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69
ㅡ 신라의 전성기 3 ㅡ
( 진흥왕 2, '지소태후'와 화랑세기 편)
'진흥왕!'
신라 왕들 중 가장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고 유명한 왕이다. 아마 진흥왕을 모르는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학창시절 국사 시험에 단골소재였던 <진흥왕 순수비> 를 빼면 아는 것도 별로 없을 것이다.
'진흥왕'은 신라 최고전성기를 열었던 왕이다.
백제 '근초고왕', 고구려 '광개토대왕'과 더불어 삼국시대 대표적인 청년 정복군주로 평가받는 명군 이다. 또한 '지증왕', '법흥왕' 뒤를 이어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 기틀 을 다진 현군이다.
진흥왕 시기 치세를 전후로 신라는 실질적으로 국력상에서 백제를 추월했고, 고구려와 호각을 다툴 정도로 고구려를 위협하고 강성해지면서 6세기 전반에 걸쳐서 한반도에서 강력한 위용을 뽐내게 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진흥왕 정복전쟁을 계기로 신라는 향후 100여 년 동안 백제와 고구려를 동시에 맞닥뜨리게 되는 형세에 놓이게 되면서 소모적인 양면 전선에 휘말리기도 했다.
'진흥왕'(眞興王, 540~576년)은 신라의 24대 왕이다.
꽤 오래 전 선풍적인 인기를 끈 '선덕여왕' 이라는 역사드라마 초기에 진흥왕이 잠시 나오는 장면을 봤다. 나이많은 '이순재' 배우가 진흥왕으로 나오는데 허연 머리 허연 수염에 너무 나이 먹어 보였다. 그 드라마를 볼 당시에는 당연한 장면으로 보았다.
그러나 역사 속 실재 진흥왕은 우리 상상 속 이미지와 많이 다르다. 진흥왕은 6세라는 너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젋다면 젋다고 할 수 있는 43세 나이에 죽었다.
진흥왕은 너무 어려서 즉위하여 초기에는 어머니인 '지소태후'가 섭정을 맡아 10년을 넘게 국정을 운영했다. 보도부인(保道夫人 법흥왕 정비. 진흥왕 외할머니 이면서 큰어머니)가 섭정을 했다는 설과 1년 정도 섭정하다 지소태후에게 물려 주었다 고도 한다.
어쨌든 진흥왕 초창기 업적은 모두 '지소태후' 업적이라 보아도 무방하다.
그런만큼 진흥왕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기 전 '지소태후'에 대해 알아보고 가야한다.
사실 지소태후를 살펴보면 신라 왕가 혼인문제나 성 풍속인 근친혼, 자유스러운 성개념등에 대해 지금 상황과는 너무 달라 깜짝 놀랄 것이다.
이런 이야기는 너무 지나치고 노골적이어서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자세히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지소태후를 자세히 알아보기 전 중요한 역사 책을 먼저 정리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역사 책은 <화랑세기>이다.
지소태후 뿐만 아니라 선덕여왕 드라마 진짜 주인공 '미실'과 자유롭고 요쌍한 성풍속의 화랑에 관한 이야기등도 거의 대부분
'화랑세기'에만 나온다.
'화랑세기'는 신라 시대 화랑을 다룬 사서이다. 신라중기 진골출신 역사학자 '김대문'이 저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에서
신라왕호에서부터 각 화랑 생애에 이르기까지 많은 부분 '화랑세기' 를 인용하고 있다.
적어도 고려시대 후반, 즉 화랑세기가 편찬된 시점에서 500여년이 지난 원 간섭기까지는 원본 화랑세기가 존재했다는 것은 확실한 사실이다. 이는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에서 자주 인용되는 것으로 증명할 수 있다.
하지만 조선시대 서적에서는 이미 화랑세기가 사라졌다는 언급이 있는 만큼 이 무렵에는 이미 원본은 존재하지 않은 것으로 추측된다.
고려시대까지 잘 전해져 오던 화랑세기가 조선시대에는 왜 사라졌을까?
아마 화랑세기 내용들 중 신라 성풍속이 근친, 동성간에도 너무 자유롭다 못 해 지나치게 노골적 이어서 '남녀칠세부동석'을 부르짓던 성리학 꼰대 조선사대부 들이 도저히 받아 줄 수 없었기에 금서취급을 하다보니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1989년 ‘화랑세기’ 필사본이 공개되는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32쪽짜리 이 필사본이 만약 ‘삼국사기’에 언급된 김대문 ‘화랑세기’가 맞다면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사서인 ‘삼국사기’ 보다 무려 460여년이나 이른 역사기록이 된다.
그러나 임창순 문화재위원장, 이기백 한림대 교수, 이기동 동국대 교수 등 고대사 권위자 들이 1989년 공개된 필사본 화랑세기가 위작일 가능성을 제기했다.
심지어 발견 당시 필사본을 검토한 정중환씨도 “왕족과 귀족들의 난혼과 성행위가 일본의 난혼과 흡사해 의혹이 있다”며 한걸음 물러났다.
지금도 '화랑세기' 진위논쟁은 현재진행형이다.
이처럼 우리나라 보수 역사학자 들은 무사정신으로 충만한 삼국사기 삼국유사 화랑들과 달리 ‘화랑세기’는 남자 화랑이 여자 보다 더 이쁘게 화장과 치장을 하고 동성애를 포함 화랑, 원화들 자유분방한 성을 다루었다고 해서 위서로 보려한다는 재야역사학자 들 주장도 있다.
나는 역사 전문학자는 아니라서 잘은 모르겠지만 화랑들 자유분방한 성 풍속을 담았다고 해서 위작으로 보는 것만큼은 아니라고 본다.
사실, 최근에 1500년 전, 신라 시대 토우가 발견 되었는데 거의 화랑세기 내용과 일치했다 한다.
(아래사진 참고)
화랑세기 필사본 책을 쓴 저자는 남당 '박창화'이다.
'박창화'는 일제강점기 시절 태어나 1960년 대까지 살았던 인물로 일제강점기 시절 조선 고서적을 다루는 일제관청인 '서릉부'에서 12년 간 근무했다. 그 시절 화랑세기 원본을 보고 '화랑세기' 를 필사하여 본인이 죽을 때까지 비공개하고 개인적으로 보관하고 있었다.
이 책이 공개된 것은 박창화가 사망한 지 30여 년이나 지난
1989년 2월 이었다.
박창화 제자 김종진 아내 '김경자' 가 생전에 박창화가 남겼다는 소위 '화랑세기 필사본'(이후 등장한 필사본 중 발췌본으로 칭해짐.)을 서울신문에 공개했다. 6년 뒤인 1995년 4월에는 일본 궁내성 용지에 필사되어 있는, 그 전 발췌본보다 좀 더 상세한 내용 필사본(모본)이 공개되었다.
금석문들을 제외하면 신라시대 1차 사료가 사실상 전무한 현실 에서 공개된 화랑세기 필사본이 진본이라면 그 역사적 가치는 대단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발견된 경위가 불확실한 데다 기존 학계 연구나 다른 사서 와 배치되는 부분이 상당히 많기 때문에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이다.
화랑세기가 진짜라 가정하고 내놓은 논문도 상당수 있으며 학계에서는 화랑세기가 진서인지 위작인지의 여부에 대해 상당한 논쟁이 벌어졌고, 현재 주류 사학계에서는 위작으로 보고 있다.
그런 논란의 자세한 이야기는 내 글이 너무 길어지기때문에 이곳에 다 쓸 수는 없다.
하지만 앞으로 내 글에는 화랑세기 내용도 상당히 나올 것이다. 그러나 화랑세기 필사본 에 나온 이야기라는 것은 밝힐 것이다.
참고로 '필사본 화랑세기' 위서 논란때문에 '환단고기'와 비슷하게 오인되어 "화랑세기란 책 자체가 위서다"라고 오해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러나 '필사본 화랑세기'가 위작일 수는 있어도 신라시대에 쓰여진 '화랑세기' 책 자체는 실존했던 역사책이 맞다. 다만 이미 사라져 현존하지 않을 뿐이다.
'지소태후'에 대한 '화랑세기 필사본' 내용은 정말 놀랍고 그 가계가 헷갈릴정도로 복잡하다.
지소태후는 법흥왕 딸로 태어나 숙부인 '갈문왕'(자기가 왕이 되지 못하고 아들이 왕인 경우, 마치 조선 대원군처럼 대우) '입종'에게 시집을 가서 후에 진흥왕이 되는 '삼맥종'을 낳았다.
이 둘 사이 차남으로 '숙흘종'을 낳았는데 그의 딸 '만명부인'은 '김유신'을 낳는다.
지소태후가 처음에는 어쩔 수 없어 늙은 삼촌과 살아야 했지만, 본남편이 죽고 나서는 자기가 맘에 맞는 사람을 고르기로 했다.
지소태후 2번째 남편 '이화랑' 이다. 이 둘 사이에 '만호태후'
(동륜태자와 결혼하여 진평왕을 낳음)를 낳는다.
지소태후 3번째 남편은 앞 편에서 언급한 바 있는 <독도는 우리땅> 의 유명한 장군 '이사부'(울릉도 점령으로 유명한 장군)이다.
이 둘 사이에 지소태후 삼남이 되는 '세종전군' 6대 풍월주를 낳고, 차녀로는 '숙명공주'
(진흥왕의 후궁, 아버지와 같은 이화랑과 간통하여 '원광법사'를 낳음.)를 낳았다
지소태후 4번째 남편으로는 '박영실'(당시 재상)이다.
이 둘 사이에서는 딸 '황화공주'
(김무림과 결혼하여 자장율사를 낳음)와 딸 '송화공주' (진평왕의 비 마야왕후 어머니,복승갈문왕 부인, 딸인 마야왕후는 나중에 선덕여왕을 낳음)낳는다.
지소태후 5번째 남편 '구진'
(태후 침실을 돌보는 신하) 이다.
이 둘 사이 딸 보명궁주는 미모가 뛰어나 3명의 왕을 모신다. ( 진흥왕, 진지왕, 진평왕의 후궁)
진흥왕의 왕세자인 '동륜태자'는 자기 아버지(진흥왕) 후궁인 보명공주에게 환장하여, 밤에 몰래 담장을 넘어 그 짓을 하다가 개에게 물려 죽고만다. 그래서 신라 삽살개가 명견이라 소문나게 되었다고도 한다.^^
아직 밝혀지지 않은 남편이 서너명이 더 있었다고도 한다.
현재 미국 할리우드에서도 보기 드문 참으로 혼란스러울 정도로 엄청난 남성 편력이다.
또 지소태후 후손들은 대부분 역사교과서에도 나올만한 유명인물들이 된다.
어쨌든 지소태후는 진흥왕이 6살의 어른 나이로 왕으로 오르자 섭정을 하며 뛰어나게 정치를 주도하여 신라 최고전성기를 열어주는 역할을 잘 해냈다.
진흥왕 초기 주요업적은 대부분 지소태후 업적이라 생각하면서 진흥왕 주요업적들을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이어서 진흥왕 주요업적이 계속 됩니다.
ㅡ 초롱박철홍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