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벨스 - 대중선동의 심리학』(1)
독일의 역사가 랄프 게오르크 로이트의 『괴벨스 : 대중선동의 심리학』은 거의 1000쪽에 가까운 엄청난 분량의 책이다. 1897년 태어난 괴벨스가 겪었던 생의 주기를 따라가며 나치즘의 선동정치를 이끌었던 그를 분석한다. 한 인물이 시대의 중심으로 등장하기까지는 수많은 요소들의 결합으로 이루어진다. 때로는 그러한 요소들은 행운으로, 때로는 불운으로 다가오기도 하지만, 결국 그의 행동을 결정짓는 것은 그가 갖고 있는 근본적 태도와 그가 지니고 있는 능력일지 모른다. 한 편의 글로 정리하기에는 너무도 많은 내용을 담고 있어 두 개의 부분으로 나눠 정리한다. 첫 번째 글은 나치의 히틀러가 합법적으로 제국의 총리가 되어 권력을 장악하는 시기까지 이다.
1. 성직자의 꿈을 지녔던 소년은 어렸을 적 사고로 신체장애를 안게 된 이후 언제나 자신의 열등감을 과잉보상하는 방향으로 행동했다. 그는 지적인 능력이 자신의 약점을 보상할 수 있다는 점을 깨닫고 공부에 열중한다. 차츰 지적능력과 문장력에서 두각을 나타내었고 연극의 재능도 발견했다. 그는 자신의 능력을 신이 그에게 내린 선물이라는 몽상에 빠졌고 주변 사람들에 대한 차별적 태도를 보였다. “괴벨스의 소년기를 지배한 것은 쓰라린 현실과 그가 현실에서 도피해 들어가던 허구 사이의 괴리였다.”
2. 여유롭지 않았지만 성실했던 부모들의 지원을 받아 대학에 진학한 괴벨스는 부르주아 계급의 여성을 만나 사랑에 빠지지만, 결국 계급적 차이 때문에 헤어지게 된다. 이 사건은 부르주아에 대한 냉혹한 증오에 빠지는 계기가 된다. 1차 대전에 참전하지 못하는 열등감을 공부와 희곡 저작을 통해 극복하려 했고 그러한 노력을 바탕으로 결국 문학박사를 취득하게 된다. 박사 획득 이후 한동안 어려움을 겪지만 우연히 친구의 소개로 바이에르 뮌헨 지역의 ‘나치즘’ 운동에 참여하게 되고 그 곳에서 자신이 오랫동안 꿈꾸던 새로운 인간이자 새 시대를 이끄는 천재를 발견한다. 바로 나치당(국가사회주의 독일노동자당)의 지도자 히틀러였다.
3. 괴벨스는 1차 세계대전 이후 등장한 바이마르 체제의 공화국을 증오했다. 사회의 모든 병리적 문제를 공화국의 탓으로 돌리기도 하였다. 문제의 원인을 외부에 돌리는 경향은 그가 쓴 모든 글에 나타나는 특징이기도 하다. “글을 쓸 때 그는 언제나 자신을 구구하게 변명하면서 결국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책임지지 않으려 했다. 그는 언제나 책임을 타락한 세상에 돌렸다.” 이런 타락한 세상을 구원한 존재는 새로운 ‘영원한 지도자’였다. “그는 생명을 지니고 있고 생명을 만들어 내”는 지도자이다. 그에게 히틀러는 바로 영원한 지도자이자 “역사를 형성하는 신적인 의지의 도구”였다.
4. 괴벨스의 가장 강력한 투쟁의 대상은 유대인이었다. 반유대주의는 폭력적인 상태로 나타나기도 했지만 더 무서운 것은 일상적 반유대주의였다. 이런 반유대주의가 괴벨스에게 정치적 파괴력을 발휘할 수 있는 정치적 토양이 된 것이다. 괴벨스는 유대인을 다음과 같이 공격한다. “우리는 유대인의 반대자들이다. 유대인은 독일이 예속 상태에 놓이게 했고 여기서 톡톡히 재미를 보고 있다. 유대인은 독일을 둘로 쪼개 놓았고 이것이 1차 세계대전 패전과 혁명의 타락을 가져온 화근이었다.” 공산주의의 시조가 유대인이었던 마르크스라는 이유로 공산주의를 ‘증권시장주의’와 동일 선상에서 비판하기도 하였다. 공산주의와 증권시장주의는 결국 유대인의 세계지배를 목표로 하는 것이라 보았다.
5. 나치당의 일원으로 활동하면서 괴벨스는 자신에게 뛰어난 연설의 자질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연설과 문장의 능력은 히틀러의 신임을 받게 하였고 결국 베를린 지역의 나치당 관구장으로 승격되었다. 제국의 수도에서 괴벨스는 공화국과 유대인을 공격하는 연설과 사설을 통해 끊임없는 선동 정치를 전개하였을 뿐 아니라 돌격대를 활용하여 공산주의자들과 계속적인 폭력적 충돌을 일으켰다.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려은 그의 계획은 정치사회적 상황에서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그들이 주장하는 세계음모이론보다는 전쟁 이후 급격하게 나빠지고 있는 현실의 고통이 나치와 공산당의 지지자를 늘리게 하고 있었다. 공화국의 쇠퇴 속에서 나치당과 공산주의는 극우와 극좌의 형태로 점차 의회에서 높은 투표율을 얻게 된 것이다.
6. 나치의 진전은 히틀러의 교묘한 정치술의 영향도 크다. 나치의 수장인 히틀러는 ‘사회주의’와 ‘노동자’을 위한 정당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도, 보수주의자들이나 대기업가와 협력을 시도하였고 합법적인 정치를 가장하였다. 나치당의 돌격대가 벌이는 폭력과는 일정한 거리를 둔 것이다. 이러한 부정적 행동은 괴벨스를 비롯한 중간 간부의 영역이었다. 더욱 격렬해진 공산주의자들의 폭력이 늘어난 것도 나치를 지지하는 국민이 늘어난 이유이기도 하다. 정치적 혼란 속에서 독일국민들은 지지할 수 있는 정치적 세력에 대한 심각한 고민에 빠졌고 이러한 혼란을 바탕으로 나치는 성장할 수 있었다.
7. 사실 민주정부는 승전국가와의 협상을 통해 조금씩 배상금 규모와 배상금 상환방법을 개선시키고 있었고 최악의 경제적 상황도 좋아지고 있었다. 하지만 괴벨스는 교묘한 선전선동을 통해 지속적으로 현 정부의 정책을 오도시켰고 공격하였다. 정치적 혼란은 귀족적 정치가들의 불안을 불러 일으켰고 통제가능할 것 같은 나치당을 권력의 파트너로 끌어들여 정권을 안정시키려는 계획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1932까지 대통령이었던 힌테부르크는 나치당의 대해 의심하였다. “나치주의자들이 이끄는 대통령 내각은 십중팔구 일당독재로 귀결되고 독일민족 내부의 갈등을 악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대통령으로서 이를 허용하는 것은 대통령 서약과 양심에 비추어 책임질 수 없는 일이다.”라고 밝히며 히틀러의 내각 참여를 거부하였던 것이다.
8. 하지만 상황은 급변한다. 히틀러의 ‘전부 아니면 전무’라는 강경한 협상 태도를 받아들이지 않던 보수세력은 갑자기 히틀러에게 내각 총리를 제공할 것을 결정한다. 이 결정 과정에는 힌덴부르크의 아들과 변호사 그리고 현 총리 파펜과 권력다툼을 벌였던 다른 정치인의 입김이 작용한다. 그럼에도 힌데부르크가 갑자가 원래의 생각을 바꾸게 된 계기는 명확하지 않다. 어쩌면 개인적인 비리때문이었다고 추측된다. 어쨌든 히틀러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1933년 권력의 중심으로 등극한 것이다. 히틀러가 권력을 잡기까지 괴벨스는 사이비 종교 방식으로 히틀러를 희망의 상징이며 시대의 난관과 결핍에서 벗어나는 길을 제시하는 사람으로 미화했지만 이것만으로 이유가 될 수 없다. 오히려 심각한 정치위기, 무능한 민주정부, 유약한 대통령, 착각에 빠진 교만한 귀족정치가들의 결합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9. 히틀러가 총리가 된 이후 곧바로 심각한 사건이 터진다. 제국의 의사당 방화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방화자는 전 공산당 소속이었다. 나치당은 이 사건을 계기로 독재정권을 확립할 수 있는 기회를 획득하게 된다.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강경하면서도 철저한 탄압이 시작되었고 국민의 기본권이 정지되고 수많은 규제조치가 내려졌으며 나치당에게 권력을 집중시키는 ‘전권위임법’이 통과되었다. 이를 통해 바이마르 체제라는 법치국가는 완벽하게 무너지고 영구적인 비상사태가 선포된 것이다.
첫댓글 - 끝없이 진화하는 정치 권력의 변화는 기본적 보편적의 일상 속으로 교묘하게 파고든다. 어쩔 수 없이 선택하는 대안을 집어 삼키며 성장한다. 거짓된 선동이 먹혀 들어간다. 무언가 대단한 것 같은......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이 순간의 선택이라는 자부심을 일으키고...... 정당성을 부여하고...... 지금 바라보고 있는 세계의 모습도 똑같이 전개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