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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수칼럼 [낮은 목소리로 14] 우연과 필연-2
원통김광수 추천 1 조회 515 19.02.18 10:56 댓글 9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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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9.02.25 01:34

    첫댓글 깨달음으로서의 자성이 없는 해탈은 무위, 공, 무아의 실현이고 이 해탈은 윤회에서 벗어난다.고 했다.
    지금여기(현 존재상태)에서 자아는 변하지 않는 것이라는 관념으로 자성을 가합할 때 이러한 자성은 자아라 할수 없는 공이므로 모든 것은 조건따라 연기한다는 논법이며 이 공상을 이해하기 힘들게 하는 것이 전도몽상론이다. 전도 몽상을 서양철학으로 인식자(론)의 한계(딜레마)를 다섯가지 우상으로 예증하고 있다.

  • 19.02.25 01:34

    공은 없는 것(무:유가 아니면 어떤 것이라는 이분법적 단변)이 아니라 이 현상(실제)계의 개념자가 있는 것과 없는 것(개념의 생득적, 기호학적 딜레마)이라고 할 때 있는 것(가합)이라면 그것은 자성으로서의 자아일 것이고 이 자아는 자성이 있을 것이다. 있는 것은 항상 있다는 의미다. 항상 있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변하지 않는다면 연기는 없다.이다.

  • 19.02.25 01:34

    그러나 공은 실제(어떤 것)가 없다는 의미의 무가 아니다. 유무(변견)의 개념(인식)자로 그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라면 이것은 자아와 자성이다라고 자동적으로 설정된다. 자성이라면 다른 것(변함,변할 것 등)이라는 가설이나 추론은 배제된다. 그런데 실제로 변하지 않는 것은 없으므로 이 변하지 않음이라는 고정됨은 없으므로 자성이라 할 수 없으므로 무아라 이름하는 것이다. 무아는 실체를 부정하는 것이지 현상계나 존재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닌 속제 또는 언설로서의 무아를 말하는 것이다.

  • 19.02.25 01:34

    그렇다면 모든 실재, 실체, 존재론까지의 개념자의 속성은 변하는 것이므로 무아인 것이고 이를 자성이 없다고 설정한다면 당연히 조건따라 연기하는 현상만이 획득된다. 여기서 깨달음으로 가서 직접보고 경험한다면 불변의 진리가 될 것이다.
    결론은 무아인데 (없는 것의)윤회는 모순이다라고 말한다면 공론을 전혀 이해하고 못하고 있는 것이고 인식의 구조틀에 대하여 다르게 생각해본 적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 19.02.25 01:34

    <변화는 유위법이고, 변화없음은 무위법이다>
    변화가 유위법이 아니라 존재하는 관념세계가 유위법으로 윤회하는 인식계(오온,12처,18계)이다.
    변화없음은 무위법이 아니라. 윤회가 끊어진 해탈의 세계이다. 구태여 무위법이라 해도 되고 말 안해도 되는 세계이다. 그냥 유위법 반대세계(유무변견계)라고 하고 이름을 안붙이고 생각하면 좀더 도움이 될까? 생각해본다.

  • 19.02.25 01:34

    변화와 공을 강조한다? 누가? 탐구자나 선생들은 학문적으로 서술해야 하니까 불가피한 입장이겠다.
    그런데 변화와 공 즉 일심은 실체의 속성 그 자체이므로 어떤 걸 더 강조한다고 말 할 수 없다. 오히려 이런 논조의 서술이 변화 또는 공을 더 이상하게 인지(대)하게 한다. 변화나 또는 공 이 둘 중 하나에 대하여 치우쳐서 알거나 듣는 것일 것이다. 공존이라는 서술도 불만이다. 항상 변견의 족쇄에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함정이 있기 때문이다. 변화와 공은 개념자의 속성이다. 어느 하나의 강조란 지적 언어유희일 뿐이다.

  • 19.02.25 01:35

    < 무상, 공, 무아의 불교의 대의에서본다면 필연 보다느 차라리 우연 쪽을 강조하느 것이 낫다. 어찌보면 우연이 필연이고 필연이 우연이다.>
    무상,공,무아를 전제하지 않았다면 그냥 서술로 보고 지나갈수 있는 문제인데... 좀 불만입니다.
    왜냐면 불교적 대의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 19.02.25 01:35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라는 사구백비론은 불교가 배척하고 싯달타가 버리고 떠나 온 두 스승까지도 싸잡아서 애매모호한자들이라고 육사외도사상을 경책할 때 분명히 선을 그어버린 잘못된 사상이기 때문입니다. 이 글들을 읽을 때 정평불 칼럼진이 이러한 논조를 이어간다면 불교를 어떻게 이해하게 될지 심히 난감합니다.

  • 19.02.25 01:36

    수필이라면 아무 문제가 없지만 사이사이 불교의 교의까지 인용하면서 글을 써가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문제가 있다한들 나의 졸필이 바르다는 것도 아니고 필히 아는 것만큼은 서술했으니 또한 잘못 알고 있다면 부딪치면서 가르쳐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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