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평)
서정의 정치성과 정치의 서정성
문정희. 작가의 사랑. 민음사, 2018
이수명. 물류창고. 문학과 지성사, 2018
양균원(시인, 대진대 교수)
창작은 뭔가 써내고자하는 갈망의 끝에서 시작된다. 뭔가를 찾아가는 행위는 그 자체로서 기쁨을 수반한다. 애타게 기대하고 있지만 그것이 무엇일지는 미리 알지 못한다. 그렇지만 마침내 그것이 형상을 드러내기 시작할 때 바로 이것이라고 확신하게 된다. 멀지 않은 곳에 숨겨져 있는 것, 더듬거리는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것, 쉽게 찾아서는 재미가 없고 누군가 이미 다 찾아버린 것 같은 것, 그걸 찾아가는 안달, 불안, 고통, 그리고 기쁨에서 시인은 시를 쓰는 게 아닐까?
시인에게 새로움에 대한 열망은 신경증을 일으킬 정도로 압도적이다. 굳이 아방가르드 시학을 표방하지 않더라도 시인이라면 누구나 최신의 것을 찾고자하는 강박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새롭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전에 보거나 들은 적이 없는 것이면 족한 것인가? 이상하고 신기해서 흥미를 유발하는 것이면 마냥 좋은 것인가? 시인이 찾아가는 새로움은 해마다 버전을 달리하는 신제품 같은 것인가?
새 것에서도 낯익음이 발견될 수 있고 낯익은 것에서도 새로움이 발견될 수 있다. 새 것의 낯익음과 낯익은 것의 새로움은 둘 다 찾아냄의 기쁨을 일으킬 수 있다. 그렇지만 새 것의 낯익음은 원형의 심상에 이어질 수도 감각의 단명에 그칠 수도 있다. 낯익은 것의 새로움 또한 이면의 발견으로 진행할 수도 신기함의 연상에 그칠 수도 있다. 시인이 찾아가는 새로움은 여러 종류, 여러 등급으로 나뉠 수 있다.
문정희의 작가의 사랑과 이수명의 물류창고는 새로움을 찾아가는 색다른 자세에서 흥미로운 대조를 이룬다. 초저녁의 시인이 풀어내는 사랑 이야기는, 숱한 전범들 사이에서, 어떻게 새로울 수 있는가? 늦은 오후의 시인이 작심하고 새 목소리로 들려주는 물류 이야기는 어떻게 새로울 수 있는가?
I. 문정희, 작가의 사랑
사랑은 가장 흔한 시적 제재들 중의 하나이다. 누군가 이런 제재를 주제의 차원까지 끌어올려 지속적으로 다루고 있다면 그는 어떻게 그것을 발견의 기쁨 속에서 써낼 수 있는가? 낯익은 것의 새로움을 찾아가는 자는 낯선 것의 새로움을 취하는 자보다 더 큰 어려움에 처할 수 있다.
1. 사랑, “알 수 없는 것”
문정희는 “여류(女流)”의 사랑에 맞서 사랑의 내, 외연을 끊임없이 확장해온 시인이다. 그녀의 사랑은 “알 수 없는 것”에서 더욱 뜨거워진다. 숱한 사랑을 목격하고 경험해온 나이에 자신의 감정에 “상투”를 씌우지 않고 새로운 영토를 분양하는 능력은 오직 그녀에게 가능한 게 아닐까?
다량과 상투를 간신히 벗어났지만
발 딛고 서 있는 여기를
언어로 투시할 힘이 없었다
(「나의 옷」 부분)
아무리 생각해도 너는 오늘
이름 모를 꽃들이다
(...)
아직 사랑이 아닌
천사와 짐승 사이의
벼랑에 핀 이름 모를 꽃들의 시간이다
나도 모르는 나의 깊이
모호해서 아름다운 거짓말들
여기 활짝 야생의 시곗바늘이
아직! 아직! 두근거리며
나를 삼키려 한다
(「이름 모를 꽃들의 시간」 부분)
익숙한 것은 시인에게 적이다. 상투적인 것들이 일으키는 질식감 속에서 시인은 “정말 어디를 흔들어야 / 다시 푸른 음악일까”(36)를 고민한다. 다량의 시를 발표하고 세상에 이름을 날렸어도 시인은 여전히 낯선 느낌을 갈망한다. 새 것을 찾아가는 설렘에서 가장 절실한 생명을 느낄 수 있다. 시를 쓰는 일은 “발 딛고 서 있는 여기”를 투시하기 위해 상투의 “옷”을 벗는 짓이다. 옷을 벗고 남는 것은 몸일 것이다. 몸의 명령에 따르는 것, 이것이 사랑을 대하는 시인의 방식인 것 같다. 느낌은 “아직 사랑이 아닌” 단계에서 가장 뜨겁다. 사랑은 절정과 이후에서보다 시작되는 순간의 낯섦에서 가장 찬연하다. 그것은 “천사와 짐승 사이에” 선하게 또한 잔인하게 피어 있는 “이름 모를 꽃들”이다.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 “벼랑”에서 규정할 수 없는 다수의 꽃들이 위험하게 햇살을 받고 있다. “나도 모르는 나의 깊이”에서 두근거리는 “아직! 아직!”은 사랑의 절정을 미루는 외침이거나 저물녘 “시곗바늘”에게 내리는 정지명령이거나 그럴 것이다.
2. 사랑, “살아 있(다)는 것”
문정희의 사랑은 “살아있(다)는 것”(25, 38)의 지독한 조건에서 피어나면서 삶의 강화에 기여한다. 중요한 것은 목적이나 대의가 아니라 “온몸이 떨리는 살아 있음”(11)이다. 그녀가 만나려는 사람들은 “살아 있는 것은 매독조차 아름답다고 / 노래한 안나들”(25)이다. 이렇게 “구체적으로 살아 있다는 것에 대해 / 누구보다 먼저 온몸으로”(38) 발언하려는 태도에서, 문정희의 사랑은 세상의 관습을 벗어나 있다.
불가마 앞에서
잘 구어진 도자기를 꿈꾸듯이
잘 구어진 남자를 설레며 기다린다
(...)
난 알아, 그때 당신이 따라간 것은
여자가 아니라 아름다운 불
불 속으로 그냥 뛰어든 거지
문학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지만
지금 여기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
그리고 오늘도 쓰고 있다는 것!
그것 말고 무엇이 더 중요할까
나는 잘 구어진 사랑 하나를 만져 보았지
흰머리 날리는 현역
이보다 더 뜨거이 살아 있을 수 있을까
술병을 들고 강물에 뛰어든 백수 광부처럼
흰 눈을 쓴 안데스산 아래서
연인보다 더 깊은 혈족을
나는 만났지
(「그가 나의 연인은 아니었지만」 부분)
칠레 산티아고 어느 호텔 앞에서 십수 년의 세월을 격하여 두 시인이 만난다. “나의 연인은 아니었지만” 화자가 그를 다시 찾는 이유는 “연인보다 더 깊은 혈족”의 유대감 때문이다. “불가마”의 열기에서 “잘 구어진 남자”가 그러했듯이 화자 또한 “지금 여기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 그리고 “오늘도 쓰고 있다는 것”을 삶에 핵심적인 것으로 긍정한다.
문정희의 사랑 시는 개인의 애증, 회고, 비탄에서 벗어나 원시의 “몸”을 노래하는 데서 관습과 제도의 사회적 편견을 다루고 있다.
그날 벗은 옷
나 다시 입지 않았어요
황금 늑대처럼 출렁이던 달빛 침대
입술 속을 헤엄치던 당신 머리칼
아직 살아 지느러미예요
(......)
비행기가 곧 이륙할 시간
따스한 이 살로 언제 다시 만날까요
(......)
내 몸은 이미 당신의 뼈와 살로 된 신전
지상에 살아 있는 한
이 신전에는 더 이상
어떤 신(神)도 들어설 곳이 없을 거예요
(「공항의 요로나」 부분, 78-79)
요로나는 관습, 제도를 벗어나 사랑을 탐닉했고 이를 위해 자식마저 희생하지만 버림받는 여인이다. 화자가 “멕시코 전설에 나오는 우는 여인”을 시에 소환하는 이유는 그 모든 희생을 감수하는 사랑을 내세우기 위해서다. 사랑은 관능, 몸, 순간의 무한에 대한 추구에서 사회적 제약을 뛰어넘어 가장 사랑답다.
그렇지만 이 시에서 관능의 사랑은 추구되는 것이지 저질러진 것이 아니다. 요로나의 페르소나가 사랑을 반추하는 곳은 “공항”이다. 여행지의 공항에서 화자는 타국의 여인 요로나를 통해 자신의 열정을 확인하지만 곧 그곳을 떠나 자국으로 귀환하는 지점에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러한 크레바스는 「문신이 있는 연인」에서 보다 분명해진다.
세기의 콜렉터 페기에게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물어보네
다행인지 불행인지 돈도 탕진도 없어
저절로 정숙한 여자가
감히 관능시를 써도 되느냐고
(「문신이 있는 연인」 부분, 69)
억만장자 수집가 페기는 화자의 못다 이룬 욕망을 대변한다. 페기는 “예술과 섹스는 하나 / 질식할 만큼 많은 돈과 외로움 / 저녁 별처럼 나타났다 사라지는 연인들”을 누리다 간 여인이다. 불처럼 타올랐던 그녀에 비해 화자는 “돈도 탕진도 없어 / 저절로 정숙한 여자”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화자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아무래도 “감히 관능시”를 쓸 것 같다. 문정희는 이러한 “허위”를 자인하고 있고 그러한 허위의 아름다움과 슬픔까지 쓰고 살아가는 시인이다.
3. 사랑, 사회적 맥락
문정희의 사랑 시는 고백의 습기로 끈적이지 않고 예술 감정으로 건조되어 있다. 그녀의 시를 자전적 사실로 읽는 것은 풍부하고 다층적이며 늘 새로운 사랑의 풍랑을 온전하게 설명해줄 수 없다. 자전적 사실들에서 진솔한 감흥이 생생해질 것이나 그녀의 사랑은 민들레꽃 포자처럼 흩어지고 어딘가에 뿌리를 내려 다시 꽃을 피우는 방식으로 진화한다. 「무덤 시위」, 「사진 없는 아이」, 「꿩」, 「지붕 위의 헌 옷」, 「오빠의 마술」, 「우드사이드 스토리」, 「구르는 돌멩이처럼」은 최소주의 형식으로 자전의 요소를 담아내면서 구체적 이야기를 일화의 수준으로 확장하고 있다. 연륜과 경륜의 합작일 것이다. 모든 것이 자전적이면서 어떤 것도 개인적이지 않다.
문정희는 사랑 자체에 코를 박기보다 그것을 에워싸고 그 진위, 미추, 가치에 영향을 끼치는 관습, 문화, 역사, 이데올로기의 맥락에 대해 매의 시선을 보내면서 사자의 소리를 낸다. 시인의 시선이 사랑의 감정에서 그것의 의미를 조작하고 왜곡하는 사회적 망과 그 역사를 향해 확장하고 있다. “애국심은 팬티와 같아 누구나 입고 있지만 / 나 입었다고 소리치지 않아 / 먼저 팬티를 벗어야해.” 이렇게 한편으로 애국주의에 함몰된 자들을 질타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눈만 뜨면 팬티를 들고 흔드는 거리에서 자란 / 나는 하나를 벗었지만, 그 안에 / 센티멘털 팬티를 또 겹겹이 입고 있었지”라고 스스로의 한계를 진단한다. 시인에게 사랑은 “지옥에서 온 개”처럼 상대하기 어려운 상대이다(46-47).
상투어들이 나의 상투를 잡고 흔든다
오늘은 상투만이 새롭다
시인 윤동주가 아니라 상투어가 주인공이다
(...)
역사와 시간을 아무리 비틀어도
오늘은 상투가 나의 전부다
나를 차지한 님이다
(「상투 상투」 부분)
시인 윤동주가 27세의 나이로 사망한 후쿠오카 형무소 앞에서 시인은 상투를 쓰고 만다. 애국, 사랑, 이런 모든 관념의 허위로부터 벗어나고자 일생을 분투했던 시인이, 상투를 벗는 일에 최고의 목적을 두었던 시인이, 자신도 벗기 어려운 허위가, 그런 종류의 사랑이 있음을 자인하고 있다. 문정희의 목소리가 깊어지는 것은 허위를 벗고자 하면서 그 허위를 쓰고 사는 순간의 고통과 열정을 말하는 때이다.
「곡시(哭詩)」는 세상의 남류(男流)에 휩쓸린 신여성의 사랑, 그 사랑의 사회적 맥락에 대한 분석보고서이다.
아직도 여자라는 식민지에는
비명과 피눈물 멈추지 않는다
조선아, 이 사나운 곳아, 이담에 나 같은 사람이 나더라도
할 수만 있는 데로 또 학대해 보아라.
피로 절규한 그녀의 유언은 오늘도 뉴스에서 튀어나온다.
탄실 김명순! 그녀 떠난 지 얼마인가.
이 땅아! 짐승의 폭력, 미개한 편견과 관습 여전한
이 부끄럽고 사나운 땅아!
(「곡시」 부분)
문정희는 삶에 필수적인 동력을 사랑에서 찾는다. 사랑은 남녀 간의 애틋한 감정을 가리키는 데 한정되지 않고 무엇이 삶을 견딜만하게 하는가, 여성의 창조성은 어디서 근원하는가에 대한 고려에서 확장되고 복잡해진다. 그녀의 몸의 시, 관능의 시는 “허위”를 벗고 “살아있다는 것”의 생명을 탐하는 자의 목소리를 낸다.
4. 사랑, 쌍두마차
문정희는 열정과 자의식의 쌍두마차를 몰고 지상을 질주한다. 열정이 날개를 펼치지만 자의식이 무겁게 끌어내린다. “더 이상 기대할 게 없는 배우”가 “분장만 능하고 연기는 그대로인 채 / 수렁으로 천천히 가라앉고 있다.” 「거위」의 화자는 텔레비전에 나온 자신을 보고 “왝 왝 거위처럼 울 뻔했다”고 고백한다. “무의식의 주름 사이로” 빠져나온 “뱀 같은 욕망과 흉터”를 “몸 곳곳에” 꿰매고 있다. “나는 나에게 다 들켜버렸다.” 무서운 자의식의 시간에서 화자는 시 쓰는 자신을 “오직 황금 알을 낳기 위해 / 녹슨 철사처럼 가는 다리로 뒤뚱거리는 / ... 과식한 거위”로 요약해 버린다(16-17). 「링」의 화자는 “승리를 탐색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링에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슬픔과 공포”를 마주하고 있다(35).
뜨거운 사랑의 반대편에서 차가운 죽음이 시인을 잡아당긴다. 하늘을 횡단하는 페가수스는 허용되지 않는다.
가령 거미처럼 검은 몰골로
당신이 그물에 걸려 있는 것을
상상해 보셨는지
몸뚱이에서 뽑아낸 투명 실로
스스로를 감다
멈춰 버린 순간을
기억들이 홀연히 사라지고
터지는 울음 하나 없이
네모난 검은 그릇에 담겨 있는
두려운 정적을
사랑하는 손들이 그 그릇을 들고 가서
캄캄한 흙구덩이 속에
혹은 뜨거운 불구덩이 속에 던져 버리고야 말
아찔한 무저갱(無底坑)의 벼랑을
(「검은 그릇」 전문)
문정희는 사랑의 열기에서 생명을 확인하는 긍정의 시인이다. 하지만 이 긍정은 낭만과 환상에 못지않게 부정과 환멸에 쇠사슬로 묶여 있다.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자신, 새로움을 끄집어내지 못하는 자신, 반복과 되풀이로 과거를 씹고 사는 자신에 대한 강한 혐오가 화자를 억압하고 있다.
하지만 바로 이 자기부정의 심연에서 문정희의 사랑은 더 뜨겁게 분출한다. 부정과 긍정은 시인을 끌고 가는 두 마리 말이어서 그녀의 사랑은 둘이 함께 쌍두마차로 작동할 때 돌진할 수 있다.
오늘 저녁은
지금까지의 저녁이 아니다
놀랍지 않은가
이 낭떠러지에서
당신을 사랑하는 일
나침반도 없이 내리꽂히는
그까짓 두려움
그까짓 불안
죄의식과 허위와 허위의 아름다움과
슬픈 쇠사슬의 겸허로
뜨겁고 단순하게
절박하게
온몸이 떨리는 살아 있음으로
당신을 사랑하는 일
태어날 때 이미 내 손에 도착한
선물이
꽃잎의 시간이
무수한 축복의 뿌리를 달고 있음을
이제야 본다는 것
놀랍지 않은가
(「당신을 사랑하는 일」 전문)
“놀랍지 않은가”는 시인이 나이가 무색해지는 지점을 향해 내뱉게 되는 감탄이다. 놀람의 기쁨이 시인을 몰고 간다. 이것은 마치 괴테의 파우스트가 극한의 만족에 이르러 그 순간을 향애 “거기 멈추어라”라고 외치는 것과 유사하다. 시인은 「링」의 순간과 대척점에서 “피 묻은 마우스를 뱉고 가죽 글러브를 벗고 / 빈둥빈둥 햇살 속으로” 자신을 방목하고서 “이제 벌거벗은 너만 오면 된다”고 에덴을 도발한다(40-41).
문정희의 시는 아무래도 절창의 노래가 의존하기 마련인 모종의 주술성에서 특징적 힘을 발휘한다. 시의 힘은 열정의 자연스러운 결과일 것인데 시인의 초저녁 사랑시가 몸의 언어로 주술의 리듬을 타고 맥동한다는 것은 “놀랍지 않은가.”
II. 이수명, 물류창고
낯선 것의 새로움은 신기하다. 신기한 것은 시선을 빼앗고 마음을 붙잡는다. 알 기 어려운 것일수록 궁금증을 키운다. 작은 실마리에서 “무엇”에 이르는 원근법이 희미하게 드러날 때 “왜”라는 질문이 이어진다. 질문이 다시 “어떻게”로 이어지는 순환구조에서 호기심은 흡족에 이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무엇,” “왜,” “어떻게”가 삶의 새 지평을 여는 데 기여하지 못한다면 그 새로움은 감각을 자극하는 신기함에 그치게 된다. 이로써 족하다고 말하는 이가 있겠지만 낯선 것의 새로움은 세상에 대한 지각의 방식을 문제 삼거나 전복을 꾀하는 시도에서 의미가 깊어질 수 있다.
1. 물류창고, 세상 밖의 세상
세상을 움직이는 가장 힘 센 자는 정치나 경제일 것이다. 개인의 삶과 일상 깊숙이 미치는 정치와 경제의 영향력은 예술에 비해 막대하고 직접적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우리의 생활에 강력하게 작용하면서도 그 실체가 잘 보이지 않는 세력들이 준동하고 있다. 후기 자본주의와 고도의 기술 그리고 정보의 홍수가 형성하는 문화에서 우리는 통제 불능의 숱한 코드들에 에워싸여 있다. 첨단의 물질문명이 급속도로 제조해내는 새 것들의 행진에서 우리는 시간의 맨 끝자락에 매달리게 된다. 오늘은 어제와 다르고 내일은 다시 달라질 것이므로 오늘을 살아내지 못하면 끝없이 과거로 추락하게 된다. 오직 오늘에 내몰려 있는 자가 있을 뿐이다.
최근에 나는 최근 사람이다. 점점 더 최근이다. 최근에 플래카드를 들고 서 있는 사람들 앞을 지나갔다. 어디서 오는 길이지요 묻는 사람은 최근에 본 사람이고 펄럭이는 플래카드 텅 빈 플래카드에는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았다. 나는 펄럭이는 깃발 아래 펄럭이는 그림자를 최근에 본 사람이고 그 펄럭이는 것이 신기하게도 구겨지지 않고 계속 펄럭이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리하여 나는 구겨지지 않는 사람들 앞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혹은 구겨진 신체를 계속 펴는 사람들이었는지도 알 수 없었는데 아무런 기분이 들지 않았다. 다만 펄럭이는 것이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으려 펄럭이는 것이 가로지르고 있는 최근을 따라 걸어가는 것이었다. 수시로 아침이 오려 하는 거리를 신체를 펴고 걸어가는 것이었다. 최근은 편안한 것이었다. 수시로 최근의 사실들이 모여들었다. 조금 더 최근의 일이에요 말하는 사람을 거기서 나는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최근에 나는」 전문)
펄럭이는 것은 구겨지지 않는다. 펄럭임은 가장 최근의 순간을 역동적으로 구현하는 방식에서 그 안에 아무것도 기록하지 않고 있다. 그것은 과거의 상처와 미래의 불안을 간직하지 않으려는 몸짓일 수 있다. 또한 그것은 과거의 가치와 미래의 희망이 허용되지 않는 단절의 몸짓일 수 있다. 최근이 전면에 나부끼면서 배후나 전망이 지워지는 상황, 이런 세계에 대한 강한 의식이 화자를 사로잡고 있다. 과거는 유해하고 미래는 불확실하므로 사실과 사건과 정보의 바다에 생각 없이 떠밀려가는 것은 차라리 편안할 수 있다. 그렇지만 “최근에 나는 최근 사람이다. 점점 더 최근이다”에서 화자는 “편안한 것”의 해방감보다는 위험에 직면한 자의 불안을 드러내는 것으로 보인다.
시인에게 자주 등장하는 “오늘”이나 “최근”의 용어는 스타인(Gertrude Stein)의 “지속적 현재”를 생각나게 한다. 이에 반하여 엘리엇이 황무지에서 “4월은 가장 잔인한 달”로 묘사했던 무의미한 현재에 대한 두려움을 상시키기도 한다. 그는 네 사중주에서 “모든 시간이 영원히 현재라면 / 모든 시간은 구원될 수 없다”(If all time is present / All time is unredeemable)고 한 적이 있다. 산업사회가 일으키는 물결은 거대하고 급속하다. “최근”은 이 물결에 휩쓸려가는 개인이 무기력하게 처하게 되는 삶의 최전선을 뜻할 수 있다.
세상 속의 세상, 세상 밖의 세상은 항상 교차하고 있다. 같은 세상에서 시인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따로 살고 있다. 일부 시인들이 일탈의 자세를 취하는 것과 달리 이수명은 사람들과 함께 하면서 다른 세상을 꿈꾼다. 꿈은 일탈 혹은 이탈에서 허용될듯한데 시인은 “그들”과 거리를 두면서도 “우리”의 일원으로 남는다.
풀 뽑기를 했어요 모두 모여 수요일에 풀을 뽑았어요 목요일에 뽑은 적도 있어요 풀이 자라고 계속 자라서 우리도 계속 모이고 모였어요 풀이 으리으리해요 토마토 밭에 들어갔다가 상추밭에 들어갔어요 풀을 뽑다가 토마토도 뽑고 상추도 뽑았어요 이게 무슨 풀이지? 물어도 아무도 몰라요 풀은 빙빙 돌고 풀은 무리 지어 부풀어 오르고 풀은 울음을 터뜨리고 풀은 서로를 뚫고 지나갔어요 풀은 텅 비어 있어요 풀은 반들반들 빛났고 더 이상 반짝거리지 않았어요 풀에 가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어요 풀 속에 숨어 아무도 보이지 않았어요 풀을 뽑다가 풀 아닌 것을 뽑았어요 미나리도 뽑고 미나리아재비도 뽑았어요 풀 한 포기 없었어요 그래도 모두 모여 풀을 뽑았어요 우리는 계속 풀 뽑을 사람을 찾았어요 풀이 으리으리해요
(「풀 뽑기」 전문)
풀은 농부에게 불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휘트먼(Walt Whitman)이나 김수영에게는 민중과 민주주의를 대변하는 것이기도 하다. 필요와 불필요를 가르는 일은 누가 행하는가, 어떻게 정해지는가, 그 기준은 타당한 것인가, 이런 질문들에서 이 시는 시작하고 있다. 풀 뽑기를 하다보면 그 기준이 오락가락하다가 종래는 무수해져서 기준 자체가 무의미해지고 뽑아내는 행위 자체만 남을 수 있다. 가장 급진적으로는 제거해야할 풀 자체가 존재하느냐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무엇이 남겨야할 꽃이고 무엇이 뽑아야할 풀이란 말인가? 풀 뽑기는 늘 모종의 규범을 내세우기 마련이지만 그 규범의 당위성은 언젠가 무너질 여지가 있고 이 과정에서 필시 상처가 발생한다. 그래도 뽑아내야할 풀이 있을 수 있다.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으리으리”하게 자라는 풀이 있을 수 있다.
아마도 시인이 시 쓰기, 시 합평 등의 과정에서 겪었을 법한 이 경험에서 안의 세상과 밖의 세상은 경계 없이 겹치고 있다. 그 겹침은 대립이 아닌 만큼 수용도 아닌 것 같다. 시인은 세상에 대한 세상이나 세상 위의 세상이 아니라 세상 속의 세상을 구축하고 있는 것 같다.
2. 물류창고, “정숙”
「물류창고」의 화자가 내면에 재구성하는 세상은 다른 사람들의 것과 같을 수 없다. 그렇지만 화자는 그 차이를 밖으로 드러내 그들과 다투려하지 않는다. 세상에서 이방인은 밖으로 내쳐지기 마련이다. 그래서인지 화자는 다른 세상을 사는 외톨이인데도 사람들 속에 처하여 잘 지내는 법을 터득하고 있다. 그는 차분한 편이고 세상과 그럭저럭 지내지만 쓸쓸해 보인다. 타협하지 않고 가장 견고하게 자신의 성을 지키고 있지만, 세상을 향해 포를 쏘는 일은 없다.
하지만 안과 밖, 두 세상의 공존은 밖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기도 하지만 안이 밖으로 투영되는 것이기도 해서 필연적으로 비판의식을 반영한다.
우리는 물류창고에서 만났지
창고에서 일하는 사람처럼 차려입고
느리고 섞이지 않는 말들을 하느라
호흡을 다 써버렸지
물건들은 널리 알려졌지
판매는 끊임없이 증가했지
창고 안에서 우리들은 어떤 물건들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으로 갔다가 거기서
다시 다른 방향으로 갔다가
돌아오곤 했지 갔던 곳을
또 가기도 했어
(...)
그냥 담당자처럼
(...)
대화는 건물 밖에서 해주시기 바랍니다
(...)
정숙이라고 쓰여 있었고
그래도 한동안 우리는 웅성거렸는데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소란하기만 했는데
창고를 빠져나가기 전에 정숙을 떠올리고
누군가 입을 다물기 시작한다
누군가 그것을 따라 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조금씩 잠잠해지다가
더 계속 계속 잠잠해지다가
이윽고 우리는 어느 순간 완전히 잠잠해질 수 있었다
(「물류창고」 부분, 14-16)
만남의 장소는 목적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사교적 만남이라면 도심의 카페나 공원의 벤치가 적절할듯하다. 화자가 선택한 것인지 아니면 어쩌다 그리된 것인지 “우리”가 만난 곳은 “물류창고”다. 그곳에서 그들은 “창고에서 일하는 사람처럼” 옷을 차려입고 있다. 창고에서 일하지 않으면서 창고에서 만나고 창고의 노동자가 아니면서 그렇게 복식을 갖추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이렇게 창고의 분위기에 어울려 있으면서도 그곳에 완전히 동화되지 못하고 “느리고 섞이지 않는 말들”을 하느라 온 힘을 소진하고 있다. “우리”는 창고의 여건에 부응하여 만남과 복식이 이뤄지는 상황에 대해 비판적 의식을 드러낸다.
하지만 그들에게 창고의 분위기는 거스르기 힘들 정도로 위력적이다. “물건들은 널리 알려졌”고 “판매는 끊임없이 증가했”다. 유통과 상업이 문화를 선도하는 세상에서 사람들은 풍요와 안락의 환상에 쉴 새 없이 노출되면서 그 방식을 자연스럽게 수용하고 있다. 우리는 물류, 물건들의 흐름을 따라가는 중에 있다.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으로 갔다가 거기서 / 다시 다른 방향으로 갔다가 / 돌아오곤 했지 갔던 곳을 / 또 가기도 했어.” 우리의 행보는 창고라는 테두리 안에서 시작하고 끝나고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물류창고와 같다. 물류로 요약되는 물질주의, 상업주의, 자본주의에 의해 세상이 지배되고 있는 한 그러하다. 이곳에서 세상을 움직이는 주체는 그 안의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는 정작 물류창고의 주인이 아니고 심지어 그곳에 고용되어 일하는 노동자도 아닌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스트 사회에서 이성과 주체성은 믿고 의지할 만한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창고의 고용주가 물신주의, 상업주의라면 그곳의 고용인은 이를 신봉하고 일선에서 실천하는 자일 것이다. “우리”는 물류창고에서 벗어날 수 없으면서 그렇지만 그 가치를 앞서 실천하는 자가 될 수는 없는 상황에 처해 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어쩌면 비겁하게, “담당자처럼” 행동하고 있다. 이윤추구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자본을 무시하는 행위는 도태를 자초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호흡을 다 써”가며 나누는 대화는 물류창고의 입장에서 보면 불온한 것이 될 것이다. 물류창고는 단호하게 그 안의 사람들에게 “대화는 건물 밖에서”라고 명령한다. 창고 건물에 붙어 있는 “정숙”이라는 표어는 코드 형성의 주체가 우리가 아니라는 사실과 그 코드의 위세가 일방적이고 압도적이라는 사실을 기호화한다. 우리는 창고에 들렸다 떠나기를 반복하는 사람들에 불과하다. “정숙”의 표어에 따라 “이윽고 우리는 어느 순간 완전히 잠잠”해 진다. 주인 없이 심지어 일꾼마저 없이 유지되는 물류창고, 그 세상이 강제하는 침묵, 그 침묵을 벗어나서는 살기 힘든 우리, 무섭지 아니한가?
3. 물류창고, “자 다시 한번 앞을 보세요”
“처음 보았는데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장소가 있다. “처음 들었는데 어디선가 들은 음성”이 있다. 세상은 다양한듯해도 비슷하다. 세상에 작용하는 규범이 천차만별인 듯해도 사실 다르지 않다. 우리에게 작용하는 어느 보편자가 하느님의 섭리와 같은 것이라면 우리는 에덴에 있는 셈이다. 하지만 우리가 처한 곳은 물류창고다. 물건이 즐비하게 쌓여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사진을 찍는다. 자신도 여기에 있다는 것을 확인시키기 위해, 자신도 남들과 마찬가지로 여기에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혼자서도 찍고” “단체사진도” 찍는다. 이곳은 사람들이 사진을 찍어 자랑하고 싶은 명소이다. 명동이나 신주쿠 혹은 뉴욕 브로드웨이처럼 멋진 곳이다. 일부러 찾아가 흔적을 남기고 싶은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곳이다. 세상의 도시들에는 얼마나 아름다운 물건들이 넘치고 있는가.
사진촬영에서 중요한 것은 “앞을 실천”하는 것이다. 물류창고의 세상은 누군가 한 방향을 바라볼 것을 요구하는 공간이다. “자 다시 한번 앞을 보세요.” 그런데 사람들이 “다시 앞을 향했을 때 앞은 사라지고 없다.” 한 순간의 앞은 다른 순간의 앞에 의해 끊임없이 대체된다. 드라이저(Theodore Dreiser)의 자연주의 소설 『씨스터 캐리』에서 여주인공은 가난한 시골 처녀에서 주급 수백 달러의 여배우로 출세한다. 그녀에게 허영의 계단을 계속 오르게 만드는 도시의 힘은 뒷골목의 어둠이 아니라 부의 정도에 따라 더욱 화려하게 반짝이는 쇼윈도의 전면이다. 물질적 풍요가 제공하는 신분의 위세와 화려한 물건들이 자극하는 욕망, 이걸 이겨낼 힘이 인간에게는 없다.
놀랍게도 물류창고의 세상에는 “창고지기가 없어” 관리자의 존재가 삭제되어 있다. 사람들을 이곳에 오게 하고 그들을 모여 서게 하며 “앞”을 바라보게 하는 자가 있지만 보이지 않는다. “카메라”는 그의 매개체일 것인데 이마저 “기념 후 곧장 사라져버린”다. 화자에게 이 창고는 처음부터 불만스러운 공간이다. “누가 여기서 만나자고 했지 / 불평이 나왔지만 왜 그런지 /여기에 드나드는 사람이 많아서” 따라와 있다. 우리가 물류창고에 머무는 일은 싫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선택사항이 아니다. 누가 총으로 그렇게 하라고 명령하진 않았다. 그렇지만 다들 그렇게 하므로 이곳에 오지 않을 수 없고 한 술 더 떠서 “담당자처럼” 바지주머니에 “볼펜과 펜”을 꽂고 어슬렁거리게 된다. 물류창고의 세상에서는 우리를 이곳에 머물게 하고 그 규칙에 따르게 하는 세력이 얼굴 없이 배후에서 활동하고 있다. 화자는 “창고가 폭발하기까지는 아직 약간의 시간이 남아” 있는데도 “밖으로 나가려는 사람들이 없”는 데서 위험을 감지한다. 하지만 그는 소릴 지르거나 뛰쳐나갈 수 없다. “더 이상 날지 않는 잎”을 바라볼 뿐. (「물류창고」, 14, 18-19)
4. 물류창고, “객석에 앉은 나”
“창고 완전 개방” 세일이 있던 자리에 힐링 캠프가 차려졌다. “시즌 오프 세일 현수막”이 그대로 걸려 있다. 시간을 격하여 있는듯하지만 사실상 힐링 캠프는 물류창고 내에서 진행되고 있다. 힐링을 위한 프로그램은 “요가,” “공예,” “연극” 세 분야를 포함한다. “우리”는 “무얼 할지 몰라” 공예보다 연극이 “쉬울 것 같아” 연극을 신청했다가 “한 팀밖에 구성할 수 없다 하여” “경훈과 성미”는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무대에 서고 화자는 “객석에 앉은 나”로 남는다.
경훈이 먼저 무대에 올라
늦어서 미안하다고 했다. 캠프 시작에 늦지 않으려 했는데 오는
길이 막혔고 그런데 자신은 여기에 왜 오는지 모르며 그냥
이끌려 왔는데 뭘 또 하라고 하니 우선 늦어서 미안하다는 거였다. 날이 더워서
더러운 날이라고도 했다.
(「물류창고」 부분, 22-23)
“진정한 나를 찾는 힐링”을 하겠다면서 연극에 참여한 다른 사람들이 “소리 지르고 바닥에 넘어졌다가 / 나중에는 포옹하는 장면”에서 경훈은 자리를 비켜주는 자세를 취한다. 성미는 “힐링 주변을 계속 빙빙” 겉돌기만 하다가 그들이 “힐링을 너무 오래해서” 아마도 예의상 “결국 이해하고” 잠깐 “감동의 눈물”을 흘린다. 그들이 “덕분에 자신도 힐링되었다며 성미의 손을 잡고 / 무대를 한 바퀴 돌았다.” 이걸 바라보면서 경훈은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다가가 / 오늘은 몹시 더운 날이라 했다. 더러운 날이라 했다.” 성미는 쇼나 마찬가지인 연극의 장치에 의해 힐링을 강요당하고 있고 경훈은 “더운 날”과 “더러운 날”의 말장난으로 불협화음을 내고 있고 화자는 객석에 앉아 관찰자의 위치를 점하고 있다.
장면의 묘사에 치중하는 언어를 구사한다. 시의 언어로서는 긴장감이 떨어지고 논리나 이야기가 목적성을 띠지 못한다. 시인이 이렇게 지향점이 없이 보이는 문장을 엉기듯 이어가는 것은 현실의 바로 그 하릴없음을 구현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힐링마저도 물류창고에서 이뤄지는 세상에서 힐링은 과연 가능한가? 힐링으로 포장된 요가, 공예, 연극마저도 속속들이 상품화된 게 아닌가?
5. 물류창고, 삶
창고가 주는 즐거움이 있다. 화자는 물류창고가 강제하는 모종의 코드에 불안을 느끼고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을 간혹 표출하지만 그것이 주는 즐거움을 부인하지 않는다. “창고에서 다음 창고로 최선을 다하는 그들의 명랑한 명상”은 사람들이 물질의 환상에 빠져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창고 안의 사람들은 의혹 없이 망설임 없이 “일제히 같은 잠”에 빠진다. “붉은 컨테이너로 지어진 물류창고”는 “도시 곳곳에 솟아” 있다. 화자가 느끼는 불안은 이 즐거움의 요소에서 가중된다. 물류창고가 고통스럽기만 하다면 언젠가 누군가, 어쩌면 모두가 들고 일어나 부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자발적으로 추구되는 물질의 즐거움에서 그곳은 “여름 내내 / 녹지 않”고 “녹슬지 않”을 것 같다(26).
물류창고 안에서 사람들은 맹목적이다. “창고 안을 돌아다니면 / 뭘 하려 했는지 자꾸 잊어버려 / 저쪽으로 갔다가 글쎄 모르겠어 그냥 돌아오게” 된다. 이 맹목의 세상에서, “불이 들어오지 않는 ... 어둠 속”에서 화자는 “병으로 뭘 하려던 건지 모르는 채 굴러다니는 / 병으로 갑자기 머리를 내리치는 사람들”을 목격한다. 이 세상에서 화자는 “아주 납작하게 창고 바닥에 누울 수 있다.” 고개 쳐들지 못하고 숨죽여 엎드린 자들이 매일 아침이면 그 “납작한 몸”으로 “세워지고 ... 서 있을 수 있다”(32-33).
“우리”는 모르는 사람들과 “창고 앞에 나란히 서서 테이프 커팅을 하고 있다.” 창고는 미래의 약속을 상징한다. 그곳은 오늘보다 더 풍요로운 뭔가를 우리에게 가져다줄 것 같다. 약속의 힘은 “우리”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막대하게 작용하는듯하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가 만나기로 한 창고 안으로 벌써 들어가고 / 들어갔다가 나오고” 있다. 물류창고의 맹목성과 번식력에 대한 비판적 인식에서 화자는 “생각을 바꾸어 그 창고를 / 뚫고 나가려는” 자세를 취한다. 이 대응자세에서 물류창고는 “순간의 창고 / 뜻밖의 창고인 듯 서있다.” 그렇지만 여전히 이 창고 앞에서는 “모르는 사람들이 ... 다시 만날 약속을 하고 있다.” 이런 일이 계속되면서 그들은 “언제 꺼냈는지 / 검은 그림자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며 / 끊어진 테이프를 뉘우치고 있다”(36-37).
경험의 차원에서 재구성되는 세상은 어차피 세상 그 자체가 아니다. 우리는 같은 하늘 아래 같은 석양을 보고 있다. 그 석양이 마음에 각인되는 그림은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는 끊임없이, 어쩌면 바보같이, 리얼리즘의 환상에, 동질성의 토대가 허용하는 안전의 범주에 속하려고 꿈틀댄다. 사회의 규범과 교육의 전범은 우리에게 바라볼 것과 따라할 것을 제시한다. 우리는 사회가 관념의 허울로 제시하는 뭔가를 따르는 데서 박수를 받고 그렇지 않은 데서 테두리 밖으로 내쳐지는 아픔을 겪는다. 대중매체가 주도하는 문화에서 그들이 말하는 다양성과 창의성마저도 산업사회의 메커니즘을 벗어나지 못한다.
이에 대하여 이수명은 세상의 이질성을, 자신이 인식하는 것의 차별성과 그 현실성을 언어화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녀의 문장은 개별적으로 투명하고 상식적인데 그 언어로 그려내는 총화는 불투명하고 비상식적이다. 같은 세상의 이쪽과 저쪽이 너무 자연스럽게 겹치면서 양쪽 사이의 경계가 보이지 않는다. 세상은 엄존, 상존하지만 그 안의 또 하나의 세상 또한 엄존, 상존한다는 것을 말하려는듯하다. 하나의 공간과 시간 속에 두 세계가 공존하는 방식이 이채롭다. 이 공존은 등지고 대립하거나 마주하여 소통하는 방식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안의 세계와 밖의 세계는 같은 시공에서 자연스럽게 뒤섞이지만 시인의 목소리는 대립의 파열음도 소통의 화음도 내지 않는다. 이수명은 끈질기게 탐색적이고 비판적이지만 시끄럽게 뛰쳐나가지 않고 무리 가운데 있다. 이 묘한 위치에서 그녀의 목소리에는 사색으로 대항하는 자의 나지막한 인내가 묻어있다.
시 「물류창고」는 시집의 제1부에 10편이 실려 있는데 각 시에 번호나 부제가 주어지지 않은 채 다른 시들 사이에 배치되어 있다. 같은 제목 하에 놓여 있지만 10편 사이에 “물류창고”라는 모티프 외에 사건이나 이야기의 연계는 없어 보인다. 연작시라고 부를 수 있는 것에 대하여 시인이 굳이 번호 매김을 생략한 것은 순서가 무의미하기 때문일 수 있다. 시간이나 공간의 선후 대신에 동시, 도처의 상황을 염두에 둔 것일 수 있다. 물류창고가 동시, 도처에 산재하는 상황이 딱 그러하기 때문일 수 있다. 또한 다른 시들 사이에 놓음으로써 물류창고가 세상 모든 것들의 틈새에, 아니 역으로 세상 모든 것들이 물류창고 사이에 놓여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일 수 있다. 10편의 시 중 물류창고와 관계가 가장 없어 보이는 경우에서 화자는 “어두워서 잠이 오지 않아 // 나도 잠이 오지 않는”(28) 처지를 말한다. “그러나 아침이 오면 / 나는 아직 눈을 뜨고 있는 것 같다”(29). 창고와 관련된 이미지나 언급이 전무한 상황에서 이 시의 제목이 “물류창고”인 것은 화자가 세상과 자신의 삶 전체를 물류창고라고 여기는 탓일 것이다. 물건의 유통과 분류 그리고 물신주의적 욕망이 끝없이 펼쳐지는 시공에서 그가 불면의 새벽을 맞이하는 일은 피하기 어렵다. 물류창고는 그 확장 비유에서 깨어 있는 자의 삶 자체를 지시한다.
III. 서정의 정치성과 정치의 서정성
문정희의 사랑 시는 시대정신과의 접점에서 새롭게 빛난다. “여류”에 역류하는 몸짓에서 그녀의 사랑은 반동적이고 뜨겁지만 단단하다. 열정을 무엇보다 신뢰하지만 그것이 사적 감정의 분출에서 에너지를 소진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문정희에게 사랑은 개인적이면서 집단적이고 현재적이면서 역사적이다. 그녀의 사랑 시는 애증의 병리학을 벗어나 생명의 근원과의 일치에서 인류학을, 억눌린 몸의 해방에서 편견의 역사를, 사랑의 의미가 조작되는 사회적 맥락에 대한 비판에서 성의 정치학을 다루고 있다. 문정희는 가장 흔한 제재인 사랑을 사회적, 역사적, 정치적 맥락에 놓음으로써 그 내면을 심화하고 그 변두리를 확장함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일구고 있다. 서정의 정치성을 실현하고 있다.
이수명의 시는 출발부터 새롭다. 전통적 서정시에서 기대하기 힘든 목소리가 들려온다. 호흡도 제재도 주제도 가장 최근의 것이다. 무엇보다 주목을 요하는 새로움은 시적 화자의 목소리가 정치적이면서도 개인적이고 차분하다는 데서 발견된다. 70년대와 80년대의 정치시가 사납고 크게 집단의 목소리로 다가왔던 것과 사뭇 다르다. 이수명의 시는 일인칭 화자의 것이지만 개인의 사랑, 고독, 고통, 상실 등이 핵심 주제로 등장하지 않는다. 호흡은 대체로 산문의 리듬을 타고 있고 간결, 압축, 긴장을 의도적으로 피해가는 듯 보이는 경우가 있다. 사회 현상, 문화, 시대가 시인의 관심의 대상이라는 점에서 시인의 시선은 비평가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이론과 시가 다르듯이 시인은 시에서 분석, 비판, 주장의 목소리를 낼 수 없다. 그녀의 시를 채우는 것은 비판의 언어가 아니라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것들이다. 시인이 문제라고 파악하는 현상이, 사건이, 상황이 이에 대한 진단 없이 전면에 제시되어 있다. 이수명의 시가 어렵게 읽혀진다면 그 주된 원인은 이러한 의도적 불친절에 기인한다. 정치적이지만 집단의 대변자, 시대의 옹호자로서 자처하지 않는다. 비평가적 사유를 심미적 거리를 통해 실천하는 개인의 목소리에서 이수명은 서정적이다. 정치의 서정성을 실현하고 있다.
―《시와문화 》 2018년 가을호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깊은 내공이 느껴지는 서평입니다. 존경합니당 ,
나의 깃발은 펄럭이고 삶이라 현장에서 펄럭이고 아무도 깃발에 나를 적어주지 않았고 나도 아무것도 적지 않았다. 최근이라는 하루의 최전선이라는 말도 사용할지 몰랐다. 그냥 오늘이었다 현장이 펄럭이고 있는 지금,
전문 이라는 용어를 써봅니다. 평글 잘 읽었습니다. 사건 상황 환경 모두 개인차가 있겠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이 거대 물류 창고가 아닐까... 창고 안에서 힐링이라는 언어를 뱉어내고...그리고 불안한 그림자를 밟으며...그래야만 첨단 사회에서 살아남고는 게 아닐까
하늘이 너무 높아서 처연해지는 오늘 제대로 찬연한 글을 만났습니다. 선생님 수고하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