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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스 산맥 산꼭대기 빙하가 녹아내리며 대규모 산사태가 일어나 마을을 집어삼킨다는 뉴스가 일상이 되며, 세계 곳곳이 기상이변을 겪고 있습니다. 마치 ‘브레이크 없는 벤츠’처럼 그 가속도가 무서운데요. 우리 역시 연일 전국을 달구던 40℃ 무더위를 넘나들다 보니, 오늘 불과 2~3℃ 내렸을 뿐인데 일단, 공기부터 상쾌합니다. 36℃인데 말이죠.
더워도 추워도 할 건 해야죠. 태풍의 여파로 무더위가 한풀 누그러졌던 오늘 우리 순례단은 복자 윤봉문 요셉 성지와 순교자의 딸 유섬이 묘를 방문했습니다.
마산교구 옥포 성당 관할의 복자 윤봉문 요셉 성지는 경남 거제시 지세포 일대에 조성된 성지입니다. 거제도 방문이 처음인 분들이 많았고 저 역시 미지의 남도 섬을 기대하며 설레었는데, 거대한 조선소와 각종 산업단지,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빽빽히 들어선 거제도는 아주 현실적인 부자 도시였어요. 다리가 놓여 이제는 섬이랄 것도 없지만, 넓게 잘 닦여진 도로에, 중장비 산업시설들이 바다와 항만에 위용스럽게 들어차 아주 활기넘쳐 보였습니다.
복자 윤봉문 요셉 성지
윤사우 스타니슬라오의 둘째 아들인 복자 윤봉문 요셉은 어려서부터 증조모 홍 씨로부터 교리 교육을 받아 신앙심이 투철했습니다. 부친 윤사우는 봇짐 행상을 하면서, 붓 대롱 속에 <교리문답>을 감추고 다니며 비밀리에 천주교 신앙을 전하고 다녔습니다. 윤사우의 가족이 재산을 몰수당한 후 신앙의 자유를 찾아 대마도로 피신할 목적으로 거제도 진목정에 귀착했을 시 진 요한 가족을 입교시켰고 이 인연으로 윤봉문 요셉은 장성하여 진 아녜스와 혼인해 거제도에 정착합니다. 윤봉문은 형 윤경문 베드로와 함께 거제 지역 전교에 힘썼고 그 결과, 로베르 신부가 거제를 방문했을 때 15명을 세례로 입교시켰으며 예비자가 40명에 이를 정도였다고 합니다. 당시 거제에 7개의 성당이 있었다고 하니 ‘거제의 사도’라는 별칭이 과하지 않네요.
1888년 봄, 어느 가족의 불미스러운 사건이 단초가 되어 천주교인에 대한 박해가 일어납니다. 천주교인들의 몸값으로 개인적인 탐욕을 채우는 관리나 포졸들에 의해 사사로운 탄압이 이어지던 중, 잡혀간 교우들을 풀어주고 대신 자신을 잡아가라고 나선 윤봉문은 거제도에서 통영으로 끌려가 모진 문초와 형벌을 받았으나 배교하지 않습니다. 이후 진주로 이송해 처형하라는 명령이 내려졌고, 윤봉문이 진주로 끌려가던 중에 하느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자 포졸들은 그의 발뒤꿈치에 구멍을 내 굵은 칡으로 꿰어 끌고 가며 살이 뭉개지는 고통을 줍니다. 하지만 그는 더 큰 소리로 천주십계와 성교사규를 외우며 신앙을 지켰고 진주 감옥에서 교수형으로 36세에 순교합니다. 8년 뒤 후손들이 이불솜 장수로 위장하여 시신을 수습해 옥포 국사봉에 모셨고, 윤봉문 요셉은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습니다.
2013년 4월 20일 마산교구는 거제시 옥포동 족박골에 안치되었던 윤봉문 요셉의 유해를 거제시 일운면 지세포리 1176-1로 이장했는데, 이장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순교자의 유골이 너무 잘 보존되어 있음에 놀랐다고 합니다. 더불어 유골 중우측 골반뼈와 꼬리뼈가 거의 남아있지 않다는 점과 발목 밑으로 뼈가 제대로 남아있지 않다는 점으로, 윤봉문 복자에 대한 고문이 얼마나 혹독했던가를 짐작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울창한 숲속에 성지가 있습니다. 좁을 길을 잠시 가파르게 오르면 산속 휴양림처럼 나지막한 건물이 나오는데, 기도 경당입니다. 얼핏 건물만 보면 천주교 성지인지 잘 모를 정도에요. 편백나무와 대나무가 숲 전체를 에워싸듯 우거졌는데 모두 수령이 엄청나고, 거대 대나무 일종인 맹종죽은 왠만한 성인 다리만큼이나 굵어 놀랍습니다. 남부지방에서 잘 자라는 종이라고 하네요.
신협연수원(서울대교구 소유)으로 사용되던 이 부지는 신자들의 요청에 따라 김수환 추기경께서 마산교구에 기증한 곳입니다. 애초 진입로가 없어 방치되던 곳이지만 신자들이 직접 나무를 베고 길을 만들며 헌신적인 봉사를 한 덕분에, 울창한 숲 사이로 십자가의 길과 묵주기도 길이 만들어졌고 순교자 현양비가 건립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순교자 현양비는 죄인들에게 씌우던 형틀인 칼을 형상화하였고, 그 현양비 뒷켠에 복자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습니다.
시원한 에어컨이 켜있는 경당에서 11시에 최태준 필립보 신부님 집전의 미사를 드렸습니다. 50대 중반이라고 믿어지지 않는, 다정하고 유쾌한 필립보 신부님은 우리 순례단을 환영하시며 윤봉문 요셉 성지를 아주아주 자세히 설명해주셨습니다.
아들을 잃고 방황하던 증조모 홍 씨의 입교에서부터 순교로 이어진 윤봉문 복자의 가족 이야기에는 세 가지 메시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윤사우의 가족이 일본 대마도로 이주하고자 했던 목적은 ‘신앙의 자유’에 있으며, 이는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한다는 것.
둘째는, 홍 씨 할머니가 천주교에 전 가족을 입교시킨 것은, 좋은 것이 있으면 가장 먼저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나누고자 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참사랑의 실천이라는 것.
셋째는, 윤봉문 복자가, 잡혀간 교우들을 대신해 자신이 잡혀간 것처럼,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자신을 내어놓는 희생을 묵상하자는 것.입니다.
혹독한 시대를 걸어간 한 가족의 서사를 통해, 이 시대 백색순교의 진한 교훈을 얻습니다.
순교자의 딸 유섬이 묘
거제도에 복음이 전파된 시기가 언제인지 분명치 않지만 1801년 신유박해의 영향으로 3명의 신자가 거제도로 귀양 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복자 윤지헌(윤지충의 동생)의 아들 종근(13세), 황사영의 어머니 이윤혜, 유항검의 딸 섬이입니다. (이 중 기록으로 남은 사람은 유섬이 뿐입니다.)
거제 성당 관할의 유섬이(1793~1863) 묘는 호남의 사도로 불리는 복자 유항검 아우구스티노의 딸 섬이가 묻힌 곳입니다. 신유박해 시 유항검과 부인 신희, 큰아들 유중철, 며느리 이순이, 차남 유문석이 순교하였고, 9세이던 딸 섬이는 경상도 거제부 관비로, 셋째 아들(6세) 일석은 전라도 흑산도 노비로, 막내 아들(3세) 일문은 강진 신지도로 귀양을 갔습니다. 유섬이의 기록은 전해지지 않다가, 2014년 유항검 일가가 시복되던 해에, 하성래 아우구스티누스 박사가 거제 도호부사를 역임한 하겸락(1825~1904) 선생의 문집인 사헌유집의 해제를 집필하다가 유섬이에 관한 기록을 발견하면서 그 생애가 전해지게 됐습니다.
그 기록에는, ‘거제부에 71세된 유 처녀가 있었고 유명한 집안의 소생이라고 들었다, 아비가 사학을 범하여 딸이 관비가 되었는데 나이가 어려 읍에 사는 노파가 수양딸로 삼아 기르며 바느질을 가르쳤다, 유는 평생 다른 사람과 말하거나 웃지 않고 문밖을 나서지 않았으며, 나이가 차 시집을 보내려는 중매쟁이가 나타나자 노비 신분으로 자손이 종이 될 것을 괴로워하며 이를 거부하였고, 나이 16~17세가 되었을 때 그 어미에게 청해 흙과 돌로 드나들 수 없는 집을 지어 스스로를 가두어 살았다, 40여세 즈음에야 흙집을 나와 여느 사람처럼 살았으나 몸을 보호하기 위해 항상 칼을 몸에 지니고 다녔으며, 고을 사람들은 모두 그 정절을 알고 감히 더럽힐 마음을 갖지 못하고 유 처녀라고 불렀다, 본인이 다른 벼슬을 맡아 돌아가려 할 때 유 처녀가 71세로 죽었다는 보고를 받았고, 그 죽음이 억울하고 애처로워 노비임에도 장사를 치뤄주고 묘 옆 바위에 묘표를 새기도록 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성래 박사는, 천주교인이 아닌 정통 유학자였던 거제 부사 하겸락 선생이 일개 노비를 위해 장례 비용을 부담하여 내간리 송곡마을 뒤 현 위치에 묘까지 마련하고 그녀의 생애를 자기 문집에 기록한 것은 참으로 특이한 일이며, 그만큼 유섬이의 삶이 고결하고, 고을 사람들에게 존경받았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기록이라 했습니다. 또한 유섬이가 그렇게 철저하게 동정을 지킨 것은 오라비인 동정부부 유중철 요한과 올케 이순이 루갈다의 삶을 본받은 것으로 보이며, 천인 후손을 낳을 것을 염려한 것은 핑계로, 신앙으로 동정을 지키며 흙과 돌로 드나들지 못하게 막은 집에서 신심의 기도 생활을 한 것이 아닐까 추정했습니다.
저는 픽션, 넌픽션 그 어느 장르에서도 이런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얼핏 영화 ‘올드보이’가 생각납니다. 하지만 결이 완전히 다르지요. 올드보이는 타인에 의해 강제격리를 당한 이야기지만, 이는 자신의 자유의지로 완벽히 사회와 격리한 극단적인 실화입니다. 어린 소녀가 자신의 신념을 지키려, 철저한 고립 속에 동정을 지키려, 길고 긴 고독의 세월을 선택했습니다.
사람이 드나들 수 없는 작은 토굴 속에서, 해가 지고 달이 뜨고 여명이 밝아오는 새벽을 어떤 마음으로 맞이했을까요, 비가 오고 눈이 오고 계절이 지나가는 모습을 어떤 시선으로 보았을까요. 가슴 속에 태양같은 신념이 들어차 있는데, 어린 자신을 지켜낼 수 없는 혹독한 현실에 절망하며 내렸을 극단의 결단. 죽음조차 그녀의 신념을 지키는 수단일 뿐, 장장 25여년 간을 인간적인 번민을 초월한 삶을 사셨네요. 그 깊은 심연의 세계에서 그녀는 과연 그리운 그 분을 만났을까요.
작은 묘에 ‘유처자묘’가 각인된 표지석만 놓여있던 유섬이 묘는 작년에 들어가는 길을 정비하고 단을 만들어 작지만 아담한 순례지로 조성했습니다. 순교자도 아니고, 신앙인인지도 밝혀지지 않았지만, 어린 나이에도 기품을 잃지 않은 채 초개와 같던 가족의 신심을 그대로 이어 받음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정절[신앙]을 지키기 위해 소신을 실천한 강인한 처녀 유섬이 묘에서, 먹먹함을 넘어선 끝없는 연민이 가슴을 고동치게 했습니다. 심신의 고통 중에 계신 분들이 떠오릅니다. 다 같이 이곳에 왔더라면 더 좋았을 것을요.
오늘 긴 일정을 위해 든든한 먹거리를 찬조해주신 풍동성당 김숙희 바실리사님과 김옥림 요안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졸깃한 송편으로 아침 식사를, 고소한 콩떡으로 돌아오는 저녁 요기를 잘했습니다. 바실리사님께서 누룽지쿠키와 달달사탕도 한 보따리 챙겨오셨네요. 감사히 잘 나누었습니다.
풍동성당 매듭묵주팀이 준비해주신 묵주는 윤봉문 요셉 성지의 최태준 필립보 신부님께 잘 전달해드렸습니다. 크게 기뻐하시며 스윗하게 셀카도 직접 찍어주셨네요. 갈수록 더 멋져지는 매듭묵주, 정말 감동입니다.
최태준 신부께서 오늘 강론 마지막에, “포기를 포기하라!”고 외치셨습니다. 나약한 마음으로 매사 먼저 포기하는 마음을 경계하라는 말씀이셨죠. 특히 순례단 예를 드시면서, 내 몸이 너무 나이 들어 남에게 폐를 끼치지는 않을까? 내가 지금 불편한 몸이어서 남에게 폐가 되지는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지레 순례를 포기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하셨어요. 하느님을 만나러 떠나는 나의 적극적인 여정이 남에게 폐가 되는 일일까요? 주저하지 말고 내 마음 가는 일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확실히 성지순례로 훨씬 더 하느님을 자주 만납니다. 신앙선조들의 예기치 않은 이야기들로 해이한 마음이 재무장됩니다. 무심히 지나치는 것 같고, 때로는 소란스럽게 걸음을 옮길지라도 그 마음속에는 항상 주님 찾는 신심이 빼곡하다는 것을 이제 우리는 다 압니다. 천천히 걷더라도 주님 찾아 떠나는 지극한 순례 여정은 우리 삶의 동력이니, 부디 그 동력 끊지 마시고, 9월 순례에서도, 모두, 반갑게 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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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이구야~ 저희는 불과 열흘전에 영성 가득한
기쁨으로 잘 다녀왔는데
이게 무슨일 입니까
거제에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지면서 거제지역
성당과 사적지에 시설물 파손으로 피해가 크다는기막힌 뉴스를 접하게 되네요
제일먼저 ~
놀라 이리저리 땀흘리며 뛰어 다니실 최태준필립보신부님이 눈에 선하여 발만 동동
안타깝기 그지없네요
모쪼록 거제도 지역 전체와 성당
특히 아직 눈안 생생이 담겨있는
윤봉문요셉순교 성지와 유섬이묘가 하루
빨리 잘 복원 될 수 있기를 기도드립니다.
글라라님의 정성어린 글과 사진을 보며
먹먹해진 마음 다잡고
주님께서 함께하여 주시리라 굳게 믿으며
위안해봅니다
글라라님 수고와 정성에 감사드립니다~ 💕
그러게요. 유섬이묘 저 올라가는 초입계단이 다 무너졌다고 하네요.
거제지역 성당들 피해도 심하고. 윤봉문 성지도 숲이라 걱정되네요.
하루빨리 복구되어 일상이 잘 회복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산림욕같이 아름다운 성지가 훼손이 많이 안 됐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거제 앞바다를 바라보았던 시선을 다시한번 떠올립니다. 눈부시게 푸르른 오늘 평화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