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악당의죽음... 미와경부
해방후 미와는 짐을싸고 도망을가려고했으나
김두환 패거리에 걸리고말아요
그리고 죽도록얻어마자서 다리한쪽지 병신이되죠..ㅎㅎ 기분짱~
하지만정신못차리고 김두환에게 총을겨눕니다 하지만 그렇게당할 김두환이아니죠 김두환의부하가 미와의 머리를잡고 벽에다 열라 칩니가 그렇게 처참하게새상을떠나죠
문영철과 김무옥..
김두한의 충직한 부하이다.
그는 본래 그시대에 인기가 높았던 권투선수였다.
키가 190cm가 넘는 장신 이여서 일명 '아웃복서'였다.
쌍칼이 이끌던 조직에 있을때부터 김두한의 실력을 인정하고 나이가 높았지만 김무옥과 함께 소위 '오야붕'으로 인정한다.
김두한이 신마적,구마적을 꺾으면서 우미관을 장악한후에 김두한 패거리의 최고의 주먹으로 군림 하였다.
일본 최고의 사무라이로 명성이 높았던 하야시의 사부이자 장인인 '고누에'패거리들과의 40 : 1로 대적한다는 사실을 알고 김무옥,정진영과 함께김두한을 도우로 왔던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6 25 전쟁때 김무옥과 같이 죽게된다.
그는 김두한의 오른팔이자 진정한 협객이였다.
김무옥..
김두한의 오른팔 노릇을 하던 사람이다.
조선 8도의 명성이 꽤 있었던 유도 대회를 조선인으로 3연속으로 우승한 유도3단의 유단자 이다. 쌍칼이 조직확장을 하던중 만나 쌍칼 조직원의 중간 보스가 된다. 그는 전라도 사투리를 능동적으로 구사하여 침울할때마다 김두한의 묵직한 얼굴에서 웃음을 지어내고야 말게 만든다.
김두한의 실력을 인정하고 문영철과 함께 일찌감치 김두한을 소위 '오야붕'으로 인정하게 된다.
김두한이 신마적,구마적을 꺾고 우미관을 차지하고 우미관패를 조성하자그 조직에서 문영철과 함께 조선 최고의 중간 보스로 활약하게 된다.
그러나 6 25 전쟁때 문영철과 함께 죽게된다.
그는 조선의 협객이였다.
김두환의 오물투척 사건
독립 운동가 김좌진 장군의 이들인 김두한 의원은 이 날 탑골공원 변소에서 퍼 온 오물을 국무위원석을 향해 뿌리면서 삼성 재벌 내 한국비료주식회사의 사카린 밀수 사건을 두둔하는 장관들은 '나의 피고들'이라고 지칭하였다.
국내 굴지의 재벌인 삼성 재벌의 한국비료주식회사가 건설 자재를 가장해서 사카린을 밀수한 사실이 1966년 9월 15일 폭로되었다. 5월에 발생한 이 사건은 6월 초에 벌과금 추징으로 일단락되었으나, 일단 이 사실이 언론에 공개되면서 그 여파는 걷잡을 수 없는 사태로 확산되었다. 특히 이 사건이 사회적으로 큰 파문을 가져 온 데는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밀수'를 '5대 사회악'의 하나로 규정해 놓고 있었다는 점, 그리고 삼성 재벌 소유의 중앙매스콤과 경쟁 관계에 있던 여타 언론들이 이 사건을 호재로 삼아 연일 대서특필하며 국민의 눈과 귀를 자극했다는 점 등이 작용하였다. 이 사건이 폭로되자 정부는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특별 수사만을 조직, 수사에 착수하였다. 수사반은 10월 6일 수사를 종결짓고 수사 결과를 발표하였다. 골자는 삼성 재벌이 사카린의 원료인 OTSA 1,403포대(시가 약1,800만원 상당)를 밀수하여 시중에 유포시켰다는 것이었다.
이 사건이 극도로 증폭된 것은 9월 22일 국회 본회의에서 김두한 의원이 국무총리를 비롯한 일부 각료들에게 오물을 투척한 사건이 발생하면서부터이다. 이 날 이틀째 속개된 삼성 재벌 밀수사건에 관한 대정부 질문에서 김두한 의원은, 질문 도중 미리 준비해 온 오물통을 열어 국무위원석에 앉아 있던 정일권 국무총리, 장기영 부총리 등 수 명의 각료들을 향해 던졌다. 김두한 의원은 "밀수 사건을 두둔하는 장관들은 나의 '피고들'"이라며 "사카린을 피고인들에게 선사한다"는 말과 함께 인분을 국무위원들을 향해 투척한 것이다. 사건 후 김두한 의원은 그 인분은 선열들의 얼이 깃든 파고다공원 공중 변소에서 가져 온 것이라고 밝혔다. 투척 당시 김두한 의원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던 정일권 총리와 장기영 부총리는 가장 크게 피해를 입었다. 의복은 물론 손목 시계에까지 오물 냄새가 배어 이를 교체했다는 후일담도 있다.
이 희대의 사건으로 정계는 발칵 뒤집혔다. 정일권 총리는 총리 공관에서 긴급 간담회를 열고는, 이 사건이 "행정부의 권위와 위신을 모욕한 처사로 더 이상 국정을 보좌할 수 없어 전국무위원이 총사직을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국회는 국회대로 의장단과 여야 총무 회담을 열어 김두한 의원을 제명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사건 당일 이병철 한국비료 사장은 서둘러 기자 회견을 갖고 "이 사건에 책임을 통감하면서 한국비료를 국가에 헌납함과 동시에, 자신이 대표로 되어 있는 중앙매스콤과 학교 법인은 물론 모든 사업 경영에서 손을 떼겠다"고 밝혔다. 문제의 '한국비료 밀수 사건'과 관련해서 이병철 사장은 "외자 5천만불과 내자 20억 내지 30억이 투입된 거대한 규모의 한비가 5백만 원내지 1천만 원 때문에 밀수를 했겠는가는 상식의 판단에 맡긴다. 그러나 한비 관계 밀수 사건에 대해 무어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절실한 책임감을 느끼고 국민 여러분들에게 사과 드린다"고 밝혔다. 그러나 한국비료를 헌납하겠다고 각서까지 썼던 이병철 사장이 도중에 각서 내용을 부인하는 한편 사카린 밀수 사건이나 헌납 사건은 정부와 일부 과격한 언론이 만든 조작극이라고 주장, 물의를 빚기도 하였다. 그후 이병철 사장은 헌납 교섭을 맡았던 장기영 부총리가 해임되자 개각 1주일 만인 1967년 10월 11일 한국비료 주식의 51%를 국가에 헌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