족 또는 인도·유럽어족으로 페르시아어를 사용하는 시아파다.
1921년에는 카자르 왕조의 장군이던 레자 칸이 영국의 지원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은 뒤, 1925년 ‘레자 샤(Shah·이란의 왕) 팔레비’가 되어 정식으로 팔레비 왕조를 시작했다. 1935년에는 나라 이름을 ‘이란제국(Imperial State of Iran)’으로 바꾸었다.
레자 샤 팔레비의 아들인 모하마드 레자 샤 팔레비, 즉 팔레비 2세는 1963년부터 이른바 ‘백색혁명’을 일으켰다. 이란의 근대화와 서구화를 제창하며 광범위한 개혁 정책을 폈다. 국영회사 매각, 노동자에 대한 이익배당, 문맹 퇴치, 히잡 착용 금지, 여성 참정권 확대가 대표적인 사례다.
하지만 토지개혁을 실시하면서 큰 지주였던 모스크(이슬람사원)와 토호 세력의 토지까지 대거 국유화시키는 과정에서 강력한 반대에 봉착했고 이는 대대적인 시위로 이어졌다. 결국 1979년 이슬람 혁명의 한 원인이 되었다.
<사진 설명: 왕정국가 이란(팔레비왕 재임 시)과 신정국가 이란(현재)를 비교하는 대표적 사진으로, 좌 - 1971년 이란 테헤란 대학 학생들 모습 / 우 - 현재 차도르를 쓰고 반 사우디 시위에 나선 이란 여성의 모습>
팔레비 왕조는 초반부터 친(親)서방 정책을 폈고, 1948년에 독립한 이스라엘과도 친했다. 고대 페르시아 시절의 인연을 이어간 것이다. 이란은 이슬람 국가로는 튀르키예에 이어 두 번째로 이스라엘을 독립국으로 인정했다.
특히 이란은 이스라엘의 주요 석유 공급원이 되었다. 양국은 서방에 석유를 팔기 위해 지중해에 있는 아슈켈론에서 홍해에 있는 에일랏까지 송유관을 깔기도 했다.
당시 이스라엘 국영 엘알(EL AL) 항공은 텔아비브 벤구리온 공항에서 테헤란까지 직항로를 개설했다.
이스라엘 건국 초기에는 이란 출신 유대인들이 활약했고, 반대로 이란에서도 현지에 오래 정착했던 유대인들이 관료로 일하며 백색혁명에도 앞장섰다. 테헤란에만 30여 개의 시너고그(유대교 회당)가 있었을 정도다.
하지만 이런 밀월 관계는 1979년 프랑스에 망명 중이던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1900~1989)가 일으킨 이슬람 혁명으로 인해 깨지고 말았다. 당시 중동의 정세는 3차 중동전쟁에서 가말 압델 나세르 이집트 대통령을 비롯한 아랍권 독재정권은 국민의 신망을 완전히 잃어버렸고, 정권에 대한 실망은 이들 정권의 기반인 아랍 내셔널리즘과 아랍 사회주의 이념의 퇴조로 이어졌다.
그 빈자리를 채운 게 이슬람주의였고 이슬람 근본주의로 이어졌다. 1979년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가 이란 혁명을 일으킨다. 이를 통해 팔레비 왕조를 축출하고 이슬람 근본주의를 내세웠다.
호메이니는 1978년 10월부터 이란 국민에게 육성 녹음으로 “팔레비 왕정을 전복하고 이슬람 공화국을 세우자”라는 메시지를 보내 혁명을 선동했다. 1979년 2월 1일 이란에 귀향한 호메이니는 신정(神政)과 공화정(共和政)을 결합한 정치형태인 ‘이란 이슬람 공화국(Islamic Republic of Iran)’을 세웠다. 호메이니는 “이스라엘은 이슬람의 적이자, 미국이라는 큰 사탄 옆에 있는 작은 사탄”이라고 외쳤다.
이스라엘·이란 관계는 2000년대 들어 이란이 핵무기 개발을 본격화하면서 완전히 틀어졌다. 이란은 레바논의 헤즈볼라, 팔레스타인의 하마스를 통해 이스라엘을 괴롭혔다.
헤즈볼라는 ‘이란 호메이니 이슬람 원리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시아파 무장단체로 1982년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의 뿌리를 뽑겠다며 팔레스타인 난민이 많이 머물고 있던 레바논을 무력 침공하자 이에 대항하기 위해 결성됐다. 물론 이란이 지원했다.
이란은 특히 2011년 시리아 내전을 통해 시리아 정부군을 지원한 대가로, 이란~시리아~레바논으로 이어지는 무기 수송 루트를 확보했다. 이를 통해 하마스와 헤즈볼라에게 광범위한 지원이 가능해졌다.
이란은 지금도 대통령과 의회가 있지만, 가장 높은 성직자를 의미하는 ‘아야톨라’인 세예드 알리 하메네이가 최고지도자이자 실권자다. 이란은 호메이니의 메시지에 따라 “미국은 큰 사탄, 이스라엘은 작은 사탄”이란 기조를 버리지 않고 있다. 또한 이슬람 혁명의 수출국을 자처하고 있다. 목적은 이스라엘의 영원한 제거다.
팔레스타인의 하마스, 레바논의 헤즈볼라, 시리아의 바샤르 알 아사드 정권, 그리고 예멘의 후티 반군(叛軍)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행동대원들을 거느리고 있다. 이란혁명수비대의 정예군 이름은 ‘쿠드스’이다. 쿠드스는 예루살렘을 가리킨다. 그만큼 이스라엘과 유대인에 대한 적개심이 강하다.
이스라엘과 이란은 거리상으로도 멀다. 이스라엘의 인접 국가는 이라크, 시리아, 요르단이 있고 그 너머에 이란이 있다. 국경이 붙어 있지도 않고, 경제적으로도 갈등을 빚을 소지가 별로 없다. 과거에 사이가 나쁘지도 않았다.
만일 키루스나 크세르크세스와 같은 군주나 지도자가 다시 이란을 통치한다면 중동에는 평화가 찾아올까? 아니면 이제는 전설이 되어버린 먼 역사의 이야기일 뿐일까?
<월간샤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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