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 이야기
박 범 신
논산의 글방 ‘와초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선인장을 키우고 전시하는 관광농원이 있다. ‘청유리원’이다. 커피도 마실 수 있고 새로 핀 선인장의 다양한 꽃도 볼 수 있어 가끔 그곳에 간다. 호수를 따라 걷다가 넓지 않은 들판을 가로질러 가면 나지막한 산으로 둘러싸인 ‘청유리원’에 닿을 수 있다. 주인장은 선인장에 반해 ‘선인장 사랑’으로 시종한 중년인데 자신을 가리켜 곧잘 ‘가시장이’라고 부른다.
장편소설 《소소한 풍경》의 주인공이 가시장이로 등장하는 것도 근처에 ‘청유리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곳에 가면 나는 선인장의 꽃들과 함께 가시를 본다. 예전엔 꽃만 보았는데 자주 선인장을 대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가시를 보게 된 것이다. 열악한 환경을 견디느라 잎이 변한 것이 바로 선인장의 가시다. 가시는, 선인장의 입장으로 보면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한 고육지책의 전략적 도구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선인장의 가시를 보면 나는 저절로 고통, 인내, 상처, 죽음 그런 낱말을 떠올린다.
가시를 중심으로 삼을 때 선인장은 데략 세 종류로 구분할 수 있다. 하나는 가시를 밖으로 뻗대고 있는 놈이고, 둘은 자라면서 가시가 안으로 구부러져 저 자신을 겨냥한 놈이다. ‘낚시바늘선인장’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셋은 아예 가시가 없는 선인장. “가시가 아예 몸 안으로 들어가 몸이 된 거지요.” 청유리원 주인장의 설명이다. 이를테면 가시 없는 선인장은 가시가 없는 게 아니라 제 몸뚱어리 속에 가시를 감추고 있는 셈이다.
새로 쓴 소설 《소소한 풍경》은 가시의 소설이라 할 만하다. 두 여자와 한 남자가 봄바람에 포위된 외딴집에서 한겨울 동안 함께 살다가 황홀한 봄날 끔찍한 파국을 만나는 서사로 되어 있는데 이 소설의 세 인물이 각각 1. 가시를 밖으로 뻗댄, 2. 가시를 제 몸 쪽으로 겨냥한, 3. 가시를 몸뚱어리 안에 숨긴 캐릭터로 그려져 있다.
인생의 과정도 그렇지 않던가.
선인장을 삶의 태도에 비유하면 재미있다. 일반적으로 젊을 땐 기운은 좋으나 외부세계에 두려움도 많으니 방어기제가 전방위적으로 작동해 가시가 외부로 뻗어있다. 열등감 많은 사람은 더 그렇다. 누가 조금만 자기를 무시하는 것 같아도 불같이 화를 내거나 마음의 문을 닫아건다. 고슴도치의 가시에 비유할 수 있겠다.
그에 비해 중장년쯤 되면 자기 과오에 대한 성찰과 회한이 쌓여 가시가 조금씩 자신에게로 구부러지기 시작한다. 가시가 자신을 겨눈바 경우에 따라선 과민한 자학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 물론 모든 중년이 꼭 그렇다는 건 아니다. 철이 든다는 건 성찰의 게이지가 깊이 작동한다는 뜻이려니와 일반적으로 그렇다는 말이다. 가시가 저 자신에게 구부러져 있는 선인장을 보면 성찰의 시기를 맞이한 중년, 혹은 장년의 그늘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그리고 세월을 더 쌓아 노년에 당도하다 보면 보통 가시가 외부에서 보이지 않는다. 잘 늙은 사람일수록 그러하다. 그이는 대체로 인자한 표정을 갖고 있으며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그렇다고 가슴 속에 왜 상처가 쌓여 있지 않겠는가. 늙을수록 가슴을 횡으로 열어보면 상처가 만든 가시들이 더께로 쌓여 있기 쉽다. 그러나 밖에서 볼 때 그의 표정은 비교적 고요하고 담담하다. 그런 점에서 눈에 안 보이게 속으로 쌓인 가시의 덩어리야말로 아름답게 나이든 노인의 표상일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다. 나이로 나눠보는 건 손쉬운 일반적인 논리일 뿐 진실에 꼭 부합한다고 볼 수 없다. 생을 이해하는 깊이가 나이순이 아니듯 삶과 세상을 대하는 태도 역시 그렇다. 어떤 이는 늙었어도 고슴도치처럼 여전히 가시를 외부로 뻗고 있고 어떤 이는 젊었어도 가시를 제 몸속에 쟁여 들키지 않는 사람도 있다. 또한 젊든 늙든 가시가 저 자신을 겨눈 자학적인 타입의 사람들도 늘 있기 마련이다. 중요한 것은 가시를 외부로 뻗치고 있는 것이 얼핏 용감하게 뵐지도 모르나 이는 삶에서 가장 하수이고, 가시를 저 자신에게 겨누는 태도는 스스로를 괴롭히니 행복해지기 어려울 뿐이며 가시를 가지런히 내장해둔 채 가시 없는 선인장처럼 담담한 표정으로 삶과 세상을 대할 수만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삶에서 가장 상수라 할 것이라는 점이다.
난 오랫동안 두 번째 스타일에 가장 가까웠다. 어떤 문제가 생기면 늘 먼저 나 자신의 과오를 성찰하고 탓하는 자학형이라 하겠다. 내가 오로지 문학을 선택하고 그 길로 걸어온 건 그 기질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자학이야말로 문학 또는 모든 예술의 핵심적 자산이기 때문이다.
안정감은 안락한 행복을 줄 수도 있겠으나 상상력을 와해한다. 그와 달리 자학은 불안정한 내적분열을 만들어내고 그 위험한 에너지는 최종적으로 창조적 상상력을 견인해낸다. 내가 오랫동안 독자들에게 청년작가라고 불렸던 연원이 아마 거기에 있었을 것이다. 자학에 따른 내적분열이 예민한 감수성을 유지시키므로 어떤 세속적 권위나 기득권에 결코 복속되지 않고 오로지 사물과 세상을 생생히 보고, 생생히 느끼고, 생생히 드러내려는 창조적 에너지를 지속적으로 갖는 일, 안락의자가 아니라 위태롭고 불온한 경계에 자신의 본체를 두는 전략으로써 고유한 상상력을 자신의 내부로부터 계속 견인해내려는 태도.
그러나 위험하다. 이런 태도는 우리의 사회 문화에선 허용의 범위가 좁다. 손가락질 받기 쉽다. 이런 태도는 우리의 사회 문화에선 허용의 범위가 좁다. 이를테면 늙어서 내 소설 《은교》 같은 경우 근본적으로 존재론적인 슬픔을 아프게 진술한 소설이지만 열일곱 소녀 은교와 일흔 살인 이적요의 관계에 따른 세속적인 고정관념 때문에 작가인 나 자신은 여러 지점에서 오해에 따른 이미지의 얼룩을 덮어쓸 가능성이 크다. 나이 들면 거대담론 따위를 앞세운 계몽적 작품 등을 쓰는 게 상수인 사회문화적 배경이 상존해 있다는 것이다. 엘리트 문화의 사회적 흐름에서 보면 더욱 그렇다. 아무렴. 나이가 들면 세상이 암묵적으로 합의해둔 그 나이에 어울리는 도포를 입는 것이 안전하다.
그러나 어떤 사람에겐 그것이 지난한 일이라는 사실이 문제이다. 일테면 내가 그렇다. 내 안엔 세상과 지속적으로 엇나가려는 내가 있다. 머리가 아무리 희어져도 내 안에 그대로 존재하는 일종의 늙지 않는 짐승 같은 것이. 빌어먹을, 세상이 가리켜 보여주는 대로 늙어가는 일이 내겐 왜 이리 어려울까.
어쨌든 몸속에 상처를 쟁이고 쟁여서 마침내 그것 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가시가 되고 말면 그게 바로 죽음인지도 모르겠다. 죽음이야말로 가장 단단한 가시가 아닐는지. 새로 펴낸 소설 《소소한 풍경》은 가시를 통해 그것을 은유적으로 진술한 소설이다.
더 늙어선 부디, 가시 없는 선인장이 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