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은 1938년 상반기에 중국과의 우호관계를 단절하고 일본에 접근하더니 1939년 1월 6일 독일, 이태리, 일본의 삼국동맹을 제안했다. 이 문제는 일본 정부와 육해군 내부에서 광범위한 논쟁을 불러 일으켰으나 의견 접근을 이루지 못했다.
이 해에 만몽국경 노몬한에서 소련과 일본의 무력 충돌이 일어났다. 5월 28일 연대 규모의 전투에서 관동군이 참패하자 6월 27일 일본 공군기 107대가 외몽골 탐사크의 공군기지를 습격하여 소련군 항공기 100여대를 파괴했다. 이어서 육군 23사단이 공격을 감행했으나 소련군의 반격에 수천 명의 사상자를 내고 패주했다. 소련군은 기갑부대와 항공대를 증강한 후 8월 20일에 공격을 개시하여 23사단을 포위섬멸하고 구원부대마저 격멸해 일본군 사상자가 6만 명에 달했다. 노몬한 사태는 9월 15일 모스크바 협정으로 종결되었다. 장동건이 주연한 영화 My Way에서 소련의 기갑부대가 보병 위주의 일본군을 섬멸하는 대목은 이때의 전투를 재현한 것이다.
노몬한 사태의 와중에 독일이 일본에 한마디 언질도 없이 8월 23일 소련과 불가침조약을 체결하자 격분한 일본은 이틀 후 독일과의 동맹 협의를 중단한다고 통보하였다. 9월 1일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고 9월 3일에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선전포고한 다음날 일본은 유럽전쟁 불개입을 선언하고 독일에 대하여 냉랭한 태도를 견지했다.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은 9월 5일에 중립을 선언하면서도 思考의 중립을 유지하기는 불가능하다고 말하여 英佛 편에 서있음을 분명히 했다. 11월 4일 미국은 중립법을 수정하여 현금결제와 수입국 직접수송의 조건으로 전쟁물자 수출을 허용했다. 이 조건으로 무기를 구입할 수 있는 나라는 영국과 프랑스뿐이었다. 한편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10월부터 태평양함대를 하와이로 전진배치하기 시작하여 주력 함대의 이동을 완료한 뒤 1940년 5월 7일 진주만을 태평양함대의 모항으로 지정하고 샌디에이고에 있던 함대사령부를 이전했다.
독일이 1940년 5월 10일 서부전선에서 공세를 개시하여 영불연합군을 격파하고 6주 만에 프랑스가 항복하자 일본 육군은 남방으로 진출할 호기라 생각하고 시국대책을 마련했다. 육군이 말하는 남방에는 동남아시아와 호주, 뉴질랜드가 포함되었다. 육군이 제출한 시국대책에 따라 7월 26일 내각은 ‘팔굉일우(八紘一宇)를 국시로 하여 대동아의 신질서를 건설한다.‘는 ’기본국책요강’을 채택하고 다음날 대본영과 정부 연석회의에서 해군의 반대를 물리치고 ‘세계정세의 추이에 따른 시국처리요강’을 결의했다. 향후 일본의 대외정책이 그대로 따라간 이날의 결정 사항은 다음과 같다.
1. 중국에서 모든 수단을 다해 장개석 정권의 굴복을 도모한다.
2. 독일 및 이태리와 정치적 결속을 강화한다.
3. 소련과 불가침조약을 모색한다.
4. 불령 인도차이나를 경유하는 장개석 원조 루트를 차단한다.
5. 남방 진출 과정에서 米國과의 관계 악화는 어쩔 수 없다.
6. 무력 사용은 영국에 국한하되 불가피한 상황에 대비하여 對米 개전을 준비한다.
프랑스는 항복했지만 독일에게는 영국을 굴복시킬 마땅한 수단이 없었다. 영국해군이 바다를 제압하고 있어서 육군이 영국 본토에 상륙하기는 불가능했다. 독일의 잠수함은 개전 시 57척에 불과했고 성능은 1차 대전 당시의 수준이어서 영국의 해상 보급을 봉쇄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공군력은 독일이 우세했으나 제공권을 장악할 만큼은 아니었고 공군력만으로 영국을 굴복시킬 수는 없었다. 영국과의 전쟁은 장기전으로 갈 수 밖에 없는데 영국을 지원하는 미국은 결국 영국 편에서 참전할 것이고 소련은 믿을 수 없다는 것이 히틀러의 생각이었다. 이리하여 프랑스가 항복하고 한 달이 지난 7월 31일 히틀러는 독일군 수뇌부 회의에서 소련 침공을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그가 지시한 침공 시기는 1942년 5월이었다.
7월과 8월의 격심한 공중전에서 독일 공군은 영국 상공의 제공권 장악에 실패했다. 9월부터 독일은 영국의 도시와 산업시설을 폭격했으나 전투기의 항속거리가 짧아 폭격기 편대를 제대로 호위하지 못한 까닭에 폭격기의 손실이 많았다. 무엇보다도 대형폭격기가 없는 것이 독일 공군의 약점이었다. 독일은 재무장 과정에서 비용이 많이 드는 전략폭격기 개발을 중단하고 전투기와 전술폭격기 생산에 집중했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 각국의 항공기 생산 수량은 다음과 같다.
독일의 계획을 알 리가 없는 일본은 유럽전쟁이 곧 독일의 승리로 끝날 것이라 생각하고 8월 1일 도쿄 주재 독일 대사를 통해 미국에 대항하는 군사동맹을 제안했다. 독일은 도쿄로 특사를 파견하여 9월 19일 합의에 도달하고 9월 27일 베를린에서 독일, 이태리, 일본의 삼국동맹을 체결했다. 삼국동맹에 반대하여 해군상 요시다가 사임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삼국동맹은 일본이 독일과 이태리가 추구하는 유럽의 신질서를 지지하고 독일과 이태리는 일본이 추구하는 대동아공영권을 지지하며 또한 미국의 무력 개입에 정치적, 군사적으로 전력을 다해서 공동 대응하기로 선언했다.
9월 23일 일본군 제5사단이 인도차이나 북부에 침입하고 다음날 본국에서 파병된 보병 연대가 하이퐁에 상륙했다. 10월 30일 일본은 소련에게 불가침조약을 제안했으나 소련의 고자세로 흐지부지 되었다. 소련은 중국과의 전쟁에 매달려 있는 일본에게 안전을 보장해줄 생각이 없었다.
일본군의 인도차이나 침입과 삼국동맹에 미국은 9월 26일 철강, 고철의 대일 수출금지로 응수했다. 미국 수출액의 1/3에 달하는 막대한 양의 철강과 고철을 미국에서 수입하는 일본은 커다란 타격을 받았다. 일본이 수요량의 70%를 미국에서 수입하고 있는 석유는 미국이 마지막 수단으로 남겨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영국은 일본의 압력으로 7월 17일에 폐쇄했던 버마 루트를 10월 17일 다시 열어 중경의 국민당 정부에 대한 원조물자 공급이 재개되었다. 12월 2일 미국 의회는 국민당 정부에 대한 1억 달러 차관을 승인했고 12월 30일 루즈벨트는 라디오 담화에서 미국이 민주주의의 병기창이 될 것임을 선언하였다. 이 말 대로 루즈벨트가 1941년 1월 10일 의회에 제출한 무기대여법이 3월 8일 상원을 통과했다.
일본이 제안한 불가침조약에 코웃음 치던 소련이 갑자기 태도를 바꿔 1941년 4월 13일에 일본과 중립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일본의 남진을 위한 조건이 완성되었다. 그러나 5년째 계속되는 중일전쟁은 여전히 끝이 보이지 않았고 독일이 영국을 제압할 가능성은 사라졌으며 영국의 병기창이 된 미국은 일본의 남진을 저지할 것임이 명백했다. 이런 상황에서 노몬한의 충격에도 정신을 못차리고 英米와의 전쟁을 불사하며 대동아공영권 건설의 꿈을 밀고 나간 일본 지도부의 정신 상태는 의학적 연구 대상이라 하겠다.
일본과 중립조약을 체결한 소련은 4월 16일부터 서부 국경지대로 병력을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로부터 50년이 지나 소련이 붕괴되고 나서 공개된 기밀문서에 의하면 소련은 6월 12일에 독일을 공격할 계획이었으나 직전에 7월로 연기했다고 한다. 돌이켜보면 히틀러의 정세 판단은 정확했으나 스탈린의 철권통치 아래에서 소련의 중공업과 군수산업이 비약적으로 성장한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 그의 실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