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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덕 영해면 원구리 창수면 인량리 일원 탐방 안내
☻ 영덕군 강구면 강구리 대게종가(☏054-733-3838/054-733-4147, 대공원에서 117km, 1시간 30분) 혹은 영덕군 축산면 경정리 경정횟집(☏054-734
-1768, 대공원역에서 135km, 1시간 48분)에서 중식 후, 오후 1시 30분 탐방 시작.
■영덕(盈德) 영해면(寧海面) 원구리(元邱里)-[대공원역에서 141km, 1시간 51분, 강구리에서 24km, 21분]. 조선 중기의 학자 남경훈이 벼슬의 뜻을 버리고 강학했던 곳. 조선 중기에 짧은 생애를 살았으나 의병장으로서, 효자로서, 학자로서 충과 효와 학문으로 영원한 불멸의 혼을 남긴 난고(蘭皐) 남경훈(南慶薰:1572~1612)이 있다. 그가 살았던 영덕군 영해면 원구리에는 난고가 강학했던 난고정(蘭皐亭)이 남아 있다. 또한 정자보다 더 오랜된 난고종택, 난고불천위사당, 난고의 손자인 남로명(南老明)이 지은 만취헌(晩翠軒) 등이 그대로 남아 전한다. 난고의 16세 종손 되는 남응시옹(86)은 내외분이 건강한 기력으로 후원에 매화나무를 기르면서 선대의 정신을 면면히 계승해 가고 있다. 난고 종택은 400년 동안 한 번도 양자를 들여온 적도 없고, 다른 사람의 글을 빌린 적도 없다고 하였다.
지수( ) 정규양이 쓴 난고 행장(行狀)에 의하면, 난고는 대대로 급제한 사대부가 후손인 남의록(南義祿)의 아들로 태어났다. 남의록은 퇴계 제자인 유일재(惟一齋) 김언기 문하에서 수업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규합하여 토벌한 공로로 조산대부 판관벼슬을 지냈다.
난고는 어린 시절, 가정에서 효경(孝經)을 받아 읽고 신명처럼 받들어 실천하였다. 훗날 가학(家學)을 계승한 난고는 부친의 명으로 과거에 응시하였는데, 당시 영해부사였던 우복(愚伏) 정경세는 손을 두드리면서 그를 칭송하였다고 한다. 승지(承旨) 조덕린이 지은 난고 묘갈명에는 우복이 난고의 글을 보고 크게 기특하게 여기면서 '이는 과거 정도의 문장이 아니다'라고 적고 있다. 향시에 장원을 하였고 진사시험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난고는 혼란한 당시 조정에서 벼슬할 뜻이 없었다. 오직 고인들의 전적과 경(經)·사(史)·자(子)·집(集) 읽기를 좋아하며, 오로지 정밀히 분석하고 의리를 연구하여 몸을 닦고 행동을 삼가는 것으로 근본을 삼았다. 특히 예학에 대한 깊은 연구로 당시 사대부들이 의문점을 그에게 물어서 결정할 정도로 확고한 판단을 내려주었다고 한다.
난고의 부친은 영해에서 임진왜란 때 창의하여 향병을 모집하였다. 당시 난고는 20세의 청년임에도 불구하고 필사적으로 부친을 따르려 했다. 그러자 부친은 "국사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신하되고 자식된 자가 높은 베개에 편안히 누워 있을 세월은 아니다. 너가 약관의 나이로 전란에 임하여 나라 위해 목숨 바칠 의리를 알고서, 한 몸 죽고 삶을 계산하지 않으니 내 어찌 자식 사랑하는 애정 한 생각으로 너의 가상한 뜻을 막겠느냐(國事至此, 此非臣子高枕安臥之日也. 汝以弱年, 惟知臨亂死上之義, 而不計己之有無, 則吾豈可以 情一念, 沮其志尙乎)"라고 말했다.
이렇게 말하면서 부자가 함께 출두하니 고을에서 모두 이들의 충의심에 감동하여 의병에 서로 다투어 참가하였다. 난고 부자는 경주성 전투에 참전, 경주성 수복을 위한 문천회맹(蚊川會盟)에서 결사항쟁을 서약한 후 경주성을 수복하였다. 그 후 영천성 전투, 당교전투, 팔공산회맹 등을 통해 전공을 세웠다.
정유재란 때 창녕 화왕산 전투에 참가하여 망우당 곽재우 장군에게 군대의 선발, 교육, 보급 방법 등을 제시한 난고의 승전전략책은 의병전사에 길이 빛나는 탁견이었다. 왜란 7년 기간 중 5~6년 세월을 전투장에서 보내고 돌아와서는 논공행상에 참여하지 않고 오직 성인의 글을 읽고 실천하는 데에 전념하였다. 현재 망우공원 임란호국영남충의단에는 부자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척암(拓庵) 김도화(金道和)가 쓴 난고정 기문에 따르면, 난고는 의병에서 돌아와 벼슬에 뜻을 접고 사는 집 동산의 작은 연못위에 정자를 처음 지으니 선조 39년(1606)이었다. 그 후 세월이 흘러 본래의 정자는 퇴락하여 무너졌다. 유림에서 난고를 추모하는 광산서원(光山書院)을 삼광동(영해면 묘곡1리)에 세우고, 1684년에 서원 안에 난고정을 복원하였다. 그러나 대원군 서원 철폐 때 모두 훼철되고 말았다. 1868년에 다시 난고 종택 옆에 복원하게 된 것이 현재의 건물이다.
난고정 본래 현판 글씨는 권진모(權進模)의 글씨였으나 도난당하고, 조선 헌종 때 영해부사인 남상교가 쓴 글씨가 남아있다. 척암은 '당시 난고(蘭皐)라고 이름을 지은 뜻을 감히 섣불리 말을 못하겠으나 아마도 두문(杜門)독서를 하면서 분수 밖에 경영을 구하지 않았다. 그래서 공자가 위나라에서 노나라로 돌아올 때 언덕에 핀 향기로운 난을 보고 불우한 마음을 의탁하여 부른 의란곡조(蘭曲操)에 느낌이 있어 스스로 비유함이 아닌지 모르겠다'라고 서술하였다.
난고의 부친 조산공은 임란 평정 후 자제들은 학업에 전념토록 하였고, 자신은 나라의 유사시를 대비하여 무과시험에 병과 1등으로 급제하여 왜군의 재침을 대비하였다. 예빈시주부, 군기시판관 등을 역임하였고 만년에는 탐관오리 영해부사의 가혹한 농민수탈에 농민을 대표하여 탄핵하려다가 감옥에 갇혀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난고는 순찰사에게 나아가 원통함을 호소하고 자신이 늙은 부친의 옥고를 대신 받겠다고 피눈물로 간청하였다. 순찰사는 효성에 감동하여 부친을 사면하였고, 난고는 부친 대신 감옥에 갇혀 추운 겨울을 나면서 병을 얻어 1년 후에 운명하니 41세의 장년(壯年)이었고 나라의 간성(干城)이었다.
난고의 아들 안분당(安分堂) 남길(南佶)은 진사 시절 성균관에 당시 광해조의 폐모사건 가담자가 있음을 알아채고 지우인 성이성(成以性)에게 '백설이 장차 어지러이 날릴 것 헤아리니(白雪調將亂)/ 봄(朝廷)기운 더욱 차구나(靑陽氣更寒)/ 풍진세상에 모름지기 각자 보전해야 되리니(風塵須各保)/ 세상일 절로 단서가 많구나(世事自多端)'라는 한 수의 시를 남기고 초연히 낙향하여 부친 난고의 뜻을 계승함으로써, 훗날 폐모사건 주동자 색출 과정에서 성균관 진사가 모조리 연루되는 화를 면했음은 유명한 일화이다.
증손자 되는 만취헌(晩翠軒) 남로명은 대과에 급제함으로써 문호가 크게 열렸고, 난고의 자손에 진사 28명, 문과급제자만 8명이 배출되었으니 충효의 가문을 누가 번창하지 않는다고 말했던가.
난고는 문장과 시가 뛰어나 당시 남산문장(南山文章)이라는 칭송을 받았다. 특히 "예란 집에서 날마다 행하는 것이니 익숙히 강론하지 않으면 그릇되기 쉽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주자가례의 요점을 뽑아 선현들이 의심한 문제점을 설파, 주석을 붙여 동이(同異)점을 판별하고 그릇된 곳을 고증하여 사례해의(四禮解義) 2책을 저술하였다. 난고선생 유고 1책이 전하고 있다. 난고종택의 남종통기(南宗通記) 등 많은 전적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귀중한 학술자료가 되고 있다.
■영덕 창수면(蒼水面) 인량리(仁良里, 나라골)-[대공원역에서 142km, 1시간 56분, 영덕군 강구면 강구리에서 25km, 28분, 영덕군 축산면 경정리에서 13km, 21분]. ‘팔성종실(八姓宗室)’이 모여 사는 마을이라 하는데, 재령이씨/안동권씨/영천이씨/대흥백씨/영양남씨/ 외에 소수인 선산김씨/야성정씨/무안박씨/함양박씨/평산신씨 등이 집성하여 살았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인량리의 양호한 입지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선 후기에 편찬된 전통 지리서인 ‘산경표’에 의하면, 북에서 동해안을 왼쪽에 끼고 힘차게 달려 내려온 백두대간은 태백산에서 잠시 숨을 고른 후, 소백산ㆍ지리산을 향하여 그 머리를 서남쪽으로 틀어 돌린다. 그러면서 거기에서 갈라져 나온 산줄기 하나가 달려온 방향 그대로 저 멀리 부산 다대포 바닷가의 몰운대를 향하여 남쪽으로 뻗어가고 있으니 그것이 바로 낙동정맥이다.
바로 이 낙동정맥을 담장으로 삼아 경상북도 동해안 지역이 하나의 지역적 구분을 이루었다. 그렇지만 이 지역을 해변의 협소한 땅으로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포항에서 울진방면 7번 국도를 따라오노라면 곳곳에 넓은 평야가 시원하게 펼쳐지는데, 흥해, 영해, 평해가 그곳이다.
인량리는 바로 그 중의 하나인 영해평야를 생산기반으로 삼을 수 있었다. 이와 더불어 풍부한 해산물을 제공하는 동해 역시 그리 멀지 않은 점도 함부로 보아 넘길 일이 아니다.이런 점에서 인량리는 복수의 유력한 가문들이 공존할 수 있을 정도의 탄탄한 기반을 갖춘 천혜의 땅이었고, 그것이 이 마을을 ‘팔성종실’이 모여사는 마을로 만든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인량리의 옛 이름은 잉량화(仍良火)였다고 한다. 지명 끝의 ‘화(火)’는 곧 ‘불’, ‘벌(伐)’과 통하니 이곳이 넓은 벌판을 끼고 있는 땅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일찍이 삼한시대에 이곳에 우시국(于尸國)이라는 소국이 자리잡고 있었다는 설도 있지만, 뒷받침할만한 증거는 찾을 수 없다.
후대에 이르러 마을의 지세가 낙동정맥의 한 봉우리인 칠보산을 거쳐 등운산으로 이어져 온 산줄기가 마치 학이 날개를 펴고 날아가는 형국으로 마을을 감싸고 있고 앞으로 송천이라는 하천이 흘러가는 길지이므로, ‘나래골’, ‘익동(翼洞)’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그것이 음전(音轉)하여 ‘나라골’, 국동(國洞)으로도 불렸다고 한다.
인량리에 유력한 성씨들이 들어와 자리 잡기 시작했던 시기는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조선시대에 이르러 그 절정을 이루었다. 그 흔적들이 오늘날 20여 채의 고택으로 남아 있지만, 거기에는 인량리 마을을 구성했던 종가들의 세월에 따른 부침이 반영되어 있다.
10개 성씨 중에는 그 세가 약해져 고택을 남기지 못할 정도로 마을에서 흔적이 사라져 버린 경우도 있고, 그와는 반대로 융성을 거듭했던 가문은 분파(分派)에 의해 대종가 외에 파종가(派宗家)가 종택으로 지칭되고 있는 경우도 없지 않다.
세월에 따른 인량리 마을의 변화상을 알려주는 자료로는 일제 강점기인 1935년에 조선총독부가 간행한 젠쇼에이스케(善生永助)가 지은 ‘조선의 취락(朝鮮の聚落)’이라는 책자를 들 수 있다. 이는 조선의 특색있는 촌락을 조사하여 식민통치를 원활하게 해보려는 의도에서 만들어진 책이지만, 20세기 초 급격한 변화를 경험했던 촌락들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는지를 알려주는 유용한 자료가 되기도 한다. 이 책에는 인량리를 송천을 건너 마주하고 있는 원구리와 함께 ‘특색있는 동족부락’으로 소개하고 있다. 이에 의하면 1930년대 초반 조사 당시의 인량리에는 재령이씨 35호 180명, 안동권씨 25호 130명, 영천이씨 20호 108명, 대흥백씨 8호 46명, 영양남씨 30호 158명, 기타 성씨 44호 125명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재령이씨 종가와 안동권씨 종가는 자산이 중류 정도이지만, 나머지 종가는 빈곤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앞에서 팔성종실로 거론된 성씨 중에는 이 당시 이미 인량리를 떠난 성씨도 없지 않았던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현존하는 고택으로 종가를 남기지 못한 성씨도 생겨나게 되었다.
★인량리의 재탄생- 인량리에 현존하는 고택 20여 채 가운데서 국가 혹은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고택은 9채이다. 먼저 충효당은 재령이씨 영해파 종택으로서 입향조 이애 공의 손자인 운암 이악 선생이 완성한 것으로 국가지정 중요민속자료 제168호로 지정되어 있다.건물의 양상이나 구조가 조선시대 사대부가로서의 전형적인 모습을 지니고 있는데, 건축물도 건축물이지만 대문채를 마주하고
종택의 서쪽에 이 집을 지은 이함 선생이 심었다는 500년 수령의 은행나무가 있어 운치를 더하고 있다. 퇴계성리학을 계승ㆍ발전시킨 갈암 이현일 선생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우계종택은 이함의 차남 우계 이시형의 살림집으로 건립된 조선 중기의 전형적인 양반 가옥이다. 현재까지 약 400여년 동안 재령이씨 우계파 종가로 보존되고 있다. 경북 문화재자료 제307호로 지정되었다.
갈암종택은 원래 청송군 광덕리에 있었던 것인데 임하댐 건설에 따른 수몰을 피하여 1992년에 인량리로 이건하였다. 바로 영남학파의 거두인 갈암 이현일 선생의 종택으로, 경북 기념물 재84호로 지정되었다.
오봉종택은 안동권씨 영해파 입향조 권책 공의 종택으로 경북 문화재자료 538호이며, 삼벽당(영천이씨 농암 이현보의 아들 이중량의 종택), 용암종택(선산김씨 김익중의 종택), 만괴헌(야성정씨의 고택이었으나 평산신씨가 매입), 강파헌(안동권씨 권상임의 고택), 지족당(인동권씨 권만두의 고택) 등도 선후를 조금씩 달리하는 조선 후기 양반가의 주택으로 경상북도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그밖에 6ㆍ25 때 소실된 영양남씨의 처인당, 소호종택(소호 박신지의 종택), 원모재(함양박씨 박종산의 종택) 등도 비록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았으나, 고색창연한 자태를 뽐내는 고택의 모습을 자랑하고 있다.
종가마을 인량리에서는 위세 높은 ‘대감님’의 불호령 소리도, 기품있는 선비들이 학문을 논하고 청아한 음성으로 책을 읽는 목소리도 더 이상 들을 수 없다. 양반들이 생명처럼 중시했던 봉제사ㆍ접빈객의 법도도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쉽게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인량리는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나고 있다. 종가 고택을 이용한 고택체험 마을로 변신을 꾀하면서 전통테마마을 체험 명소로 급부상하고 있는 것이다.영덕군에 따르면 지난해에만 해도 국내 관광객뿐 아니라 약 21만여명의 외국인들이 인량리를 찾았다고 한다. 유서 깊은 전통마을 인량리의 새로운 도약이 기대된다.
■영덕 장륙산 장륙사(莊陸寺)-영덕군 창수면 갈천리. [인량리에서 13km, 21분]. 장륙사(藏陸寺)라고도 하며,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본사인 불국사의 말사이다. 1355년(공민왕 4)에 창수면 출신의 나옹(懶翁)이 창건하였으며,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대찰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 뒤에도 이곳에서 수도를 하면 도승이 된다고 하여 많은 승려들이 운집하였으며, 수도도량으로서 면모를 갖추었다.
그러나 세종 때에 산불로 인하여 대웅전을 비롯한 모든 당우가 전소되었으며, 그 뒤 중창하였다. 이 때 병환중인 어머니를 봉양하던 목수가 대웅전을 중건한다는 소문을 듣고, 어머니 병의 쾌유를 기원하며 공사를 자원하였다. 공사가 거의 끝나 마지막 기둥 네 개만을 남겨놓았을 때 어머니의 죽음을 전해들은 그는 자신의 정성이 부족하여 어머니가 소생하지 못하였다 하며 종적을 감추었다. 그 뒤 다른 목수를 기용하여 남은 공사를 완공하였으나 기술의 부족으로 뱃머리 집으로 만들고 말았다고 한다. 그 뒤 임진왜란 때 폐허가 된 채 명맥만을 이어오던 것을 1900년에 이현규(李鉉圭)가 가산을 모두 바쳐 중수하였으며, 최근에는 주지 권성기가 폐찰이 된 평해 광암사의 유물을 옮겨와서 산신각과 금당을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조선 초기의 전설이 담긴 정면 3칸, 측면 3칸의 대웅전이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138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정면 5칸, 측면 2칸에 맞배지붕인 범종루, 산신각·금당·홍련암(紅蓮庵)·요사채 등이 있다. 대웅전내에는 1395년(태조 4) 태조와 왕비를 송축하기 위하여 지방 관리들이 중심이 되어 조성한 건칠보살좌상(乾漆菩薩坐像)이 보물 제99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벽에는 매우 빼어난 벽화들이 그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