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마치 오랜만에 연락이 닿은 친구에게 인사를 건네는 기분이야. 먼저 심신의 안부부터 물어야겠지? 몸은 어떤지, 아직 거동에 불편은 없는지, 눈은 괜찮은지, 정신은 여전히 말짱한지...
나는 지금 눈 내린 창밖을 바라보며 이 글을 쓰고 있어. 오늘따라 바람이 거세게 불어 현관 입구에 매단 윈드 차임이 요란하게 울리는군. 11월 중순치고는 여느 해보다 추운 날씨야. 'Grey November'라 부르기 딱 어울리는 날이라고 보면 될 것 같아. TV를 틀어 놨어. 백그라운드 음악처럼 집안에 훈기를 주니 좋아. 분위기 잡기에 안성맞춤인 날이야.
난 지금 혼자야. 남편은 내 곁에 없어. 며칠 전 한국에 갔거든. 한 달 반 동안 허리 통증에 시달리다 비로소 거동이 가능해져 제대로 된 치료를 받기 위해 떠났지. 알다시피 여기 의료 시스템은 느려 터졌잖아. 모국의 의료 수준이 뛰어나 선택의 폭이 넓어진 게 여간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어.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병처럼 자존감을 상실케 하는 병은 아마도 없을 거야. 2032년 11월, 그쪽 시간대에서 그의 건강은 어떠한지 궁금하군. 계단 많은 이곳 타운하우스에서 콘도로 이사는 했을 테지? 계단은 움직이기 힘든 그에게 지옥 그 자체였으니까.
사람은 큰일을 겪으면 몸과 마음에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는 것 같아. 남편은 말할 것도 없고, 나도 체중이 많이 빠졌어. 매번 다이어트를 한답시고 그리 계획을 세워도 안 되던 것이 저절로 이루어진 셈이야. 참, 이런 와중에 한국 식품점 경품에도 당첨되었어. 힘든 가운데서도 이따금 행운의 여신이 찾아오기도 하나 봐. 아무튼 남편이 몇 주 전 극심한 통증으로 앰뷸런스를 타고 응급실에 실려 갈 때는 눈앞이 캄캄하더군. 밤늦게 응급실 진료를 마치고 돌아오는 시각에도 오늘처럼 세찬 바람이 불고 추웠지. 환자를 생각해서 할 수 없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선배에게 전화를 했어.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는 걸 불편하게 여기는 내게, 그건 큰 용기가 아닐 수 없었지. 선배가 기꺼이 우리를 집에 데려다주고 저녁 요기까지 챙겨 주었을 때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어. 그건 고마움의 눈물이기도 했지만 쓸데없는 것에 자존심을 부렸던 스스로에 대한 부끄러움의 눈물이기도 했어. 그래서 이번에 남편이 공항 갈 적엔 지인에게 도와달라는 부탁을 용기 내어 할 수 있었던 것 같아. 지인은 자신에게 도와 달라고 해줘서 오히려 고맙다고 말하더군. 감동했지만 표현할 말을 찾지 못했어.
지난가을 우리 부부가 계획하다 무산된 로마 여행은 어떻게 되었지? 트레비 분수, 콜로세움 경기장, 바티칸 시티는 꼭 가 보고 싶었는데... 건강이 허락했다면 분명 실천에 옮겼으리라 믿어. 그다음 여행지가 어디였더라. 그래. 스페인이구나.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어 보고 싶다고 했었지. 물론 남편의 체력이 허락하지 않았겠지만, 입구 정도는 서성이다 왔을 거라고 추측할래. 이제는 튀르키예로 바뀐 터키의 이스탄불도 여행했으려나? 여행은 익숙함에서 벗어나 낯선 곳에서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새로움과 설렘을 안겨 주지. 은퇴 후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을 거라 여겼는데 예상외의 걸림돌이 꽤 많았던 것 같아. 설마 그새 내가 모르는 여행을 계획하고 다녀온 건 아닐 테지? 그랬다면 그건 경이로운 일이야. 현재로서는 여행에 대한 꿈을 꾼다는 게 상상이 안 되지만, 부디 상황이 나아져 가능한 많은 도시와 자연을 볼 수 있었기를 바라마지 않아.
책은 원 없이 읽은 게지? 추정컨대 한 달에 최소 4권 이상 읽었다면 1년이면 50여 권, 10년이면 500여 권은 족히 읽었겠군. 그 많은 독서를 통해 어떤 깨달음을 얻었으려나? 지금과는 다른, 아니 더 만족할 만한 모습을 마주하고 있을는지... 글쓰기는 꾸준히 하고 있겠지? '부부 글쓰기'를 책명으로 수필집 한 권 정도는 발간한다고 하지 않았나? 매번 진부하다고 한탄했던 문장력은 개선되었는지 모르겠군. 하루도 빠짐없이 읽고 몇 줄이라도 쓰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면 기대치를 높여도 괜찮을까? 하기야 많이 읽고 많이 쓴다고 해도 제자리걸음일지도 몰라. 성실함만 가지고 목적을 달성하는 건 이런 분야에선 통하지 않는 이야기일 수 있으니까. 재능을 타고나지 못했음에도 이 길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건, 순전히 내가 좋아하는 일이기 때문인 거 알잖아. 그래서 지금의 나와는 분명 달라졌을 10년 후 나의 모습이 정말로 궁금해.
11월에는 우울한 감정에 휩싸이고 말도 안 되는 상상을 마구 해도 충분히 납득해줘야 한다고 생각해. 나는 이때가 1년 중 가장 힘든 시기라고 예전부터 말했잖아. 이해를 구해도 되겠지? 계절을 탄다는 건 생생하게 살아내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일면이기도 하니까 말이야. 과거를 회상하며 추억에 젖어 드는 일은 좀 자제하고 싶어. 그야말로 앞으로 나아가는 일에만 집중해도 시간은 부족해. 올해도 눈 깜짝할 새 지나가고 앞으로 다가올 새해도 금세 지나가 버릴 거야. 1년은 정말 짧아. 10년을 내다보고 계획을 세우지 않으면 번개처럼 지나간 세월을 붙잡고 푸념만 늘어놓을지도 몰라. 넉넉하게 10년을 잡고 내가 가야 할 방향을 정하기로 마음먹으면 훨씬 의욕이 생길 거라 확신해. 앞으로 10년 동안 어떤 변신을 할 수 있을지 이미 그곳에서 다 알고 바라보는 네가 새삼 부러워.
그럼, 보다 인간적이고 따뜻한 사람이 미래의 내 모습이길 기대하면서... 이만 줄일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