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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 19세기말, 20세기초 사대부가 노부부 모습.
부부 사이가 안좋은 듯 부인이 남편에게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고 시선도 다른 곳을 향하고 있다. 유희춘과 아내 송덕봉은 금슬이 좋았다. 수원광교박물관 소장.
미암일기는 유희춘이 1567년(선조 즉위년) 10월 1일부터 1577년 5월 13일 죽기 전날까지 10년에 걸쳐 친필로 쓴 일기이다. 명종말 선조초 고위직을 역임하면서 경험한 사건을 비롯해 당대 정치, 사회, 경제 상황와 풍속 등을 낯낯히 기술하고 있다.
아내와의 애정, 집안 경제, 건강 등 개인 생활사도 사실적으로 담았다. 조선시대 개인 일기로는 가장 방대해 사료로서 가치가 매우 높아 보물 260호로 지정됐다.
송덕봉은 담양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학문과 시문을 익혔다. 16세이던 중종 31년(1536년) 9세 연상의 유희춘과 혼례를 올렸다. 유희춘은 양재역벽서사건(명종 2년·1547년 윤원형 일파가 대윤 세력을 숙청하기 위해 꾸며낸 사화)에 연루돼 함경도 종성 등에서 20년간 유배생활을 했다.
송덕봉은 그동안 시어머니를 봉양하고 시어머니의 삼년상을 치른 후 홀로 남편을 찾아가 귀양생활을 함께 견뎠다. 슬하에 1남 1녀를 뒀다. 유희춘의 일기에서 그녀는 당당하고 호방한 기상을 가졌고 명민하면서도 서사에도 두루 능한 것으로 묘사된다.
사진2. 19세기말, 20세기초 금관조복(조선시대 문무백관이 국가대사때 착용하던 관복) 차림의 관찰사(중앙)와 수행원. 유희춘은 전라관찰사 때 기생들을 가까이해 아내의 애를 먹였다. 캘리포니아디지털도서관.
유희춘은 "여자를 멀리하라"는 아내의 부탁에도 주위에 여자가 많았다. 그는 오랜 귀양에서 풀려나면서 그때의 들뜬 기분이 일기에 고스란히 적었다. 그런데 그는 첩의 집에 길조가 생겨 자신이 행운을 입었다고 이야기한다.
그가 고향으로 돌아온 선조 1년(1567년) 12월 5일 일기에 "첩의 집에 죽었던 배나무가 소생해 병인년(1566년)에 가지와 잎이 싹 트더니 금년에는 열매를 맺었다. (내가 유배에서 풀린 것은) 참으로 길조가 뚜렷이 드러난 것"이라고 했다.
유희춘은 전라감사(관찰사)에 부임해서도 기생들과 어울렸다. "옥부용을 불러다가 만나 봤다. 그녀는 임인년(중종 37년) 봄에 내가 설서(정7품 벼슬)로 있을 때부터 사귀어왔다. 그런데 금년에는 옥경아와 친밀하게 지내니 전주에 두 사람이 있게 되었으니 우스운 일"이라고 했다.
송덕봉은 여자를 가까이 하는 남편을 늘 나무랐다. 유희춘이 옛 친구를 거론하며 신의가 부족하다고 탄식하자 부인은 "남이 나에게 신의를 저버릴지언정, 나는 남에게 신의를 저버리는 일이 없어야 하니 우리는 절대 그러지 맙시다"라고 꼬집었다. 남편이 전라감사에 제수됐을 때 송 씨는 "정욕을 절제하라"고 요구했다.
선조 5년(1572년) 10월, 유희춘은 종2품 동지중추부사에 임명되어서는 아내를 동반해 한양으로 올라왔다. 두 사람은 한양에서 금실이 무척 좋았다. 유희춘은 자신의 일기에 이 때를 "부인과 함께 서로 태평의 즐거움을 누리는 것을 자축하며 화목한 기운이 넘치니 금실의 어울림이 만년에 더욱 깊다"고 묘사했다.
<미암일기>에는 아내와의 이야기 외에도 동시대의 다양한 인물을 품평하는 대목도 다수 등장한다. 기대승을 두고 "승지(기대승)가 회재 이언적의 행장(죽은 사람의 평생을 적은 글)을 보내왔다. 대개는 아주 좋으나 다만 가끔 허술한 곳이 있다"고 했다.
이황이 주자(주희)에 대해 "배워서 알았고 이롭게 행한 대현일 뿐 성인은 못 된다"고 하자 유희춘은 "퇴계가 세속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것이니 유감"이라고 했다. 퇴계가 주자를 성인으로 받들지 않는 것에 비위가 상한 것이다.
임금은 어떻게 평가했을까. 당대 학문에서 따라올 자가 드물었던 유희춘은 매일 새벽 임금과 고금의 학문을 토론했다. "성상(선조)이 이르기를 '내가 좋은 정치를 할 수 있겠소' 하였다.
이이가 대답하기를 '영명하신 전하께서 어찌 못하겠습니까' 하고 내가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청명하고 공정하시어 참으로 큰일을 할 성품이십니다. 다만 타고난 바탕이 고집스러워 통창(시원스럽게 넓고 환함)하지 못하신 데가 있습니다' 하였다."
사진3. 19세기말, 20세기초 고관.
미암일기의 저자 유희춘은 정치사건에 휘말려 20년간 유배생활을 했지만, 학문이 높아 임금(선조)에게 학문을 가르쳤으며 대사성, 부제학, 예조·공조·이조참판 등의 고위직을 두루 지냈다. 캘리포니아디지털도서관.
<미암일기>는 당대 세태도 묘사한다. 중국으로 가는 사신단은 물건을 잔뜩 싣고 가 장사를 했는데 그곳에서 항상 비웃음거리가 됐다.
유희춘은 선조에게 "사신이 일 년에 5~6번이나 되는데 매번 짐을 싣고 가는 말이 일백 수십 필에 달합니다. 연경 조정의 대우가 유구국보다 못합니다. 유구의 사신은 짐이 적지만 우리나라 사신은 짐이 너무 많고 하인들까지 모두 무역을 하기 때문"이라고 고했다. 선조가 이 말을 받아들여 백년의 폐단을 고쳤다.
비상시를 대비해 나라에서 식량을 준비해야 하지만 조선 중기 국가 식량 비축량은 일 년치가 채 못 됐다. 일기는
"국가의 기강이 해이해져 창고지기들이 권력을 쥔 간신들에게 뇌물로 주기 위해 쥐새끼 마냥 무수히 도적질했다. 더욱이 임술년(명종 17년·1562년) 이후 해마다 국상이 생겨 1년 동안 사용한 쌀이 15만 섬에 이르니 이제는 쌓아놓은 쌀이 10만 섬도 채 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신입 관원을 괴롭히는 관행도 크게 횡행했다. 일기는
"시궁창의 진흙을 새로 급제한 이의 얼굴에 바르고 관과 의복을 찢고 더러운 물속에 밀어넣어 귀신 형상을 만드니 차마 볼 수가 없다. 몸을 상하기도 하고 병을 얻기도 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고 전한다. 보고를 받은 선조가 크게 노해 엄단할 것을 지시했다.
악습은 이 뿐만 아니었다. 관료들이 사임하고 낙향할 때 전별식 또한 요란하기 이를 데 없었다. 선조 2년(1569년) 9월 유희춘은 병을 이유로 3번이나 사임장을 올렸지만 임금이 만류했다. 대신 휴가를 줄테니 좀 쉬었다가 돌아오라고 명했다.
그러자 조정의 관료들이 돌아가면서 전별식을 마련해 주었다. 9월 21일부터 27일까지 이어진 전별식은 안주가 곁들여진 술자리가 마련된 것은 물론 기녀와 악공까지 동원됐다.
한강을 건너는 배까지 전별객들이 몰려들어 고향으로 가는 여정이 지체됐고 끝내 아내 송 씨가 먼저 출발해버렸다.
서울로 다시 돌아왔던 유희춘은 선조3년(1570년) 11월에 결국 사직을 하고 낙향했다. 역시 시끌벅적한 술자리가 곁들여진 전별식이 쇄도했다.
[출처] : 배한철 매일경제신문 기자 :<배한철의 역사의 더께> - 20.여자 밝히는 남편 매섭게 꾸짖은 대학자의 부인 [미암일기] / 매일경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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