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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으로 간다, 꿈조각 찾으러
이주영(대구)
1. 열린아동문학과의 만남
2015년 대봉도서관에서 김상삼 선생님께 동화를 배울 때였다. 학생 6명이 같이 스터디를 하게 되었고 그때 누군가 열린아동문학 잡지를 추천했다. 우리는 잡지를 읽고 토론을 하기로 했으나, 문학잡지는 일반서점에서 구할 수 없었다. 다음 카페에 가입해서 어렵게 정기구독을 신청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지금까지 카페에 글을 올린 적이 없는데 4년 만에 여행 후기를 올리게 될 줄은 몰랐다.
그때 우리가 꿈꾸던 일은 동화작가로 등단하는 것이었고, 문학 잡지에 언젠가 내 글이 실리는 것이고, 그 후에는 고성 동시동화나무 숲 어딘가에 자신의 나무를 갖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동화 같은 꿈을 꾸었다.
그 후 우리는 몇 년 뒤에 진짜로 작가가 되었고, 새로운 글을 썼을 때 열린아동문학 잡지에 투고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곳은 내 첫 번째 꿈을 완성해주신 배익천 선생님이 계신 곳이기도 했다. 또 잡지의 이 문구가 내 마음을 끌어당겼다.
ㅡ이름보다 작품을 우선하여 싣는 잡지. 좋은 작품을 써두고도 발표할 지면이 없을 때는 언제든지 보내주십시오,
‘그래, 보내보자. 떨어지면 할 수 없고.’
그렇게 글을 보냈고 선생님께 연락이 왔다.
나는 <즐거운 소연이네>가 2019년 가을호에 실림으로써 두 번째 꿈조각을 완성했다. SNS기자단 활동 중 취재를 하다가 만난 소연이(가명)라는 아이 이야기를 동화로 쓴 것이다. 아파트 화단에 아이들 이름표가 붙어있는 것을 보고 취재를 해도 되겠냐고 담당 주무관에게 물었다. 그랬더니 그 이름 주인공이 직접 화단에 물을 줄 수 있다면 좋은 기사가 되겠다며 취재를 해보라 했다. 그 주인공을 어떻게 찾나? 관리실에 가면 전화번호야 알겠지만 그 분들이 사진 찍는 것을 허락해 주실까? 그 이야기를 동네 친구에게 했더니, 자기가 아는 사람이 화분심기 행사에 참여했다고 했다. 다행히 그 아이는 연예인이 꿈이어서 사진 찍는 것을 좋아했다. 나는 그 아이를 만나 사진찍기 미션을 성공했고, 전화로 추가 인터뷰를 했다.
“꽃을 심을 때나 꽃을 가꾸며 어떤 생각이 들었어?”
나는 왜 그 아이가 자기 화단이 아닌 남의 화단에서 사진을 찍자고 했는지, 여러 가지 사연을 듣고 알게 되었다. 정말 순수한 아이였다. 아파서 한 달 동안 물을 주지 못해 화단의 꽃이 시든 이야기를 들었다. 머릿속으로 동화 같은 한 장면이 둥실 떠올랐다. 아이들이 서로 경쟁하듯 꽃을 심는 스토리를 집어넣었다. 화분가꾸기 전쟁 같은 것.
그날 하루만에 동화를 써서 다음 날 열린아동문학으로 보낼 때 느낌이 좋았다. 몇 달을 주무르는 동화도 있고, 이렇게 순간적으로 완성되는 이야기도 있다. 어떤 글이 더 나은지는 알 수 없다.
글이 실렸으니 이제 내게도 고성숲으로의 초대장이 올까? 잡지를 통해서 필자들을 고성으로 혹은 부산 방파제로 초대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진짜로 초대장이 도착했다. 여름, 가을호 필자를 고성 숲으로 초청한다는 내용이었고, 메일에 상세하게 동동숲으로 오는 길을 안내해 주었다.
ㅡ승용차로 오실 때는 네비게이션이 뭐라고 안내하든 고성시외버스터미널까지 오셔서 아래 주소를 입력하세요. 서울에서 고성까지는 4시간이며, 버스비는 25,000원입니다.
세세하고도 친절한 안내였다. 사실 인터넷 검색만 하면 고성으로 가는 방법은 얼마든지 알 수 있다. 그렇지만 갈까말까 망설여지는 사람에게는 “어서오십시오.”하고 환대하는 느낌이었다.
나는 당연히 고성으로 갈 것이다. 그런데 차를 가져가자니 고속도로 운전이 걱정이고, 버스를 타자니 시외버스정류장에서 동동숲까지 택시비가 만만치 않았다. 더구나 외진 길을 한참 들어가야 한다니 걱정이 되었다. 그렇게 망설이며 전화를 걸었더니 배익천 선생님은 버스정류장에 오면 누구든 데리러 나갈 테니 걱정하지 말고 오라고 하셨다. 마음이 편해졌다. 남편에게 데려다 달라 해야 하나 온갖 고민을 하던 참이었다. 물론 남편은 꼭 가야하느냐고 묻고 있었다.
“응 꼭 가야돼. 그건 내 꿈이야.”
2. 고성가는 길
서부정류장에서 오전 10시 반에 출발하는 버스를 스마트폰 앱으로 예약했다. 두 시간 정도 걸린다고 했다. 오랜만에 가본 서부정류장. 그곳에 가니 옛추억들이 생각났다. 그곳은 30년 전 영남대학교로 가는 75번 버스의 종점이기도 했다. 학교가 워낙 멀어서 경산 캠퍼스에서 늦게까지 술을 먹고 놀 수도 없고, 밤 9시 전에는 버스를 타야 10시 반에 서부정류장에 도착했다. 거기서 다시 성당동 집으로 가는 버스를 갈아타야 했다. 그때는 겁이 얼마나 많았던지 늦은 밤에 돌아다니면 다 인신매매를 당하는 줄 알고 도로변에 세워져 있는 봉고차만 봐도 두려워했다. 딸이 셋인 엄마는 항상 우리에게 온갖 뉴스 속 공포스런 사건들을 이야기해 주셨고, 나도 버스가 끊기기 전엔 집에 돌아가려고 애썼다. 그 시간까지 같이 놀던 대학 써클 남학생들이 여학생들을 데려다주기도 했다. 그때는 그런 의리가 있었다. 네 명이서 오면 꼭 한 남학생이 날 데려다 주었고 덩치 큰 회장은 더 먼 여자친구를 데려다주었다. 그러고 나면 돌아가는 버스가 끊겨서 두 남학생은 걸어서 집까지 가곤 했다.
이십여 년 만에 만난 대학동창에게 그때 이야기를 물었다.
“니 혹시 내 좋아했나?”
“아니거든. 내가 좋아하는 여학생은 1번 버스를 타고 갔고, 난 좋아하지도 않던 널 데려다 주느라고 힘들었다 아이가.”
반전이었다. 눈꼽만큼은 좋아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라고 강하게 부정했다.
그때 남자 둘은 집으로 걸어가면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이건 미친 짓이야.”
옛 추억을 상기하는 동안 고성 가는 버스가 도착했다. 버스비는 할인해서 14,600원. 시간은 1시간 40분 정도 걸렸다. 태풍이 남쪽에서 불어온다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날씨는 청명한 가을날씨였다. 버스 맨 앞 자리에 앉아 친구들과 카톡을 주고받으며 고성에 도착했다.
고성시외버스정류장 옆은 시골 논이었다. 선생님이 오시는 동안 점심을 먹을까? 아니 안 먹어도 배가 부른 느낌이었다. 배익천 선생님께 전화를 걸어 점심 드시고 나오시라고 했다. 그런데 바로 오겠다고 하신다. 창모자에 작업복 차림의 선생님을 만났다. 작년 서울에서 아동문학평론 신인상 시상식에서 뵙고 처음이었다. 늘 책으로만 보던 분이다. 부산 쪽 신춘문예에 떨어지면서 선생님 성함을 처음 보았다. 그런데 나는 운이 좋게도 선생님께 당선되었다. 심사평에선 칭찬보다는 걱정을 더 많이 하셨던 것 같다. 뒷심을 발휘해서 잘 성장해주기를 부탁한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등단하는 것만으로도 기뻐서 누가 무슨 평을 하든 기쁘기만 했다. 그리고 늘 감사하는 마음을 품고 살기로 했다. 나를 이끌어주신 모든 선생님들, 예심을 본 평론가들, 전화를 걸어주신 김용희 선생님까지도 나는 늘 은인으로 여기며 살겠노라 다짐했다. 머리가 하얀 배익천 선생님을 서울에서 처음 만났을 때는 말 몇 마디 못 물어보았다. 내겐 참 어려운 분이셨다.
작업복 차림을 보니 웬지 그때와 다르게 편안하게 느껴졌다. 잠시 뒤 도착하는 이영원 선생님을 기다리자고 하셨다. 이영원 선생님은 열린아동문학 잡지의 표지그림을 그리는 분이시다. 그 기다리는 이십여 분 동안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등단하는데 이십 년이 넘게 걸렸다는 것, 문학관과 기자단 활동을 한다는 것 등 내 이야기를 많이 했던 것 같다. 선생님은 잘 들어주셨다. 그리고 “이번 여행 후기를 쓰면 되겠네.” 라고 지나가듯 말씀하셨다. 나는 워낙 블로그나 페이스북에 글을 많이 올리는 스마트폰 중독자이다. 그래서 오늘 일기도 물론 동네방네 올릴 것이지만, 동동숲이나 선생님에 대해 기록하고 싶었다. 그것이 고마움을 갚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모두가 빛나고 싶어한다. 그러나 누군가를 기록하는 사람도 있어야 한다. 대구문학관에 있으면서 알았다. 이중섭을 기록한 사람은 구상 시인이었고, 상화와 고월을 기록한 사람은 백기만 시인이었다. 나는 내가 만나는 모든 문학가들을 기록해야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대구아동문학회에서 만나는 원로 선생님들도 그렇고, 최근엔 여러 문학행사를 기록해서 기사로 보내는 일도 하고 있다. 그런 일들이 참 즐겁고 보람된다.
이영원 선생님이 도착했다. 나와 이름 두 글자가 같다고 배익천 선생님이 이야기해주셔서 금방 이름을 외웠다. 빵모자를 쓰고 오셔서 뒷자리에 앉으셨다. 동동숲으로 다가갈수록 길이 점점 좁아들었다. 인터넷으로 동동숲에 대해 많이도 찾아보았다. 그 상상의 숲으로 나도 들어간다. 꿈의 한 장면처럼.
3. 동동숲의 첫째날
숲 속에 이층으로 된 도서관이 하나 있었다. 그 옆으로는 사진으로 보던 산책길이 나 있었다. 도서관 일층엔 테이블을 쫙 깔아놓고 준비가 거의 다 된 듯했다. 부엌에는 우리를 기다려 점심을 차리느라고 분주한 아주머니 두 분이 계셨다. 송정욱 관장님과 홍종관 선생님, 또 젊은 여자 선생님들이 오셨고 같이 점심을 먹었다. 나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모두 처음 보는 분들이시다. 무슨 이야기를 해야 될지 몰라서 명함이라도 드리고 통성명을 할까 하다가 뒤늦게 식사하시는 분들이 계셔서 그냥 산책을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비장의 핸드폰을 챙기고 나섰다. 사진을 찍으면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다. 예전엔 외로워서 책을 늘 끼고 다녔던 것처럼 요즘은 스마트폰을 한시도 놓치지 않는다. 숲을 거닐고 주변을 탐색하며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건물 바로 뒤에서 최춘해 시인의 나무를 만났고, 하청호, 정휘창 선생님처럼 대구작가들의 나무를 만날 때도 사진을 찍었다.
뒷길은 막혀서 다시 앞길로 걸어올라가 보았다. 처음 가보는 길이다. 숲으로 오르니 글샘 오솔길이 있었다. 샘을 파다가 나온 곳이라고 하고 소중애 선생님이 그 명당을 점령하셨다. 아마 이곳은 동동숲의 전설이 될 수 있겠다.
나는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글샘 전설의 문구처럼 왼손으로 샘물을 마시고 오른손으로 이마를 치며 앗쭈구리를 조용히 외쳤다. 재밌었다. 오기 전에 소중애 작가님 책을 미리 읽고 왔는데 소중애 선생님이 오시지 않아서 조금 아쉬웠다.
산길이 닦여 있는 곳으로 무작정 걸어가보았다. 아무도 없는 산속이지만 그리 무섭진 않았다. 여러 꽃들도 만났고 이쁘게 사진으로 담았다. 수국, 백일홍, 송엽국, 부들레아, 구절초, 국화, 미국미역취까지 빨강, 노랑, 파랑꽃들을 만났다. 길은 숲 속으로 계속 이어졌고 중간중간 작가들의 이름이 새겨진 바위들을 만나며 산책하는 기분이 좋았다. 저 이름에 새겨진 작가들은 얼마나 행복할까? 중간중간 숲에는 나무를 가로로 눕혀놓은 의자도 만날 수 있었다. 자연적으로 쉼터가 되도록 평평한 바위도 가져다 놓았다.
이 숲을 가꾸고 계신 홍종관, 배익천 선생님의 우정은 참 대단하신 것 같다. 숲을 사서 도서관을 짓고 작가들 이름을 단 나무와 바위로 산책길을 만드는 것이 상상으로만 가능할 것 같은데 두 분은 직접 하고 계시니 말이다. 홍종관 선생님은 아동문학가가 아니라고 들었는데 부산에서 방파제 횟집을 운영하고 계신단다. 요즘은 장사가 잘 안된다고 걱정하셨다. 그럼에도 아동문학잡지를 펴내고, 숲을 가꾸고, 작가들을 대접하는 그 귀한 제정적인 부분을 다 감당하신다. 직접 만났을 때도 홍종관 선생님은 순한 인상으로 일일이 잡다한 일들을 도와주셨고 마지막에 떠날 때까지 집청소를 하시며 일을 하시는 모습을 보았다. 모르는 분들이 보면 집안일을 하는 집사로 아셨을 듯하다. 사모님인 박미숙 선생님이 늘 이런 행사를 주관하신다는데 이번에는 아파서 못 오셨다. 필자들의 글귀를 서화로 써서 선물로 보내주시는 분이기도 하다. 가을호 40여 명 필자들의 글귀를 다 쓰지 못하셨다고 한다. 처음엔 나도 그 선물이 궁금해 기다렸으나 이번 행사에 오지 못할 정도라면 이제 글씨 쓰는 일은 안 하셨음 좋겠다. 처음에 글씨를 쓰게 된 일도 원고료를 주지 못해 직접 지은 농산물과 서화를 보냈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이제 지원금을 받아 원고료를 줄 수 있게 되었는데도 전통을 이어가시는 것이다. 나는 첫 번째 원고료를 받았고 두 번째 특별한 원고료를 받으러 이곳 고성에 왔다. 이런 잡지가 어디에 있을까? 작가를 귀하게 대해주는 잡지와 선생님들에게 감동받아 모두 열린아동문학의 팬이 돼서 돌아갈 것 같다.
산책에서 돌아오니 가방을 숙소에 올려두라고 하신다. 도서관 이층에 마련된 숙소는 커다란 거실을 중심으로 작은 방이 여러 개 있었다. 작은 방에는 여자 분들이 서너 명씩 자고, 거실에는 남자 분들이 주무실 것이다. 신주선 작가님이 명찰 만드는 것을 도와달라고 해서 이름표를 잘랐다. 부산아동문학회 회원들이 배익천 선생님을 도와 일을 하고 계셨다. 작가들이 속속 도착했고 그나마 페이스북에서 안면을 익힌 윤미경 작가와 이시향 작가님이 보여 반가웠다. 윤미경 작가님은 오시자마자 익숙한 듯 종이와 붓을 꺼내 글씨 쓰는 일을 도왔다. 이번에 상을 받거나 책을 낸 작가들 이름을 적었다. 야외까페에도 이둘자, 김옥애님 외 여러 작가들이 모여 있어 가보았다. 서울에서 오신 팀들도 있었고 차를 준비해주신 황미숙 작가님도 계셨다. 이름표를 달고 있어 이제 한분씩 이름을 외우려고 했다. 그때 우주복 같은 작업복을 입고 연장을 든 이영원 선생님이 등장했다.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우리는 모두 뒤를 돌아보았고 그 장면을 이시향 시인이 찍어주셨다. 지구를 구하러 온 어벤저스 영웅 같은 포즈다. 아마도 이 숲을 구하려고 오셨나보다. 숲의 바위에 글귀를 쓰고 그림을 그리고 꾸미는 일들을 해주신다.
이제 5시가 되어 본격적인 행사를 시작했다. 테이블 옆으로 뷔페가 차려졌다. 고기, 야채, 과일, 반찬들과 함께 재첩국이 준비되었다. 모두 접시에 담아와 먹으면서 시작했다. 그때 배익천 선생님이 뒤늦게 도착한 작가님들을 모시고 왔다. 오는 시간이 제각각이라 몇 번이나 마중을 나가셨는지 모른다.
이제 30명이 넘는 작가가 오셨다. 이 계절에 심은 동시동화나무의 주인공이 가장 행복한 작가일 것이다. 네 분 중 조경숙, 양인숙 작가님이 참석하셨다. 돌아가며 한분한분 인사를 시작했다. 들어도 곧 잊어버릴 것이지만 어떤 작가분들이 오셨나 귀를 기울였다. 서울, 순천, 광주, 각지에서 오셨지만 대구에서도 여러 분이 오셨다. 나는 혼자서 버스를 타고 왔는데 대구라면 모르는 분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 분들은 처음 보았다. 성주희, 이재영, 박채현 작가였는데 나이도 젊을 뿐더러 신춘문예 출신에 문학상까지 받은 작가들이 이렇게 많았다니 놀랐다. 조금 늦게 심후섭 작가님이 부부동반으로 도착하셨다. 대구아동문학회 회장님이시고 내가 회계간사를 맞고 있으니 너무 반가웠다. 못 오실 줄 알았는데 내일도 주례를 서야한다며 밤에 돌아가신다고 하셨다. 사모님은 이번에 처음 뵈었는데 키도 크시고 엄청 미인이셨다.
자기 소개에서 내 순서가 돌아왔을 때 배익천 선생님은 “이번 후기는 이주영 작가가 쓰시겠다.”고 소개하셨다. 이번에 가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열린아동문학 잡지는 한번 글을 발표하면 3년이 지나야 다시 실어주는 전통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러니 투고해도 이제 글을 실을 수도 없고 고성숲에도 올 수 없다는 슬픈 이야기였다. 그런데 만약 후기를 쓴다면 다음 번에도 초대를 받게 되는 행운이 따르는 것이다. 그 사실을 알고 너무 기뻤다. 다음에도 고성에 올 수 있구나 하고. 아마도 버스정류장에서 동동숲까지 오는 동안 내가 블로그를 운영한다거나 시민기자단 활동을 한다는 이야기를 했던 게 기억에 남으셨나보다. 여러 선생님들 앞에서 영광스럽게도 박수를 받으며 앞으로 나갔다. 무슨 이야기를 해야될지 몰라 생물학을 전공했느니 여성학을 공부했느니 소설을 공부했느니 하는 이야기를 막 내뱉다가 결국은 작가가 돼서 너무 행복하다는 이야기로 끝을 맺었다. 작가가 돼서 이렇게 많은 작가들과 함께 하는 이 순간을 기다렸던 것인지도 모른다. 무슨 다른 꿈이 있겠는가? 책을 내고 유명작가가 되고 또다른 꿈을 꾸게 될 것이라고 하지만 지금은 이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다.
무대 앞 전지에 씌어진 이름들은 올 한 해 상을 받거나 책을 출판한 분들이다. 그 이름들을 보며, 이런 대단한 분들과 같은 자리에 앉아있구나 싶어 더욱 뿌듯해졌다. 이지현, 이규희, 문정옥, 이시향, 김완수, 김옥애, 윤미경, 조경숙, 성주희, 박선미, 정혜진, 정지윤. 이 열 사람은 나와서 촛불을 불고 하트모양의 자두를 하나씩 받아 들고갔다. 특히 이번에 나무와 바위를 선물받게 된 이 계절의 작가로 선정된 두 분의 인사말도 들었다. 조경숙 작가님은 컷트머리에 모자를 쓰고 오셨는데 마른 몸이라 보이시한 여학생 같았다. 양인숙 선생님은 단발머리를 뒤로 묶으셨고 잠바를 입고 오셨다. 집에 가면 저분들 글부터 찾아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방 배정이 있었는데 메모지에 같은 방을 쓸 작가들 이름을 박선미 선생님이 적고 계셨다. 다가가니 어느 분과 같이 방을 쓰고 싶냐고 물으셨다. 나는 좀전에 본 조경숙 작가님과 한 방을 쓰고 싶다고 했다. 한 마디라도 듣고 싶어서였다. 그러면 자정향실로 가면 된다고 했다. 거기가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도서관과 떨어진 별채인 모양이었다. 아는 사람이 없는데 방으로 갈 때 나를 두고 가면 어떡하지? 걱정했는데 우연히 조경숙 작가님이 옆에 앉았다. 뒤풀이에는 술을 맘껏 먹을 수 있다고 했다. 20리터짜리 물통에 술을 담아오기도 했고, 유리병 모양에 술을 담아 이영원 선생님이 어깨에 걸친 채 여기저기 따라주는 모습도 꽤나 재미있었다. 사람이 많다보니 앞자리와 옆자리에 앉은 사람과 이야기를 많이 했다. 조경숙 작가와 뭔가 공통점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불의를 보면 못 참는 순간을 이야기하다 너무 웃겨서 빵 터졌다. 이번엔 내 차례였다.
동네에 영어회화를 배우러 갔는데 나이든 선생님께서 3,40분을 한국말로 자신의 소개를 하셨다. 자랑은 멈추지 않았고 심지어 불법적인 경험담까지 나왔다. 모두들 이제 좀 멈추어줬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볼펜을 굴리며 먼 데를 바라보고 있었다. 누군가는 이 상황을 멈춰야 한다는 간절한 눈빛들을 보았다. 나도 여기 왜왔나 후회가 밀려오고 있었다. 그때 내가 희생하자는 마음으로 손을 번쩍 들었다.
“선생님, 영어수업은 언제 시작하나요?”
그 말이 끝난 순간 졸거나 멍하니 있던 수강생들이 뭔가 큰 충격을 받은 듯 눈을 번쩍 떴고, 기뻐하리라는 예상과는 다르게 모두가 나를 싸하게 쳐다보았다. 수강생 대표인 듯한 분이 와서 내게 선생님께 사과하라고 했다.
“그래서 어떻게 했어?”
조경숙 작가가 궁금해서 물었다. 내가 멋지게 자리를 박차고 나갔을 거라고 기대 하는 것 같았다.
“그냥 사과했지요. 거기다가 수업이 끝날 때까지 얼마나 열심히 들었는데요.”
나는 의협심이 있었지만, 때론 비굴하기도 했다. 그것이 사회를 살아가는 한 방법이 아닐까 요즘 깨달았다. 조경숙 작가도 내가 재밌다고 웃었다.
이제 방으로 가고 싶다고 해서 나도 따라 가기로 했다. 재미난 이야기를 계속 이어가고 싶기도 했고,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이제 겨우 친해진 조경숙 작가를 따라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술은 냉장고에 있으니 맘껏 마시라고 했다. 그러니 우리는 부엌으로 가서 맥주 한 병씩을 들고 오두막집으로 갔다. 그곳은 도서관에서 10미터 정도 떨어져 있었다. 하지만 밤이라 깜깜했고 완전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이렇게 깜깜한 밤을 본 적이 별로 없다. 아주 아담하고 이쁜 찻집 같았다. 다음 날 배익천 선생님의 설명에 의하면 아픈 노인이 들어와 3년 만에 병을 고치고 나간 집이다. 이제 방에 온돌을 넣고 작가들이 와서 쉴 수 있는 쉼터로 만들었다. 소중애 선생님이 일주일씩 머물며 글을 쓰기도 한 집이다. 이런 곳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된 나는 참 운이 좋은 것 같다.
우리 방에는 총 6명이 배정되었다. 문정옥, 이지현, 이규희, 김미혜 선생님이 뒤늦게 방으로 오셨다. 나머지 분들은 이층 숙소로 올라가 다들 삼삼오오 밤늦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했다. 남자분들은 일층에서 여전히 새벽까지 술을 드셨다. 숙소로 들어온 분들은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화장을 다 지운 후 수다에 들어갔다. 처음 만난 분들이지만 문학이라는 공통점 때문인지 나는 모두 좋았다. 이야기도 다 재미있었다. 정치이야기에서 가족이야기, 은밀한 농담까지 잠을 안 자도 좋았다. 하지만 방바닥이 따뜻하게 덥혀오고 어느 순간 잠이 들었다.
4. 동동숲의 둘째날
아침 일찍 눈이 떠졌다. 창밖으로 해가 붉게 떠오르고 있었다. 얼른 나가서 사진을 찍었다. 차례대로 다시 옷을 입고 화장을 하고 도서관으로 모였다. 같은 숙소에 계셨던 이규희 선생님은 어제와는 완전히 다른, 빨간 드레스코드로 스커트에 머플러를 휘날리며 나오고 계셨다. 그래서 우리가 “오늘 새로온 분이신가 봐요.”하고 농담을 했다.
그사이 밤에 돌아간 작가분들도 있었다. 어제 오자마자 친하게 통성명을 했던 박해련 작가는 아침에 나간다고 했는데 전화하니 벌써 순천의 집에 도착했다고 했다. 어젯밤에 가는 팀들이 있어 먼저 갔다고 했다. 그래도 전화번호를 주고받았으니 다행이다. 같이 방을 쓴 분들의 전화번호는 다 받았다. 그 외 분들에게는 쓰지 않던 명함을 나눠드렸다. 짧은 시간에 연락처를 다 못 교환할까봐 가져갔는데 잘 사용되어 기뻤다.
숲 해설을 배익천 선생님이 해주셨다. 이런 일이 자주 있는 일이 아니라고 했다. 우리는 아주 운이 좋다. 숲을 거닐기에 날씨도 너무 좋았고 해설사도 모셨으니 말이다. 혼자서 거닐면서 보지 못했던 개울과 정자도 보았다. 구지뽕나무 열매도 따먹어 보고 산딸나무의 열매도 먹어보았다. 자정향실의 글씨를 어효선 선생님이 쓰셨다는 것, 글샘오솔길이라는 글씨는 홍종관 선생님이 쓰셨다는 것도 알았다. 작가들마다 어떤 나무를 심어달라 요구하신 분, 자신의 나무를 직접 가져와서 심으신 분, 원래 나무가 태풍에 쓰러져 다른 나무를 심으신 분 등 저마다 나무의 사연을 들었다. 그리고 새로 나무를 선정해야 할 두 분의 작가님들은 행복한 고민을 하면서 걷고 계셨다. 길은 계속 이어지고 수국밭, 국화밭, 꽃무릇, 진달래밭 등 계절마다 다른 꽃들이 피고 편백나무, 차나무 등 길마다 다른 종류의 나무를 심고 있었다. 길을 내고 계단을 만들고 돌을 치우고 나뭇가지를 치우는 온갖 노동을 배익천 선생님과 홍종관 선생님이 하고 계셨다. 마치 농사를 짓는 그런 느낌이었다. 매일 돌봐야 할 화초가 있고 심어야 할 나무가 있다. 두 분 선생님께서 늘 건강하시며 오래오래 숲을 가꾸기를 속으로 소망해보았다.
큰길가에는 백일홍과 구절초, 애기동백들이 심겨져 있었다.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갔을 때 아래로 산과 호수가 내려다보였다. 그 전망 좋은 곳을 차지한 주인공은 이경애 작가님이셨다. 아름다운 풍경을 내려다보다가 벽화가 있는 곳까지 가보았다. 그림은 몇 년 전에 그린 듯한데 색이 조금 흐려졌고 그 앞에서 단체사진을 찍고 천천히 걸어내려왔다. 사진은 모두 이시향 시인이 카메라로 찍어주었으며, 나는 멀리서 사진 찍는 모습을 몇 컷 담아드렸다. 윤미경 작가는 내려오는 길 담에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말했다.
도서관 앞에서 10시가 돼서 떠나야 하는 서울 작가들과 대구팀들이 차를 타고 떠났다. 배익천 선생님이 다시 버스정류장으로 갈 남은 분들을 모셔다드렸다. 나는 가져간 기념품을 이제 팬이 되버린 조경숙 작가님과 몇몇 분에게 나눠드렸다. 이시향 시인과 둘이 남았다. 도서관 책상에서 좀더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가 오두막 별채에서 보냈기 때문에 2층 숙소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다 기록할 수 없다. 다만 그들도 밤늦도록 이야기를 나눴으며 너무 즐거웠다는 뒷이야기를 들었다. 내가 모든 분들과 사귈 수 없었듯이 그분들도 누군가와는 밤새 깊은 정을 나누었고 누군가와는 몇 마디 못 나눠봐서 아쉬웠을 것이다. 그분들을 기억하기 위해 나는 집으로 돌아와 다시 열린아동문학 여름호와 가을호를 읽는다. 그리고 서점에 가서 그 분들의 책을 사서 읽는다. 이제 어제와는 다르게 글이 읽힌다. 그리고 고성에 가서 보게 될 봄을 다시 꿈꾼다. (62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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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지난 번에 쓰신 분들이 무척 길게 쓰셨길래 길게 적었습니다. 선생님들 성함을 다 못 외우고 아주 주관적인 후기가 될 수도 있으니 너그러이 보아주십시오. 길이를 줄이거나 수정하셔도 됩니다.ㅡ대구에서 이주영 동화작가 드림.
이주영선생님 덕분에 까페도 가입하고 정성으로 쓰신 긴 후기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고성에 꼭 가야겠냐는 부군의 질문에 "응. 가야해. 이건 내 꿈이야"라고 답하신 부분이 와 닿습니다.^^
기성 작가님들의 1박2일 여정을 작가지망생의 입장에서 읽으니 두근두근 설레고 남다른 감동이 옵니다. 작가가 되고, 글을 투고하고 책을 내고 또 고성 동시 동화숲에 자신의 이름으로 소중한 나무 한그루 심는 것.. 저 역시 감히 꿈꿔 봅니다^^
지난 후기 읽다가 제 인생에서 정말 만나뵙고 싶은 이규희 작가님을 지난 후기 사진에서 봤어요^^ 언제가 진짜로 만나뵐 날을 꿈꾸며...
차근차근 노력하여 꿈을 이루신 것 부럽고 다시 한 번축하합니다.
고마워요.경재씨도 잘 하실 거에요.너무 겸손하세요.^^
즐거운 소연이네보다 이 글이 더 재밌네요. 현장을 돋보기로 들여다본 듯 합니다
감사합니다.조금 수정해서 보낼 생각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고생하셨어요.
첫행사에서 좋은기회를 주셔서 감사할 뿐입니다. 열린아동문학을 응원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