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평 신애리 용천리 이야기
1)이재용(82세) , 신애1리가 고향
처음 전투때는 피난도 못 갔다. 인민군이 내려오고 동네는 사람이 다 죽었다
무려 27명이나 끌려나가 양평 남한강가에서 죽었다. 지역 빨갱이들이 유지들을 대려다 강 모래 사장에 땅을 파고 총을 쏘고 기름부어 태웠다
수복시 파서 신원확인이 어려워 옷 색깔 키등을 비교하여 모셔다 매장했다
그러니 국군이 들어와서는 반대로 또 죽었다
그래서 동네가 반쪽이 되었다~~!
겨울에 1.4후퇴가 되어 피난을 가는데 소를 끌고 동네 사람들이 진천으로 떠났다
하지만 당시에 아버지가 아파서 계셔 있었다 그러니 피난 가다말고 돌아왔다
중공군이 왔는데 인민군도 끼여 있었다
동네에 와서 쌀등을 가져다 주었다
그들 스스로 밥을 하는데 산 위로 밥을 옮기는데 질통을 이용해서 담아 시골 물지게를 이용하여 날랐다
어느날에는 할아버지가 지어날르기도 했다
닦을 때에 보면 통안을 기름으로 한번 휑구어 사용한다~~~~
그놈들은 무슨 기름을 갔고 다니며 먹더라
그러다 미군폭격이 시작되고 산에는 온통 방공호를 파고 있더라
★51년 2월중순부터 3월초까지 약 20여 일을 전투했는데 낮에는 미군과 일부 국군이 점령하고 밤에는 중공군과 일부 인민군이 전령하고~~~
나중에★ 산에 올라가니 여기저기 유해가 수없이 있는데 주로 중공군인데 사실 누군지 잘 모른다. 냄새나고 흉흉하니 동네에서 어른들이 나서서 긁어 군데군데 묻었다
★저 위에 헬기장이 있는데 그 주변에도 몇군데 있지만 군 사격장이 들어서면서 길을 만든다고 지역이 훼손 되었다
전후에 내가 보는 동안에 미군이나 국군이 와서 유해를 찾지는 안했다~!
그 당시는 지금보다 더 많은 집과 사람이 있었고 중공군때는 그렇게 숨지는 안하고
한번은 ★중공군이 미군에게 연락한답시고 12명을 붙잡아 산 위 방공호로 데려갔다
미군 폭격이 시작되고 중공군이 숨어 달아 났는데 그중 사촌 아주머니뻘 되는 분이 어떻게 태극기를 갔고 있다 웃옷을 훌렁벗어
함께 흔들었다
그래서 폭격을 면하고 다 살아서 나왔다
할아버지 할멈: 까만 미군이 와서는 색시를 찾는다고 해서 광속에 숨어 지내기도 했다
그때 12살인데 동네 언니들과 함께 숨었다
51년5월 용문산 전투때는 여기까지 오지 않았다!
2)용천리 사니사 할아버지(82), 절 입구가 고향
처음 전쟁나서는 피난도 못가고 있었다
★그때 이렇게 죽고 저렇게 죽고 동네 사람들 손가락질로 많이도 죽었다
그러다 추운 겨울에 다시 중공군이 내려온다고 해서 진천까지 피난갔다 왔다
피난갔다 오니 동네뿐만 아니라 산에도 온통 시체였다. ★주로 중공군이다
그 당시는 금속 탐지기를 구입해서 탄피캐러 다녔다
한번은 ★기차타고 대구까지가서 걸어서 ★팔공산 갑티재(?)에 가서 탄피를 캐서 고물상에 팔아 먹을 것을 사먹기도 했다
갑티재(?)라고 대구가 내려다 보인다
어떤 때는 아무것도 없어서 굶기도 한다
☞한티재는 팔공산과 가산사이에 있고 갑령은 영천북방 신령에 있는데~~~?
★지금 사니사 오르는 다리 바로 전봇대 자리도 몇구 묻었다
★다리 건너기전 식당 주차장 냇가쪽이 가장 많이 묻혔는데 지형이 변해서 잘 모르겠다
그때는 얕게 묻어서 훼손 될수도 있고~~
저 좌측산에 개인호가 있고 몇구 있어서 군대에 알려주어 얼마전에 1구 찾았다고~
절 우측 은행나무가 있는데 그때 우측 나무쪽에 큰 바위가 있어 그 곳에도 묻었다
절은 폭격으로 다 타버려 다시 지은 것이고 은행나무는 그대로다
다만 땅이 비스듬했는데 계단이 만들어져 약간 변한것 갔다
이곳입구에서 태어나 살다 다리 밑으로 이사 해 지금까지 살고 있다
카페 게시글
우리들의 이야기
양평 신애리 용천리이야기
이용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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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9.07 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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