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도봉문학상 심사소감
어느 해보다도 수상작을 결정하는데 심혈을 기울여야 했다.
출품작은 모두 우위를 겨를 수 없이 우수한데 본상 한 분을 선정한다는 것이 난제였다.
조현상님의 시조집 『삼팔선 빗소리』는 그분이 아니면 누구도 쓸 수 없는 체험에서 이루어진 우리나라 전쟁사를 시화한 시조집이다. 이지엽 경기대 교수의 해설처럼 한국전쟁을 단독으로 다룬 이 시조집은 한국시조사 및 시사詩史에서는 최초인 것이다. 8.15 해방을 시작으로 38선 분단, 한국 전쟁, 한강교 폭파, 수도 서울함락......등 역사를 따라 이어지는 각가지 에피소드는 웃다 울다를 거듭하며 결국 70년이 흐른 오늘에 이르러 분단의 벽 앞에 통일의 염원으로 끝을 맺는다.
눈이 펑펑 쏟아진다 내 고향 독쟁이 마을
올망졸망한 초가집들이 이글루처럼 웅크리고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다.
듬성듬성 기와집 서너채 때만 되면 야트막한 굴뚝에선
가난한 하얀 입김이 솔솔 날숨을 쉰다.
벌컥 방문만 열면 바깥세상과 이마가 맞닿는 우리집 사랑
채, 저녁마다
"에헴, 조 생원 계신가?"
“어서 들어오게."
투박한 말꾼들의 얘기가 고봉밥처럼 수북하게 사랑방에
쌓인다. 달그락달그락 밤은 점점 늙어 갈 때쯤, 사랑채 말
꾼 수 셈해오라는 엄니의 귀띔에 툇돌 위에 그득한 짚신을
손가락 접어가며 세었지. 밤참 삶는 구수한 냄새가 삭정이
울타리 개구멍을 트고 이웃집 들창에 기웃기웃할 때쯤 새
콤한 동치미 국수 한 사발 뚝딱, 이보다 더한 산해진미 없
다고들 수염 쓰다듬어 내리지만 내 엄니의 고단함을 구름
속 들락날락하는 저 달은 알까? 고드랫돌*소리 차곡차곡
쌓여 돗자리 키 커가듯
우리집
가세家勢 든든했던
그 겨울 포근했네.
* 고드랫돌 : 발이나 지직, 돗자리 따위를 엮을 때 날을 감아 매는 돌.
조현상님의 시조집『삼팔선 빗소리』 중에서 「그 겨울」 전문이다.
인정 많던 옛날의 따뜻한 사랑방 풍경과 대갓집 며느리의 고단하지만 고단한 줄 모르고 맡겨진 책무를 벼슬처럼 감당해내던 우리 어머니들의 순종적인 삶이 그대로 보여진다.
시는 ‘가세家勢 든든했던/그 겨울 포근했네.‘로 끝을 맺지만
아마도 ‘가세는 기울고 그 겨울 포근함은 이미 사라졌네’ 라는 말을 대신하고 있음이리라. 어려운 삶 속에서도 도의와 위신을 지키며 살아온 조상님들의 삶을 무한히 그립게 만드는 작품이다.
이밖에도 「오줌 항아리」 「복수초」 「삼팔선 빗소리」 등 완성도 높은 수작 여러 편이 눈길을 끈다.
잎사귀는
나무에만 피지 않는다.
내 유년의 강가에
심어져 자라고 있는
기억의 줄기에도
푸른 잎사귀 피어난다
그 잎사귀에 올라앉은
칠성무당벌레
일곱 개의 점에서
별은 태어나고
별마다 그 사내아이의
떨리는 말소리 들린다
은발 같은 흰빛 시간을 타고
거슬러 오르면
아버지의 큰 기침 소리
쿨럭
저만치 달아나던 그 아이
기억의 줄기 밑에
물망초 피어난다.
신인호 시인의 시집 『사유思惟의 우물』 중 「한 잎의 추억」 전문이다.
누구나 하나쯤은 간직하고 있음직한 그 아이- 입가에 살짝 미소가 번진다. 비록 몸은 은발에 이르러도 유년시절의 비밀 같은 그리움이 지워지겠는가? 아름다운 한 편의 동화를 읽는 느낌이다.
신인호 시인의 시집 역시 「빈집」 「사유思惟의 우물」 「미지에서 온 새 한 마리」 등 한 권의 시집에서 여러 편의 수작을 보여주고 있다. 시인은 나이 들어도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이 새삼 반갑다.
이제 김국자 수필가의 수필집 『어머니의 홍시』를 읽어본다.
김국자 수필가의 수필집 『어머니의 홍시』 는 펼치는 순간부터 재미가 충천한다.
생면부지의 할머니를 병원으로 한의원으로 택시를 타고 모셔드리느라 정작 자신의 일은 하지 못한 이야기며 서해안 기름유출 사고 때 봉사대에 참여하여 구례포에서 기름제거 작업을 한 이야기며 독감주사 후유증으로 남편을 잃은 이야기, 이런 저런 뜻하지 않았던 사유로 진학을 포기해야 했으나 조금의 원망도 없이 부모님 말씀을 들은 것이 잘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긍정적인 심성, 텃밭을 같이 가꾸자고 하고는 한 번도 가꾸는 일은 않고 살금살금 따가고 캐가기만 하는 이웃에 대한 솔직한 미움의 표현 등, 어떠한 수식도 없이 강직하고 거짓 없는 작가의 면모를 있는 그대로 토로하고 있다.
그의 작품들은 하나같이 일상에서 겪은 결코 평범하지 않은 경험을 주제로 어떤 문학적인 덧칠도 없이 쓰여져 조금은 드라이 한 듯 하면서도 독자를 읽는 재미에서 빠져나올 수 없도록 몰입시킨다.
-연명으료결정법이란 회복 불가능한 환자가 혈액 투석이나 인
공호흡기를 거부할 수 있는 제도이다. 이 일은 자식들이 할 수 없는 일이기에 국민건강관리공단에 가서 연명의료의향서에 등록 했다. 그리고 <당신의 결정을 존중합니다>라는 메시지와 함께 등록증이 도착했다. 미리 준비해 놓은 영정사진과 등록증을 자식들이 찾기 쉬운 서랍에 넣어두었다.
김국자 수필가의 『어머니의 홍시』 중 「비우면서 채우고」의 한 부분이다.
어쩌면 이렇게도 인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준비가 다 되어있을까? 삼가 작가의 신념 앞에 머리 숙이지 않을 수 없다.
심사위원들은 세 분을 다 본상 수상자로 하여도 무리가 없다고 기뻐하면서도 고민하였다. 어떻게 세분에게 본상을 수상할 수 있겠는가? 그때 누군가 큰 소리로
“도봉문학상은 본회의 발전에 공헌이 지대하고....”라는 도봉문학상 운영 규정을 읽었다. 그 말이 나오자 모든 고민은 해결되었다. 심사위원 모두 손뼉을 치며 김국자 수필집을 본상으로 올리는데 이의가 없었다. 삶이 곧 글이고 생활철학인 작가의 거침없는 행보가 도봉문학상 수상과 더불어 더욱 빛나기를 바란다.
따라서 조현상 시조집 『삼팔선 빗소리』와 신인호 시집 『사유思惟의 우물』을 우수상으로 올린다. 우수상을 받으신 두 분께도 축하의 말씀을 전하며 이 정도의 작품집이면 비록 도봉문학상에서는 우위를 차지하지 못했을지라도 다른 문학상에서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까 혼자 생각해 본다.
그리고 적극적인 참여와 진정한 문협 사랑을 최우선으로 하는 운영규정에도 공감의 박수를 보낸다.
날로 발전하는 도봉문학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도봉문학 입회연도가 5년을 넘지 못하거나 해당분야에 등단 기일이 규정의 기간에 미치지 못하여 심사에 들지 못한 작가에게 다음 기회를 기약하며 심사소감을 마친다.
도봉문학 2021
2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