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영사적공원水營史蹟公園(부산시 수영구 수영성로 43번)은 조선 시대 경상좌도慶尙左道 수군절도사영水軍節度使營(좌수영)이 있었던 곳이다. 1968년 공원으로 지정돼 수영공원으로 개장한 뒤 1995년부터 문화재 정비 사업에 따라 역사 교육의 장과 시민 휴식처, 그리고 관광지로 발돋움한다는 목적으로 새롭게 단장했다. 이때 명칭도 수영사적공원으로 바뀌었다. 공원 면적은 2만 7128㎡다.
도시화 과정에서 성은 허물어지고 현재 수영성 성지 관련 유적*만 남아 있다. 남쪽 입구에 수영성 남문**이 있는데, 남문에 들어서면 신령스러운 푸조나무***와 곰솔****을 만날 수 있다. 남문 아래쪽으로 수영팔도시장이 이어진다. 북쪽으로는 숲이 조성돼 있다. 숲의 남쪽 기슭에는 역대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수사) 등을 기리는 공덕비군, 안용복 장군 사당과 동상이 있는 수강사守疆祠, 송씨 할매당‧할배당*****, 장승이 자리한다. 숲의 북서쪽 기슭으로는 수영 민속예술관이 있어 지역 민속예술인의 공연과 전수 등을 위한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공원 서쪽에는 수영구 망미번영로 70번길이 남북으로 가로지른다. 그 서편에 25의용단******이 자리한 의용사가 있다.
수영사적공원은 수영 사람들의 혼이 담긴 역사와 교육의 장으로 부산의 해양 민속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대표적 문화유적 공원이다. 주변에 망미동 문화재 상가거리, APEC 나루공원, 올림픽공원, 벡스코 등이 있다.
*좌수영성지左水營城址
부산광역시 지정 기념물 제8호인 이 성지는 경상좌도 수군의 본영이 있던 곳에 설치된 군사적 방어시설이다. 좌수영이란 서울에서 보아 낙동강의 좌측을 담당하는 수군의 주진主鎭을 말한다. 경상우도 수군절도사영은 지금의 경남 통영에 있었고 전라좌도 수영은 전남 여수, 전라우도는 전남 해남에 있었다. 충청도는 충남 보령에, 경기도는 남양 화량만花梁灣에 있었다고 한다. 충청도와 경기도의 수영은 그 흔적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
수군절도사는 정3품으로 요즘으로 치면 해군 함대사령부 사령관 격이다. 육군인 병마절도사의 품계가 정2품이었으므로 수사가 한 단계가 아래였음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수사는 경상좌도는 박홍, 경상우도는 원균, 전라좌도는 이순신, 전라우도는 이억기였다.
경상좌수영은 경상좌도 수군의 본영으로 본래 감만이포戡蠻夷浦(현재 부산 남구 감만동)에 있었으나 조선 태종 때 울산 개운포開雲浦(울산 남구 성암동)로 옮겼고, 다시 임진왜란 직전에 동래 남촌(부산 수영구 수영동)으로 옮겼다고 하는데, 그 연대는 확실하지 않다. 1636년(인조 13)에 사천絲川(수영천)의 범람으로 선창의 수로가 매몰돼 다시 감만이포로 옮겼으나 이곳은 왜관과 가까워 군사 기밀이 누설될 수 있다 하여 1652년(효종 3)에 또다시 남촌으로 옮겨왔다. 그 후 1852년(고종 32) 일본의 강압으로 군대가 해산될 무렵 각 도의 수영이 해체됐으니 그때까지 좌수영은 243년간 존속했던 것이다.
좌수영에는 무관 정3품인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가 주재하고 관할하는 1개의 첨사영僉使營이 있었다. 좌수영에는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와 수군 등이 배속됐다. 예하에 7개의 진이 소속됐으며 모두 65척의 전선과 40척의 나룻배가 있었다. 좌수영은 낙동강의 동쪽에서 경주까지 경상도 동쪽 해안 방어의 총책을 맡았다.
수영성의 초기 축조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지금의 것은 1652년 다시 이곳으로 옮겨 온 후 축성된 것이 아닌가 한다. 그 때 동원된 인력의 상황은 알 수 없지만 현재 남아 있는 돌에 언양이나 양산 등의 지명이 새겨진 것으로 보아 부산 인근 지방의 주민들을 동원해 쌓은 듯하다. 성의 둘레는 약 2784m, 성벽의 높이는 4m였으며 3개소의 우물, 4대문과 4곳의 배수구, 옹성甕城‧치성雉城‧보루堡壘 등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일제강점기 관리 소홀로 대부분 폐허가 되고 지금은 성벽과 남문, 홍예虹霓, 배수구 등이 남아 있다.
**수영성 남문
지금은 수영사적공원 남쪽 입구에 보존돼 있지만, 수영성 남문은 원래 200m 떨어진 옛 수영국민학교 자리에서 옮겨온 것이다. 무지개 형태의 홍예문虹霓文으로, 1692년(숙종 18) 수군절도사 문희성이 성을 중수할 때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오랜 세월을 버틴 홍예석이 무너질 우려가 높아 지난 1993년 해체하고 보수했다. 홍예문은 흔히 돌로 만든 문 위에 누樓를 지어 누대 혹은 누문 형식으로 이뤄지는데 이곳은 돌문만으로 만들어졌다. <좌수영지左水營誌>에 의하면 ‘수영성에는 4개의 문이 있었다고 하는데, 동문은 영일문迎日門, 서문은 호소문虎嘯門, 남문은 주작문朱雀門, 북문은 공진문拱辰門이라 했다.’ 크기로는 남문이 가장 컸고 동남북 세 문에는 옹성도 설치돼 있었다 한다.
이 남문에는 재미있는 조각물로 박견拍犬이라는 조선개가 세워져 있다. 문 전면 좌우 우주석隅柱石의 사각 돌기둥에 화강암으로 조각된 박견 한 쌍이 그것이다. 얼굴은 정면으로 향하지 않고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려 서로 마주보고 있다.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조각이다. 박견 조각상을 남문에 설치해 놓은 것은 다분히 왜국을 염두에 준 조치로 보인다. 박견은 조선 토종개로 의협심이 강하고 용기가 있어 우리 민족의 기상을 상징한다. 남문에 배치한 것은 바로 남쪽이 바다로 통해 있었기 때문이다. 왜구의 동태를 감시하던 좌수영성의 성격을 한 눈에 보여준다. 수영성 남문은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7호다.
***부산 좌수영성지 푸조나무
느릅나무과에 속하는 이 푸조나무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될 1982년 당시 수령이 500년 정도로 추정됐다. 높이 18m, 가슴 높이의 줄기 둘레가 8.5m, 가지퍼짐은 동서로 23m로 마치 두 그루의 나무가 자라는 모습을 띠고 있다. 이 나무는 팽나무와 비슷해 곳에 따라서는 개팽나무 또는 검팽나무라 불리기도 한다.
나무의 유래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으나 마을 사람들은 나무에 신성한 혼이 깃들어 있다고 믿었고 이 나무를 마을을 보호해 주는 신으로 여기고 있다. 오래 세월 조상들의 관심과 보살핌을 받아왔으며 민속적, 생물학적 자료로서 가치도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 보호하고 있다.
****부산 좌수영성지 곰솔
이 곰솔은 높이 23.6m, 둘레 4.5m로 소나뭇과에 해당하며,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1982년 당시 나이가 400년 정도로 추정됐다. 소나무의 겨울눈은 대개 붉은 색을 띠는데 반해 곰솔은 회백색인 것이 특징이다. 이와 같은 특성을 지닌 곰솔은 바닷가를 따라 자라기 때문에 ‘해송’으로도 부른다. 줄기 껍질의 색이 소나무보다 검다고 해서 ‘흑송’으로 부르기도 한다. 좌수영이 있던 이곳 수영구의 전설에 따르면 당시 군사들이 이 나무를 군영을 보호해 주는 신성한 존재로 여기고 나무에게 자신의 무사함을 기원했다고 전해진다.
*****수영고당
지금의 사각형 부지는 2017년 9월까지 수영고당姑堂이 있던 부지였다. 수영고당의 창건은 400여 년 전(임진왜란 이전)으로 추정된다. 일제강점기 왜병에게 항거한 송씨 할매의 정신을 기리는 ‘송씨 할매당’이라는 산신당山神堂과 경상좌수영이라는 병영의 군기軍旗를 모신 독신묘纛神廟가 함께 하나의 건축물을 구성하고 있었는데, 건축물의 위치가 관련 문헌상 일치하지 않고 건축물의 건축 양식이 한국 전통 가옥의 양식에서 벗어난다는 문화재전문위원들의 의견에 따라 현재의 위치에서 25의용사 뒤 수영동 363번지에 신축, 이전했다. 이때, 1922년 건립된 조씨 할배당도 옮겨 산신당으로서 성격이 흡사한 송씨 할매당과 함께 모시게 했다. 종래의 독신묘는 독립해 또 다른 신당에 모셨다. 2018년 2월, 독립된 두 개의 사당이 준공됐다.
수영고당 기존 부지의 오른쪽에는 공덕비가 있다. 오래된 수영고당을 1981년 증수增修한 애향인 김기배 씨의 공덕과 2003년 개수改修한 그의 아들 김종수 씨의 공덕을 기리는 비석이다. 그 기림의 의미를 좇아 지금의 상태가 계속 유지되고 있다.
******25의용단二十五義勇壇
임진왜란 당시 수영성에서 왜군에게 저항하다 죽은 성민의 의용을 기리는 곳이다. 임진왜란 발발 뒤 경상좌수사가 수영성을 버리고 달아나지 이곳에 주둔한 일본군은 7년 동안이나 약탈과 살육을 저질렀다. 이때 수영성의 수군과 성민 25명은 성문 밖에 모여 ‘싸우면 이겨서 살 것이요, 싸우지 않으면 망하리로다. 나라의 존망이 경각에 있거늘 어찌 삶을 구하여 산야로 달아날 것인가. 단 한 번의 죽음으로 나라에 보답하리라’ 하고 피로써 맹세한 후 왜군을 상대로 유격전을 전개하다가 장렬하게 죽었다고 한다. 지금 비문에 새겨진 이름에서 전사한 이들이 일반인들이 중심이었음을 알 수 있다. 부산시 지정 기념물 제12호.
25인의 의용이 드러난 것은 1609년(광해군 원년) 동래부사 이안눌이 지방민의 청원에 따라 25인의 사적을 모아 <정방록旌榜錄>에 싣고 이들의 집 문에 의용義勇이라는 두 글자를 써 붙인 데서 비롯됐다. 그 후 순조 연간(1800~1834)에 동래부사 오한원은 이들의 후손들에게 부역의 의무를 면제하고 글을 지어 포상했다. 1853년(철종 4)에는 경상좌수사 장인식이 수영공원에 비를 세워 의용단이라 하고 매년 음력 3월과 9월 정일丁日 두 차례에 걸쳐 제향을 봉행했다. 그때 제주는 경상좌수사가 맡았다. 1894년 군제 개혁으로 경상좌수영이 폐지되자 수영면의 면장이 제사를 주관했다. 일제강점기 일본 면장의 부임 뒤로는 수영기로회 水營耆老會에서 제사를 주관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새천년 들어 25의사의 충절을 드높이기 위한 정화 사업이 전개됐다. 25의사의 위패를 새로이 제작하고 이를 모시는 사당인 의용사義勇祠와 내삼문(永懷門), 외삼문(存誠門), 관리사(典祠堂)를 건립해 의사 사후 400여 년 만에 시민 역사의 도장으로 거듭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