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산탈춤>
1. <봉산탈춤>은 춤사위가 화려하고 음악과 대사가 효과적으로 표현된 한국 가면극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황해도 봉산군 동선면 길양리’에서 시작된 봉산탈춤은 ‘해서 탈춤’의 한 형태로 18세기를 전후로 하여 크게 발전하였다. 봉산탈춤을 창조한 집단은 상인과 지방의 이속들로 이들은 사회경제적으로 변화된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들이다. 봉산탈춤이 급속도로 발전된 이유는 우선 민중들의 호응이 컸고, 상업적 교류가 활발한 지역이라는 점, 관아의 이속이 주축이 되면서 관아의 지원을 충분히 받았다는 점, 그리고 황해도 감사가 개최한 경연대회을 통한 기술적 발전 등을 들 수 있다.
2. ‘봉산탈춤’은 ‘양주별산대’와 유사한 ‘산대계통극’의 일종으로 5월 단오에 공연되었을 뿐 아니라, 지방 관아의 ‘산대놀이’나 중국 사신을 위한 환영식에 동원되기도 하였다.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봉산탈춤’은 황해도 일대에서 가면극 공연을 하였던 사람들이 한국전쟁 이후 남하함으로써 재구성되었고 그들의 노력을 통해 ‘중요무형문화재’로 등록될 수 있게 되었다. ‘봉산탈춤’은 다른 어떤 탈춤보다도 다양한 춤의 형태를 볼 수 있으며, 춤의 동작이 화려하고 경쾌하며 힘이 넘친 것이 특징이다. ‘춤’은 단지 부수적 요소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극의 전개과정에서 흐름과 단절의 묘한 긴장감을 해소하는 역할로도 활용된다. 춤과 함께 다양한 음악적 장단이 활용되었고 극 중간에 민요를 활용하면서 극의 흥미를 높이고 있다. 한시나 고사 그리고 어려운 문장이 다른 민속극보다 많다는 점은 당시 지식인들이라 할 수 있는 이속 집단의 정체성을 반영한 결과라 할 수 있다.
3. ‘봉산탈춤’ 또한 가면극의 핵심적 갈등 구조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먼저 <노장과장>은 여전히 민중들에게 중요하면서도 위협적인 종교적 권위를 비판하는 내용이다. ‘노장과장’과 관련되어서는 전설이 전해오는데, 만석이라는 늙은 도승을 조롱하기 위해 방랑 거사인 취발이가 아리따운 여성을 이용하여 결국은 파계시킨다는 내용이다. 이러한 전설이나 실제 가면극에서 벌어지는 내용은 형식적이고 추상적인 권위는 이제 불필요하다는 인식이 담겨있다고 할 수 있다. 늙은 도승인 ‘노장’은 ‘팔목중’이라는 제자들과 함께 등장하는 데 위엄있고 권위있는 모습이 아닌 목중들에게 농락당하는 초라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목중들이 노장찾는 대목에서는 노장에 대한 존중심은 전혀 없고 조롱의 대상으로 전락할 뿐이다.
4. 하지만 노장이 세속적 유혹에 적극적으로 반응하여 아름다운 소무를 유혹하고 소무에게 신발을 사주면서 신장수와 실강이할 뿐 아니라 신장수에게 위엄을 보이면서 노장의 모습은 현실 속에서 적극적인 인물상으로 변모한다. 이런 점에서 비판의 대상은 노장의 파계가 아니라 파계하기 전, 단지 비현실적 권위 속에 머물고 있던 노장이었던 것이다. 파계한 노장은 오히려 자기를 발견하였고 자기의 존재를 확인한 것이다. “봉산탈춤은 (....) 민중적인 현실주의를 더욱 적극적으로 표명하고 이에 대하여 적대적인 관념론을 더욱 과감하게 비판”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노장에 대한 풍자는 유교적인 관점이 아닌 민중들이 갖게 된 반권위적 태도의 반영이었던 것이다.
5. <양반-말뚝이 마당>은 좀 더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개된다. 양반(생원, 서방, 종가집도련님)의 등장부터 말뚝이는 조롱섞인 말로 관객들에게 알린다. 이후 벌어지는 갈등구조는 동일한 형식을 띤다. 먼저 양반이 위엄을 보이고 나면 말뚝이가 양반의 위엄을 파괴하고 그런 행동에 대해 양반은 말뚝이를 꾸짖는다. 말뚝이의 변명이 이어지고 변명을 들은 양반들은 납득하여 안심한다는 내용이 반복되는 것이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양반들은 말과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존재들로 부각되며 풍자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구조는 현실의 갈등을 끌어들이면서도 직접적인 묘사가 아닌 희극적 집약을 통한 새로운 ‘갈등의 구조’를 창조함으로써 만들어지는 것이다. 양반과 민중의 현실적 갈등 속에서 결코 민중을 대표하는 말뚝이는 한탄에 빠지거나 무력하지 않다. 그는 적대자에 맞서 저항하면서 적대자를 비하시키는 것이다. 말뚝이의 공격은 관중들과 합작으로 이루어진다. 과거 가면극의 관객들은 대부분 민중들이었다. 그들의 겪었던 일상의 고통이 무대 속 말뚝이와 함께 표출되는 것이다.
6. <양반-말뚝이 과장>에서 대사는 서사적인 인과적 관계로 전개되기 보다는 각각의 독립된 상황에 대한 묘사를 통한 단절된 형식으로 표현된다. 이러한 대사의 독립성은 극적환상을 제거하고 극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유지하게 하여 현실에 대한 사실적인 지각을 가능하게 해준다. 춤 또한 이러한 독립적 성격을 강화하는 데 활용된다. 특히 춤은 갈등이 고조될 때 효과적으로 개입됨으로써 극을 원활하게 전개시키는 기능을 수행한다. “긴밀하고 급격한 갈등구조를 가진 부분들은 서로 별개의 것으로 가져다 놓는다는 구성의 원리는 어느 탈춤에서나 존재하리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구성의 원리는 어느 경우에나 되도록 이야기를 배제한 순수한 희극적 갈등으로 현실을 현실 그대로 비판하기 위해서 사용된다.”
7. <영감-미얄마당>은 권위에 대한 저항이라기보다는 민중 사이의 존재하는 관습적 갈등을 드러낸다. 영감과 미얄할미는 전쟁과 배고픔 때문에 정착하지 못하고 떠돈다는 설정으로 등장한다. 최소한의 안정과 먹거리도 얻기 어려웠던 민중들의 고단한 삶이 형상화된 것이다. 하지만 동일한 민중의 고난은 남성지배적인 ‘가부장적 구조’에서 발생하는 갈등으로 전이된다. 영감은 첩인 덜머리집을 얻었고, 본처를 구박한다. 관객들은 대부분 남자들이었지만, 영감이 미얄을 구박하고 멸시하는 장면에서 웃음보다는 아픔을 느꼈을 것이다. ‘영감-미얄 마당’는 그런 점에서 ‘노장마당’이나 ‘양반마당’에서 느낄 수 있는 통쾌감과는 다른 자성과 성찰의 기회를 제공해준다고 할 수 있다.
8. 극의 마지막, 남강노인이 등장하여 “미얄할멈이 죽었구료, 아이고 원통하고 가련하여라. 영감을 잃고 가진 고생을 다하더니 그만 맞아 죽고 말았구나”라고 말하며 관객들이 하고 싶은 말을 대변한다. 곧이어 무당을 불러 진오기굿을 통해 죽은 미얄의 죽음을 위로하는 것이다. 어쩌면 이 장면은 가면극에서 등장하는 비극적 정서가 유일하게 나타나는 장면일 것이다. ‘굿’은 죽은 자의 영혼을 위로했던 민중들의 제의였다. 한바탕 웃음과 재담으로 펼쳐지던 마당은 죽은 미얄에 대한 위로로 마무리되면서 민중들의 슬픔과 고통을 정화시켜주는 것이다. 하지만 죽음과 굿에 관한 장면도 희극적이며 외설적으로 표현하는 내용을 다른 가면극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성격에 대해 조동일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리 민속극에는 희극만 있고 비극은 없다. 왜 그러냐 하는 문제는 간단히 논할 수 없으나, 탈춤은 민중의 연극이고 민중의 사회적인 처지를 다루면서 작품을 전개하므로 비극적인 원천 또는 비극적인 소재도 희극적인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9. ‘봉산탈춤’은 민중들이 갖고 있던 ‘관념적 허위, 신분적 특권, 남성의 횡포’에 대한 문제의식을 흥미로운 갈등구조를 통해 표현하고 있다. 봉산탈춤을 실제로 주도한 집단이 민중보다는 이속과 같은 새로운 변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봉산탈춤은 새로운 시대를 맞기 위해 우리가 떨쳐버려야 할 구시대의 잘못된 가치에 대한 고민과 비판이 담겨있다. 흥미로운 것은 ‘봉산탈춤’ 내용 중에 나쁜 행동을 처벌하기 위해 ‘사자’가 등장하는 데, 그의 공격 대상은 노장에게 소무를 빼앗은 ‘취발이’가 아니라, 어설프게 행동한 목중이었다. 봉산탈춤의 주역들에게 ‘취발이’는 그들의 세계관을 반영하는 인물이었다. 자신있고 적극적인 태도를 구세대와 경쟁하면서 승리하겠다는 의지가 반영되어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첫댓글 - 문화는 시대적 상황의 공유물이다. 대륙과 반도, 양반과 평민 그리고 천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