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순원왕후(純元王后)
이칭: 명경(明敬), 문인(文仁), 광성(光聖), 융희(隆禧), 정렬(正烈), 선휘(宣徽), 영덕(英德)
가족관계
본관: 안동김씨(安東金氏)
부(父):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 김조순 (金祖淳)
모(母): 청양부부인(靑陽府夫人) 심씨 (沈氏)
부군(夫君): 순조 숙황제(純祖 肅皇帝)
장남: 효명세자 (孝明世子)문조익황제(文祖翼皇帝)익종대왕(翼宗大王)(1809년-1830년)신정익황후 조씨(神貞翼皇后 趙氏)
장녀: 명온공주(明溫公主)1810년-1832년 동녕위(東寧尉)김현근 (金賢根)
차녀: 복온공주(福溫公主)1818년-1832년 창녕위(昌寧尉)김병주(金炳疇)
차남: 대군(大君)1820년-1820년
삼녀: 덕온공주(德溫公主)1822년-1844년 남녕위(南寧尉)윤의선(尹宜善)
양자: 철종 장황제(哲宗 章皇帝)1831년-1864년 철인장황후 김씨(哲仁章皇后 金氏)
능묘: 인릉(仁陵) (서울특별시 서초구 내곡동 산 13-192)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 김조순(金祖淳)의 딸이다.
1800년(정조 24) 초간택·재간택을 거쳐 정조의 뜻이 결정되었다.
정조가 갑자기 죽어 삼간택이 연기되었다가 1802년(순조 2) 10월 왕비로 책봉되었다.
삼간택 문제를 놓고 시·벽파(時僻派)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 당시 대왕대비로 수렴청정한 정순왕후(貞純王后)의 오빠
김관주(金觀柱)와 권유(權裕)들의 방해 움직임이 있었다.
1809년(순조 9) 문조(文祖)를 낳았다. 문조는 1812년(순조 12) 세자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문조는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1830년(순조 30) 22세로 죽었다.
아들 헌종이 즉위하고 1834년(순조 34)익종에 추존되었다.
순원왕후는 1827년(순조 27) 존호 명경(明敬)이 올려졌고 헌종 연간에 왕대비·대왕대비에 진호(進號)되었다.
그 뒤 문인(文仁)·광성(光聖)·융희(隆禧)·정렬(正烈)·선휘(宣徽)·영덕(英德) 등의 존호가 더해졌다.
1849년(헌종 15) 헌종이 후사 없이 죽자 순원왕후는 원상(院相)에 권돈인(權敦仁)을 지명했다.
그리고 영조의 혈맥을 잇기 위해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이광(李㼅)의 셋째 아들을 지목해 철종으로 왕통을 잇게 하고
수렴청정하였다.
1851년(철종 2) 자신의 외가인 김문근(金汶根)의 딸을 철종의 왕비로 책봉해,
그 뒤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절정기를 이룩하였다.
1857년(철종 8) 창덕궁에서 세상을 떠났다.자헌(慈獻)현륜(顯倫)홍화(洪化)신운(神運) 등의 존호가 뒤에 추상되었다.
『순원왕후어필봉서(純元王后御筆封書)』가 전한다. 명온(明溫)·복온(福溫)·덕온(德溫)의 세 공주가 있다.
시호는 명경문인광성융희정렬선휘영덕자헌현륜홍화신운순원왕후
(明敬文仁光聖隆禧正烈宣徽英德慈獻顯倫洪化神運純元王后)이다.
능호는 인릉(仁陵)으로 서울 서초구 내곡동 산13의 1에 있다.
효현황후(孝顯皇后)
사망: 1843년 10월 6일(음력8월25일)(향년 16세)
능묘: 경릉(景陵)
재위기간: 1837년 4월 10일 ~ 1843년 10월 6일
조선 제 24대 국왕인 헌종의 정비. 본관은 안동 김씨로, 아버지는 김조순의 재종질인 김조근.
1837년에 가례를 치르고 궁에 들어왔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1843년에 16세로 창덕궁 대조전에서 사망하였다.
헌종과의 소생은 없으며 능호는 경릉(景陵)이며 헌종과 그의 계비 효정왕후 홍씨와 나란히 매장되어 있는
삼연릉(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능역에 위치해있다)( 이다. 이후 순종 때 효현성황후(孝顯成皇后)로 추존되었다.
가계도
본가
안동 김씨(安東 金氏)
고조부 : 첨지중추부사 김탄행(金坦行, 1714∼1774)
고조모 : 정경부인 청주 한씨(貞敬夫人 淸州 韓氏, 생몰년 미상)
증조부 : 좌의정 익헌공 김이소(翼憲公 金履素, 1735∼1798)
생증조부 : 군수 김이유(郡守 金履裕, 생몰년 미상)
생증조모 : 정부인 문화 유씨(貞夫人 文化 柳氏, 생몰년 미상)
조부 : 충주목사 증 영의정 김지순(忠州牧使 贈 領議政 金芝淳)
조모 : 증 정경부인 여흥 민씨(贈 貞敬夫人 驪興 閔氏, 생몰년 미상)
아버지 : 영흥부원군 효간공 김조근(永興府院君 孝簡公 金祖根, 1793~1844)
숙부 : 병조판서 김보근 (兵曹判書 金輔根, 1803∼1869)
외조부 : 직산현감 이희선(稷山縣監 李羲先, 1775~1818)
외조모 : 정부인 반남 박씨(貞夫人 潘南 朴氏, 1774~1811)
어머니 : 한성부부인 한산 이씨(漢城府夫人 韓山 李氏, 생몰년 미상)
외숙 : 공조참판 증 좌찬성 이창재(工曺參判 贈 左贊成 李昌在, 1797~1863)
외숙모 : 정부인 안동 김씨(貞夫人 安東 金氏, 1798~1871)
외숙 : 영의정 문간공 이경재(領議政 文簡公 李景在,1800 ~1873)
왕가(王家)
시고조부 : 추존 장조의황제(莊祖懿皇帝, 1735~1762)
시고조모 : 헌경의황후 홍씨(獻敬懿皇后 洪氏, 1735~1815)
시증조부 : 제22대 정조선황제(正祖宣皇帝,1752~1800)
시증조모 : 효의선황후 김씨(孝懿宣皇后 金氏, 1789~1857)
생시조모 : 현목수빈 박씨(顯穆綏嬪 朴氏, 1770~1822)
시조부 : 제23대 순조숙황제(純祖肅皇帝, 1790~1834)
시조모 : 순원숙황후 김씨(純元肅皇后 金氏, 1789~1857)
시아버지 : 추존 문조익황제(文祖翼皇帝, 1809~1830)
시어머니 : 신정익황후 조씨(神貞翼皇后 趙氏, 1808~1890)
남편 : 제24대 헌종성황제(憲宗成皇帝, 1827~1849)
철인왕후(哲仁王后)
사망: 1878년 5월 31일(음력5월12일)향년42세
능묘: 예릉(睿陵)
왕비: 1851년 11월 5일 ~ 1864년 1월 4일
대비: 1864년 1월 9일 ~ 1878년 5월 31일
본관: 안동김씨(安東金氏)
부(父): 영은부원군 김문근((永恩府院君 金汶根 1801~1863)
모(母): 흥양부부인 여흥민씨(興陽府夫人 驪興閔氏 ?~1872)
형재자매: 1남 1녀 중 장녀
자녀: 1남이융준(李隆俊 1858~1859)
전호: 효휘전(孝徽殿)
존호(尊號): 명순휘성정원수령(明純徽聖正元粹寧)
휘호(徽號): 경헌장목(敬獻莊穆)
시호(諡號): 철인장황후(哲仁章皇后)
조선 제25대 국왕 철종의 왕비.
본관은 장동(安東), 시호는 명순휘성정원수령경헌장목철인왕후(明純徽聖正元粹寧敬獻莊穆哲仁王后).
추후 대한제국 고종 때에 철인장황후(哲仁章皇后)로 추존되었다.
그렇지만 사람들한테는 철인왕후(哲仁王后) 김씨 혹은 명순대비(明純大妃)로 잘 알려져 있다.
장동 김씨 세도 정권의 핵심 인물이었던 영은부원군 김문근과 흥양부부인 민씨의 딸로,
순조의 비였던 순원왕후 김씨와 헌종의 첫번째 비인 효현왕후 김씨에 이어 세 번째로 장동김씨로서 왕비가 된 인물이다.
순원왕후에게는 조카 뻘인 친척.[4] 1851년(철종 2년) 9월 25일, 15살의 나이로 왕비에 간택되어 철종과 가례를 올리고
정식으로 왕비로 책봉되었다.
본래 그녀가 왕비가 된 것은 안동김씨가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 비가 없던 철종에게 자기 집안의 사람을 왕비로 맞아들이도록 해,
당시 조정을 장악하고 자신들의 부를 축적시키기 위한 의도였다. 하지만 단지 가문의 이해를 위해 간택되었을 뿐,
정작 왕후 본인은 한 번도 정사에 나서거나 가문을 두둔하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오히려 말수가 적고 기분의 좋고 나쁨을
얼굴에 잘 드러내지 않았다고
하며 대왕대비 신정왕후와 왕대비 효정왕후를 극진히 모셔 칭송이 자자했다고 한다.
남편 철종이 1863년(철종 14년) 승하한 이후 고종 때에는 대비(大妃)가 되었으며, 또한 '명순(明純)'이라는 존호를 받았다.
1858년(철종 9년), 남편 철종과의 사이에서 외아들 원자(元子) 이융준을 소생으로 두었으나 알 수 없는 이유에 급작스런
열병으로 6개월 만에 향년 2세로 요절했다.
1878년(고종 15년) 5월 12일, 42세로 창경궁 양화당에서 폐결핵으로 승하하였다.
생애
인정전에 나아가 책비례를 행할 때의 교명문
옥책문(玉冊文)에 이르기를,
"관저(關睢, 시경(詩經) 주남의 편명)가 왕도(王道)의 터전이 되었으니 주남(周南)의 교화가 집안과 나라를 다스렸고,
곤상(坤象)이 건원(乾元)에 화협하였으니 주역[羲經]의 점괘에 내외(內外)를 바로잡았다.
이에 어진 보좌(輔佐)의 아름다운 덕은 바로 인륜(人倫)의 시작이다.
이에 이장(彝章, 떳떳한 글)을 상고하여 곧 옥책문(玉冊文)을 선포한다.
그대 김씨는 충량(忠良)한 화벌(華閥)의 후예요, 시례(詩禮)의 세가(世家) 명문(名門)이다.
견매(俔妹,하늘에 비유할 여인상)의 아름다운 명성이 일찍이 드러났고,성모(聖母)의 휘음(徽音)을 계승하기를 생각하였다.
단아(端雅)하고 근신(謹愼)하며, 유순하고 온공(溫恭)하였다.
자나깨나 좋은 짝을 구하였는데 하늘이 즉위(卽位)의 초두에 짝을 맺어 주었고,
숙덕(淑德)을 간택하여 장추전(長秋殿, 왕비가 거처하는 궁전)에서 중궁(中宮)의 자리에 오름이 마땅하였다.
이에 지극히 존엄함에 짝하게 되어 마침내 주량(舟梁)의 예(禮)를 거행하였다.
이에 사신(使臣)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정원용(鄭元容)과 행 용양위 대호군(行龍驤衛大護軍) 서좌보(徐左輔)를 보내어
절(節)을 지니고 예(禮)를 갖추어 왕비로 책봉하노라. 아! 오직 부지런하고 검소함으로 곤위(壼闈)에 임하고,
효경(孝敬)으로 가르침을 받들게 하라. 계명장(鷄鳴章)의 경계를 마음에 새겼으니, 만기(萬機)의 내조(內助)에 힘썼고,
자손(子孫)이 번성하여 후예(後裔)가 천억(千億)으로 늘어나리로다.
방유(芳猷, 아름다운 모책)를 모두가 송축하니, 큰 복록(福祿)이 길이 편안할 것이다.
이에 교시(敎示)하노니, 마땅히 모두들 알지어다." 하였다.
대비전께서 승하하다
대비 전하(大妃殿下)께서 승하(昇遐)하였다.
대비전의 상사를 발표하는 의식을 명정전에서 거행하도록 하다
전교하기를,
"성의와 효성이 부족하여 오늘 인시(寅時, 오전 3시~5시)에 대비전(大妃殿)께서 양화당(養和堂)에서 승하(昇遐)하셨으니
끝없는 슬픔을 어디에 비기겠는가?"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궁성을 호위하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거애(擧哀, 초상난 것을 발표함) 장소는 명정전(明政殿)으로 하라." 하였다.
조선 왕실의 마지막 '대비(大妃)'이다. 철인왕후 다음의 왕비들인 명성황후나 순명효황후는 남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으며,
그 다음인 순정효황후는 조선의 마지막 왕비이자 대한제국 최후의 황후다.
가계
본가
고조부: 김성행(金省行)
증조부: 김이장(金履長)
조부: 목사(牧使) 김인순(金麟淳)
조모: 정부인 신씨(貞夫人 申氏)
백부: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김수근(金洙根)
백모: 정부인 조씨(貞夫人 趙氏)
아버지: 영돈령부사 증 의정부 영의정 영은부원군(領敦寧府事 贈 議政府 領議政 永恩府院君) 김문근(金汶根)
어머니: 흥양부부인 민씨(興陽府夫人 閔氏)
오빠: 좌의정 예조판서 효정공(左議政 禮曹判書 孝貞公) 김병필(金炳弼)
시가
남편: (추존)철종 장황제(哲宗 章皇帝) 이원범/이변(李元範/李昪)
양시조부: (추존)정조 선황제(正祖 宣皇帝) 이산(李祘)
양시아버지: (추존)순조 숙황제(純祖 肅皇帝) 이공(李玜)
양시숙: (추존)문조 익황제(文祖 翼皇帝) 이영(李旲)
철인왕후는 조선의 대비들 중 유일하게 왕대비가 되지 못한 대비였다. 무슨 뜬금없는 소리냐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원칙적으로 선왕의 정실 부인인 대비(大妃)의 정식 명칭은 왕대비(王大妃)이다. 하지만 보통 줄여서 대비라고 부르는 것. 따라서 인수대비(소혜왕후), 소성대비(인목왕후)[5] 등의 정식 존호는 인수왕대비, 소성왕대비인 것이다. 그런데 조선 말기로 오면서 순조, 헌종이 젊은 나이에 승하하고 헌종이 아버지인 효명세자를 왕으로 추존하면서 왕실에 여성 웃어른들이 많아졌다. 그래서 철종 대에는 선선선대 왕비(순조비 순원왕후), 선선대 왕비(추존 문조비 신정왕후 조씨), 선대 왕비(헌종비 효정왕후)가 모두 생존해 있는 상황이 발생하였는데 이렇게 되자 대왕대비 위 혹은 대비(왕대비) 아래에 새로운 단계를 만들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대비(왕대비) 아래에 '대비'라는 단계를 새로 만들었고 선대 왕비들의 서열이 '대왕대비' - '왕대비'의 2단계에서 '대왕대비' - '왕대비' - '대비'의 3단계로 재편된 것이다. 그래서 효정왕후는 정희왕후, 소혜왕후, 문정왕후, 인원왕후, 정순왕후 등 이전 왕비들이 대비(왕대비)로 존봉된 것과는 다르게 '대비'로 존봉받았다. 그런데 철종 또한 젊은 나이에 대왕대비(신정왕후), 왕대비(효정왕후)보다[6] 먼저 승하하면서 철인왕후도 왕대비가 아닌 어정쩡한 '대비'의 칭호를 받았다. 게다가 고종이나 신정왕후보다 일찍 승하해 왕대비, 대왕대비가 되지 못하고 최종적으로 '대비(大妃)'로만 남았다.[7]
원자(元子) 융준을 잃고서 이후 남편 철종이 1863년(철종 14년) 승하하고 시조카 고종이 다음 국왕에 즉위하자, 그녀는 대비(大妃)가
된 뒤 자식 없이 생활하는 무료함을 달래기 위하여 왕대비인 효정왕후와 함께 어린 궁녀를 자신의 대비전에서 돌보았었는데, 이아이가 조선의 마지막 궁녀인 천일청(千一淸) 상궁이다.
영빈 김씨
본관: 안동 김씨(新 安東 金氏)
조부 : 증 공조참판 김수증(工曹參判 金壽增, 1624년 - 1701년)
조모 : 증 정부인 창녕 조씨(贈 貞夫人 昌寧 曺氏, ? - 1687년, 조한영의 딸)
아버지 : 성천부사 김창국(成川副使 金昌國, 1644년 - 1717년)
외조부 : 판돈녕부사 효간공 이정영(判敦寧府事 孝簡公 李正英, 1616년 - 1686년)
외조모 : 증 정경부인 청송 심씨(贈 貞敬夫人 靑松 沈氏, ? - 1639년, 심장세(沈長世)의 딸)
친외조모 : 정경부인 문화 유씨(貞敬夫人 文化 柳氏, ? - 1691년, 유기선(柳基善)의 딸 )
어머니 : 전주 이씨(全州 李氏 1648년 - 1714년)
언니 : 안동 김씨(安東 金氏)
형부 : 부평현감 이하조(富平縣監 李賀朝, 1664년 - 1700년, 이단상의 차남)
양제 : 돈녕부도정 김치겸(金致謙)
서제 : 김최겸(金㝡謙)
서제 : 증사복시정 김익겸(金益謙)
서제 : 첨지중추부사 김의겸(金宜謙)
왕가(王家 : 전주 이씨)
시조부 : 제17대 효종대왕(孝宗大王, 1619~1659, 재위 1649~1659)
시조모 : 인선왕후 덕수 장씨(仁宣王后 德水 張氏, 1619년 ~ 1674년)
시아버지 : 제18대 현종대왕(顯宗大王, 1641~1674, 재위 1660~1674)
시어머니 : 명성왕후 청풍 김씨(明聖王后 淸風 金氏, 1642년 ~ 1684년)
남편 : 제19대 숙종대왕(肅宗大王, 1661년 ~ 1720년, 재위 1674년 ~ 1720년)
봉사손 : 화유옹주(和柔翁主)
본관은 안동(安東), 종파는 문정공파이다.
청음 김상헌의 현손이며 영의정 김수항의 종손녀로 김창국과 그의 부인인 전주 이씨 사이의 무남 2녀 중 둘째딸이다.
1686년(숙종 12년) 입궐, 그해 음력 3월 28일에 숙의에 책봉되어 노비 150명을 하사받았다.
그녀는 숙종의 다른 후궁인 희빈 장씨나 숙빈 최씨 등과는 달리 명문가의 여식으로 정식 간택되어 입궁한 후궁이었다.
입궁 후3개월 만에 대왕대비인 장렬왕후의 환갑이 된 해를 기념하는 명목으로1686년 음력 5월 27일 소의(昭儀)로 진봉되고,
같은 해 11월 5일, 장렬왕후의 탄신일을 기념하는 명목으로 귀인(貴人)에 봉해졌다.
1689년 4월 22일, 왕의 동정을 염탐하여 궁중의 기밀을 친정에 알려오고 이모부 홍치상과 작당하여 희빈 장씨의 어머니와
조사석에 대한 유언비어를 날조해 유포한 죄로 폐출되었으며,
그녀의 종조부이자 후견인이었던 전 영의정 김수항과 그녀의 공범이었던 이모부 홍치상은 사형에 처해졌고,
그녀의 또 다른 이모부로서 홍치상의 아들 홍태유가 아비의 구명을 위해 죄를 전가하려고 했던 심정보(숙명공주의 아들)도
결국 공범 혐의에서 온전히 벗어나지 못해 서인으로 강등되어 절도에 유배되었다.
숙종은 그녀의 행위를 조장한 배후로 인현왕후를 지목하여 맹렬히 비판하니 결국 열흘 뒤인 5월 2일, 인현왕후 역시
서인으로 강등되어 사가로 폐출되었다.
1694년(숙종 20년) 음력 4월 12일, 인현왕후가 왕비로 복위하면서 그녀 역시 특별히 귀인으로 복위하였다.
그러나 이해 6월 1일에 인현왕후가 새로이 왕비 책봉식을 받아 다음날 숙원 최씨(숙빈 최씨)는 관례대로 승봉이 되었지만
그녀는 누락되었으며,
단종의 복위 기념으로 정1품 빈 아래의 모든 후궁을 특별히 승봉해준 1699년에도 역시 그녀 홀로 누락되는 수모를 겪었다.
1701년(숙종 27년) 8월 14일에 인현왕후가 2년간의 투병 끝에 창경궁 경춘전에서 승하하였다.
이재 황윤석의 《이재난고》의 기록에 따르면 인현왕후가 죽기 전에 숙종에게 자신이 죽으면 희빈 장씨를 복위치 말고
영빈 김씨를 왕비로 세울 것을 청했다고 전한다.
인현왕후의 사후,소론과 남인은 희빈 장씨의 복위를 기정사실로 여겨 8월27일에는 희빈 장씨가 같은 국모인 인현왕후를 위해
여느 후궁처럼 재최 기년복을 입는 것이 경악스럽다는 상소가 오르기도 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다음달인 9월,숙빈 최씨가
숙종에게 인현왕후가 죽은 것은 희빈 장씨의 저주를 받아 시해당한 것이라고 고발하고 민진원형제가 숙빈 최씨의 고발을 적극
지지하니 숙종은 즉시 제주에 유배 중인 장희재를 사형하라는 명을 내리고 이틀 뒤 희빈 장씨 역시 자진토록 하라는 비망기를
내린다. 이에 대해 소론의 항의가 지극하자 숙종이 희빈 장씨의 친신들을 친히 국문하여 증언을 받아내었으나 소론은 왕이
독단적으로 친국하여 증언을 받아내어 정식 수사절차없이 즉시 처형토록 한 것과 수일에 걸쳐 압슬형을 내려 받아낸 자백이라는 것 등을 이유로 의혹을 제기하니 10월 1일 소론 영의정 최석정을 중도 부처(中途付處)하고 좌의정 이세백에게 수사를 지휘토록
하였는데 이세백은 영빈 김씨의 내종숙이다.10월 7일,숙종은 대전과 중궁전에서 인현왕후의 저주굿에 쓰인 흉물을 발견하였다
고 선언하고 다음날인 10월 8일 승정원에 일러 희빈 장씨의 자진을 명하는 공식 어명을 내렸는데 이에 앞서 빈어(嬪御: 후궁)를
왕비로 삼지 않는다는 국법을 세우니 영빈 김씨는 계비가 될 수 없었다.
또한 숙종은 1702년 1월 10일 영빈 김씨의 이종아우인 홍태유가 숙종과 여론이 무고의 옥으로 희빈 장씨에 대해 감정이 나쁜
것을 기회로 삼아 1689년에 영빈 김씨와 함께 희빈 장씨의 어머니에 대한 추문을 지어내 유포한 죄목으로 사형당했다가
1694년 인현왕후의 복위로 영빈 김씨와 함께 특별히 복관되었던 아버지 홍치상(숙안공주의 아들)의 무고함을 세상에 밝혀달라고 격쟁하니 '홍치상의 죄는 만 번 통분할 일이지만 늙은 공주가 하나 남은 아들을 잃은 것이 가엾어 특별히 복관해준 것인데
그 아들이 감히 멋대로 격고(擊鼓)하여 신설(伸雪)할 계획을 하려 한다.'며 홍치상의 복관을 다시 환수해 도로 서인(庶人)으로
강등하고1710년에도 홍치상과 이사명은 영구히 복관치 말라고 재차 명을 내렸으며, 1717년에 명을 회수하여 이사명은 특별히
복관해주면서도 홍치상은 복관치 않았을 만큼 반감을 드러냈다.이는 홍치상과 공범이었던 영빈 김씨에 대한 숙종의 감정을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무고의 옥의 여파로 집권당으로 등극한 노론에 의해 남인과 소론이 대거 화를 입던 과정 중1702년1월 숙종이 돌연 희빈 장씨의
지지자였던 전 영의정 서문중(소론)을 영의정으로 임명하고 소론 대신들을 대거 재등용하여 다시 소론 중심의 정국으로 교체하
였는데 이는 희빈 장씨의 소생인 왕세자(경종)을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숙종은 처의 3년상을 마치기 전에는 재혼할 수 없다는 국법을 지켜 인현왕후에게 의리를 다하라는 노론의 반대에도 불구
하고 계비 간택을 강행해 1702년 9월 3일 소론 김주신의 딸을 계비로 간선하니 이가 바로 인원왕후 김씨이다.
10월 3일 새로운 국모로 책봉된 인원왕후가 열흘 후인13일에 친영례로 입궐하자 새로이 왕비가 책봉되면 종1품 이하의 후궁을
승진하는 관례대로 이미 정1품 빈이었던 숙빈 최씨만 제외하고 모두 승봉하였는데 이때는 영빈 김씨도 소외되지 않고1계급 승봉하여 정1품 영빈(寧嬪)에 봉해졌다.
그녀는 숙종의 후궁들 중 같은 노론인 숙빈 최씨와 신분이 친했는데 이 때문인지 숙빈의 소생인 연잉군을 친아들처럼 대했다고
하고 연잉군또한 어머니라고 불르며 친했다고 한다.
1720년(숙종 46년)에 숙종이 사망하자 관례에 따라 다른 후궁들과 함께 대궐에서 나가 살았다.
숙종의 후궁들은 전 왕대와는 달리 남편인 왕이 살아있어 궁에서 지내면서도 각기 궐 밖 사제를 하사받고 또 그것의 규모와
화려함이 극에 달아 대신들의 비판이 끊이지 않았지만, 영빈이 나가서 살 사제는 후궁이 살기에 합당치 않을 정도로 허름하여
경종이 특별히 개조해주라고 명하였다. 이에 대해 후궁의 제택을 궁에서 개조해주는 것은 옳지 않다고 반대하니 경종은 민진원
의 주장대로 대신 수리비 천금(千金)을 지급토록 하였는데 빠져나간 돈이 2천 금에 이르러 탄핵이 있었지만 경종이 덮었다.
경종 즉위년 12월 14일에 발생한 경종의 급성 중독 사건에 독을 쓴 흉수로 의혹을 받았으나 인원왕후의 비호로 경종이 김씨
성을 가진 궁인이 너무 많아 찾을 수 없다며 사건을 덮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그녀의 친족이 대거 연루된 신임옥사로 수년에 걸쳐 거세게 거론되었다가 경종4년 4월,그녀의 외사촌아우인
이진검에 의해 그녀가 공개적으로 지목되고 효종이 부왕의 후궁이었던 귀인 조씨를 처형했던 전례를 따라 목을 베어야 한다는
강경 사태가 일어나 인원왕후가 이진검의 고모이자 영빈 김씨의 이모인 이씨(심정보의 아내,경종의 내종숙모)를 시켜 이진검을
설득토록 하기도 하였다.이해 8월에 경종이 돌연 급서하여 영조가 즉위하니,영조는 다음달 즉시 그녀의 혐의를 무혐의로 돌리고각별한 예우를 올렸다.
1735년(영조 11년)에 영빈 김씨가 67세의 일기로 사망하자 영조는 그녀를 항상 어머니라고 불렀던 각별한 사이였음을 밝히고
영빈의 사당을 봉궁하고 대신들에게 치제 토록 하는 파격적인 행각과 함께 이후에도 수시로 친히 궐 밖 그녀의 사당에 들러 명복을 비는 비정상적인 정성을 보이기도 했다. 영조의 사친인 숙빈 최씨에게 시호가 내려진 영조 29년(1753년)에는 영빈의 가까운
친족 중에서 벼슬이 없는 자를 모두 등용하라는 명과 함께 영조의 서녀인 화유옹주가 영빈 김씨의 봉사손으로 주어졌다.
그녀의 묘는 영빈김씨묘로,이를 간축해 흔히 영빈묘라 하며,
위치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장현리에 있다. 1991년 사적 367호로 지정되었다.
남인 과격인물로서 갑술환국 당시 유배형을 받았다가 결국 사사된 전 좌의정 민암은 국문 중에 영빈 김씨에 대해 '머리가 좋아
아낌없이 재물을 풀어 궁중의 환심을 얻을 줄 알았다.(金貴人, 亦多智, 且不惜財, 深得宮中之歡心)'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