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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만이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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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nema 천국 스크랩 (영화) 이사도라 던컨 / 폴모리아 악단,
Rose Marie 추천 0 조회 29 12.11.10 16:3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이사도라 던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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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adora Dunc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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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가 로댕에게 사랑을 바치려고 노력한 또 한 명의 여성>


미국 태생의 이사도라 던컨(1878~1927)은 모던 댄스의 개척자로 불리운다.
1878년 샌프란시스코에서 4형제 중 막내로 태어나
15살 때에는 뉴욕에서 델리의 무대에 출연했다.
그후 1~2년간 자신만의 무용을 했으며 관객을 사로잡아
상당한 재산을 모으며 유럽과 북미 양 대륙에 이름을 떨쳤다.

그녀는 음악 교사인 어머니로부터 음악적 기초 교육을 받았고
아울러 발레도 습득하였다.
가난한 무명의 젊은 무용가로 유럽에 건너갔던 이사도라는
무용의 역사를 바꾸었을 뿐만 아니라 무용에 대한 관객의 개념까지 변화시켰다.
그녀는 태어나면서 부터 자연을 사랑한 반항적 기질이 있었으며,
그래서 인공적인 기법에 의문을 품게 되었다.

1897년 18세의 이사도라는 델리단원으로 영국에 건너가
델리의 주선으로 발레지도를 받았다.
뉴욕으로 돌아온 이사도라는 다시 본판티의 지도를 받았다.
비록 이사도라는 발레가 비표현적이라하여 반대하였지만,
기본적인 발레지도를 받은 것은 사실이다.
일반적인 대중의 견해와는 달리 이사도라는
무대 위에서 얻어지는 순간적인 착상으로 춤추지 않았다.
옷감 선택에서부터 의상 제작, 배경활동 등 모두를 세밀히 준비하였다.
이 점이 그녀의 재능이며, 또한 무용이 가식없이 보이도록 노력하는 의도였다.

자신의 신무용에 대해 명료하고도 능숙한 포용력을 지닌 이사도라는
공상적으로 작품을 시도했다.
그 결과 그녀는 1899년 시카고 데뷔 공연 때는
맨발에 거의 반나체의 모습으로 춤을 추었다.
그때까지 기교 위주의 발레밖에 보지 못한 관객들은
그 장면을 보고 놀랐으며 그녀의 무대의상의 양상까지 변화시켜
이사도라 이후 발레를 포함한 모든 무용수들은
유행에 얽매인 의상보다 적절한 무용의상을 입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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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1900년에 유럽으로 건너갔다.
이사도라는 그 해에 파리에서 새로운 무용을 발표해 절찬을 받았으며
그것이 계기가 되어 유럽의 각 도시를 순회 공연하였다.
그녀의 공연 중에서 가장 강력한 지지를 받은 곳이 독일이었다.
그녀가 일으킨 혁명은 발레에 대한 반항이요,
나아가 그 당시 남자와 여자들의 사고방식을 거부하는 반기였다.
미국 여성들의 참정권 운동이 시작되고 여자에게도 균등한 기회를
요구하는 결의가 여성들 사이에서 번져가던 때,
이사도라는 독일의 신무용 탄생에 적지않은 기여를 했다.

그리고 그녀가 독일 베를린 근처의 그뤼네발트에
무용학교를 설립한 것은 1904년이었다.
또한 1905년 러시아 방문 공연은 러시아 발레에
큰 파문을 일으켰으며 발레뤼스가 결성되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녀의 무용에서의 자연주의란,
인공적인 기교 제일주의의 고전 발레에 대한 반발인 것이며,
또한 기성의 음악곡으로 부터 받은 인상을 그대로 무용으로 표현하였다.
특히 그녀는 기법이나 표현 그 자체에 대한 표현을 주장하였고
무용 예술을 소수의 전문가로부터 개방하여
대중의 손으로 옮기는 일을 개척하였다.

20세기를 맞을 때까지 독일은 무용면에서는 참으로 빈곤한 나라였다.
그러한 독일의 19세기 이후 프리드리히 얀(1778~1852)이라든가
구츠무츠(1759~1839)가 제창한 육체 문화운동이 국민 전반에 보급되었다.
물론 이 운동에 영향을 주고 목표를 제시한 사람은 이사도라이다.
그 후 독일의 각 도시에서는 수많은 일반인이 이사도라의 신무용을 향해
활발한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것을 신무용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무용적인 보건운동의 영역을 벗어나지를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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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50회 생일이 다가올 즈음 새로이 알게 된 친구와 
드라이브를 하러 나가기로 약속한 이사도라는 목에 붉은 빛깔의
스카프를 두르고 언제나처럼 한쪽 끝을 끌면서 차에 올랐다.
차가 움직이기 시작한 순간 이사도라의 목이 젖혀지면서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갔다.
이사도라는 작품을 미완성한 채 자신의 새로운 춤이
어떻게 규명될 지 모른 채 죽은 것이다.
또한 던컨 무용학교를 전세계에 세우고자 했던
그녀의 꿈도 실현되지 못했다.

그녀는 아주 자유로운 정신의 소유자였다.
그녀는 무용이 육체의 동작을 매개로 한
인간 정신의 신성한 표현이라고 하였다.
이사도라는 영혼의 춤을 추었고 춤을 종교와
동격으로 두면서 춤을 통한 종교의 무용을 주장했다.
그녀는 모든 속박을 깨뜨리는 인간의 가능성을 보여준
화려한 실례로서 대중의 상상력을 끊임없이 뒤흔들어 놓았다.

그녀의 뒤를 이어 그녀의 독창적인 움직임의 양식을
흉내내거나 발전시킨 루스, 세인트, 데니스, 도리스, 헌프리,
마사 그라함 등의 거물의 이름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클래식 발레의 규범과 인공적인 양식에 반대해서
무용을 인간의 강렬한 표현형태로 발전시킨데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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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컨은 그녀가 무용의 정수라고 믿은
자연스럽고 열정적인 단순성으로의 복귀를 주장했다.
그녀의 창작 방법은 창조적인 선구자라면
누구나 취했어야 할 기본적인 것이었다.
그녀는 진실로 인간의 영혼을 육체의 움직임이라는 수단으로
성스럽게 표현할 수 있는 무용을 추구한 것이다.

던컨의 표현은 때로는 너무 천진스러운 것이었지만
1930년대와 1960년대의 자유주의 운동에 영향을 주었다.
그녀는 활동적이고 주체성이 강한 여성이고,
여성임을 영광되게 한 인물이며 그러면서도 그녀의 일을
수행해 나가는 데에 타협을 몰랐던 여성의 표본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사도라 던컨은 무용가이자 여성선구자로서 전설적인 존재다.
태어난 지 100년이 훨씬 넘은 오늘날에도
그녀는 속박을 깨뜨리는, 인간의 가능성을 보여준 화려한 실례로서,
자유의 강렬한 상징으로서 끊임없이 되살아나고 있다.
이사도라 던컨은 단순한 무용가이거나 사회적 영향력을 발휘한 사람이 아니다.
그녀는 두 손으로 삶을 부여잡고 대중의 상상력을 끊임없이 뒤흔든 사람이다.
그녀는 자신의 삶 자체를 거대한 무대공연처럼 살았다.
극도로 방종한 것 같으면서도 실은 강렬한 자의식으로 관객을 의식하고 있었다.
천재의 본능과 스스로를 해칠 정도로 난폭하고 반항적인 언행으로
이사도라 던컨은 환희와 고통을 동시에 누렸다.
그것은 마치 그녀 자신이 주역을 맡은 거대한 한 편의 공연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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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도라 던컨 (Isadora Duncan)
(1878.5.26 - 1927.9.14)

출생 : 미국

직업 : 현대무용가(Morden Dancer)

경력 : 1905년 러시아 방문공연 
         1904년 독일 그뤼네발트에 무용학교 설립 
         1900년 유럽으로 건너감 
         1899년 시카고 데뷔공연 
         1897년 영국 델리 단원

저서 : '이사도라 던컨'
         '이사도라 던컨(나의 예술과 사랑)'
         '맨발의 이사도라' 
         '이사도라 던컨의 무용에세이(춤추는 무용가의 혁명적 예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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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 Europe의 예술계는
혜성같이 등장한 한 여인으로 인해 술렁거렸다.
아름다운 무대 장치도 없이,
몸에 딱 붙는 무용복도 없이,
토슈즈(toeshoes)도 없이...
맨발에 헐렁하고 속이 비치는 Dress를 걸친 무용수는
처음 보는 춤을 사람들에게 선보였다.
아름답고 기교가 뛰어난 전통 발레(ballet)와는 전혀 다른 춤이었다.
하지만 그 춤을 보고 있노라면
춤을 추는 무용수의 절절한 마음이 그대로 전달되었다.
신대륙 미국에서 건너온 무용수 Isadora Duncan은
이러한 맨발의 자유로운 춤으로 Europe 예술계를 뒤흔들어 놓았다.

마침내 그녀는 영국과 독일, 러시아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녀의 춤으로 인해 무용에 대한 인식은 180도 전환되었으며
토슈즈(toeshoes)의 발레(ballet)를 떠나
자유롭게 인간의 몸과 마음을 표현하는 현대 무용이 등장하였다.
전통 무용을 배격하고 무용을 창조적 예술의 수준으로 끌어올린
현대 무용 개척자. 자유로운 영혼의 전설적인 현대 무용의 어머니.
그의 이름은 'Isadora Duncan'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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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P-

1927년 9월 14일 프랑스의 아름다운 항구도시 니스의 한 레스토랑에서 
현대무용의 기수라 불리는 이사도라 던컨은 애인이었던
젊은 카레이서의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 저녁 식사를 한 후
해안을 따라 드라이브하기로 했다.
 
잠시 후 레이서는 새 스포츠카인 이태리제 부가티를 몰고 그녀 앞에 나타났다.
이사도라는 빨간 스카프를 길게 끌면서 좌석이 좁은 2인승 스포츠카에 올라 타고
배웅하는 친구들에게 손을 흔들어 미소를 보냈다.
그런데 차가 세차게 출발하는 순간 이사도라의 목이 갑자기 뒤로 꺾어졌다.
올라 탈 때 늘어뜨린 긴 스카프 자락이 덮개도 없는 차의
뒤바퀴 스포크에 감겨 돌아가면서 그녀의 목을 잡아당겨 버린 것이다.
불꽃의 여인 이사도라 던컨은 이사고 때문에 49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 스포츠카는 당시 유럽의 천재적인 자동차 예술가였던
이태리의 기술자 에토레 부가티가 만든 차로서
유럽에서 가장 성능이 뛰어나고 운전하기 쉬운 작은 차체에
시대를 앞선 뛰어난 디자인 때문에 상류상회의 스포츠맨들에게
대단한 사랑을 받던 차였다.
그런데 이차는 한쪽팔을 밖으로 내지 않고는 탈 수 없을 만큼
폭이 좁고 팔꿈치에서 뒷바퀴까지의 거리는 불과 15cm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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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여신들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아 판에 박은 듯한 고전무용을
자유분방한 현대무용으로 바꾼 이사도라는
항상 헐렁한 무용복과 긴 스카프를 두르고
맨발로 춤추기를 좋아해 '맨발의 이사도라'라고 불렸다.

자유분방한 사랑과 무용으로 세계를 휩쓴 그녀는
한때 파리의 위대한 조각가 로댕에게 사랑을 못바쳐 안달했고,
오스트리아의 황태자 페르디난드 대공의 사랑을 받았다.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그녀의 춤을 비방하던 성직자들을
적극 무마해 주었고, 자동차왕 헨리 포드는 미국의 어린이들에게
이사도라처럼 춤추는 어린이가 되기를 바랄 만큼
세계적인 유명인사가 되었다.

이사도라가 파리에 머물고 있던 1913년
그녀의 어린 딸 디어드로와 아들 패드릭이 유모와 함께
자동차를 타고 드라이브하다가 마차를 피해 강으로 추락 죽고 말았다.
사랑하던 자식들까지 자동차 때문에 잃어 버리고
자신도 자동차 때문에 세상을 등진 비운의 여인이었다.


*
흐르는 음악은
Paul Mauriat 악단이 발표한 '이사도라' 입니다.
영화 "맨발의 이사도라"에 삽입된 곡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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