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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소는 정읍 음악과 엔카의 연결 고리 | |||||||||||||||||||||||||||||||||||||||||||||
[권희덕의 정읍문화 뿌리찾기] 정읍사 계보로 이어진 민요와 농악 멜로디, 태평소로 연주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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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음악인 정읍사음악이 유행하던 삼국시대 태평양과 알라스카 빙판을 딛고 아메리카로 건너간 동이족 한민족의 뿌리를 탐색하고 그시대 음악을 재현하고 찾아 본다. 조선의 유교와 해방후 서구문화 유입으로 '한국의 소리'는 거의 말살됐다.
군사정권 말기에야 정권유지 차원에서 홍보선전용 행사치레로 행하였으나 고질적인 부패로 진전이 미약했다. 고구려의 황조가, 백제 정읍사, 신라음악 동경(계림)은 모두가 토템(동물)신앙으로 불교도 유교도 아닌 원시 수렵시대 음악이다. 현재 남아 있는 수제천과 동동, 상사소리도 비들기, 닭, 꾀꼬리, 까치등의 소리로 확인하고 정읍통문에 80번이나 소개했다. 산외에 살던 악사 전광문의 태평소 연주를 보고 자라났다 녹두장군이 사는 산외면에서 친척 천안전씨 악사 전광문이 태평소에 능숙하여 악사 김판순과 연주하는 것을 자주보고 자라난 기자는 그 곡을 기억하고 있다. 정읍농악 순서에 "양산도" 굿이 있다. 그러나 요즘에는 단절되어 누구도 양산도를 불지 못하니 듣지도 못한다. 백제 궁중음악을 신라, 고려시대, 중국사신 접대용으로 계승하고 특히 고려시대 궁중악이 농악으로도 변형되면서 관현악 농악의 멜로디 절차는 정읍사음악 곡목 이었다. 농민의 농악 아닌 무속인의 농악에는 피리와 태평소 연주 있었다 옛날에는 농민(양반)농악이 아닌 정읍재인(무속)의 농악대에는 피리와 태평소 연주가 꼭 있었다. 일본이 양반상놈의 계급을 페지하고 오히려 무속인을 군사장교 예술인으로 우대하여 고급관리로도 임용했다. 1925년의 섬진강 땜(엔떼이)과 운암발전소 건설자금이 풀리자 몰려든 우수한 광대와 협율사, 무속인 악사 농악대가 살고 있었다. 전광문, 이태화, 방태진 등의 태평소 소리가 대동가극단 통해 일본으로 전광문, 이태화, 방태진 등의 태평소 소리가 정읍예기원이 중심이된 대동가극단을 매개로 동경유학생 호남학생단장 김낙기의 주선으로 일본공연과 레코드취입이 가장 많았다. 여기에서 대부분은 신분을 감추었고 방태진만이 1950년대 진경국극단, 여성국극단으로 정읍극장에서도 자주 공연하였다. 이 소리가 후백제 궁중악으로서 정읍농악의 태평소소리로 간신히 계승되고 그 빠른 정읍곡을 모방한 농부가, 양산도, 태평가로 농사 선전으로 부르고 모든 한국민요는 정읍사노래를 신민요로 모방했던 것이다. 후백제 궁중악, 정읍 농악 태평소 소리로 간신히 계승돼... 이 과정에서 태평소는 일본의 태평양전쟁 와중에 놋쇠공출 쇠로 빼앗기고 또 농악에서 사물악기는 농민으로 인식하지만 태평소는 재인(무속인)으로 인식되고 천하게 취급받기 때문에 모두가 기피하여 불지 않아서 없어�다. 엔까의 원조 고가마사오는 황성옛터의 작곡가 전수린의 옆집에 살면서 1930년에 '술은 눈물인가 탄식인가'를 채규엽의 노래로 발표하여 중국 일본 대만등지에서 크게 유행하였다. 엔까 '술은 눈물인가 탄식인가'는 정읍사 모방 농부가를 슬프게 사용한 것 그 곡의 모든 소리는 정읍사를 모방한 농부가를 "미파라시도" 5음계로 슬프게 사용했다. 조선은 아악으로 단조의 슬픈 노래를 금지하고 그런 노래를 부르면 천인 노예로 인정하는 시대였다. 그래서 "도래미쏠라" 5음계로 아주 느리게 양반의 품위를 과시하는 소리로 사용되었다. 빠르고 슬픈 노래를 부르면 과거시험 보는데 추천서를 받을 수가 없어 천민을 자초하는 패가망신의 길이 되었던 것이다. 해방후에 이 소리는 친일파로 매도되고 방송금지곡으로 제정하여 우리의 귀를 막아버렸다. 일본 엔까의 원조 고가마사오의 다수 곡은 농부가를 모방한 것들이다. 이 농부가를 모방한 "슬픈 술(사비시이사케)" 노래는 한국계 가수 미조라히바리의 노래로 전 일본 시청자를 눈물바다로 만들었다. 배용준보다 40년 이전 일본타도의 시대에 지속된 한류열풍이었다. 삼국시대 궁중음악은 토템(동물신)을 새소리로 맞이하는 매굿(맞이굿:迎鼓) 당시에 신라, 고구려, 백제의 음악은 시조 왕의 신화인 닭, 말, 까치소리 등으로 구성한 종묘음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박혁거세 탄생음악 말소리, 석탈해 탄생의 까치소리, 김알지(파사왕) 탄생의 닭 울음소리, 백제 단군(단골)의 호랑이소리, 고구려 고주몽을 도와준 비둘기 우는 소리, 고구려 유리왕의 황조가에서 나오는 꾀꼬리소리, 뻐꾹(쑥국)새 소리가 그대로 묘사된 음악이 고려사 악지에서는 동동으로 지금의 정읍 땅에서는 도둑재비 라고 불렸다. 그런데 진성여왕이 김알지 김씨 혈통이므로 순서를 바꿔 시조 혁거세 상징의 말울음소리 앞에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잡은 김알지 상징의 닭소리를 처음 순서로 놓게 하였다. 그 '동동' 음악을 동물소리로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꼬끼오(닭)- 히히히힝(말)- 재잭 재잭 재잭 재잭(까치)- 지지구구 지지구구(비들기)- 회회회-앵앵(꾀꼬리) 우리나라에서 김알지-박혁거세-석탈해-단군-고주몽-유리왕 황조가의 순서로 연주되고 있는데 비하여, 그 당시에 중국음악은 하-은-주 3대 시기의 가무로 구성되어 있었다. 유명 팔도민요는 정읍사 중심 가락과 장단을 모방했다 이번 정읍사 사물놀이는 모든 한국 민요의 근본이자 모체임을 증명하는 고증자료이다. 현재 애창되고 있는 유명한 팔도민요의 가사를 모방한 위치에 붙여 부르면 안다. 그로써 민요의 중심가락과 장단을 정읍사 음악에서 모방하였다는 느낌이 든다. 정읍사 가사는 그대로 "달아노피곰 돋아샤..."로 사용되었는데, 선운산, 방장산, 무등산, 지리산의 가사는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정읍사를 모방하여 192-30년대의 일본이나 미국에서 양악기 반주로 제작된 축음기(유성기, 레코드)로 연주된 한국민요 가사를 붙였다. 즉, 경기민요 태평가의 "짜증을 내어서 무엇하나...", 함경도민요 신고산타령의 "신고산이 우르르르 함흥차 가는..." 등등 팔도 민요는 정읍사의 모방으로서 192-30년대의 레코드 음반 산업의 결과로 그 시대 유행가가 된 것이다. 개화된 친일 음악인 홍난파가 천민 음악을 궁증악 작곡 재료로 사용 홍난파는 소년시절부터 궁중음악을 서양악보로 연주하는 직업인으로서 1920-30년대에 수제천,동동 등등 정읍음악 악보를 익혀 알고, 국악을 하면 천민무당이되는 현실의 한국인보다 개화된 일본인이기에 서슴치 않고 궁중악을 작곡 자료로 사용하였다 한다. 여기서 궁중음악은 소리가 계급표시로 되어 무미했고 새소리 모방으로 만든 정읍, 동동등의 악곡이 자연히 더욱 흥겨운 편이어서 주로 편곡됐다. 1917년 백우용이 수제천을 서양악보로 채보하여 그 당시는 가장 빠른가요 궁중악으로 일본민요 하루사메와 같이 방아타령 곡을 처음으로 연주하였다. 이 곡은 조선 협율사 창극에서 심청전, 방아타령으로 사용되어 대유행하고 1925년에 장한몽이라는 일본극을 이 곡으로 편곡, 사용했다. 이어서 정읍지방에서는 자진농부가로 불려지고 있다. 14일 6시30분에 공연될 예정의 곡목은 다음과 같다. 단 종목이 너무 많아서 시간이 부족할 경우에는 줄 일 수도 있다. 권희덕 태평소 연주곡목(예정) 1. 정읍시나위 12지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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