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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외에는 구원자가 없느니라. / 호 13:1-16
오스왈드 스팽글러가 ‘서구의 몰락’이라고 하는 책에서, 인류 역사가 결국은 몰락하고 말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그런데 인류 역사가 처음부터 몰락하는 것이 아니라, 서양의 모든 문명을 연구해 보면, 처음에는 문명이 탄생하고 성장하고 쇠퇴하고, 마지막에는 멸망하는 네단계로 진행이 됩니다. 그가 본 것은 결국 인간이 만들어 놓은 문명은, 언제가는 쇠퇴하고 말 것이라는 것인데, 그 발전하는 방법은 인류 문명의 발전 과정을, 개인의 발전 과정에서 유추를 해 낸 것입니다. 한 개인이 탄생을 하고, 성장을 해서 쇠퇴해 지고, 마지막에는 무덤으로 들어가는 한 개인의 역사와, 인류 문명의 발달 역사는 같은 것이라고 그는 보았던 것입니다. 스팽글러가 참으로 위대한 점을 발견하여, 오늘날까지 그의 글이 온 세계의 많은 역사학자들에게 애독됩니다. 그러나 그는 역사를 죄와는 연결을 시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인류가 멸망하고 쇠퇴해 가는 것이, 죄의 결과라고 하는 것을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문명의 구원도 생각해 보지를 못했고, 역사가 구원을 받아야 될 것임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습니다. 모든 인류가 나고 성장하고, 마지막에는 쇠퇴해지고, 그리고는 멸망해 버리는 것이 개인의 역사라면, 인류의 문명도 여전히 그러한데, 개인이 왜 나서 결국은 쇠퇴하고 죽어버릴 수밖에 없는가, 그 원인을 성경에서 찾아 보면, 문명의 몰락의 원인도 찾을 수 있습니다. 성경은 그것을 가리켜, 죄의 값이라고 가르쳐습니다. 만일 스팽글러가 성경을 알았더면, 역사를 다른 각도에서 보았을 것입니다.
근대 과학은 다윈과 그의 진화론과 더불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복음주의자며 어린이집 설립자인 페간이, 그 마을로 이사 왔을 때, 다윈은 페간에게 이런 편지를 썼습니다. “당신은 몇 년 동안에 걸친 우리의 노력보다 더 많은 것을, 단지 몇 달 동안에 해주었소. 우리는 결코 술주정뱅이를 교화시킬 수 없었소만, 당신의 도움으로 우리 마을에는 술주정뱅이가 남아 있지 않소. 과학은 인생 가운데 자리하지만, 그러나 오직 그리스도만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소.” 온 인류는 구원 받아야 합니다. 사실 모든 사람은 구원받고 싶어합니다. 귀찮게 구원받느니, 편하게 지옥에 가겠다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하는 거 보면, 구원받기 싫어하는 사람으로 보입니다. 말로는 구원받고 싶다고 하면서, 실제 살아가는 거 보면, 구원받을까봐 겁내는 사람 같습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1절 ‘에브라임이 말을 하면 사람들이 떨었도다. 그가 이스라엘 중에서 자기를 높이더니, 바알로 말미암아 범죄하므로 망하였거늘’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나뉘어져, 한 때는 북 이스라엘이 대단했습니다. 경제적으로 군사적으로 부강했습니다. 주변 국가들에게 위협적인 존재였습니다. 북 이스라엘이 한 번 움직이면, 주변국들이 떨 정도였습니다. 북 이스라엘의 대표지파인 에브라임의 위세는 등등했습니다. 이스라엘 내에서도 아주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습니다. 북왕국 초대 왕 여로보암도 에브라임 지파 아니었습니까? 이쯤 되면 에브라임은 성공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완전히 자리를 잡았고, 독자적인 위치를 확보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사람 보기에 그렇습니다. 하나님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져만 갔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그들의 눈에 하나님이 들어올 리가 없습니다. 경제적으로 군사적으로 부강하니, 언제까지 잘 먹고 잘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들은 서서히 교만해져 갔습니다. “그가 이스라엘 중에서 자기를 높이더니” 사람이 그렇습니다. 조금 잘 되면 교만해집니다. 조금 뭘 가지게 되면 거만해집니다. 폼도 폼 같지도 않은 어색한 폼 잡으려고 합니다. 상대를 얕잡아 봅니다. 다른 사람의 시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사람도 의식하지 않는데, 눈에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을 의식하겠습니까? 삶의 규범인 말씀을 무시합니다. 맘 놓고 죄짓습니다. 그렇게 하면 틀림없이 망하게 됩니다. “바알로 말미암아 범죄하므로 망하였거늘” “망하였거늘”이 실패했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패망하였다는 뜻을 넘어, 죽게 됐다는 뜻입니다. 범죄의 길, 곧 여로보암의 길을 가고 있는 에브라임을, 하나님이 언제까지 두고만 볼 수 없어서였습니다.
여로보암이 어떻게 왕이 되었습니까? 왕의 자질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먼저는 솔로몬의 죄 때문이고, 르호보암의 실책 때문입니다. 자기가 잘해서가 아니라, 상대의 자책골로 승리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기기는 이겼는데, 제대로 이긴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북 왕국을 맡기면서 단단히 주의를 주셨습니다. 왕상 11:37-38절 ‘내가 너를 취하리니, 너는 네 마음에 원하는 대로 다스려, 이스라엘 위에 왕이 되되, 네가 만일 내가 명령한 모든 일에 순종하고, 내 길로 행하며, 내 눈에 합당한 일을 하며, 내 종 다윗이 행함 같이 내 율례와 명령을 지키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내가 다윗을 위하여 세운 것 같이, 너를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우고, 이스라엘을 네게 주리라.’ 실로 사람 선지자 아히야를 통해 주신 말씀입니다. 그때는 “예 알았습니다. 반드시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지금 자기 신분이 감독관인데, 세상에 자기한테 왕을 시켜준다고 하니, 무슨 대답인들 못하겠습니까. 그러나 그가 왕위에 오르고 얼마 못가서 송아지 우상을 만들었습니다. 나라를 위해서 우상을 만든 것도 아닙니다. 순전히 자기를 위해서 만들었습니다. 자기 배를 채우기 위해서 만들었습니다.
2절 ‘이제도 그들은 더욱 범죄하여, 그 은으로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부어 만들되, 자기의 정교함을 따라 우상을 만들었으며, 그것은 다 은장색이 만든 것이거늘, 그들은 그것에 대하여 말하기를, 제사를 드리는 자는 송아지와 입을 맞출 것이라 하도다.’
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놓고 뭐라고 둘러댔습니까? 왕상 12:27-28절 ‘만일 이 백성이, 예루살렘에 있는 여호와의 성전에 제사를 드리고자 하여 올라가면, 이 백성의 마음이 유다 왕 된 그들의 주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서, 나를 죽이고 유다의 왕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리로다 하고, 이에 계획하고 두 금송아지를 만들고, 무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다시는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의 신들이라 하고’ 세상에! 금송아지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신이라고 합니다. 처음에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여겼지만, 계속하여 세뇌를 해서 그렇게 믿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송아지 우상에게 제사를 드리며, 송아지와 입을 맞췄습니다. 입을 맞춘다는 말은, 극히 존경하고 숭배한다는 뜻입니다. 이제 그들에게 송아지가 하나님이었던 것입니다. 은장색이 만든 금송아지가 하나님이 되어 예배를 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걸 지켜보고 계시는 하나님의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너무너무 괴로우실 것입니다. 오래도 참으셨습니다. 한두 해 참으신 게 아닙니다.
3절 ‘이러므로 그들은 아침 구름 같으며, 쉬 사라지는 이슬 같으며, 타작 마당에서 광풍에 날리는 쭉정이 같으며, 굴뚝에서 나가는 연기 같으리라.’
하나님이 그들을 향해 징계의 손을 드셨습니다. ‘아침 구름, 쉬 사라지는 이슬, 광풍에 날리는 쭉정이, 굴뚝에서 나가는 연기’ 이것들은 흔적도 남지 않고 없어지는 것들입니다. 이스라엘이 그렇게 패망할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물론 이스라엘이 그렇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기쁘신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경고를 하시는 것은, 그들이 망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 때문입니다. 망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라면 경고하고 말 것도 없습니다. 그냥 잘못하면 심판의 칼을 휘두르면 됩니다.
4절 ‘그러나 애굽 땅에 있을 때부터,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나 밖에 네가 다른 신을 알지 말 것이라. 나 외에는 구원자가 없느니라.’
경고의 소리를 귀담아 들으면 사는 길이 열립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모두가 경고의 소리를 듣고, 송아지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살기를 바라셨습니다. 하나님의 이 볼멘소리가 들립니까? ‘내가 너희의 하나님이다. 너희가 애굽에 있을 때부터 내가 하나님이었다. 너희의 하나님은 나밖에 없다. 나 외에는 구원자가 없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볼멘소리를 들은 척도 하지 않습니다. 아예 듣기 싫다고 귀를 틀어막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이 그렇게 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게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선택받은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누구보다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신 역사를 보고 체험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지금 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있으니, 하나님이 열불이 나십니다.
세상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제시하신 유일한 구원의 길을 거부합니다. 요 3: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이 보내주신 유일한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요 14:6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행 4:12절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그렇습니다.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원자십니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원자십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유일한 구원자는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이 세상에 추앙받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신으로 숭배 받는 대상도 꽤나 많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인정하는 구원자는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생명입니다.
헨리 나우웬 교수는 1985년 1월 겨울 학기 강의를 마치고, 더 이상 학문의 세계에 남아 있을 수 없다고 느끼면서, 하버드대학에 사직서를 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이런 일기를 남겼습니다. “하버드대학의 치열한 경쟁과 성공 지향적인 삶에서 떠난 지 몇 주가 흘렀다. 하버드의 동료들과 학생들에게 ‘하버드를 섬기지 말고 하나님과 그의 사랑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십시오. 그리고 고독과 절망과 영적인 가난으로 신음하는 사람들에게 소망의 말을 전하십시오.’라고 크게 외치고 싶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보다 더 섬겨야 할 것은 없습니다. 이 세상 부귀도, 이 세상 명예도, 이 세상 행복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 있을 때도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들이 광야를 걸을 때도 하나님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에 정착해서도 역시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만나를 주었고, 메추라기를 주어 먹게 하셨습니다. 가나안 땅에서도 적당한 비를 내려, 농사를 통해 배부르게 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5-6절 ‘내가 광야 마른 땅에서 너를 알았거늘, 그들이 먹여 준 대로 배가 불렀고, 배가 부르니 그들의 마음이 교만하여, 이로 말미암아 나를 잊었느니라.’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배부르고 등 따뜻하니 하나님을 잊었습니다. “하나님이 언제 그렇게 하셨는지 기억도 안 난다”고 했습니다. 배고프고 목마를 때는 “아이고 하나님 살려주세요” “우리에게는 하나님 밖에 없어요” “하나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예요” 했습니다. 하지만 배부르니 교만해졌습니다. 교만해져서 하나님마저 잊어버렸습니다. 주위에서도 보면, 교만해지면 뵈는 게 없는가 봅니다. 하긴 하나님도 안 보이는데 사람이 보이겠습니까? 성경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리켜, “목이 곧은 백성, 목이 뻣뻣한 백성”이란 말이 나옵니다. 그들의 교만함을 지적하는 말입니다. 목에 힘이 들어가 뻣뻣해지면, 그때부터 망하는 길로 들어선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도 교만한 사람을 싫어합니다. 하물며 하나님은 교만한 사람을 싫어하는 정도가 아니라 대적하십니다. 하나님과 대적하여 이길 자신 있으면, 얼마든지 교만해도 상관없습니다.
7-8절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사자 같고, 길 가에서 기다리는 표범 같으니라. 내가 새끼 잃은 곰 같이, 그들을 만나 그의 염통 꺼풀을 찢고, 거기서 암사자 같이 그들을 삼키리라. 들짐승이 그들을 찢으리라.’
하나님이 그들의 교만을 어떻게 다스렸습니까? 하나님이 그들에게 사자 같고 표범 같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새끼 잃은 곰 같아서 그들을 찢고, 암사자 같아서 그들을 삼키며, 들짐승 같아서 그들을 찢겠다고 하십니다. 무슨 소리입니까? 하나님이 그들의 우상 숭배에 대해, 더 이상 참지 않고 심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교만할 때까지는 좋았습니다.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무시하고 폼 잡을 때까지는 좋았습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자기 방식대로 살아갈 때까지는 좋았습니다. 하지만 그런 날이 계속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날이, 언제까지 지속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이미 버려진 자입니다.
9절 ‘이스라엘아. 네가 패망하였나니, 이는 너를 도와 주는 나를 대적함이니라.’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패망하게 되면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 회개할 생각은 안 하고, 우선 하나님께 불평부터 합니다. 왜 하필 나냐고, 왜 나만 미워하냐고 불평부터 합니다. 그때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아. 네가 패망하였나니, 이는 너를 도와 주는 나를 대적함이니라.” 배부르니 마음이 교만하여 하나님을 잊어버린 것을, 하나님을 대적했다고 여기셨습니다.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신다고 했는데, 그 이유를 알 거 같습니다. 교만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거여서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정말이지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잠시도 살 수 없습니다. 은혜 받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잠 3:34절 ‘진실로 그는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나니’ 약 4:6절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벧전 5:5절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은혜 받는 비결은 간단합니다. 겸손입니다. 겸손하기만 하면 은혜 받습니다. 겸손하면 하나님이 은혜를 주십니다.
10-11절 ‘전에 네가 이르기를, 내게 왕과 지도자들을 주소서 하였느니라. 네 모든 성읍에서 너를 구원할 자, 곧 네 왕이 이제 어디 있으며, 네 재판장들이 어디 있느냐? 내가 분노하므로 네게 왕을 주고, 진노하므로 폐하였노라.’
겸손이란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입니다. 전에 그들이 하나님께 왕을 달라고 했었습니다. 삼상 8:6-7절 ‘우리에게 왕을 주어 우리를 다스리게 하라 했을 때에, 사무엘이 그것을 기뻐하지 아니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이는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그들의 태도에 사무엘 선지자는 물론이고 하나님도 무척 서운해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그들의 말을 들어주라고 했습니다. 마지못해 허용하신 것이지, 흔쾌히 허락하신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왕을 주시면서, 왕 제도의 부작용이 심각할 것도 예고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후에 왕 때문에 죽을 고생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만을 의지하지 않고 구한 왕이라면, 그 왕이 구원해줘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왕이 구해주기는커녕, 어디 있는지도 모릅니다. 지도자도 재판장도 어디 있는지 모릅니다. 다 자기 살겠다고 숨고 도망쳤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미 붙잡혔습니다. 하나님과 그 종을 서운하게 해 가면서 왕을 세웠지만 결과가 이랬습니다.
12절 ‘에브라임의 불의가 봉함되었고, 그 죄가 저장되었나니’
하나님께 불순종했는데 아무 일 없이 넘어갔을 때 좋아할 일이 아닙니다. 죄가 저장된다는 말씀을, 그냥 넘겨서는 안 됩니다. 죄를 짓는 자 입장에서는, 죄가 자연 소멸되기를 바랍니다. 시간이 지나면, 죄 지은 게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그런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죄는 차곡차곡 저장됩니다. 그 저장된 죄를 하나님이 언젠가 들춰내십니다. 그때가 징계의 때입니다. 그때는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징계가 갑작스럽게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해산하는 여인에게 임하는 고통처럼 말입니다.
13절 ‘해산하는 여인의 어려움이 그에게 임하리라. 그는 지혜 없는 자식이로다. 해산할 때가 되어도 그가 나오지 못하느니라.’
최고의 고통을 해산의 고통에 비유합니다. 하나님이 징계하실 때 확실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해산의 고통에 비유할 만큼 강력하게 징계하신다는 것입니다. 해산의 고통이 언제 끝납니까? 출산하면 끝납니다. 이스라엘은 해산의 고통 중에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해산할 때가 되어도 그가 나오지 못하느니라.” 해산의 고통만 있고, 애는 안 나오는 상황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이스라엘이 이렇게 미련스럽다는 것입니다. 고통을 끝낼 수 있음에도, 끝까지 고집을 피우다 고생을 더하게 됨을 비유하신 것입니다.
14절 ‘내가 그들을 스올의 권세에서 속량하며, 사망에서 구속하리니, 사망아, 네 재앙이 어디 있느냐? 스올아, 네 멸망이 어디 있느냐? 뉘우침이 내 눈 앞에서 숨으리라.’
그래서 그 고통이 어디까지 이르렀습니까? 스올,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그들은 거의 죽음에 이르러 겨우 숨만 깔딱깔딱 쉬고 있습니다. 놔두면 곧 죽게 됩니다. 왜냐면 동풍이 오기 때문입니다.
15절 ‘그가 비록 형제 중에서 결실하나 동풍이 오리니, 곧 광야에서 일어나는 여호와의 바람이라. 그의 근원이 마르며, 그의 샘이 마르고, 그 쌓아 둔 바 모든 보배의 그릇이 약탈되리로다.’
여기서 말하는 ‘동풍’이란, 사막에서 뜨거운 열기와 함께 불어오는 바람을 말하는데, 앗수르의 공격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바람이라’는 말은, 앗수르의 침략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징계하시기 위해 보낸, 회초리임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본문은 이스라엘이 지금은 번영을 누리고 있지만, 머지 않아 앗수르의 침략을 받아, 철저히 약탈을 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바람은, 이스라엘이 지니고 있는 것들을, 순식간에 날려버릴 수 있다는 사실을, 이스라엘은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가지고, 오히려 죄를 짓는 일에 잘못 사용하면,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이 순식간에 날아가 버리게 하는, 심판이 임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불어오는 뜨거운 동풍에 의해, 샘의 근원이 말라버리는 것처럼, 모든 것이 순식간에 날아가 버리는, 환난의 바람이 불어오게 하시는 것입니다.
16절 ‘사마리아가 그들의 하나님을 배반하였으므로, 형벌을 당하여 칼에 엎드러질 것이요, 그 어린 아이는 부서뜨려지며, 아이 밴 여인은 배가 갈라지리라.’
또한 북쪽 이스라엘 왕국의 수도인 사마리아를 침공한 앗수르가, 무자비한 학살을 자행할 것임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자신들이 지은 죄에 대한 대가를 피로 갚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죄의 삯은 사망임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는데, 이스라엘은 처참하게 피를 흘리는 죽음을 통해, 자신들의 죄에 대한 값을 치르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 눈 앞에, 처참한 죽음의 현실이 다가오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다가, 결국에는 본문에 기록된 것처럼, 앗수르에 무자비한 학살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어머니의 태 속에서 나오지 않는 태아를, 칼로 배를 갈라 끄집어내어 내동댕이치듯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잉태하고 있는 죄를, 칼로 강제로 끄집어내는 것과 심판을 행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구원자이십니다. 동시에 어떤 이에게는 심판자가 되십니다. 겸손하여 하나님만 바라는 자에게 구원자가 되시지만, 교만하여 하나님을 잊어버린 자에게는 심판자가 되십니다. 예수 믿는 우리에게는 구원자가 되시지만, 예수 믿기를 끝내 거부하는 자에게는 심판자가 되십니다. 요 3:18절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하나님을 만나서 잘 섬기는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이 헷갈립니다. 다른 신을 섬기면서도 잘 모릅니다. 오직 예수님이 기준입니다. 딤전 2:5절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이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오직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아들이, 보이는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하나님에게 나아가는 길이 되신 분입니다. 여기에 기독교의 유일성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떠합니까? 하나님 외에 무슨 신, 무슨 우상을 섬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권세의 신, 물질의 우상, 향락과 육신의 우상에 깊이 빠져 있지 않습니까? 이 시대에 또 다른 우상 숭배에 빠져 있지나 않습니까? 그것은 굴뚝의 연기요, 아침 구름같이 허망한 생활이다. 메마른 땅 광야에서도 나를 아시고,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시고, 자기 백성을 삼으시고 먹이시는, 참 목자이신 여호와께로 돌아갑시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구원의 주님께로 돌아가, 선한 일에 힘쓰는 하나님의 친 백성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그들이 나를 잊었느니라’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탄식 앞에, 이 시간 겸손히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게 하신 것 감사합니다. 확실히 저희 어리석은 인생은, 배부를 때 하나님 잊기 쉬운가 봅니다. 점점 풍요로워지는 세상 속에서, 저희들은 하나님과 점점 멀어지고 있습니다. 이 시간 저희들의 심령 속에 처음 은혜를 새롭게 하여 주옵소서. 그 기쁨, 그 감격을 다시 찾게 하여 주옵소서. 오직 하나님 외에 구원자가 없음을 고백하게 하옵소서. 오직 예수님 만이 우리의 구세주가 됨을 고백하게 하옵소서. 그리고 풍요의 때를 시험으로 여기고, 어떠하든지 열심히 주님 섬기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는 언제까지나 주의 은혜에 기뻐하면서, 충성하며 헌신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은총 내려 주옵소서.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주님의 사랑의 메시지가 우리의 심령 깊이 새겨져, 주와 동행하며 사는 원동력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