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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2장 1-5절. 예수의 십자가와 성령의 능력. 요약설교
2장 1-5절.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인간적 지혜에 근거해서는 안 되고, 하나님의 능력에 근거해야 함.
1절.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1. 바울 사도가 고린도에 가서 전도한 것은 사도행전 18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때 바울 사도는 1년 6개월 동안 이곳에서 전도했습니다. (행 18:11)
당시 이 고린도와 아테네를 포함한 아가야 지방을 다스리던 통치자는 로마 총독 ‘갈리오’였습니다. (행 18:12)
그는 네로 황제의 가정교사이며 유명한 철학자였던 세네카((Lucius Annaeus Seneca, BC 4- AD 65년)의 친동생이었습니다.
이 고린도에서 서북쪽으로 약 500Km 떨어진 델피(Delphi)라는 곳의 신전 비문에는 갈리오 총독이 아가야 지방을 다스리던 때가 AD 52-53년(어떤 사람은 51-52년이라고 함)이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바울 사도가 고린도에서 1년 반 동안 전도할 때는 AD 52-53년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도들의 행적과 성경의 역사적 연대를 측정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됩니다.
2. ‘하나님의 증거’란 복음과 하나님께서 증거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나 사도들을 통해서 증거하신 말씀의 중심도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성경이 예수님께 대해서 증거하는 것입니다. (요 5:39)
바울은 이 말씀의 내용을 한 마디로 ‘십자가의 도’(고전 1장 18절)라고 표현했습니다.
2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1.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 하였나니
바울 사도는 고린도 전도 시에는 인간적 지혜로써 전도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해서 전도했습니다. (고전 2:1-5)
그 이유는 아테네 전도 시에(행 17:22-34) 철학적 변증 설교로써 전도했으나, 큰 성과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전도 시에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던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죄인들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이것은 바울이 고린도에 가고자 했던 유일한 목적이었습니다.
바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곧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에 대해서만 가르칩니다.
이러한 그의 가르침이야말로 복음의 핵심입니다.
세상에서 이 이상 기쁜 소식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담대히 복음을 전합시다.
우리가 병든 사람에게 가장 좋은 약을 소개할 때 자신이 있지 않습니까?
그렇듯이, 내가 ‘죄병’을 고침받은 약인 예수님의 피를 가장 귀한 치료약으로 소개합시다.
2.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바울은 모든 것을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으나 그리스도에 대해서만은 깊은 지식을 가졌고 또 가지기를 원했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다짐한 것은 바울이 회심 때에 겪은 체험과 철학적인 지혜를 동원하여 전도하려다가 실패한 아덴에서의 경험을 회상한 것입니다(행 17:22-34).
바울은 이 경험을 통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만이 영원한 진리이며,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 가장 귀한 복음임을 확신했습니다.
3절.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1. 이처럼 바울 사도가 고린도 전도를 할 때 약하고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을 것입니다.
즉, 아덴에서 철학적 변증 설교의 실패, 자칭 철학자연한 고린도인들의 웅변과 도도한 태도, 고린도의 음탕한 분위기, 바울 자신의 육신적 질병(갈 4:13), 빈약한 체구(고후 10:10), 말을 잘못하는 것(고후 10:10), 고독으로 인한 압박감(고후 2:13), 핍박에 대한 무방비 상태, 영적 분위기가 수용적이지 못함 - 이러한 상태가 바울의 고린도 전도를 심히 불안케 하였을 것입니다.
바울은 비록 주의 성령님이 함께 하실 때는 강하고 담대한 대사도(고후 4:7-11; 엡 6:19,20)이기도 했지만, 인간적으로는 나약하고 보잘것없는 평범한 인간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여러 번 외로워했으며 두려워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주님이 곁에 계셔서, 두려워 말라고 격려해주시고, 희망을 주셨습니다.
사도행전 18:9-10에는 고린도 전도시에도 바울이 두려워 낙심하고 있을 때, 주님이 밤에 곁에 찾아오셔서, 이 성에 주의 백성이 많으니 두려워 말고 전도하라, 아무도 바울을 해할 자가 없다고 격려해주셨습니다.
바울은 그런 주님의 격려를 완전히 믿고 의심치 않았습니다.
또, 사도행전 23장 6절에서 바울이 나약해져서, 목숨을 건지려고,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나는 예수 믿는 사람이다’고 담대하게 전도하지 못하고, ‘나는 바리새인이요, 바리새인의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11절에는 그날 밤에 주님이 바울 곁에 서셔서, ‘바울아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를 증거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고 죽지 않고 살아서 로마에까지 가서 전도할 것에 대한 소망을 주셨습니다.
2. 이 말씀은 바울 사도의 진실한 인간적인 모습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바울과 같은 능력의 사도도 인간적인 모습은 우리와 별다름이 없는 연약한 인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동질감과 위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심지어 사도행전 19장 12절에서 에베소 전도 시에는 그의 손수건만 갖다 얹어도 병마가 떠나갔던 바울 사도도 “내가 심히 두렵고 떨려 살 소망까지 끊어졌다”고 고백했습니다(고후 1:8-9).
성경에는 아무리 위대한 신앙인들도 좌절과 낙망에 빠졌던 사실들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예컨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어두움 때문에 심히 두렵고 떨었던 적이 있었고, 이스라엘의 영도자 모세도 “나로 내 연약함을 보지 않도록 즉시 나를 죽여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 아닌 기도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에 꼭 들었던 다윗 왕도 “내 뼈가 쇠하고 진액이 여름 가물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라고 탄식하면서 스스로 자신에게 “내 영혼아 네가 어찌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며, 내 속에서 낙망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라고 자신을 위로했던 적이 있었습니다(시 42편).
또한, 능력의 종 엘리야도 이세벨을 피하여 도망가다가, 자신의 무능력한 비참한 모습을 보고 스스로 낙심에 빠져서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즉시 나를 죽여 나로 이 곤고함을 보지 않게 하소서”라고 기도 아닌 기도를 한 적이 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께서도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마 26:38)
그러므로, 우리들도 인간적인 두려움과 낙심이 생길지라도 좌절하지 말고, 좋으신 주님께 기도하고 성령님의 위로와 능력을 받아서 바울의 고백처럼 “내가 약할 그때가 곧 강한 때라”는 확신을 가지고, 주님의 도우심으로 날마다 복된 생활 해가시기를 축원합니다!
4절.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 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1. 바울 사도는 말할 때나 전도할 때 인간적 지혜로 하지 않고, 다만 성령님께 붙잡히어 성령의 나타남과 외적인 표적으로써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말에 있지 않고 오직 능력에 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4:20.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그러나, 이 말씀은 설교 말씀을 전할 때나 전도할 때, 연구하고 준비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바울의 전도나 설교는 조리 정연하고 풍부한 학식도 갖추었음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2. <설득력있는 지혜의 말> (πειθοῖς σοφίας λόγοις: persuasive of wisdom words)는 '유혹하는 말'이나, '그럴듯한 말'을 가리킵니다.
즉, 인간의 이성을 교묘하게 사용하여 유혹하는 말, 곧 인간의 지혜가 상상해 낸 설득조의 말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바울은 사람들에게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갖게 전도하는 데 있어서, 인간적인 논쟁으로 설득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세상 학문에는 이와 같은 논리와 설득력, 인간적인 지혜와 웅변술이 필요할 것이지만, 십자가의 도는 인간의 이성이 아닌 성령님의 감동으로 믿어집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장 17절에서는, 복음을 전하되 말의 지혜로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3.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바울은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은 강한 영적인 능력이 나타나는 데 관심을 두었습니다(1:18).
여기에서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이란 성령님께서 능력 있게 나타나심을 가리킵니다.
즉, 바울 사도는 성령님께서 능력 있게 나타나시도록 성령님을 의지해서 전도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바울이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서 전도할 때, 박수 엘루마가 장님이 되고(행 14:8-10), 귀신들이 떠나가고, 병들을 고치면서(행 14:8-12, 19:12, 20:9-10, 28:8-9)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이 성령의 사역에 대해서 말한 것은 이 구절이 처음입니다.
5절.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 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1. 믿음이란 의지하는 것인데, 인간적 지혜에 근거한 신앙은 모래 위에 세운 집과 같고, 하나님의 능력에 근거한 신앙은 반석 위에 세운 집과 같습니다.
여기서 사람의 지혜에 근거한 신앙이란 아볼로파의 신앙을 염두에 둔 것이고, 하나님의 능력에 근거한 신앙이란 바울파의 복음적 신앙을 염두에 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2.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바울이 왜 인간의 지혜로 된 말을 사용하지 않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바울이 '성령의 능력'으로 전도한 이유는 고린도 교인들의 믿음이 사람에 의지하지 않고 성령님에게 의지하는 믿음이 되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고린도 교회가 지금 사람을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하고자 한 것에 대해 비판하는 말씀입니다.
3.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바울은 구원을 얻게 하는 믿음의 근거가 이성에 호소하는 논리가 아니라, 진리로 말미암아 심령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임을 보여줍니다.
다시 말해 그는 고린도 교인들의 믿음의 근거가 하나님의 능력에 있음을 명확하게 인식시켜서, 고린도 교인들이 헬라 철학적 인간의 지혜를 추구하지 말고, 겸손히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것도 역시 사람을 중심하여, 파당을 형성한 고린도 교인들이 사람을 바라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로 뭉쳐지게 하려는 의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인간은 연약하고 두렵고 심히 떨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을 알고, 하나님의 능력과 성령의 나타남을 의지하는 신앙을 갖도록 합시다.
열심히 기도하여, 성령님의 감동과 인도와 능력을 받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가장 좋은 선물인 성령님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눅 11:13).
그러면, 하나님의 능력과 성령의 나타남에 근거한 신앙이란 말씀을 버리고 신비주의를 추구하라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반석 위에 세운 신앙의 집은 말씀을 듣고 준행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영이요 생명이라고 했습니다(요 6:63).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서, 심령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여, 죄병을 치료하는 능력입니다(히 4:12).
그러므로, 우리 자신을 의지하지 말고, 날마다 기도하고, 말씀을 통해서 영혼에 새 힘을 얻어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비록 우리가 세상에 살지만,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고,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고, 예수님의 피가 죄병을 치료하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영생의 약임을 증거하시는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기도 -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은 연약하여 두려워하고 심히 떨 수밖에 없는 저희들이지만, 성령의 능력으로 채워주셔서 오늘도 믿음으로 힘차게 살아갈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됨을 드러내는 삶이 되게 하시고, 전도의 사명을 감당하는 능력 있는 성도들이 되게 해주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