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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 | 본질 |
변화 | 일정함 |
多 | 一 |
작은 눈, 미시적 | 큰눈, 거시적 |
단기적 | 장기적 |
속제 | 진제 |
언설제 | 제일의제 |
분별지 | 무분별지 |
생멸문 | 진여문 |
. | . |
. | . |
연기법 | 공 |
여기에서 현상과 본질은, 진제와 속제는 동일한 대상(것)에 있어서의 서로 반대되는 두 속성이다, 하나의 존재에 있어서의 두가지 반대되는 두 측면이다. 원효는 그것을 일심(一心)이라고 했다.
이제 논의하는 것은 맨 아랫부분이다. 연기니까 공이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연기는 변화하는 측면, 유위법의 측면을 말한 것이고, 공은 분별이 없는 측면, 무위법, 변화하지 않ㅈ는 측면을 말한 것이다.
사람이, 세상이, 모든 일이 변화인가 아닌가?
상(常)인가 비상(非常)인가?
무위(無爲)인가 유위(有爲)인가?
이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것, 모든 일에는 이 두 측면이 공존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변화만 강조해서도 안되고, 공만 강조해서도 안된다는 것이다.
4.
세상 만사가 철저히 인연법 아닌게 없다고는 하지만,
어찌보면 내가 일본에 태어났을 수도 있고, 미국에 태어났을 수도 있다.
하루 전에 태어났을 수도 있고, 625때 태어나서 그냥 죽었을 수도 있다.
나는 중3때 교통사고를 당해서 죽을 뻔 했는데, 그대 까딱하면 죽었을 수도 있다.
죽지 않고 살았는데, 이게 우연인가, 필연인가? 그건 말하기 나름이고 생각하기 나름이다.
학교때는 우연히 좋은 선생을 잘 만나서 화엄학 공부를 잘 했다. 우연히? 내가 해주스님이 실력이 더 좋은지 어떤지 어찌 알았겠나.
우리때는 중학입시때 1점으로 당락이 결정되는 경우가 너무 많았다. 동점자도 너무 많았다.
내가 용산중학교 붙을 수도 있었고, 중동중학교 안갈 수도 있었다.
그때 무우즙 사건만 안 났어도, 아버지가 그때 소송만 했어도 나는 용산중학교에 합격될 수 있었다. 그리되면 내가 육동신, 임종철을 못 만날수도 있었고, 그리되면 내 인생이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여자와의 관계라면 더 일러 무엇하리. . . .
이게 다 우연인가, 필연인가?
필연이라고 생각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필연이라고 하겠지. 그러나 우연이라고 생각한다면 얼마든지 우연일 수도 있다. 즉, 우연과 필연은, 종교가 말해주는 것도 아니고, 과학이 말해주는 것도 아니고, 철학이 말해주는 것도 아니다.
그저 그렇게 생각하고 싶으면 그렇게 생각할 뿐이라는 거다.
이를 일러 아마도 “경향성”이라고 하는 것 같다.
5.
현실에 아등바등 집착하지 말자는 처세술을 다룬 책 중에 “내인생 모든 것은 우연이 결정하였다”는 내용의 책이 있다고 한다. 좋은 책이다. 인생의중요한 것이 이 우연에 의해서 결정된다면 현실의 불행이나 불운도 누구 탓이 아니고, 그저 어쩌다가 그리 됐을 뿐이다.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니다. 누가 나빠서 그리 된 것도 아니다. 그저 하늘이 주는 운명을 겸허히 받아들일 뿐이다. 멋있지 않은가? 착한 일을 했는데도 왜 고통을 받는가. 그저 하늘의 뜻일 뿐이다. 내가 알 것 없고, 내가 알 수 없다. 내일 어떻게 될 것인가? 우연에 맏기자. 그리고 기쁘게 감사히 받아드리자.
어찌 보면 이것이 부처님의 무아사상, 공사상 아닐까? 필연의 철학이 불교의 가르침이라면 우연의 철학도 그 못지 않은 불교의 가르침 아닐까?
이 둘을 가르는 결정적인 경계는 인간사 이면의 중중무진의 인연을 인간이 알 수 있는가에 있다. 인간이 알 수 없다. 알아야 하는가? 아니다. 그럼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그렇다. 받아드릴 때, 필연으로 받는가, 우연으로 받는가? 내 좋을 대로 받으면 되는 것이다.
어차피 모르는 일을 꼭 필연으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그건 아니다.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말라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연기는 현상이고 공이 본질이다. 그렇게 본다면 필연이 현상이고 우연이 본질이다. 즉, 무상, 공, 무아의 불교의 대의에서본다면 필연 보다느 차라리 우연 쪽을 강조하느 것이 낫다. 어찌보면 우연이 필연이고 필연이 우연이다.
그런데, 필연은 우리가 모르는 저쪽에 있다. 우리가 모르는 저쪽을 '형이상학'이라고도 하고, 신이라고 도 한다. 물자체라고도 한다. 인식과 사변과 인지를 넘어서는 쪽이다. 그 필연을 우리는 모르기 때문에 우리가 볼 때는 우연이다.
우리가 모를 때는 우연인 그것을, 구태여 아는체 하고 “필연”이라고 채색할 필요가 있을까?
사이비 도사들이 많은데, 자기도 모르면서, “음, 다 인연법이지요“하고 깨달은 체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인연 내세우는 사람들, 좋아보이지 않는다. 모르면서 아는 체 하기 때문이다.
6. <부기>
처음에 니체 얘기를 했는데, 니체의 표현으로는 이렇다.
“가치전환이란 우연의 필연성을 뜻한다.
디오니소스는 도박하는 자이다.
진정한 도박사는 우연을 긍정의 대상으로 만든다.
그는 우연의 단편들을 긍정하고, 우연의 요소들을 긍정한다.
그리고 이러한 긍정으로부터 주사위를 던져서 나타나는
필연적인 수가 나타난다.”
“모든 사물 위에 우연이라는 하늘,
천진난만이라는 하늘,
의외라는 하늘,
자유분방이라는 하늘이 펼쳐져 있다. . .
의외,
이것을 나는 모든 사물들에게 되돌려 주었다.
그렇게 하여 모든 사물을 목적이라는 것의 예속상태에서
구제해 주었다.”
첫댓글 깨달음으로서의 자성이 없는 해탈은 무위, 공, 무아의 실현이고 이 해탈은 윤회에서 벗어난다.고 했다.
지금여기(현 존재상태)에서 자아는 변하지 않는 것이라는 관념으로 자성을 가합할 때 이러한 자성은 자아라 할수 없는 공이므로 모든 것은 조건따라 연기한다는 논법이며 이 공상을 이해하기 힘들게 하는 것이 전도몽상론이다. 전도 몽상을 서양철학으로 인식자(론)의 한계(딜레마)를 다섯가지 우상으로 예증하고 있다.
공은 없는 것(무:유가 아니면 어떤 것이라는 이분법적 단변)이 아니라 이 현상(실제)계의 개념자가 있는 것과 없는 것(개념의 생득적, 기호학적 딜레마)이라고 할 때 있는 것(가합)이라면 그것은 자성으로서의 자아일 것이고 이 자아는 자성이 있을 것이다. 있는 것은 항상 있다는 의미다. 항상 있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변하지 않는다면 연기는 없다.이다.
그러나 공은 실제(어떤 것)가 없다는 의미의 무가 아니다. 유무(변견)의 개념(인식)자로 그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라면 이것은 자아와 자성이다라고 자동적으로 설정된다. 자성이라면 다른 것(변함,변할 것 등)이라는 가설이나 추론은 배제된다. 그런데 실제로 변하지 않는 것은 없으므로 이 변하지 않음이라는 고정됨은 없으므로 자성이라 할 수 없으므로 무아라 이름하는 것이다. 무아는 실체를 부정하는 것이지 현상계나 존재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닌 속제 또는 언설로서의 무아를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실재, 실체, 존재론까지의 개념자의 속성은 변하는 것이므로 무아인 것이고 이를 자성이 없다고 설정한다면 당연히 조건따라 연기하는 현상만이 획득된다. 여기서 깨달음으로 가서 직접보고 경험한다면 불변의 진리가 될 것이다.
결론은 무아인데 (없는 것의)윤회는 모순이다라고 말한다면 공론을 전혀 이해하고 못하고 있는 것이고 인식의 구조틀에 대하여 다르게 생각해본 적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변화는 유위법이고, 변화없음은 무위법이다>
변화가 유위법이 아니라 존재하는 관념세계가 유위법으로 윤회하는 인식계(오온,12처,18계)이다.
변화없음은 무위법이 아니라. 윤회가 끊어진 해탈의 세계이다. 구태여 무위법이라 해도 되고 말 안해도 되는 세계이다. 그냥 유위법 반대세계(유무변견계)라고 하고 이름을 안붙이고 생각하면 좀더 도움이 될까? 생각해본다.
변화와 공을 강조한다? 누가? 탐구자나 선생들은 학문적으로 서술해야 하니까 불가피한 입장이겠다.
그런데 변화와 공 즉 일심은 실체의 속성 그 자체이므로 어떤 걸 더 강조한다고 말 할 수 없다. 오히려 이런 논조의 서술이 변화 또는 공을 더 이상하게 인지(대)하게 한다. 변화나 또는 공 이 둘 중 하나에 대하여 치우쳐서 알거나 듣는 것일 것이다. 공존이라는 서술도 불만이다. 항상 변견의 족쇄에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함정이 있기 때문이다. 변화와 공은 개념자의 속성이다. 어느 하나의 강조란 지적 언어유희일 뿐이다.
< 무상, 공, 무아의 불교의 대의에서본다면 필연 보다느 차라리 우연 쪽을 강조하느 것이 낫다. 어찌보면 우연이 필연이고 필연이 우연이다.>
무상,공,무아를 전제하지 않았다면 그냥 서술로 보고 지나갈수 있는 문제인데... 좀 불만입니다.
왜냐면 불교적 대의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라는 사구백비론은 불교가 배척하고 싯달타가 버리고 떠나 온 두 스승까지도 싸잡아서 애매모호한자들이라고 육사외도사상을 경책할 때 분명히 선을 그어버린 잘못된 사상이기 때문입니다. 이 글들을 읽을 때 정평불 칼럼진이 이러한 논조를 이어간다면 불교를 어떻게 이해하게 될지 심히 난감합니다.
수필이라면 아무 문제가 없지만 사이사이 불교의 교의까지 인용하면서 글을 써가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문제가 있다한들 나의 졸필이 바르다는 것도 아니고 필히 아는 것만큼은 서술했으니 또한 잘못 알고 있다면 부딪치면서 가르쳐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